계계군벌

 

'''桂系軍閥''' / 桂系军阀(Guìxì jūnf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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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구 계계
2.2. 신 계계
3. 참고문헌
4. 매체에서
5. 관련인물
5.1. 구 계계
5.2. 신 계계
6. 관련사건


1. 개요


광서성을 중심으로 한 중화민국의 지역군벌. 크게 루룽팅을 중심으로 하는 구 계계군벌과 리쭝런, 바이충시를 중심으로 하는 신 계계군벌로 나뉜다. 광서군벌, 광서파는 이들을 말하는데 광서파의 경우, 국민정부 시기의 신 계계군벌을 뜻하는 일이 많다.

2. 역사



2.1. 구 계계


계계군벌은 비적 출신의 루룽팅이 시작이다. 루룽팅은 원래 중월국경에서 비적질을 하다가 청나라 조정에 귀순한 이후 1911년 신해혁명에 참여하여 광서성 부도독에 추대되었으나 1913년 계축전쟁에서 위안스카이를 도와 혁명군을 진압하며 광서성의 실력자로 자리잡았다.
구 계계군벌의 본격적 시초는 위안스카이홍헌제제를 통해 황제에 즉위하려 하자 운남에서 차이어, 탕지야오, 량치차오 등이 호국전쟁을 일으켰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서성의 루룽팅은 사태를 관망하다가 호국군에 합세하여 광서성의 독립을 선포, 광동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계계군벌 산하에는 2개 사단, 2개 여단의 병력이 있었으며 위안스카이가 죽은 이후 루룽팅은 양광순열사로 임명되어 그 휘하의 계군 1사단장 천빙쿤이 광동독군에, 2사단장 탄하오밍이 광서독군에 임명되면서 구 계계군벌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1917년 부원지쟁장훈복벽을 거쳐 쑨원이 1차 호법운동을 벌이자 계계군벌은 탕지야오전계군벌과 함께 쑨원을 초청하여 광저우에 호법정부를 수립하게 했으나 정작 자신들은 원수에 추대되고도 취임하지 않는 등 호법운동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는 구 계계군벌이 어디까지나 호법을 세력확장의 구실로만 사용할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1917년 호법전쟁이 터지고 원하는 바를 얻은 서남군벌들은 쑨원에 비우호적인 정학회의 천춘쉬안과 결탁하여 쑨원을 축출하고 북양군벌과 화의를 맺었다. 하지만 광저우를 중심으로 전횡하다가 동맹이었던 탕지야오와의 관계도 결렬되는 등 고립되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1920년 쑨원2차 호법운동을 일으키자 민남에 주둔하던 광동군벌 천중밍이 이에 호응하여 월인치월의 구호를 내세워 루룽팅을 광동에서 축출하면서 계계군벌의 위세는 축소되었다. 이후 루룽팅은 광서성을 중심으로 보신정책을 취하였으나 1921년 쑨원이 광저우에서 비상대총통에 취임하자 우페이푸차오쿤직예군벌의 사주를 받고 광동을 공격했다가 천중밍의 반격에 도리어 패하여 광서성의 상당수 지역이 천중밍의 손에 들어갔다. 이후 광서성은 심홍영, 유전환, 리쭝런 등의 계계군벌들이 할거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힘을 얻은 것은 과거 루룽팅 휘하의 심홍영의 부하였던 리쭝런과 바이충시 등이었다. 구 계계군벌은 천중밍과 연대하여 국민당을 치고자 했으나 리쭝런, 바이충시, 황소횡 등이 1922년 광서자치군을 조직하여 루룽팅에게 대항하기 시작하면서 구 계계와 신 계계의 패권 싸움이 시작되었다. 루룽팅은 직예군벌의 지원을 받아 광서성을 탈환하려 했지만 1924년 패배하고 하야를 통전한 후 상하이로 도주했다. 1925년 신 계계가 광서성을 통일하면서 구 계계군벌은 완전히 몰락했다.
유진환 등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일부 계계군벌들도 있는데 이들은 1923년 쑨원의 천중밍 타도 선언에 호응하여 서로 토역군 사령관에 취임, 천중밍을 몰아내고 3차 광동정부를 수립하는데 일조했지만 천중밍, 탕지야오, 돤치루이 등과 결탁하여 딴 마음을 품다가 1925년 전계군벌의 양시민과 합쳐 1925년 객군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당한다.

2.2. 신 계계


루룽팅을 축출한 리쭝런, 바이충시 등 신 계계군벌은 1924년 11월 광저우의 대원수대리 후한민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중국 국민당에 합류했다. 리쭝런은 광서전성수정독판 겸 광서육군 1군장에 황소횡은 광서육군 2군장에 임명되었다. 국민당의 지원을 받은 신 계계군벌은 운남의 탕지야오의 확장을 저지한 후 광서에서 루룽팅과 심홍영의 잔당을 축출하여 1925년 즈음에 광서성을 완전히 통일하였고 1925년 국민정부가 조직되자 광서에 광서성 정부를 설치하였다.이후 신 계계군벌은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에 참여하여 국민혁명군 7군으로 편성되었고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27년 즈음에 국민당 우파와 좌파의 갈등이 격심해지자 장제스를 비롯한 국민당 우파의 편에 섰고 4.12 상하이 쿠데타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장쭤린, 쑨촨팡 등 북양군벌의 반격이 거세지는 가운데 탕성즈, 장파쿠이를 비롯한 우한 국민정부의 동정까지 겹치자 장제스에게 하야를 압박하여 1927년 8월 장제스 하야를 이끌어냈고 이후 서산회의파와 합작하여 영한합작을 이끌어냈다. 1927년 말에 탕성즈가 안하무인으로 날뛰자 탕성즈 토벌을 결의하고 양호 지역을 점령하여 세력권으로 삼고 탕성즈를 축출했다. 하지만 장제스가 월계군벌, 왕징웨이의 개조파 및 후한민을 비롯한 국민당 우파들과 연대하여 복직이 기정사실화되자 서산회의파와의 합작을 끝내고 장제스 복직을 지지하여 국민당의 2차 북벌에 참여했다.
하지만 장제스의 급격한 세력성장을 경계하고 있던 광서군벌은 황고둔 사건 이후 봉천군벌의 수장이 된 장쉐량과 몰래 접촉하며 반장운동을 꾀하기도 했으며 1929년 편견회의를 시작으로 가장 먼저 반장전쟁에 나섰다. 1929년 2월 우한 정치분회 주임 리쭝런이 상계군벌인 호남성 정부주석 루디핑을 무단 해임하면서 호남 사건을 일으켰고 이것이 1차 장계전쟁으로 번졌다. 계계군벌은 곧 진압되었지만 이어 펑위샹1차 장풍전쟁을 일으키고 장파쿠이가 반란을 일으키자 계계군벌은 장파쿠이와 합세하여 2차 장계전쟁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당했다. 이어 1930년 옌시산이 나서 중원대전을 일으키자 다시 한번 반장을 시도했으나 장쉐량이 장제스의 편에 서면서 모조리 진압당했다.
그러나 1931년 장제스가 입법원장 후한민을 감금시키는 탕산 사건이 일어나자 광서파는 근성넘치게도 개조파, 서산파와 합작하여 광저우 국민정부를 수립, 1차 양광사변을 일으켰다. 장제스에 대한 가장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던 광서파였으나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일단 장제스 하야를 조건으로 난징과 도로 통합하기로 결정하면서 장제스 하야를 이끌어내는가 싶었는데... 1932년 신임 행정원장 쑨커가 GG를 치고 하야하면서 왕징웨이장왕합작을 결성한 장제스가 군사위원장으로 복귀하면서 도루묵이 되었다. 어쨌거나 1차 양광사변의 결과로 계계군벌은 광동의 월계군벌과 함께 서남정무위원회를 설치하고 반독립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1933년 천밍수, 리지선, 차이팅카이 등 실각한 광동파를 중심으로 복건사변이 일어났을때 이들은 광서파의 지원을 호소했지만 광서파는 분리주의를 비판할 뿐 그들의 지원 요청을 씹었다. 1934년 제5차 초공작전중화소비에트공화국 토벌에 참여했다. 1935년 홍군이 대장정에 오르자 역시 추격에 참여, 홍군의 샹강 도하를 기습하여 큰 피해를 입혔으나 홍군 지도부가 사천, 운남, 귀주로 넘어가면서 추격을 중단했다. 이후 법폐개혁 등 중앙의 권력 강화 시도에 저항하며 독자적인 화폐를 발행하는 등 자치를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1936년 광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후한민이 사망하고 장제스가 광동성이 자체적으로 발행한 지폐 수령을 거부하고 광서파의 주요 수입원인 아편을 단속하는 등 양광 지역에 대한 정치, 경제적 압박을 강화하자 장제스가 이번에는 자신들을 칠 것이라 여겨 항일을 구실로 광동파의 천지탕과 힘을 합쳐 호남에 출병, 2차 양광사변을 일으켰다. 2차 양광사변 역시 장제스의 승리로 끝났으나 월계군벌의 수장 천지탕은 휘하 군벌들이 죄다 장제스에게 붙어버리는 바람에 외유를 떠나야 했던 것과 달리 광서파는 지역적 연대가 충실하여 장제스의 분열공작에도 넘어가지 않고 완강히 저항했고 이에 장제스가 무력토벌이 아니라 평화교섭을 결정함에 따라 광저우에서 장제스와 협상하여 중앙에 복종을 선언하는 대가로 광서성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는 것은 성공했다. 다만 이전과 같이 정무위원회를 두면서 반독립적인 정권으로 남는 것은 불가능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타이얼좡 전투, 쉬저우 전투 등지에서 활약했고 리쭝런은 5전구 사령관에, 바이충시는 군훈부장에 임명되었다. 중일전쟁 내내 맹렬히 활약했으나 전쟁 말기가 되어 일본군이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자 미국과 접촉하여 장제스 하야를 기도하기도 했다. 중일전쟁 종결 이후 바이충시는 2차 국공내전에 참여, 만주진공작전을 지휘했고 1948년 헌정이 시작되자 리쭝런은 부총통에, 바이충시는 국방장관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중일전쟁의 피해를 복구하지도 않고 전쟁에 뛰어들었던 국민정부는 무너지기 직전이라서 리쭝런은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고 바이충시는 광서성을 기반으로 치열하게 저항하다가 끝내 국부천대로 대만으로 이주한 국민당을 따라서 퇴각해야 했다. 이것으로 계계군벌의 군사적, 지역적 기반도 사실상 소멸했고 이후 리쭝런은 미국에서 어렵게 살다가 중공에 합류했으며 바이충시는 대만에서 생을 마감했다.

3.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국의 군벌정치 연구(1916~1928), 최관장, 중국연구 20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 중국 군벌의 성쇠와 국민정부에 미친 영향, 오수열, 한국 동북아 논총 18권 2호, 한국동북아학회.

4. 매체에서


호이4에서 신계계가 new guangxi clique로 등장한다. 지도자는 리쭝런. 역사적으로는 월계군벌의 영역이었던 광동성까지 영역으로 차지하고 있는데 1936년 2차 양광사변으로 월계군벌은 아예 몰락하고 계계군벌 역시 1차 양광사변 이래 가지고 있던 반독립적인 지위를 잃었다는 걸 가정하면 실제 역사보다 훨씬 세고 강하게 나온다.

5. 관련인물



5.1. 구 계계



5.2. 신 계계



6. 관련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