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 TSR-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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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 TSR-2'''
1. 제원
2. 개요
3. 개발[1]
3.1. 개발 배경
3.2. 정치적 변화
3.3. 임무
3.4. 진행과 시험 비행
3.5. 프로젝트 취소
4. 이후
5. 참고 링크


1. 제원


분류
초음속 공격기
초도비행
1964년 9월 27일
전장
27.13m
전폭
11.32m
전고
7.25m
주익면적
65.3㎡
자체중량
24,834kg
최대이륙중량
46,947kg
최대속도
마하 2.35 (고도 12,000 m) / 마하 1.1 (해면고도)
실용상승한도
12,000 m
상승률
4,575 m/min
항속거리
4,630 km
전투행동반경
1,390 km (Hi-Lo-Lo-Hi)
엔진
Bristol Siddeley Olympus Mk. 320 터보젯 엔진 (추력 22,000 lb~30,610 lb) 2기
무장
레드 비어드(Red Beard) 열핵폭탄 1발 또는 1,000 lb 폭탄 6발 / 940mm 로켓 런처 4기 등
무장 탑재량
4.5톤 (폭탄창 2.7톤 / 외부 1.8톤)
승무원
2명
제작사
British Aircraft Corporation
생산대수
3기

2. 개요


Tactical Strike and Reconnaissance 2, 즉 전술 폭격 및 정찰을 목적으로 개발되다 중단된 프로젝트다. 저고도를 고속으로 비행하여 적 후방에 핵 또는 재래식 폭격을 하는 것이 주임무였으며, 고고도에서의 장거리 무장 투발 및 사진촬영 등도 함께 상정된 개발 목표였다.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까지 계속 개발이 진행되었으나, 개발비용 증가 및 영국의 국방비 감축, 대체재가 될 줄 알았던 F-111의 등장으로 인해 1965년에 개발이 취소되고 만다. 다만 믿었던 F-111 역시도 비용이 껑충 뛰는 바람에 도입이 무산되었고, TSR-2가 맡으려던 역할은 해군에서 얻어온 블랙번 버캐니어F-4가 나뉘어 맡았다가, 최종적으로는 파나비아 토네이도를 개발하여 맡기게 된다.
나름 개성있는 항공기들을 만들어내던 영국이었으나, TSR-2의 취소 이후 21세기까지도 독자적인 항공기 개발은 못하게 된다.

3. 개발[2]



3.1. 개발 배경


1950년대만 해도 영국은 세계를 선도하는 항공기 기술을 가진 나라였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항공 기술, 그 중에서도 제트 엔진 기술이 크게 발달했는데, 영국은 미국 못지 않게 성숙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 예시중 하나가 바로 잉글리시 일렉트릭 캔버라인데, 당시로는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고고도에서 폭격과 정찰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최첨단 항공기로, 자국산 개발을 중시하는 미 공군에서조차 도입한 몇 안되는 예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대공 미사일의 기술도 크게 발달했는데, 영국의 캔버라와 V 폭격기, 그리고 미국의 B-52의 활동은 소련의 지대공 미사일에 매우 취약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이는 1959년 중국이 소련에서 도입한 S-75가 대만의 RB-57 정찰기를 격추시키면서 가시화되었다.
이러한 위협의 해결책은 바로 저공 침투. 당시 레이더는 레이더 지평선이라 불리는 가시선 내에서 작동했는데, 여기서 초저공으로 비행하는 항공기들은 레이더에 잡히지 않았다. 거기다 나무, 언덕, 협곡과 같은 장애물들은 레이더의 저공 탐지 효과를 더욱 낮추었다. 캔버라는 철저히 중-고고도에서의 비행에 맞춰져 있던 항공기였으므로, 초저공으로 비행을 하면서 연료를 더욱 탑재할 수 있는[3] 전혀 다른 개념의 항공기 개발이 필요해졌다.
1955년, 영국 군수성은 잉글리시 일렉트릭에게 캔버라를 대체하는 새로운 작전 환경을 위한 경폭격기를 연구하라고 지시했고, 이러한 초기 연구는 2,000nmi(2,300mi, 3,700km)의 페리 항속 거리[4], 마하 1.5의 "고도" 및 600nmi(690mi, 1,100km)의 저준위 범위를 가진 항공기로 정착되었다. 여기에 각종 항법기기를 조작하기 위해 총 2명이 승무원이 필요했으며, 4발의 1000파운드 폭탄을 탑재하는 것으로 되었다.
1956년에 이 연구는 일반 작전 요구 사항(General Operational Requirement) 339, 일명 GOR.339로 공식화되었고, 이는 영국의 항공기 개발사에 전해진다. 이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명시하고 있었다.
  • 초음속으로 핵투발이 가능할 것.
  • 고고도에서는 마하 2.0, 저고도에서는 마하 1.2.[5]
  • STOL 또는 제한적인 VTOL 성능.
  • 비행장이 폭격당할 것을 전제로 한 험지 이착륙 능력.
  • 전천후 임무 수행 능력.
    • 날씨, 시간에 관계없는 전천후 핵투발 능력.
    • 시간에 관계없는 정찰 촬영 능력.
    • 날씨에 관계없는 전자 정찰 능력.
    • 레이더만을 이용한 핵폭격 능력.
    • 통상 화기 투발 능력.
시스템을 제외하고서도 지금 봐도 상당히 어려운 조건인데, 당시로서는 굉장한 모험이었다.

3.2. 정치적 변화


TSR-2의 계획이 공개되자 마자 프로젝트를 좌절시킬 정치적 폭풍이 하나둘씩 머리를 들기 시작했는데, 먼저 국방성 장관 던컨 샌디스가 1957년에 유인기의 시대는 끝났고 탄도 미사일이 미래의 병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당연히 이는 수많은 반대에 부딪혔고, 특히 TSR-2가 캔버라뿐만 아니라 V 폭격기 전체를 대체할 수 있다고 본 공군은 더욱 심하게 반발했다.
유인기와 탄도 미사일의 관계뿐만 아니라 정치적 관계도 영향을 미쳤다. 군수성은 최소 2개 이상의 기업으로 구성된 팀이 프로젝트를 맡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영국에 수많은 항공 기업이 있지만 수요가 점점 줄어드므로 각 기업간의 협력을 고양시키기 위해 내린 조치였다. 이러한 조치는 기업들이 서로의 기술을 공유하여 더 좋은 결과물을 낼 수 있게 하지만, 발이 안맞으면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위험성이 존재했다.
해군 또한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GOR.339가 공식화되는 동안 영국 해군은 이후 블랙번 버캐니어의 결과가 되는 프로젝트인 NA.39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아음속이라는 것만 빼고는 TSR-2와 동일한 임무를 맡을 계획이었다. 다른 군대가 같은 항공기를 사용하는 것은 예산을 절약할 수 있는데다, 마침 해군에서도 GOR.339의 조건을 부분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설계안을 제안했다. 특히 블랙번 버캐니어를 열심히 밀어주던 해군 원수 마운트배튼 경은 TSR-2를 하나 사는 돈으로 5기의 이 기체를 살 수 있다고 했으나, 결국 공군은 전체적으로 성능이 떨어지고 원하는 임무 수행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계획을 거부했다.
또 다른 정치적 영향은 미국에서 하드웨어를 들여와 사용하자는 방위성 내의 일부 분파였다.

3.3. 임무



3.4. 진행과 시험 비행



3.5. 프로젝트 취소


1960년대 미 공군이 F-105 썬더치프를 대체하기 위해 F-111을 개발하기 시작하고 본래 TSR-2을 눈여겨보고 있었던 호주 공군이 F-111을 선택하게 되자, 영국 공군의 비용 절감을 위한 관심 또한 그쪽으로 옮겨갔다. 당연히 BAC의 직원들은 이에 반발했고 새로 집권한 노동당 또한 이를 거부했으나, 두차례의 국무회의를 통해 결국 1965년 8월 1일 TSR-2는 예상 비용을 이유로 취소하고, 대신 구매 약속 없이 F-111을 110대까지 획득하는 옵션 계약을 따내기로 결정했다.
마침 이날은 공교롭게도 2번째 시험기 XR220이 첫번째 시험비행을 하려는 날이었고, 해당 기체는 이미 시험장인 Boscombe Down에 전달된 상태였으며 직원들은 당장 뛰쳐나가 최소한의 비행만이라도 허가 받기를 원했으나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첫번째 시험기 XR219만이 하늘을 날 수 있었고, 취소된 날로부터 1주 후, 영국 총리 해럴드 윌슨은 하원에서 F-111이 더 저렴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All modern aircraft have four dimensions: span, length, height and politics. TSR-2 simply got the first three right.

모든 현대 항공기들은 4개의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비, 길이, 높이, 그리고 정치. TSR-2는 첫 3개만 만족시켰을 뿐이죠.

호커 허리케인의 개발자 시드니 캠 경의 회고.[6]


4. 이후


TSR-2는 완성된 기체 3기 말고도 제작중이던 더 많은 기체들이 존재했는데, 전부 개발을 위한 기구들과 함께 6개월 내로 신속히 처분되었다. 완성된 기체이자 유일하게 비행을 경험한 기체인 XR219는 또 다른 완성형 XR221, 그리고 미완성된 XR223과 함께 현대 항공기가 얼마나 대공 사격에 잘 버티는지 위한 표적으로 처참히 파괴되었다. 다른 완성/미완성된 기체들도 거의 모두 스크랩되었고, 결국 비행을 앞두었던 XR220과 거의 완성된 XR222만이 살아남아 박물관에 전시되게 된다.
TSR-2가 취소된 후 공군성[7]은 대체재를 찾고 있었는데, F-111A를 기반으로 F-111C의 기기를 채운 F-111K가 가장 유력했지만, 다쏘 미라주 IV에 자국산 엔진 RB.168 Spey 25R를 탑재한 Dassault/BAC Spey-미라주 IV, 그리고, '버캐니어 2-더블스타'라고 불렸던 블랙번 버캐니어 S.2의 개량형이 존재했다.
1966년 국방성은 2가지의 항공기를 보고 가기로 정했는데, 단기적으로는 F-111K를 선택하고, 장기적으로는 AFVG(Anglo-French Variable Geometry) 계획[8]에 참여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는 두가지 공격기를 운용하는 것이 F-111K만 운용하는 것보다 더 싸게 먹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9]. 그러나 10기의 F-111K의 주문을 한 뒤 40기의 추가 주문을 하는 동안, F-111의 개발 비용이 폭등하게 되어 비용적, 기술적 측면 모두 TSR-2를 운용하느니 못한 것이 되버렸고 결국 1968년 주문을 취소하게 된다.
결국 영국 공군은 해군의 F-4 팬텀과 블랙번 버캐니어의 일부를 공군 소속으로 전환시켜 운용하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1970년대 들어와서야 팬텀의 임무를 SEPECAT 재규어가 물려받게 되었고, 1980년대에는 파나비아 토네이도가 재규어와 버캐니어의 정찰/폭격의 임무를 완전히 대체하였다.
1970년대 토네이도 전폭기들이 생산되는 동안 한 사업가가 TSR-2 프로그램을 부활시키는 제안을 내놓았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토네이도만으로 TSR-2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

5. 참고 링크



[1]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TSR-2 The Untold Story[2]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TSR-2 The Untold Story[3] 저공 비행은 고고도 비행보다 훨씬 많은 연료가 소모된다.[4] 하중(payload)이 0일 때의 최대 안전 항속 거리[5] 저고도 300m 이하에선 마하 0.95로 설정되었으나, 실제 TSR-2는 마하 1.1의 속도로 비행이 가능했다. [6] 출처: #[7] Air Ministry. 1918년부터 1964년까지 존재.[8] AFVG 계획의 최후는 문서 참고.[9] 보통 1가지 기체만 운용하는 것이 더 싸게 먹히지만, 국방성은 둘다 운용하는 비용이 10억 파운드로 약 7억 파운드의 절감 효과를 계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