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finger

 

1. 개요
2. 활동 초창기: 애플 레코드 시절
3. 활동 후반기 : 워너 레코드 시절
4. 밴드의 재결성, 해체


1. 개요


[image]
멤버는 좌측부터 조이 몰란드(보컬, 기타), 마이크 기븐스(드럼), 피트 햄(보컬, 기타, 피아노), 톰 에반스(보컬, 베이스)
1970년대에 활동한 영국의 록 그룹이자 '''팝 역사상 가장 불운한 그룹.'''
해리 닐슨[1]머라이어 캐리의 커버로 전세계적으로 히트한 명곡 Without You의 원작곡자로 유명하며 'No Matter What'등의 곡을 통해 파워 팝 장르를 창시한 밴드라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보통 이들을 설명할 때는 그러한 설명보다 팝 역사상 가장 불운한 그룹이라는 표현이 훨씬 많이 쓰인다.
여담이지만, 한동안 록계에서 밴드명에 bad를 넣으면 망한다는 도시전설이 촉발되게 한 장본인.

2. 활동 초창기: 애플 레코드 시절


1967년 웨일스에서 The Iveys라는 이름으로 피트 햄(기타,보컬), 톰 에반스(기타,보컬), 론 그리피스(베이스,보컬), 마이크 기븐스(드럼)으로 결성되었다. 결성 직후인 1968년 이들은 그 유명한 비틀즈가 설립한 애플 레코드와 계약하고 데뷔를 준비한다. 애플과의 계약은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었지만 그들을 평생 따라다닌 '제2의 비틀즈' 라는 꼬리표가 대중들에게 붙는 순간이기도 했다. [2]
1968년 말, 애플과의 계약 후 데뷔 EP인 <Maybe Tomorrow>를 발매했지만 대중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고 마침 첫 아이가 태어나 돈이 궁해진 상태였던 베이시스트 론 그리피스가 밴드 활동에 회의감을 느끼고 밴드를 탈퇴한다. 론 그리피스가 탈퇴한 이후, 밴드는 톰 에반스가 베이스로 포지션을 바꾸고 오디션을 통해 리버풀 출신의 기타리스트 조이 몰란드를 영입하여 멤버를 재정비한다. 또한 새롭게 출발하는 의미에서 밴드 이름을 배드핑거(Badfinger)로 바꾼다. 직후 배드핑거는 1969년 폴 매카트니가 작곡한 <Come and Get it>으로 데뷔하게 된다. 폴 매카트니는 1집 Magic Christian Music의 전체 프로듀싱도 맡았다.
1969년 애플 레코드의 협력으로 배드핑거는 링고 스타 주연의 영화 Magic Christian에 출연하고 영화 OST앨범 Masic Christian Music의 전곡을 담당하여 대중들에게 눈도장을 찍었고 미국 진출을 위한 투어를 위해 미국인 매니저 스탠 폴리와 계약을 맺는다.
다음 해인 1970년에 발매된 No Dice 앨범은 조이 몰란드가 처음으로 참여한 앨범이자 Straight Up과 함께 밴드의 커리어에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되는 명반으로[3] 앨범에서 싱글 커트된 <No Matter What>이 차트 8위에 오르면서 밴드는 본격적으로 락스타의 반열에 합류한다. 그 유명한 <Without You>또한 이 앨범에 실려있는 곡이다.
1971년 그들의 최고 명반으로 꼽히는 Straight Up이 발매된다. 이 앨범의 제작과정은 엄청나게 험난했다. 본래 프로듀서로 낙점된 이는 조지 해리슨 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성사된 방글라데시 투어로 인해 앨범의 완성이 조지 해리슨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이에 애플 레코드사는 앨범을 마무리하기 위해 기타리스트 출신의 프로듀서 토드 런그렌을 고용한다. 당시 토드 런그렌은 프로듀서로 경력을 시작한 상태였고, Straight Up은 그의 초창기 프로듀싱 앨범이다. 그런데 토드는 앨범의 사운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서 밴드는 거의 처음부터 다시 앨범을 녹음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토드와 배드핑거 멤버들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여 다음 앨범은 꼭 밴드 스스로 프로듀싱 하게 해달라고 애플 레코드에게 요구하게 된다. [4][5] Straight Up앨범에서는 <Day After Day>, <Baby Blue>가 싱글커트되어 각각 빌보드 차트 4위와 14위에 랭크되었다.
이렇게 앨범은 성공했지만 오히려 애플 레코드의 재정상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고[6] 이에 밴드의 매니저였던 스탠 폴리는 워너브라더스와 비밀리에 계약을 채결하기에 이른다. 이 소식을 들은 애플 레코드는 격노했고 이에 대한 보복 조치로 이미 밴드 스스로 프로듀싱까지 하여 녹음이 완료되어 있었던 앨범 Ass의 발매를 취소하고[7] 애플 레코드사가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던 피트 햄과 톰 에반스 곡들의 발행을 중단하고 저작권료 지급을 거부하게 된다.
이러한 애플의 보복조치로 인해 밴드의 주작곡자들인 피트 햄과 톰 에반스는 돈이 궁해졌고 그들이 작곡한 곡들 중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Without You>의 리메이크 판권을 당시 슬럼프에 빠져있었던 미국 가수 해리 닐슨에게 헐값으로 팔아 버린다. 현악기 세션이 더해진 해리 닐슨의 리메이크 곡은 발매 후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하는 등 엄청난 히트를 불러 일으키고 해리 닐슨은 완벽하게 재기에 성공한다. 하지만 닐슨과 그의 매니저는 곡의 편곡을 다르게 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원작자라고 주장하며 피트 햄과 톰 에반스에게 돈을 지급하기 거부했으며 그들은 해리 닐슨에게 저작권료를 지불하라는 소송을 제기한다.
한편 피트 햄과 톰 에반스가 워너와 애플사이의 계약 문제로 곡을 발표하지 못했던 것과 달리 밴드의 기타리스트 였던 조이 몰란드는 자신의 곡을 각각 다른 판권업자들과 계약하고 있었고 자금사정이 절박했던 애플 레코드의 관계자들은 '원하는 음악을 자유롭게 하게 해주고 단독으로 밴드에서 주목받게 해주겠다'며 조이에게 앨범을 내자고 설득했다. 조이는 피트 햄의 <Apple of My Eyes>를 앨범 첫 트랙에 싣고 앨범의 커버를 원래 계획[8]대로 발매한다는 조건하에 승낙을 하여 1973년 앨범의 대부분을 자신의 곡으로 채운 버전의 Ass를 발매하기에 이른다.

3. 활동 후반기 : 워너 레코드 시절


한편, 워너 레코드로 새 둥지를 튼 밴드는 애플 시절보다 빨라지고 복잡해진 사운드, 훗날 섹스 피스톨즈펄프 등의 앨범을 프로듀스하게 되는, 하지만 당시에는 신참 프로듀서였던[9] 크리스 토마스를 영입하는 등 당시 이들에게 붙여진 '비틀즈에 의해 키워진 제2의 비틀즈'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워너와의 첫 앨범 <Badfinger>는 생각보다 잘 팔리지 않았고 다음 앨범인 <Wish You Were Here> 제작 도중 조이 몰란드와 피트 햄의 관계가 악화되어 밴드는 해체 직전까지 가게 된다.[10] 결국 둘의 갈등은 피트 햄이 밴드를 탈퇴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는데 피트 햄의 빈자리는 기타리스트이자 키보디스트인 밥 잭슨이 가입함으로써 채워지게 된다. 하지만 워너 측에서 피트 햄이 밴드에 돌아오지 않으면 밴드와의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피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솔로 1집 녹음 도중 다시 밴드로 돌아와 투어에 참여한다.[11] 하지만 둘의 관계는 계속 좋지 않았고 피트 햄이 밴드로 돌아온 직후 이번에는 조이 몰란드가 밴드에서 탈퇴하게 된다. 이후 밴드는 밥 잭슨을 재가입시켜서 <Wish You Were Here>를 완성한다.
그러나 앨범 발매 직후, 밴드의 미국 매니저였던 스탠 폴리가 워너의 계약금을 들고 잠적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에 분노한 워너 측은 <Wish You Were Here> 앨범이 발매된 지 불과 1달 만에 앨범을 절판시킨다. 이러한 워너의 조치에 절망한 밴드의 리더이자 메인 송라이터 중 한 사람이었던 피트 햄은 결국 '''자신의 28 번째 생일 3일 전인 1975년 4월 24일 만 27세의 나이로 차고에서 목을 메고 자살해버린다.''' 그의 유서에는 당시 만삭이었던 아내에게 경제적으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아내에 대한 미안함, 아무리 곡을 써도 돈을 벌기는 커녕 발표조차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절망, 자신의 음악은 제 2의 비틀즈라는 꼬리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평생을 바친 음악에 대한 회의감, 밴드를 배신하고 밴드의 돈을 가로챈 매니저 스탠 폴리[12]에 대한 분노 등 음악 비즈니스에 대한 억하심정이 담겨 있었다. 유서 말미에는 "스탠 폴리는 영혼조차 없는 개자식이다. 내가 그를 함께 지옥에 데려가겠다."라고 써져있었다. <Without You>의 메인 멜로디를 포함하여 <No Matter What>, <Day After Day>, <Baby Blue>등 밴드의 히트곡 중 대다수는 다 그가 작곡한 것들이었다.

4. 밴드의 재결성, 해체


피트 햄의 자살 이후 나머지 배드핑거의 멤버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마이크 기븐스는 웨일스에서 세션 드러머로 일했으며 톰 에반스와 조이 몰란드는 음악계를 떠나 톰 에반스는 파이프 수리공으로, 조이 몰란드는 그의 미국인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카페트를 파는 사업을 하게 된다. 1978년 조이 몰란드는 톰 에반스에게 연락해서 배드핑거를 재결성하자고 말했고 톰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여 그와 함께 2장의 앨범을 내게 되고 그럭저럭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조이 몰란드와 톰 에반스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되면서 그룹은 다시 와해되는데 이 당시 조이는 배드핑거의 이름만 빌리고 그의 미국 동료들과 같이 만든 새 밴드를 생각하고 있었고 톰은 배드핑거의 원년 멤버들로 밴드를 꾸리는 실질적인 재결성을 원했었다고 한다. 결국 두 사람은 '조이 몰란드의 배드핑거'와 '톰 에반스의 배드핑거'라는 2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서 활동하게 된다. 조이 몰란드의 그룹에는 조이 몰란드와 그의 미국인 동료 뮤지션들이 톰 에반스의 그룹에는 배드핑거의 원년 드러머 마이크 기븐스와 워너 레코드 재적 시절에 같이 활동한 키보디스트 밥 잭슨이 가입하였다.
그러나 두 그룹 모두 별다른 성공을 하지는 못했고 그들은 서서히 알콜과 마약에 빠지고 만다. 특히 톰 에반스와 그의 밴드는 미국 투어 도중 '제 2의 비틀즈는 필요 없다'며 관객들로부터 야유를 받았고 그들은 이를 견디다 못해 투어를 도중에 중단하고 영국으로 귀국했는데 미국의 투어 에이전시에서 계약 불이행으로 톰 에반스를 고소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그렇게 힘든 나날을 버티던 중 톰 에반스는 조이 몰란드와 전화로 <Without You>의 수익 분배와 저작권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게 되고[13] 에반스는 분노하여 전화를 끊고 아내에게 음악 비즈니스에 대한 환멸과 피트가 있는 곳은 분명히 이곳보다 좋은 곳일 거라며 하소연을 하고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다음날인 1983년 11월 19일 아침 톰 에반스는 그의 가족들에 의해 뒷마당의 나무에서 목을 매어 죽은 채로 발견된다. 향년 36세였다.
톰 에반스의 사후 마이크 기븐스는 조이 몰란드의 배드핑거에 가입하여 투어를 돌다가 1989년 탈퇴 후 몇 장의 솔로 앨범을 발매하였으며 2005년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조이 몰란드는 조이 몰란드의 배드핑거라는 이름으로 계속 활동을 했다.

5. 고스트스테이션에서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에서도 거의 상징에 준할 정도로 많이 언급되었는데, 특히 첫방 엔딩곡을 Badfinger의 Carry on Till Tomorrow로 선곡했을 정도였다. 마지막 시즌에서도 신해철이 언급할 정도면 가히 준 상징적인 밴드라 할 수 있다.

[1] (1941.6.15.~1994.1.15.) 미드나잇 카우보이의 주제가 Everybody's Talkin과 2015년 롤링 스톤 선정 100대 송라이터 62위, 2020년 개정판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 281위에 든 Nilsson Schmilsson 앨범으로 유명하고 존 레논과 링고 스타와 친했던 바로크 팝, 사이키델릭 팝 싱어송라이터[2] 당시 빽빽한 스캐줄로 녹초가 되어 있었던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는 그들이 보낸 데모 테이프를 녹음실에서 듣고 자신들의 데모 테이프인줄 알고 착각하여 레코딩까지 하려고 했다고 한다.[3] 초창기에는 <Straight Up> 앨범이 더욱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최근 들어 <No Dice> 앨범이 보다 순수하게 밴드의 사운드를 담아낸 앨범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밑의 앨범 설명에도 보여지듯이 <Straight Up> 앨범은 밴드 멤버들보다 프로듀서 토드 런그렌의 영향이 더욱 짙은 앨범이다.)[4] 원래 토드 런그렌은 까다로운 뮤지션 & 프로듀서로 유명하다. 거의 15년이나 지난 후 영국 밴드 XTCSkylarking를 녹음할 당시엔 리더 앤디 파트리지랑 의견 충돌이 심각해 언쟁이 엄청났다고 전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Skylarking은 XTC의 걸작이자 영국 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반으로 자주 거론된다.[5] 런그렌 역시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였는지 내가 다 완성했는데 왜 크레딧에 조지 해리슨이 올라와 있냐고 불쾌해하기도 했다.[6] 배드핑거는 비틀즈 관련 앨범을 제외하고 애플에게 수익을 안겨주는 유일한 밴드였다.[7] 이 앨범의 커버는 당나귀에게 당근과 채찍을 주는 모습으로 애플의 불합리한 매니지먼트를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앨범에는 이러한 애플 레코드에 대한 그들의 입장이 담긴 피트 햄의 곡 <Apple of My Eyes>가 실려있다.[8] 애플 레코드는 자신들을 조롱하는 늬앙스의 커버를 바꿀것을 제안했다.[9] <Wish You Were Here>에 수록된 <No One Knows>라는 곡에서는 당시 크리스 토마스가 배드핑거와 동시에 프로듀싱하던 사디스틱 미카 밴드의 카토 미카가 피처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10] 조이 몰란드는 밴드의 매니지먼트에 대해 불만을 품으면서 자신과 자신의 아내가 직접 밴드의 매니저먼트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밴드의 리더였던 피트 햄은 스탠 폴리를 계속 믿어보자고 주장하였다.[11] 결국 피트 햄의 솔로 앨범은 그의 생전에 완성되지 못했고 피트 햄의 사후, 그의 유족들이 피트가 생전에 녹음해 놓은 데모들을 믹싱하여 2장의 앨범으로 완성하여 발표하였다.[12] 스탠 폴리는 1991년에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군에서 비행기 엔진 제조 회사 설립 명목하에 항공 엔지니어 피터 브록에게 25만 달러 사기를 치고 자금유용 및 돈세탁 혐의로 집행 유예 5년을 선고 받고 25만 달러를 모두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배상금 전체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 뒤 2009년 7월 20일에 87세로 사망했다.[13] 당시 <Without You>에 대한 배드핑거의 저작권이 인정되어 작곡자로 표기된 피트 햄과 톰 에반스에게 저작권료가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이미 고인이 된 피트 햄의 몫은 유족들에게 돌아갔다.) 이에 대해 배드핑거의 전 멤버 조이 몰란드, 마이크 기븐스, The Iveys 시절 매니저인 빌 콜린스가 자신들도 작곡에 참여하였으며 저작권료의 일부를 받아야 한다고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ASCAP는 주장의 근거가 부정확하다며 소송을 각하하고 최종적으로 <Without You>는 피트 햄이 메인 멜로디와 소절(Verse)부분을 작곡하고 톰 에반스가 후렴(Chorus)부분을 작곡했다고 정의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