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매카트니

 

'''폴 매카트니의 관련 둘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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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매카트니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bgcolor=#f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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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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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이름'''
'''폴 매카트니
PAUL MCCARTNEY
'''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99년'''
'''후보자격 연도'''
'''1993년'''
<bgcolor=#0c0000> '''후보선정 연도''' ||<bgcolor=#0c0000> '''{{{#ffd700 1999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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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ness World Records'''
[image]
''' ''Most-Successful Songwriter of All Time.
역사상 가장 성공한 송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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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자'''
'''등재 날짜'''
'''출처'''
폴 매카트니
200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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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image]
'''이름'''
'''폴 매카트니
PAUL MC CARTNEY
'''
'''분야'''
'''음악'''
'''입성날짜'''
'''2012년 2월 9일'''
'''위치'''
'''1752 Vine Street'''
}}} ||
}}} ||
'''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
Member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

Paul McCartney
폴 매카트니'''

[image] }}}||
<colbgcolor=#ffffff><colcolor=#000000> '''본명'''
제임스 폴 매카트니 경
Sir James Paul McCartney
'''국적'''
[image] 영국
'''출생'''
1942년 6월 18일 (81세)
영국 잉글랜드 랭커셔 리버풀[1]
'''직업'''
싱어송라이터, 작곡가, 프로듀서, 사업가, 배우, 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 동화작가
'''소속'''
쿼리멘 (1957 - 1960)
비틀즈 (1960 - 1970)
윙스 (1971 - 1981)
무소속 (1981 - )
'''서명'''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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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fff><colcolor=#000000> '''부모'''
아버지 짐 매카트니
어머니 메리 매카트니
'''형제자매'''
남동생 마이클 매카트니
'''배우자'''
린다 매카트니 (1969 - 1998, 사별)
헤더 밀스 (2002 - 2008, 이혼)
낸시 쉬벨 (2011 - )
'''자녀'''
슬하 1남 4녀
헤더[76], 메리, 스텔라, 제임스, 베아트리체
'''거주지'''
영국 잉글랜드 이스트서식스 주
미국 뉴욕 주 뉴욕시 맨해튼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스[77]
'''작위'''
Knight Bachelor (기사)[78]
'''학력'''
리버풀 인스티튜트 고등학교 (졸업)
예일대학교 (음악 / 명예 박사)
'''혈통'''
아일랜드계 영국인
'''레이블'''

'''장르'''
, , 일렉트로닉, 클래식[79]
'''악기'''
기타, 보컬, 베이스 기타, 건반 악기, 드럼[80]
'''활동 기간'''
1959년 ~ 현재
'''재산'''
$11억~[81] ~ $12억 8천만[82]
'''종교'''
무종교 (무신론)[83]
'''신체'''
181cm, 72kg, B형, 왼손잡이
'''링크'''
| | |

'''폴 매카트니 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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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경력
2.1. 비틀즈 (1957 ~ 1970)[2]
2.1.1. 결성에서 정상까지
2.1.2. 불화와 분열
2.1.3. 비틀즈는 계속된다: 미발표곡 발매를 위한 노력
2.2. 윙스 및 솔로 활동 (1970 ~ 현재)[3]
3. 음악적 성향
4. 여담
4.1. 가족
4.2. 채식주의자 및 동물애호가
4.3. 외모
4.4. 종교관
4.6. 성격
4.7. 기타
4.8. 콜라보레이션
6. 솔로 디스코그래피
6.2. 싱글
6.2.1. 빌보드 1위
6.2.2. 빌보드 2위
6.2.3. 빌보드 3위~10위
6.2.4. 빌보드 11위~20위
7. 어록
8. 참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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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매카트니에게 경외감을 느낀다. 그는 내가 경외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밥 딜런[4]

영국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인물들 중 한 명'''으로,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있고 위대한 그룹 비틀즈베이시스트이자 작곡가이다. 또한 절친[5]이자 라이벌인 존 레논과 함께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 파트너쉽으로 유명하다.
1979년 기네스 북은 폴 매카트니를 세계 최고 골드 디스크 기록을 60개 보유한 '''‘대중음악사 가장 명예로운 음악가이자 퍼포머’'''로 발표했으며[6], 2009년 기네스북은 다시 '''‘역사상 가장 성공한 송라이터’'''로 그를 발표했다.[7]. 또한 연예계에서 제일 돈이 많은 개인 중 하나이다.[8] 또한 영국 차트에서 유일하게 솔로[9], 듀엣[10], 트리오[11], 콰르텟[12], 퀸텟[13], 그리고 자선 밴드[14]의 모임으로 1위를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또 빌보드 차트에서 솔로 경력과 비틀즈 경력의 빌보드 1위를 다 합치면 총 32개의 1위를 배출해냈다.[15] 또 2015년 롤링 스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송라이터에 폴 매카트니를 2위로 꼽았다.[16]
비틀즈 멤버로서 가장 유명하지만, 솔로 활동 커리어 역시 비틀즈 시절에 꿇리지 않는 수준이다. 사실 1970년대에 그와 비슷한 앨범 판매고를 올린 밴드/아티스트는 엘튼 존레드 제플린 뿐이며, '''비틀즈 해체 후 5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앨범을 발매하면 무조건 빌보드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등 노익장임을 과시하고 있다. 최근에 발매한 McCartney III 앨범 역시 빌보드 2위까지 오른 것을 보면,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악가'''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1965년에는 비틀즈의 멤버로서 대영제국 훈장 5등급(MBE)을, 1997년 3월 11일에는 단독으로 기사작위(Knight Bachelor)를 받았으며[17] 1992년에 음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폴라음악상을 처음으로 수상했다. 1987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 1999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솔로 아티스트로서 입성했다.[18] 2012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정되었다.[19] 2017년에는 영국 1.5등급 훈장에 해당하는 컴패니언 오브 아너(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 훈장을 받았다.

2. 경력



2.1. 비틀즈 (1957 ~ 1970)[20]


자세한 내용은 비틀즈 문서 참조. 여기서는 간략하게 폴 매카트니 위주의 설명만 한다.

2.1.1. 결성에서 정상까지


젊은 시절의 폴 매카트니
Hey Jude 생방송에서의 모습

1942년 리버풀에서 태어났으며 댄스 밴드의 리더였던 아버지에게서 음악을 접하게 된다. 아버지가 선물한 트럼펫을 배우고 있었지만 윗입술에 경련이 생기자 이 트럼펫을 어쿠스틱 기타와 바꿨는데 이 기타를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14세 되던 해에 어머니 매리 매카트니가 유방암으로 사망하였고 후에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존 레논과 더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57년부터 존 레논과 함께 쿼리멘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1958년 조지 해리슨의 가입으로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스튜어트 서프클리프, 피트 베스트의 5인조 밴드가 구성된다. 이후 이름을 '더 비틀즈(The Beatles)' 로 바꾸고 스튜어트 서프클리프가 탈퇴한 뒤 피트 베스트가 링고 스타로 교체되면서 현재 알려진 비틀즈의 기본 체제가 확립된다.
초기에는 존 레논과 함께 '''레논-매카트니''' 체제라는 환상의 콤비를 이뤘다. 로큰롤에 기반을 둔 이 둘의 음악은 서로에 의해 조율되었다. 하지만 존 레논이 개인적이고 독특한 음악을 지향했다면 폴 매카트니는 대중적이고 듣기 좋은 음악을 지향한 편이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의 음악에는 각자의 개성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1967년, All You Need Is Love 방송 직전의 모습
그러나 이 둘의 차이가 바로 둘 사이의 대립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Yellow Submarine' 이전까지만 해도 이 둘의 협력은 계속되었고 8번째 음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이하 페퍼 상사)' 에 수록된, 비틀즈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A Day in the Life' 는 이 둘의 곡을 합친 곡이었으며 당시 존 레논의 재혼으로 혼란을 겪었을 존 레논의 아들 줄리안 레논에게 'Hey Jude' 를 써주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불화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21] '페퍼 상사' 와 'Magical Mystery Tour' 는 폴 매카트니의 주도 아래 제작되었고 다른 멤버들은 이에 불만을 가졌다. 후기에도 폴 매카트니는 다른 멤버들을 이끌려고 하고 이에 대한 반발이 커지면서 사이가 더 벌어졌다.
그렇지만 무조건 폴의 탓만을 할 수도 없는 것이 비틀즈의 매니저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죽은 후부터 비틀즈는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오노 요코와 앨런 클라인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는데,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나름 폴은 와해를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마음대로 하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실제로 폴이 했던 행동이 다소 오해를 살 만한 부분도 일부 있었고. 결국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소통의 문제.

2.1.2. 불화와 분열


1968년의 폴 매카트니
1969년 Get Back(Let It Be) 세션의 폴 매카트니
'The Beatles' 를 발표할 무렵 비틀즈 멤버들의 대립은 극심해진다. 링고 스타와 조지 해리슨은 비즈니스적인 문제로 인한 폴 매카트니와의 대립으로 비틀즈를 일시 탈퇴하기도 했으며 존 레논이 오노 요코를 녹음 스튜디오에 데려오면서 시작된 개인적인 대립은 비틀즈 해체 이후까지 계속된다. 게다가 폴 매카트니는 완벽한 녹음을 추구했기 때문에 음악을 녹음할 때 30~40번씩 다시 녹음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이런 일에서도 멤버들의 사이는 벌어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뭉치자는 취지 아래 계획된 'Abbey Road' 와 'Let It Be' 에서도 멤버들과의 충돌은 끊이질 않았고 결국 1970년도에 폴 매카트니가 견디다 못해 McCartney 앨범 발표를 앞두고 비틀즈 활동을 지속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며 비틀즈는 공식적으로 해체된다.
앞서 말했듯이 비틀즈 해체는 누구 하나의 잘못만이라고 보기 어렵다. 여러 사안이 얽혀 돌아간 매우 복합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1967년 밴드의 정신적 지주였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죽음 이후 비틀즈는 매일이 혼란의 연속이었다. 리더인 존 레논은 그룹에서 흥미를 잃고 점점 멀어졌으며[22] 나머지 멤버들은 지쳐있었는데 이에 폴 매카트니는 본인 나름대로는 밴드의 분열을 막겠다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시하며 주도하는 등) 노력한 것이었다. 폴이라도 나서서 주도하지 않았으면 아마 비틀즈는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사망한지 1년만에 해체됐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멤버들에게는 이것이 밴드를 자신의 입맛대로 끌고 가려는 독선으로 느껴졌고 상호 불신과 감정의 골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비틀즈에서 점점 멀어져가던 존 레논이 1968년 이혼하고 오노 요코와 본격적으로 연인 관계를 공표한 이후부터는 그 이전까지 멤버들 사이에서 암묵의 룰이었던 '비틀즈 멤버들과 고용된 세션맨들을 제외하곤 외부인의 스튜디오 출입금지'를 무시하고 스튜디오에 꼭 오노 요코를 끼고 등장하거나 심지어는 약속 날짜에 스튜디오에 안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스튜디오에서 요코는 조지 해리슨이 먹으려고 놔둔 과자를 허락도 없이 먹거나 침대 매트를 가져와서 누워있으면서, 사사건건 끼어들며 "아티스트인 자신이 생각하기에 지금 녹음하고 있는 음악은 이러이러한 부분에서 잘못되었다."라며 음악적인 부분에 도가 지나친 훈계를 하고 멤버들이 연주 중인 앰프를 깔고 앉는 등 무례한 행동을 보였다. 그래서 존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이 (특히 조지와 폴) 오노 요코를 싫어하게 된다. 때문에 후에 폴 역시 아내 린다를 스튜디오에 데려오고[23]조지는 존과 요코 앞에서 존이 존경하던 밥 딜런까지 얼마나 요코를 안 좋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털어놓은 적도 있다. 존은 이때 요코를 변호할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Let It Be'를 녹음할 때는 폴을 제외한 나머지 세 멤버들이 애플 레코드의 매니저로 추대한 앨런 클라인이 개입하게 된다. 당시 폴은 장인이자 법률가인 리 이스트먼에게 애플의 매니지먼트를 맡기자고 주장했고 존과 요코는 당시 판권업자들에게 있던 저작권을 원가수에게 돌려주는 행위로 음악계의 로빈 훗이라 불리며 인기를 얻고 있었던 앨런 클라인에게 매니지먼트를 맡기자고 주장했는데다. 자신의 장인을 추천한 폴에 대해 조지와 링고는 폴이 비틀즈를 제멋대로 하려는걸 넘어서 이제는 자신의 처가까지 비틀즈에 끌어들인다며 존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다.
이후에 앨런 클라인의 연속된 월권행위와 돈에 집착하는 행위들로 인해 앨런의 본성을 알게 된 존 레논은 Walls and Bridges 앨범에서 그를 비판하는 곡 'Steel and Glass'를 쓰기도 했다.[24] 당시 앨런 클라인은 폴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폴의 곡을 조지 마틴이 아닌 필 스펙터에게 넘겼고 필 스펙터는 폴이 예전의 화기애애한 시절로 돌아가자며 단순한 밴드 사운드로 작곡한 원곡을 자신의 장기인 '월 오브 사운드(Wall of Sound)'를 사용하여 오케스트레이션을 입혀서 곡의 사운드 자체가 바뀌는 일도 발생했다. 이를 들은 폴은 분노하여 앨범의 발매를 계속 반대하다가[25] 밴드 탈퇴 선언 직전인 1970년, 타이틀을 'Get Back'에서 'Let It Be'로 바꾼다는 조건으로 앨범 발매를 허락했다고 한다. 또한 훗날 자신이 생각한대로의 사운드를 수록한 'Let It Be... Naked' 앨범을 내기도 했다.
비틀즈 해체 직후 서로에 대한 앙금과 불신이 있었지만,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갈등이 본격화된 것은 1970년 12월 31일 폴 매카트니가 비틀즈 멤버들과 애플을 상대로 물적 분할 소송을 진행하면서부터였다. 앞서 말한대로 폴 매카트니는 앨런 클라인의 월권 행위에 진절머리를 느꼈고, 계약이 애플에 묶여있는 한 절대로 자유로워질 수 없다고 판단해 이 소송을 진행한 것이다. 이 때문에 1971년은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갈등이 정점에 달했던 때였다. 일례로 1971년 존과 폴이 각각 발표한 솔로 앨범들은 서로에 대한 디스를 담고 있다. 폴 매카트니는 자신의 솔로 앨범 'Ram' 에서 짝짓기하는 딱정벌레 사진을 집어넣었는데 존 레논은 이를 자신과 오노 요코를 비유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분개하였다. 또한 해당 앨범의 첫 곡 'Too Many People' 의 가사에는 존 레논에 대한 비꼬기가 담겨 있다. 존 레논도 이에 맞받아쳤다. 자신의 앨범 'Imagine' 의 부클렛 내부에는 폴이 'Ram' 에서 양의 뿔을 당기는 포즈를 따라하며 돼지의 귀를 당기는 사진을 넣었고 폴 매카트니를 디스한 곡 'How Do You Sleep?'을 수록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폴과 존의 대립은 적어도 1972년까지 계속되었고 존 이상으로 폴에 대해 앙금이 남아있던 조지 해리슨은 "4인조 밴드 비틀즈의..." 라고 말하는 오노 요코에게 "3인조 밴드야"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때가 조지와 폴의 사이가 매우 틀어져있던 때로 폴 매카트니를 비틀즈 멤버로 인정 안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존과 폴, 조지와 폴은 오히려 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사이가 완화되고, 오히려 1980년 경 조지의 자서전 문제로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1974년 3월 29일 로스 엔젤레스. '''5년 만에 한 사진에 담긴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26]
위와 같은 예화들 때문에 존과 폴의 불화가 존 레논이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비틀즈 해체와 물적 분할을 둘러싼 법정 소송이 1973년 무렵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면서 화해의 무드가 조성된다. 사실 폴에 대한 나머지 멤버들의 반감은 브라이언 엡스타인 사후 비틀즈와 애플사의 매니지먼트 문제로 증폭된 부분이 큰데, 폴은 자신의 장인어른인 리 이스트먼을 후임 매니저로, 나머지 셋은 앨런 클라인을 후임 매니저로 밀면서 대립하였다. 그러나 앨런 클라인의 기만 행위들이 밝혀지면서 ‘폴의 말이 틀리지 않았어.’로 분위기가 바뀌었고, 폴에 대한 멤버들의 반감이 상당히 누그러들게 되었다.[27] 이 과정에서 '''폴 vs 나머지 세 멤버 + 앨런 클라인'''이었던 법적 공방이 '''비틀즈 멤버들 vs 앨런 클라인'''으로 구도가 바뀌게 된다. 1974년 3월에는 로스 엔젤레스에 머물며 해리 닐슨의 앨범을 프로듀싱 중이었던 존 레논을, 폴 매카트니가 아내 린다 매카트니, 그리고 스티비 원더와 함께 깜짝 방문한다. 이 당시 링고 스타도 함께 있었고, 존과 폴은 스튜디오에서 즉흥 연주를 함께할 정도로 사이가 회복된다.

1974년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가 해리 닐슨, 스티비 원더 등과 함께 'Stand By Me'를 함께 연주한 음원.
<A Toot and a Snore in '74>라는 이름의 부틀렉으로 돌아다닌다.
물론 화해를 하긴 했지만 예전만큼 허물없이 지낸 건 아니었다. 1975년 이후 음악계에서 은퇴하고 션을 돌보면서 전업주부로 살아가고 있었던 존 레논은 20대 시절처럼 연락도 없이 갑자기 기타 하나 달랑 들고 나타나 음악을 연주하는 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폴도 "지금은 20대도 아니고 비틀즈 시절도 아니야"라는 존의 말에 상처받아 나중에 자신의 말에 후회한 존이 연락을 해도 받지 않는 등 티격태격 하긴 했다고 한다. 그래도 서로 으르렁거리던 1970년대 초반의 분위기와 달리 교류도 꽤 있었으며, 존이 죽기 전에는 사이가 많이 회복됐었다. 폴은 존 레논이 살고있는 다코타 아파트에 자주 놀러갔으며 어느날은 함께 술을 마시며 TV에 나오는 SNL 방송을 보면서 출연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물론 둘이 술에 많이 취한 상태라 결국 그 계획은 무산됐지만.
존 레논은 폴 매카트니가 McCartney II 앨범을 발표할 때 'Coming Up'을 듣고 좋은 싱글이라고 칭찬했으며 폴 매카트니 역시 존 레논이 5년의 공백기를 깨고 Double Fantasy를 발표했을 때 응원차 전화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일화는 1994년 폴 매카트니는 오노 요코에게 완성되지도 않고 상업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존 레논의 홈 레코딩 노래들이 수록된 두 개의 테이프를 받았는데, 한 테이프에는 (폴,조지,링고가) 작업을 마치고 발표[28]한 "Free as a Bird"와 "Real Love"가 수록되어 있었다. 나머지 하나의 테이프에는 "Now and then" (원제:I Don't Want to Lose You)와 "Grow Old With Me"가 수록되어 있었는데 테이프의 겉면엔 '''"for Paul"''' 이라고 급하게 휘갈겨 쓴 존의 필체가 남아 있었다... 존은 훗날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기도 했으며[29] 폴은 존이 죽었을 때 추모곡 'Here Today' 를 작곡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대중들은 "역시 폴과 존의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말한다.

2.1.3. 비틀즈는 계속된다: 미발표곡 발매를 위한 노력


투어 활동을 재개한 1990년대 이래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 멤버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기보다 오히려 비틀즈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비틀즈 관련 활동 및 사업에도 활발히 참여하는 편이다.
비틀즈 음악에 관한 판권 분쟁이 매듭된 이후 1994년, 폴 매카트니는 조지 해리슨링고 스타와 함께 존 레논의 미발표 음원 ‘Free as a Bird’를 작업하고 비틀즈의 전기 다큐멘터리인 ‘비틀즈 앤솔로지’에 참여한다. 앤솔로지는 음반으로도 발매되어 차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2000년 비틀즈의 영국 및 미국 차트 1위 싱글을 모은 1이 예상치 못한 대박 흥행을 거두자, 윙스의 활동을 정리하는 다큐와 음반 Wingspan을 2002년에 선보이는 한편, 2003년에는 본래 의도의 사운드로 비틀즈의곡들을 복원하기 위해 'Let It Be... Naked' 를 발매하기도 했다. 필 스펙터의 프로듀싱을 못마땅해한 폴의 원래 의도대로 곡을 다시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노래들을 다시 믹싱했다. 수록곡과 곡 순서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최근에는 'Carnival of Light' 를 발매하려 하고 있으나 조지 해리슨의 부인 올리비아 해리슨의 반대로 성사되지 않고 있다. 'Carnival of Light' 는 14분 가량의 곡이라고 하며 현재 비틀즈 곡 중 가장 긴 곡인 'Revolution 9'(8분 가량) 보다도 2배 가까이 긴 곡이다. 조지 해리슨의 유족들은 생전에 조지 해리슨이 이 곡을 무척 싫어했다는 이유로 이 곡의 발매를 반대하고 있다.
존 레논이 죽은 이후에는 존 레논의 유족과 화해했고 오노 요코를 초청한 자리에서 존 레논의 곡을 부르기도 했다. 존이 사망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레논-매카트니의 이름으로 된 곡을 매카트니-레논으로 바꾸다가 논란이 펼쳐졌지만 과잉보된 것으로 폴 매카트니가 바꾸려고 한 것은 오직 'Yesterday' 한 곡 뿐이었다. 'Yesterday' 는 완전히 폴 혼자서 만든 곡이기에 딱히 문제될 게 없는 일이었지만 이 일이 크게 왜곡되어 모든 곡들을 바꾸려 했다는 식으로 보도되었고 큰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Hey Jude' 마저도 존 레논이 작곡했다는 말까지 나오는 치욕까지 경험을 해야 했다. 이리저리 팔려나간 비틀즈 노래들의 판권을 되찾기 위해 요코와 힘을 합치기도 했다. 막대한 저작권료로 인해 실패했지만.
비틀즈의 노래를 새로 리믹스해 재탄생시킨 앨범 'LOVE'로 다시금 전 비틀즈 멤버로서 그래미 무대에 서기도 했다.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 행사가 열린 현지 시각 7월 28일 0시 50분 경에 피날레 무대에 등장하여 'The End' 와 'Hey Jude' 를 열창하였다. 그는 영국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니 어찌 보면 마땅한 일[30]. 개막식에 참석한 관중들이 함께 후렴구인 "나나나 나나나나~" 를 외치는 떼창 장면은 개막식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

2.2. 윙스 및 솔로 활동 (1970 ~ 현재)[31]


윙스 시절의 폴 매카트니[32]
폴은 비틀즈 해체 보도 일주일 후인 1970년 4월 17일, 가족을 주제로 녹음한 셀프 타이틀 앨범 'McCartney' 를 발표했다. 이 앨범에서 폴은 기타, 베이스, 피아노, 드럼 등 다양한 악기를 모두 혼자서 다루었다. 폴의 아내 린다 매카트니는 그저 하모니와 백보컬만 할 정도로 앨범의 기획부터 녹음, 믹싱까지 모두 폴 혼자서 해낸 앨범으로,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 1위까지 오를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비틀즈 해체를 폴이 발표하고 뒤이어 바로 솔로 앨범을 냈다는 점에서 폴은 "자신의 솔로 앨범을 위하여 비틀즈를 이용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33]
비틀즈가 해체된 이후인 1971년, 폴은 아내 린다를 비롯한 몇몇 세션맨들과 작업한 'Ram' 을 발표한다. 이 앨범 역시 영국과 미국에서 각각 1, 2위에 오를 정도로 히트했다. 하지만 앨범 뒷면에 있던 딱정벌레의 짝짓기 사진 때문에 존 레논과 한바탕 디스전이 일어난다. 이에 대해서는 How Do You Sleep 문서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 뒤 폴은 자신과 린다 매카트니, 기타리스트 데니 레인을 주축으로 윙스(Wings)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윙스의 자세한 역사는 역시 해당 문서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윙스의 명의로 발표된 첫 앨범 Wild Life는 믹싱을 최소화하여 최대한 자연스러운 느낌이 나게 하려는 의도로 발표되었다. 실제로 몇 번의 테이크만 사용하여 만들어 수수한 느낌이 든다. 다만 차트 성적이나 대중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고, 특히 '윙스'라는 이름의 낮은 인지도 탓이라고 생각한 폴은 윙스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질 때까지 Paul McCartney & Wing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로 한다.
Paul McCartney & Wings로 이름을 바꾼 윙스는 1973년 'Band on the Run'을 발표한다. 이 앨범은 폴 매카트니의 가장 성공적인 솔로 앨범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명작으로 평가를 받는다. 차트에서도 폴의 솔로 앨범 중 처음으로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1위를 하기도 했다. Band on the Run으로 윙스라는 이름을 널리 알린 폴 매카트니는 1975년 발매된 Venus and Mars부터 다시 밴드의 이름을 Wings로 되돌린다. Venus and MarsWings at the Speed of Sound의 연이은 대성공을 거둔 윙스는 Wings over Europe, Wings over America 투어 등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거두어들인다. 들어보자 이 시기 윙스는 브라스 밴드를 동원하여 재즈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팝 음악을 주력으로 하였다. 1976년 히트한 "Silly Love Songs"와 "Let 'Em In"가 그 대표적인 예.
1977년 11월 발매한 싱글 "Mull of Kintyre"는 영국 사상 최초로 판매량 200만 장을 넘기며 1977년 크리스마스 차트 1위, 1977년 최다 판매 싱글은 물론 1970년대 최다 판매 싱글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폴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최다 판매 싱글 기록을 모두 가진,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34] 윙스는 1979년의 투어 역시 성황리에 마무리를 하며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1980년 1월, 윙스의 일본 공연을 위한 입국 수속 중 폴 매카트니가 반입한 대마초 때문에 일본 공연이 취소되며 윙스의 활동은 중단된다. 한편, 1980년 5월에는 자신의 이름으로만 발매한 두번째 셀프 타이틀 앨범 McCartney II를 발매한다. 이 앨범 역시 1970년 발매된 McCartney처럼 폴 본인이 앨범 제작의 전 과정을 혼자서 진행하였다. 이 앨범은 기존의 록이나 재즈풍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신디사이저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일렉트로닉 테크노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당시의 이러한 파격적인 행보는 차트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영국과 미국에서 1위와 3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8일, 폴에게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일이 발생한다. 존 레논마크 채프먼의 총격으로 사망한 것이다. 존 레논의 죽음으로 정신적 충격과 함께 신변의 위협을 받은 폴 매카트니는 차후 투어 활동을 주저하게 된다. 결국 밴드 활동에서 관심이 멀어진 폴 매카트니와의 협업에 지칠대로 지친 데니 레인이 밴드 활동에 환멸감을 느끼고 1981년 4월 27일 밴드에서 탈퇴를 선언하자 윙스는 해체되고 만다. 데니 레인이 세션으로 참여하기도 했던 Tug of War는 결국 폴 매카트니 솔로 명의로 발표된다.
다시 솔로로 돌아온 폴은 1982년작 'Tug of War'를 통해 또 한번 찬사를 받는다. 조지 마틴이 프로듀싱한 앨범으로, 비틀즈 시절의 멜로디 감각이 제대로 나타난 수작으로 평가 받는다. 폴의 팬이라면 꼭 들어봐야 할 앨범. 폴의 솔로 시절 음악에 관심이 없더라도 이 앨범 쯤은 'Band on the Run' 과 함께 들어봐도 좋을 것이다. 이 앨범에는 스티비 원더와 함께한 곡이 두 곡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Ebony and Ivory다.
이듬 해 발표된 1983년작 'Pipes of Peace'에서 영국 4위 미국 15위라는 다소 아쉬운 흥행을 달성한 이후[35] 폴은 영화 제작에 오랜만에 도전하여 Give My Regards to Broad Street을 발표하지만, 싱글 ‘No More Lonely Nights’만 성공하고 올드한 감각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흥행에 실패한다. 이처럼 중년 뮤지션이 된 폴 매카트니는 톱스타의 자리에서 밀려나 1980년대에 급격하게 뒤바뀐 음악 유행 스타일에 적응하는데 꽤나 애먹는다.[36] 1986년Press to Play는 흥행면에서 폴 매카트니 답지 않게 흥행하지 못한 앨범으로 손꼽히며, 폴 매카트니도 꽤 충격을 받고 다음 작품인 Flowers in the Dirt에 상당한 공을 들이게 된다. 그 덕분인지 이 앨범은 영국 음반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1989년 Flowers in the Dirt 앨범이 준수한 성적을 거둔 이후, 폴 매카트니는 10년 만에 투어를 재개하게 된다. 1989년 7월 26일 런던 공연을 시작으로 1990년 7월 29일 미국 시카고 공연까지 총 103회의 공연이 진행되었던 "The Paul McCartney World Tour" 이후로 폴 매카트니는 1993년 Off the Ground를 발매한 이후 "The New World Tour"를 진행한다.[37] 1994년부터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 Anthology 작업에 들어가게 되면서 앨범 발매는 물론 투어도 중단한다. 그러다가 1997년, 비틀즈 시절의 느낌과 폴 매카트니 특유의 느낌이 살아있는 곡들로 채워진 Flaming Pie가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영국, 미국 할 것 없이 좋은 평가를 받았고, 차트 성적도 영국과 미국에서 2위에 오르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앨범 역시 폴 매카트니에 관심이 있다면 꼭 들어봐야 할 앨범.
하지만 Flaming Pie의 발매 후에도 폴 매카트니는 투어를 진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폴의 아내 린다가 유방암으로 투병하다가 1998년 사망했기 때문이다. 폴 매카트니의 투어는 2001년 Driving Rain이 발매되면서 다시 진행된다. "Driving World Tour", "Back in the World Tour" 등이 진행되었으며, 특히 후자는 라이브 앨범으로도 발매되었다.
2005년에는 음악적으로 꽤나 좋은 평가를 받은 폴 매카트니 표 발라드 앨범인 Chaos and Creation in the Backyard가 발매되며, 2007년에는 반대로 강렬한 록 사운드 위주의 Memory Almost Full이 발매된다. 2010년부터는 다시 전세계를 도는 투어가 개시됐으며, 2013년에는 비틀즈 스타일의 음악에 현재의 일렉트로니카 사운드를 결합한 New 앨범을 발매하며 호평을 받았다.
2018년 현재에도 폴 매카트니는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18년 안에 새 정규앨범을 발매한다는 것 또한 언급했다. 2018년 6월 폴의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의 모든 사진들이 삭제되고 새 앨범을 암시하는 게시물들을 올렸고, 6월 20일 새 싱글 I Don't Know/Come on to Me가 공개되었다. 8월 15일 또 다른 싱글 Fuh You가 공개되었다. 9월 7일 신보 Egypt Station을 발매했다. 발매 이후 빌보드 200 '''1위'''에 올랐는데, 이는 Tug of War이후 36년 만의 1위이며 폴 매카트니 커리어 사상 최초의 1위 데뷔 앨범이다.
폴 매카트니는 솔로 시절에도 수많은 히트곡들을 써냈다. 윙스 시절 007 죽느냐 사느냐의 주제가인 'Live and Let Die'[38], 'Band on the Run', 'Jet', 'Silly Love Song' 등의 숱한 히트곡을 남겼다. '''70년대에 엘튼 존 다음으로 가장 많이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한 게 솔로 시절의 폴 매카트니이다.''' 또한 솔로 전향 이후에도 스티비 원더와 듀엣으로 부른 'Ebony & Ivory' 를 히트시켰으며 마이클 잭슨과 듀엣으로 부른 'Say Say Say', 'The Girl is Mine' 도 유명하다.
비틀즈 시절 벌어들인 돈보다 윙스 시절에 벌어들인 돈이 훨씬 더 많았다고 한다. 일단 솔로 폴 매카트니의 정점은 윙스 시절에 만든 'Band on the Run' 앨범이라는 게 중론. 'Jet', 'Band on the Run' 등 솔로 폴 매카트니의 최고 히트곡이 수록되어 있으며 음악적으로도 폴 매카트니의 멜로디 메이킹 실력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는 앨범이다. 하지만 이후의 음반들도 폴 매카트니의 천재적 멜로디 실력이 잘 드러나있다. 'Tug of War' 앨범 역시 폴 매카트니 앨범 중 정수로 꼽히는 명작.

3. 음악적 성향


앞에서 언급했듯 존 레논에 비해 대중성이 강한 곡을 썼으며 한국 내에서 일반 대중들에게 유명한 비틀즈의 곡도 대부분 폴 매카트니의 곡인 편이다.
존 레논은 비틀즈 해체 이후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법을 새롭게 연마해 나간 반면,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 때부터 완성된 자신만의 작법 스타일을 해체 이후에도 유지한 편이다. 폴 매카트니가 사기캐 작곡가로 불리는 이유는 그 누가 들어도 아름다운 멜로디를 순식간에 만들어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면서도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 음악적 실험과 혁신 또한 지속적으로 추구했던 점에 있다.
아케이드 파이어의 보컬 윈 버틀러가 말하길, 자신이 작곡하다가 막힐 때면 폴에게 이메일을 보내 도움을 요청한다고 한다. 바빠서 대충 답장할 만도 한데 폴은 단 한 통의 메일도 빼놓지 않고 그때마다 그냥 연습용으로 작사 작곡을 끝마쳐서 완성한 곡을 뚝딱 내놓으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하니 흠좀무.
락 역사상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페퍼 상사'를 구상하고 컨셉을 주도한 것 역시 폴 매카트니이며 대중적인 곡들만이 아닌 실험적인 곡들또한 많이 만들었다. 오히려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보여준 것만으로 보면 그는 존 레논보다도 더 다채로운 면모를 자랑한다. 그가 작곡한 'Helter Skelter' 가 헤비메탈의 시초가 된 것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1980년에 뉴웨이브 테크노 음악을 시도하기도 하는 등[39] 음악적 스펙트럼은 다른 멤버들 못지 않게 광범위한 편이다. 클래식 음반도 5여장 냈으며 Fireman이란 가명으로 일렉트로니카 음반 또한 3장 냈다. 물론 일반 앨범들에 비해서는 잘 안알려져 있기도 하고 평가 또한 해당 장르 평론가 사이에서는 범작 내지 평작 정도 평가를 받지만. 어쨌거나 폴 매카트니가 존 레논에 비해 음악적 시도나 실험정신이 떨어진다는 평가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얘기다.
존 레논 역시 그가 대중적으로 만든 곡들을 비판하면서도 그의 음악적 재능을 소중히 여겼다. 이러한 존의 행동은 폴의 재능을 존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용하지 않고 결국엔 다른 성향을 가지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게 되어 츤데레적 성향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싶다. 'Here, There And EveryWhere' 을 들으며 감탄에 잠기다가도 'Ob-La-Di, Ob-La-Da' 를 들으며 "이게 노래니?" 하고 비웃는 츤데레(?) 레논을 상상해보자...[40]
최근에는 오히려 폴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 그의 음악적 능력과 그 진가가 다시금 알려지고 있다. 사실 비틀즈 전성기 시절 평가는 '''폴>=존'''이었다가 레논 사후 '''존>=폴'''이 된 것이지만 시간이 더 흐른 후 '''폴=존'''이 됐다고 할 수도 있다. 그냥 애초에 비교가 불가능한 당대의 위대한 작곡가들이다. 서로 다른 음악적 색채와 스타일, 그리고 음악관을 지녔을 뿐.

4. 여담



4.1. 가족


아버지 제임스 매카트니는 트럼펫과 피아노를 연주하였는데, 이는 어린시절 폴 매카트니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어머니 메리 매카트니[41]는 간호사였는데 폴 매카트니가 15살이 되던 해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뜨게 된다. 이는 역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존 레논과 유대를 쌓게 되는 계기가 된다. 형제 관계로는 동생 마이클 매카트니가 있다.[42]
영국의 하이틴 스타 제인 애셔와 함께
비틀즈 시절 폴은 영국의 하이틴 스타이자 여배우인 제인 애셔와 동거 관계였다. 화이트 앨범 이전에 쓴 폴의 러브송은 본래 제인 애셔를 위해 쓴 곡들이었다. 1964년 둘은 제인 애셔의 집에서 동거생활을 시작했으나 이들의 사랑은 순탄하지 않았다. 1965년, 한창 비틀즈가 전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10대 시절부터 영국에서 인기가 높은 배우였던 제인이[43] 비틀즈와 폴의 인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충실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폴이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기도 했다.[44] 참고로 제인은 폴이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핀다는 사실을 듣자 폴이 둘 사이의 관계를 오픈 릴레이션십으로 여긴다고 받아들여서 자신도 같은 연극에 출연중이던 동료 남배우와 맞바람을 피는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그래도 1966년 비틀즈가 투어를 중단하자 폴과 제인은 시골에 별장을 구입해서 재결합하고 1967년 크리스마스에는 결혼을 발표했다. 그러나 돈은 자신이 벌테니 결혼 후에는 배우일을 은퇴하고 가정에 충실해달라는 폴의 부탁을 자신의 일에 무척 자부심이 컸고 폴의 상태도 대마초와 LSD에 중독되어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제인이 거절하면서 둘의 관계는 최종적으로 끝이났다. 이후 폴은 제인이 여행을 다녀온 틈을 타서 그녀와 같이 살고 있던 집에 다른 여자들을 데려오기 시작했고 결국 폴 매카트니가 시나리오 작가인 프랜시스 슈와츠와 바람을 피고 있는 장면을 제인이 목격하여 1968년 7월 20일에 제인 애셔가 공식적으로 약혼을 파기한다. 제인 애셔는 훗날의 인터뷰에서 "나는 늘 존과 폴 두 사람의 정신적인 교감을 질투했었다. 게다가 당시 비틀즈의 멤버들이 LSD 트립 체험 등 최신 트랜드를 접할때 나는 늘 배제되어 있었다."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이에 폴 매카트니는 "제인 애셔는 늘 그녀의 일과 인기에만 신경썼을 뿐 자신이나 비틀즈에 큰 관심을 두고있지 않았다."라며 응수했다. 지금도 제인 애셔에게 폴 매카트니에 대한 질문을 묻는건 실례라고 한다.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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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매카트니는 1969년 3월 12일 사진작가 린다 이스트먼과 결혼한다. 린다는 유명 록밴드와 동행하며 그들의 모습을 담는 사진작가였는데, 런던에서 활동하던 록밴드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 1967년 영국에 왔고 비틀즈와 알게되었다. 폴의 회고에 따르면 서로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당시 린다는 6살된 딸(헤더 루이즈)을 한명을 둔 이혼녀였는데, 폴은 그 딸을 정식으로 입양하였다. 헤더는 지질학자인 친아버지 조셉 멜빌 시 Jr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폴 역시도 자신의 아버지로 생각한다고 밝혔으며 도공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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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는 폴의 뮤즈로써, 폴은 린다와 윙스활동까지 같이하며 어디든지 함께 하였다. 폴에게는 안습이지만 '뮤지션'으로써 린다의 평가는 매우 좋지 않았다.[46] 그러나 애초에 밴드에 그녀를 부른 이유는 그녀가 좋은 뮤지션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함께 하고 싶었던 이유였기 때문에 당사자들은 신경쓰지 않았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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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린다는 1998년에 유방암으로 인해 투병생활을 지속하던 중 5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평생을 함께한 배우자의 사망으로 폴은 큰 슬픔에 빠졌으며, 후에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암 치료제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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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와의 사이에서는 2녀 1남을 두었다. 장녀 메리는 사진작가이자 사형제의 어머니로 살고 있으며, 차녀 스텔라 매카트니는 성공한 의류 디자이너다. 막내아들 제임스는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워낙 성공한 아버지를 둔 탓인지 크게 뜨지는 못하고 있다. 그럴만도 한게 아버지가 성공했다 정도가 아니라 세계 음악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전설의 그룹 비틀즈 츨신이니... 본인도 유명세에 대한 욕심없이 현재에 만족하며 사는 듯.[47]
2014년 11월 6일부터 서울 대림 미술관에서 린다 매카트니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기간은 2015년 4월 2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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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02년 헤더 밀즈[48]라는 환경운동가와 재혼하였다. 그 이듬해에 늦둥이 딸을 보게 되는 등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나 이와 같은 시간이 지속되지 못하고 2007년에 결국 이혼하게 된다. 둘 사이에서 난 딸의 양육권은 조건부로 헤더 밀즈가 가져가게 되었다. 이혼시 헤더 밀즈는 엄청난 위자료를 챙겨 결국 돈을 보고 결혼했던게 아니냐는 여론의 뭇매를 받기도 하였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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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다시는 결혼하지 않을 것 같던 폴 매카트니는 19세 연하의 낸시 쉬벨을 만나 2011년 세번째 결혼을 했다. 헤더 밀즈와 달리 낸시 쉬벨은 미국의 유명한 자산가의 상속녀로 재산과 관련한 의심에서 벗어난 상태.[50] 최근 폴 매카트니와 여러 매체에서 보여주는 훈훈한 모습으로 팬들에게도 호의적인 응원을 받고 있다.

4.2. 채식주의자 및 동물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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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폴 매카트니는 여느 영국인과 같이 육식을 하던 사람이었다. 당대 사람들의 생각처럼 채식주의는 신체를 허약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 그러다가 채식주의자인 제인 애셔와 동거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녀의 영향으로 채식주의자가 된다. 물론 식단을 갑자기 바꾸는 과정에서 꽤나 힘들었지만 끝내 성공했다고 한다.
1975년의 어느 날, 폴과 린다 매카트니 부부는 양고기를 파는 식당에 가게 되었다. 그들은 이때 사람들이 식당에서 열심히 양고기를 먹는 동안 밖에서 평화롭게 초원을 거니는 양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 길로 폴과 린다는 채식주의에서 나아가 동물애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51].
현재는 채식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열성 채식주의자다.[52] 그래서 폴 매카트니의 공연을 함께 다니는 스태프들도 공연 준비와 공연 기간 동안은 채식만 먹는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는 '도살장 문이 유리로 되어있다면 여러분은 고기를 먹지 않을 겁니다'라는 영상을 만들어 현대 축산업의 어두운 면을 고발한 바 있으며, 월요일에는 고기를 먹지 않는 'Meat Free Monday'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2006년에는 중국 모피 시장에서 개와 고양이가 잔인하게 도살되는 영상을 눈물을 흘리며 보고 중국 공연은 절대 하지 않을것을 선언했고[53], 2008년에는 달라이 라마에게 육식을 그만둘 것을 주장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린다 매카트니는 채식주의 식품 사업을 런칭했으며 그들의 딸이자 유명 디자이너인 스텔라 매카트니 또한 동물의 가죽으로 제품을 만드는데 반대하고 있다. 2013년부터는 비건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였으나, 2018년의 인터뷰에서 치즈는 즐겨 먹는 편이고, 비건이 아닌 ‘락토’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4.3. 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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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활동 시절 사진들. 각각 64년, 66년, 68년도
속눈썹이 길고, 선이 날렵한 곱상한 외모로 60년대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54] 그리고 키도 비틀즈 4인방 중 제일 컸다.(181cm)[55]
또한 Revolver부터 화이트 앨범 사이에 장발과 수염으로 인상이 크게 변한 나머지 멤버들과 달리 수염으로 인한 외모의 변화가 적은 편이다. Let It BeMcCartney 작업 당시에는 턱수염을 수북하게 길렀지만 그마저도 특유의 쳐진 눈 때문에 인상이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40대가 넘어서도 상당한 동안이었는데 노년에 들어선 현재까지도 젊은 시절의 외모가 그대로 남아있다. 다만 지금은 70대 후반의 나이로 인하여 할아버지가 다 되었다.
그린데이빌리 조 암스트롱과 닮았다는 의견도 있다.



4.4. 종교관


폴 : 우리중 누구도 종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우리가 반종교주의자들처럼 보일 것 입니다.

: 만약 당신이 스스로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밝힌다면 모두가 당신을 반종교주의자로 취급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종교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저희들은 무신론자보다는 불가지론자에 가깝습니다.

기자 : 그룹으로서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개인으로서 말하는 것입니까?

존 : 당연히 그룹으로서요.

폴 : 우리는 우리 모두가 거의 종교관이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불가지론자들입니다.

1965년 플레이보이지와의 인터뷰 中

공공연히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밝혔던 존 레논만큼은 아니어도 무신론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비틀즈로 활동했던 시절 스스로 무신론자라기보다는 불가지론에 가깝다고 밝힌 만큼, 무신론적 불가지론자로 분류된다.
어렸을때에는 가톨릭을 믿은 어머니와 개신교 신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믿었지만, 이후 성인이 되면서 종교를 믿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2012년 인디펜던트지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자신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인물이며, 스스로 선(善)에 대한 믿음은 있지만 그 이상의 종교적 신념은 없다고 밝히면서 다시 한번 무신론자임을 드러냈다.
다만 그와 레논이 작곡한 비틀즈 곡들중엔 가끔씩 개신교나 가톨릭 성향이 짙은 가사들이 은근 포함되어 있다 .

4.5. 사망 음모론




4.6. 성격


자기 중심적이고 비관적인 성격이 강해서 후배 뮤지션들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곤 해 현대에 들어서는 욕을 좀 먹는 존 레논과 다르게 논란이나 구설수가 잘 없는 편이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믹 재거키스 리처즈가 난봉꾼으로 유명하고, 데이비드 보위는 정치적으로 파시즘 옹호 논란이 있었으며 에릭 클랩튼처럼 여성 편력 문제가 심했던 것[56]을 보면 자기 처신을 상당히 잘한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밴드를 했던 존 레논이나 조지 해리슨[57], 심지어는 그 사람 좋은 링고 스타[58]도 논란이 조금 있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여러모로 대단한 일.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더라도 폴 매카트니에 대한 비난은 거의 없는 편이다. 같이 일하는 한국인 전속 사진사가 열정이 떨어져 사진을 대충 찍는 것을 폴 경이 알아 차렸음에도 다시 잘해보자며 한 번 더 기회를 줬다는 미담이 한국 방송에도 탄 적이 있다. 존 레논의 아들인 줄리안 레논이 부모의 이혼으로 방황하던 시절 줄리안을 위로해주기 위해 대신 아버지 노릇을 해주고, 그만을 위한 곡인 Hey Jude를 써준 것은 비틀즈 팬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녹음 세션이 다소 우울하게 진행된 The Beatles 세션 때에도 폴 매카트니와 조지 마틴 둘이 있을때만큼은 스튜디오 내부가 화기애애했다는 증언도 있을 정도다.
후대 밴드에게도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해주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에드 시런이 무명일 시절 "나와 같은 길을 걷는다"라며 그의 커리어를 응원해준 적이 있다. 2020년에는 방탄소년단을 비틀즈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 외에도 라디오헤드, 레드 제플린 등 후대 뮤지션들을 좋아하는 밴드로 꼽으면서 장르나 시대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후대 뮤지션들에게 격려를 해준다고 한다. 보통 선대 뮤지션들이 자신들의 인기를 빼앗은 후대 뮤지션들을 싫어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경우도 많은 것을 보면 이 역시 보통 일이 아닌 셈.[59]
이러다보니 비틀즈 팬들 중에서는 음악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유로 존 레논을 좋아하더라도 인간적인 면모 때문에 폴 매카트니를 더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도 꽤나 있다.
다만 모든 인간이 완벽할 수는 없는 법. 1970년대에는 대마초를 무진장 피워대서 일본 입국 금지를 당하기도 했다.[60] 하지만 이 역시 2012년에 손자 손녀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끊었다고 한다. 그리고 상술한 제인 애셔와 교제하던 시절 보여준 꼴마초적인 태도와 이로 인한 각종 트러블들에 대해서도 좋은 소리는 못 듣는다. 그나마 대놓고 아내 신시아 레논에게 가정폭력을 일삼았던 존 레논과는 달리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고, 이후 린다와 결혼하여 잉꼬부부로서의 모습을 보여줬기에 까이는 빈도 수는 적은 편. 애초에 연애사야 불륜이나 폭력 등 도의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범주 외의 부분은 사생활의 영역이기도 하고...

4.7. 기타


  • 현재의 리이슈 (Reissue)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자신의 앨범의 음질 상태가 마음에 안 들었던 폴이 그걸 직접 리마스터해서 재발매한 게 그 시초라 한다.
  • 또 자신의 파트인 베이스를 비롯하여[61] 기타, 피아노 등 많은 악기들을 잘 다룬다. 그의 첫 솔로 앨범 'McCartney' 는 전곡이 폴의 독주로 채워져있으며 해체 이후에도 그런 시도를 종종 보여줬다. 심지어 조지 마틴은 롤 주법 테크닉에 한해 드럼 연주가 링고 스타를 능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드럼은 테크닉이 전부가 아니며 롤 주법은 그 중에서도 극히 일부이다. Back in the U.S.S.R.에서 폴의 드럼 트랙만 추출한 음원을 들은 팬들의 반응은 "그래도 드럼은 링고 스타다."로 요약된다.[62]
  • 특이하게도 '폴'이 중간이름임에도 '제임스'가 아닌 '폴'로 불린다. 집안에서도 태어나서부터 폴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도 정확히 잘 모른다고 한다. 아버지 이름도 제임스였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동생 피터 마이클도 중간이름 마이클로 부르는 걸 봤을 때 아일랜드계의 특징이 아닌가라고 폴 매카트니 본인이 추측하였다.
  • 젊은 시절의 폴 매카트니는 악보를 볼 줄 몰랐다고 한다[63]. 나이 들어서 교향시를 쓰고 클래식 음악가로 활동하면서 악보를 배웠다고 한다.[64] 그래서 젊은 시절 폴 매카트니가 메모지나 종이에 쓴 노래 원고들을 보면 가사를 쭉 적고 위에 코드를 표기하거나 가사 따로, 코드 따로 적어놓았다. 현재도 클래식 곡이 아닌 일반 팝곡을 쓸 때는 악보에는 잘 쓰지 않는다. 사실 프로 연주자들은 물론이고 유명한 싱어송라이터들도 악보를 볼 줄 모르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65] 특히 무단표절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악보를 자기만 알아보게 쓰기도 한다.예시
  • 젊은 시절 엄청난 골초였다. 사실 비틀즈 멤버들 다 그랬으나 담배 뿐만 아니라 연기를 흡입하는 형태의 마약을 좋아했는지 비틀즈 멤버들 중에 가장 대마초를 많이 했다고 한다. 대마초는 비틀즈 해체 이후에도 했는지, 윙스 시절 일본 공연을 하기 위해 공항에서 수속을 받다가 아이들 옷가방 아래에서 대량의 대마초가 발견되어 일본에서 쫓겨난 적도 있었다. 이때 린다와 폴이 빡쳐서 '''칭키 아이즈를 시전'''했지만, 이 둘은 그저 추방당한 것에 순수히 빡쳤던 것이고 인종차별을 하려던 의도는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이에 대해서 반성했다. 다만 비틀즈의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LSD는 별로 안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도 현재는 손자, 손녀, 그리고 늦둥이 막내딸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모조리 끊었다고 한다. 그 영향 때문인지 나이가 든 현재는 목소리가 매우 중후해졌다.
  • 어렸을 때 공부를 상당히 잘 했다고 한다. 90명의 수험생 중 3명만이 통과한 일레븐 플러스 시험[66]을 통과해 당시 리버풀에서 명문 그래머 스쿨로 통하던 리버풀 인스티튜트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입학 후에도 상위권 성적을 유지한 것은 물론 교우관계도 좋아서 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또한 초등학교 시절부터 여러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탈 정도로 글쓰기에도 재능이 있었다.
  • 왼손잡이이다. 굳이 왼손잡이를 언급하는 이유는 지금이야 왼손잡이도 양손, 오른손잡이 같이 정상에 속하지만 약 20년 전에는 왼손잡이는 장애인과 동급 취급을 받았을 정도로 사회 풍조가 좋지 않았다. 실제로 한국도 과거에는 자식이 왼손잡이면 기겁을 하면서 오른손잡이로 교정을 시키던 풍조가 있었으니... 실제로 존 레논이 폴 매카트니를 본 첫인상이 '기타도 똑바로 못 드는 놈이 무슨 연주를 한다고'였다고 한다. 게다가 1950년대 당시에는 왼손잡이용 기타는 거의 없다시피 했을 정도라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개조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베이스 기타 또한 위아래가 대칭이라 개조를 해도 불편하지 않은 것으로 골랐다고 한다. 물론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그냥 왼손으로도 칠 수는 있다. Yesterday 잘 보면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거꾸로 들어서 픽가드가 위로 올라간 것이 보인다. 나중에는 # 왼손잡이용 기타를 구입해서 사용했으나 지금은 거의 폴 매카트니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초기의 베이스 기타를 다시 사용하고 있다.
  • 한국에는 '음악을 차별하는 것은 인종차별과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김태원라디오 스타에 출연해서 음악 장르에 편견을 가져선 안 된다는 얘기를 하면서 폴 매카트니가 그런 말을 했다고 즉흥적으로 지어서 내뱉은 말이 마치 진짜인 것처럼 퍼져버린 것.
  • 세계에서 가장 라이브 공연이 경험이 많은 음악가로, 공연 한 번 할 때마다 엄청나게 많은 곡들을 부른다. 대부분의 가수들이 20곡 내외를 부르는 데 반해 폴 매카트니는 공연 한 번에 앵콜 두 번을 포함해 쉬지 않고[67] 35곡 정도를 부른다! 거기다가 내한 때는 곡들 사이 텀에 악기를 교체할 때, 기타 끝 쪽을 잡고 한 손으로 올리는 묘기를 하는 등 건장함을 자랑한다.
  • 인터뷰를 할 때 'you know'를 자주 쓰는 말버릇이 있다. #
  • 줄리안 레논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다. 존 레논이 오노 요코와 재혼을 하며 아내인 신시아와 이혼하며, 신시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줄리안을 홀대했기 때문. 이에 폴은 줄리안과 휴가를 보내거나 악기를 가르쳐주는 등 아버지 존 레논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앞서 언급했듯 줄리안을 위해 Hey Jude를 작곡하기도 했다.
  • 비 지스배리 깁이 형제들을 모두 잃고 슬퍼할 때 많은 위로를 해주었다고 한다.
  • 시트콤 프렌즈 시즌4 마지막 편의 결혼식 장면에서 로스 겔러의 시아버지 역할로 특별출연 제의를 받았었으나 바빠서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후에 폴은 시트콤 30 ROCK에 특별출연하게 된다.
  • 2012 런던 올림픽에 개막식에서 피아노를 치며 경기장의 모든 참가국 선수들 관중, tv를 통해 시청하고 있는 전세계 사람들과 함께 비틀즈의 명곡 Hey Jude를 열창하며 피날레를 장식했다.
  • 2016년 2월 15일 래퍼 타이가가 개최한 그래미 어워드 뒷풀이 파티장에 참석하려다가 경비원이 그를 알아보지 못해서 쫓겨나는 엄청난 굴욕을 당했다. 주최측에서 '우리는 더 유명한 사람을 원한다'면서 쫓았다고. 이에 폴 매카트니는 '어떻게 하면 VIP가 될 수 있느냐, 히트곡을 더 내야겠다'는 말을 남겼다. 영상 황당해하는 Beck과 푸파이터스의 표정이 백미. 폴 입장에서는 정말 어이가 없는 경험이었을 듯하다. 타이가 본인도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하고 '내가 그를 막을 이유가 어디 있나. 그가 온 줄을 몰랐었다.'라고 트위터로 해명했다. 사실 폴 매카트니도 약간의 실수를 하기는 했다. 본래 다른 행사에 참석하려다가 장소를 착각해서 그래미 어워드 뒷풀이 장소에 오게 된 것.
[image]
  • 현재 함께하고 있는 밴드 멤버들이 있다. 2000년대부터의 공연 영상에 꼭 얼굴을 비추는 멤버들로 오른쪽부터 기타를 맡고 있는 Rusty Anderson(흑발)과 Brian Ray(금발), 드럼을 담당하는 Abe Laboriel Jr.(스킨 헤드+수염), 키보드를 담당하는 Paul 'Wix' Wichens(가장 왼쪽의 탈모인). 곡마다 어우러지는 화음들이 도드라지는 폴 매카트니 작곡의 노래 특성상 각각의 멤버들이 백보컬을 담당하고 있다. Brian Ray는 폴이 피아노를 연주할땐 베이스를, 폴이 베이스를 잡으면 일렉기타를 연주한다. Hey Jude 인트로때는 템버린을 치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드러머 Abe는 위 사진도 그렇고 영상을 보면 엄청난 고도비만이다. 뒷목의 살이 접힌 게 보일 정도. 때문에 드럼을 치는 게 매우 힘겨워 보이기도 한다.

  • 70대 후반이지만 여전히 공연을 뛸 정도로 노익장이다. 2018년 즈음까지는 70대 중후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활발함과 외모를 보여주고 있다. 2018년 새 앨범 발매로 카풀 카라오케 등 tv쇼에 자주 나왔는데, 이 즈음 76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2020년 들어 2년만에 머리도 많이 하얗게 세고 상당히 나이가 든 모습이 보인다.
  • 상당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과 다를 바 없이 특유의 재치와 장난기는 여전하다. 또한 meme이나 기타 챌린지에도 종종 참여하는 등 20대 청년들의 SNS 문화를 상당히 잘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존 레논과 다르게 정치 성향을 스스로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이 때문에 존 레논은 매카트니와 사이가 안좋았던 시절 매카트니를 '보수주의자'로 부르며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 피의 일요일 사건을 두고 <Give Ireland Back to the Irish>#를 발표했다는 것을 보면 보수라고 볼만한 행보를 보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정치적으로는 진보 성향에 가깝다고 분류된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조지 W. 부시를 비판하고 버락 오바마를 지지했다. 더군다나 신보 앨범에서 '정신나간 대장'(Mad Captain) 도널드 트럼프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관련 인터뷰에서 폴은 트럼프를 '미국의 추악한 면을 그대로 보여줬다' '트럼프는 때때로 사람들 사이에서 숨어있는 증오심을 부추겼다'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 전속 사진작가가 한국인이다. 2008년부터 전속 사진가로 일한 김명중 작가[68]로, 본래 스파이스 걸스의 투어 포토그래피였다가 폴 매카트니를 소개받아 리버풀 사이드 콘서트에서 첫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처음에는 한 두번의 촬영이 전부일 줄 알았는데 한 두 번이 수십 회로, 수십 회가 수백 회로 결국 2020년까지 12년 동안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고.
  • 사적으로는 친절하고 사교적이지만 음악에 관련해서는 결코 양보를 못하는 완벽주의적인 성질이라 팬들에게는 '녹음실의 독재자'라는 별명도 얻었다. 비틀즈 관계자에 의하면 사실 비틀즈 초창기 때부터 폴 매카트니는 거의 리더 수준으로 활약했는데, 이게 후반기로 갈수록 점점 강해져 나중에는 조지 마틴조차 폴 매카트니에 대들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고 한다. Penny Lane의 녹음 과정에서 조지 마틴의 관악기 연주가 마음에 안들었던 폴이 자꾸 리테이크를 요청하자, 조지 마틴 경이 지쳐 이만하면 되지 않았냐고 했더니 폴이 소리를 지르면서 다시 연주하라고 했다고 한 일화가 있다. 또 The Beatles 세션 때에는 오블라디 오블라다를 다른 멤버들이 전부 싫어하는 곡이었음에도 독재적으로 밀어붙여 수십 테이프를 바꿔가며 연주하게했고, 보다못해 빡친 존 레논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몇시간 뒤에 마리화나를 잔뜩 먹은 채 들어와 아무렇게나 피아노를 두들기며 "이게 니 잘난 곡의 첫 멜로디다"라고 했다고 한다(...).[69]
  • 존 레논을 만나기 전에는 리버풀의 이층 버스에서 존 레논을 자주 보곤 했다고 한다. 폴은 그때마다 존의 큰 덩치가 두려워서 가까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 폴 매카트니가 말하길 "근처에서 유명한 양아치에 나이도 나보다 많아서 수틀리면 날 때릴것 같아서 멀리했다"라고.
  • 에드 시런이 무명일 시절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라고 격려해준 일화가 있다. 참고로 에드 시런은 폴의 광팬이다.
  • 함부르크 시절 돈이 부족해서 존 레논과 함께 범죄를 저지르곤 했다. 보통 폴이 지나가던 행인을 꼬드겨서 뒷골목으로 대리고 오면, 존 레논이 냅다 행인을 패서 돈을 빼앗는 식이었다. 그리고 이게 한두번이 아니었다는 점이 흠좀무.

4.8. 콜라보레이션



'''마이클 잭슨'''의 앨범 Thriller에 수록된 'The Girl Is Mine'
폴 매카트니는 윙스 해산 후 1980년대에 완전히 솔로로 전향하면서 여러 뮤지션과 교류하여 다양한 콜라보 작업을 남겼다. 1982년 스티비 원더와 함께 Ebony and Ivory를 부르고 마이클 잭슨과 'The Girl Is Mine', 'Say Say Say'를 발표한 것은 매우 유명하다.[70] Flowers in the Dirt 앨범에서는 엘비스 코스텔로와 협연하였고, 'No More Lonely Nights'나 'We Got Married'에서는 핑크 플로이드의 기타리스트 데이비드 길모어와 함께하기도 하였다. 스티비 원더는 이후 폴 매카트니의 2012년작 앨범 Kisses on the Bottom의 '"Only Our Hearts'란 곡에 하모니카 연주를 해주기도 했다.
폴 매카트니는 가장 좋아하는 현대 밴드로 라디오헤드더 킬러스를 꼽았다. # 폴은 개인적으로 라디오헤드에게 콜라보를 제안하고싶지만 라디오헤드가 너무 바빠 거절할까봐 제안을 못하겠다고 했었다.#

2014년에 데스티니의 곡들을 공동작곡하였다. 특히 Hope for the Future라는 제목의 싱글도 발매했다. 게임팬들의 반응은 노래는 좋은데 황금기를 누리던 인류가 미지의 적에 의해 몰락해버린 배경인 게임하고 맞지 않는 가사가 문제라고 한다.

리한나의 싱글 'FourFiveSeconds'에도 기타 반주 피처링으로 참여하였다.

카녜 웨스트와의 콜라보 'Only One'이 공개되었다. 오토튠이 인상적이다.

5. 내한


폴 매카트니/내한 문서 참조.

6. 솔로 디스코그래피



6.1. 앨범



6.2. 싱글



6.2.1. 빌보드 1위



6.2.2. 빌보드 2위



6.2.3. 빌보드 3위~10위


  • Another Day (1971)
  • Hi, Hi, Hi (1972)
  • Helen Wheels (1973)
  • Jet (1974)
  • Junior's Farm (1974)
  • Let 'Em In (1976)
  • Maybe I'm Amazed (1977)[71]
  • Goodnight Tonight (1979)
  • Take It Away (1982)
  • No More Lonely Nights (1984)
  • Spies Like Us (1985)
  • FourFiveSeconds (2015)[72] [73]

6.2.4. 빌보드 11위~20위


  • Venus and Mars/Rock Show (1975)
  • Getting Closer (1979)
  • All Day (2015)[74]
폴 매카트니의 솔로시절 히트곡들은 윙스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 많다.

7. 어록


The love you take is equal to the love you make

당신이 받는 사랑은 당신이 주는 사랑의 양과 같아요

Nothing pleases me more than to go into a room and come out with a piece of music.

방에 들어가 곡 하나를 만들고 나오는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


8. 참고 문서


[1]잉글랜드 머지사이드 리버풀.[2] 쿼리멘 시절 포함.[3] 윙스 후기에 이미 솔로 앨범을 여러장 낸 상태였으므로, 시기 구분이 애매하여 같이 이어지는 흐름으로 설명함.[4] 2007년 롤링 스톤지 인터뷰에서. [5] 다만 1970년대 초 불화가 있었고 서로 디스전(?) 비슷한 것도 펼치기도 했다. 물론 1970년대 중반 화해했다.[6] McWhirter, Norris (1980). Guinness Book of World Records. London: Sterling Publishing. pp. 235, 250, 251.[7] Glenday, Craig (2009). Guinness World Records 2009. London: Bantam Books. p. 290.[8] 한때 음악가 중 1위였으나, 현재는 13억 달러 자산 보유자인 카녜 웨스트에 밀린 상태다. 카녜는 갑자기 재산이 불어나 30억 달러를 돌파했다. 그런데 카녜의 재산이부호로 알려진 카다시안 가문의 재산과 합쳤으며, 결정적으로 그 돈을 번 과정이 사업을 해서 번 것임을 감안하면 저작권료로 가장 많은 수입을 번 사람은 '''당연히 이분이다.'''[9] Pipes of Peace [10] "Ebony and Ivory" with Stevie Wonder [11] Mull of Kintyre, Wings [12] "She Loves You, The Beatles [13] "Get Back", The Beatles and Billy Preston [14] Do They Know It's Christmas? Band Aid 2[15] McCartney has written, or co-written 32 number-one singles on the Billboard Hot 100: twenty with the Beatles; seven solo or with Wings; one as a co-writer of "A World Without Love", a number-one single for Peter and Gordon; one as a co-writer on Elton John's cover of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one as a co-writer on Stars on 45's "Medley"; one as a co-writer with Michael Jackson on "Say Say Say"; and one as writer on "Ebony and Ivory" performed with Stevie Wonder.[16] 1위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밥 딜런, 3위는 비틀즈의 또다른 멤버이자 레논-매카트니로 유명한 존 레논.[17] 그래서 "폴 매카트니 경(Sir Paul McCartney)" 혹은 "폴 경(Sir Paul)"이라고도 불린다.[18] 존 레논은 기준이 충족되자마자 바로 헌액되었으나 매카트니는 후보 자격이 주어지고 7년 후에 헌액되었다.[19] 비틀즈 멤버 중 가장 늦게 헌정되었다.[20] 쿼리멘 시절 포함.[21] 이때부터 불화가 '''시작된 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중기로 접어들며 존과 폴의 음악적 성향으로 인해 충돌이 생기고 그 사이에서 조지는 소외되는 현상들이 발생하다보니 팀워크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던 것. 후에 브라이언 앱스타인의 죽음과 이로 인한 비즈니스적인 문제, 사생활에 관련된 문제까지 겹치며 사단이 난 것이다.[22] 제일 먼저 비틀즈를 떠난 것도 존 레논이었다. 두 차례나 비틀즈 탈퇴를 멤버들에게 언급했다고... 지치다 못해 결국 비틀즈를 놓게 된 폴이 나중에 공식 발표만 했을 뿐 이미 내부적으로 비틀즈는 해체됐던 상황.[23] 이 시기 사진가였던 린다가 촬영한 스튜디오 작업 사진이 남아있다.[24] 묘하게 'How Do You Sleep'과 분위기가 비슷한데, 존 레논은 잘 모르고 폴 매카트니를 깠던 본인의 행위에 대한 반성과 앨런 클라인에 대한 비판을 담았다고 밝혔다.[25] 이때 존 레논은 "그는 최악으로 녹음된 짐들을 받았지만 거기서 뭔가를 만들어냈다. 내가 들었을 때는 나쁘지 않았다"라며 필 스펙터를 두둔했다.[26] 물론 둘은 그 이전에도 사적으로 여러 차례 만난 바 있지만, 1969년 8월 이후 둘이 함께한 사진이 대중에 공개된 것은 5년 만의 일이었다.[27] 앨런 클라인은 롤링 스톤즈와의 협업에서도 문제를 일으켰는데, 이 혼란의 시기에 녹음된 롤링 스톤즈의 명반이 Exile on Main St.이다.[28] 이 작업을 할 때 셋의 마음고생이 꽤나 심했다고 한다. 링고가 술회하기를 "우리는 존이 휴가를 갔거나 차를 마시러 가서 잠시 자리를 비운 채 우리에게 함께 작업할 테이프를 남겨두고 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감정이 북받치는 작업을 해낼 수 없었다."라며 특별한 의식 없이 최대한 가벼운 마음으로 임하고자 했다고 한다.[29] 존이 폴을 디스하려고 요코와 함께 작곡한 'How Do You Sleep?'은 존이 나중에 아주 많이 후회한 곡이다.[30] 폐막식에서는 영상을 통해 존 레논이 등장한다.[31] 윙스 후기에 이미 솔로 앨범을 여러장 낸 상태였으므로, 시기 구분이 애매하여 같이 이어지는 흐름으로 설명함.[32] 투어 때 장발로 무대에 많이 섰다.[33] 이 비판을 더욱 뜨겁게 지핀 게 빌보드 차트였는데, '''Let It Be보다도 먼저'''(!) 3주 동안 빌보드 1위를 차지해버렸다....[34] 1960년대 최다 판매 싱글은 비틀즈의 "She Loves You"로 대략 130만 장이 팔렸다. 또한 "Mull of Kintyre"의 기록은 1984년 밴드 에이드 자선 싱글 "Do They Know it's Christmas?"가 298만 장을 기록하며 깨기 전까지 깨지지 않았다. 현재도 "Mull of Kintyre"는 영국 내에서 최다 판매 싱글 순위 3위에 올라있다. 참고로 1위는 1997년 엘튼 존이 "Something About the Way You Look Tonight" / "Candle In The Wind 1997"로 기록한 477만 장이 최고.[35] Pipes of Peace는 Tug of War와 동시에 작업했던 앨범이었다. 그런데도 차트 성적이나 평단의 반응에서 큰 차이가 난다는 점이 아이러니.[36] 같은 비틀즈 멤버인 링고 스타는 연이은 상업적 실패로 음악 산업에서 거의 쫓겨나다 시피 해 알콜 중독에까지 빠지던 시기였다. 오히려 1987년 무렵에는 조지 해리슨Cloud Nine을 히트시키며 가장 상업적 성공을 크게 이룬 비틀즈 멤버가 된다.[37] 전자의 공연 일부를 담은 것이 "Tripping the Live Fantastic"이며, 후자의 공연 일부를 담은 것이 "Paul is Live" 앨범이다.[38] 건즈 앤 로지스가 커버 앨범으로 발표한 적이 있는 곡이다. 이 곡은 007 매니아들에게 최고의 주제가 중 하나로 뽑히고 있다.[39] 'McCartneyII' 앨범 수록곡 'Temporary Secretary'.[40] 다만 폴 매카트니의 인터뷰에 따르면, 존도 Ob-La-Di, Ob-La-Da를 꽤나 좋아했다고 한다.# 직접 피아노 반주 인트로를 만들어 준 것 역시 존 레논.[41] 폴이 밝힌 바로는 'Let it be'에 등장하는 'mother mary'는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어머니를 뜻한거였다고.[42] 마이클이 어린시절 뒤뜰에서 기타를 치던 폴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폴 매카트니의Chaos and Creation in the Backyard 앨범의 표지가 되기도 하였다.[43] 심지어 비틀즈의 무명시절에는 제인 애셔가 오히려 비틀즈보다 인기가 높았다. 제인 애셔의 대표작으로는 알피, 딥 엔드가 있다. 폴과 제인이 첫 만남을 가진 계기도 1963년 4월 18일, 방영된 영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리포터로 출연한 17살의 제인이 비틀즈와 인터뷰를 한 것이었다.[44] 참고로 존 레논도 비틀즈의 인기에 취해서 아내를 놔두고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웠다. 이들이 1965년 녹음한 Help!Rubber Soul 앨범에는 여자를 까는 가사가 많다.[45] 2004년 인터뷰에서 인터뷰어가 폴 매카트니에 대한 질문을 하자 제인 애셔는 "나에게는 이미 몇 십년을 해로한 남편이 있는데 뭔 소리냐 지금 날 모욕하는 거냐."라는 반응을 보였다.[46] 다만 이는 어쩔 수 없었던 게, 린다는 본래 사진작가였고, 옆에 세계 최고의 싱어송라이터가 옆에 있으니...[47] 아버지의 앨범인 Driving Rain에 공동작곡한 곡이 있다. 문서 참고.[48] 지뢰사고를 당해서 지뢰 해체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는 루머가 있지만 틀린 사실로 경찰 오토바이와 부딪혀서 왼쪽 발목 아래가 날아갔다. 현재 의족 착용 중. 하지만 지뢰를 반대하는 것은 사실이다.[49] 그런데 헤더 밀즈는 몇 해 뒤 이걸 다 탕진했단다.[50] 어짜피 본인도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지라 굳이 돈 보고 남자와 결혼할 이유가 없다.[51] 비단 해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농가의 소고기집 가보면 소 울음소리를 들으며 소고기를 먹거나, 닭요리집 가면 창밖에 닭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52] 사실 록 음악가중에서는 채식주의자가 상당히 많다. 대표적으로 전설적인 메탈 밴드인 블랙 사바스오지 오스본기저 버틀러가 있는데, 아무래도 폴 매카트니가 열성적으로 동물 애호 운동을 벌이고 가장 유명한 록 뮤지션이기도 한만큼 채식주의의 대표적인 인사로 여겨지게 된듯하다.[53] 하지만 후에 폴은 한 인터뷰에서 중국 공연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54] 비틀즈 멤버들 모두 외모가 출중한 인물들이지만 각자의 이미지는 달랐고 이러한 요소 또한 비틀즈의 인기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영화 에잇 데이즈 어 위크에 나온 어록을 빌리자면, "은 놀랄 만큼 당돌했고, 폴은 놀랄 만큼 귀여웠고, 링고는 개구쟁이에 매력적이었고, 조지는 우리 누나가 사랑하는 남자였다." [55] 당대 기준 상당히 큰 키였다. 지금으로 치면 180 중반은 되는 수준.[56] 이분은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와의 삼중 불륜(...)을 제외하더라도 1970년대 극우 파시즘에 경도되어 "더 하얀 영국을 위하여" 등의 헛소리를 하고, 2020년 들어서는 록다운을 파시즘이라고 비난하며 방역 정책에 반대하는 곡을 쓰면서 꽤나 논란거리가 많은 편이다.[57] 이전 각주에 상술한 삼중 불륜 문제야 너무나 유명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존 못지 않게 독설가 기질이 있었기에 논란이 될 발언을 꽤 했다. 가장 쓸모없는 상을 1965년에 받은 왕실 훈장이라고 대답한다거나, 후배 밴드인 오아시스에게도 독설을 퍼부었다가 리암 갤러거에게 폭풍디스를 당한다거나... 그나마 후자의 경우 리암에게 사과하긴 했다. 그 외에도 Anthology 3에 수록 예정이었던 존의 유작 'Now and Then'에 대해서도 폴에게 작업 도중에 "쓰레기(rubbish)"라며 녹음을 관두자고 얘기하는 등 생각보다 독설이 차고 넘친다.[58] 팬 레터에 답장해주기 귀찮다면서 팬 레터는 오는 족족 쓰레기통에 버릴거라고 막말을 해 좀 욕을 먹은 적이 있다.[59] 엘비스 프레슬리는 비틀즈를 비롯한 후대 뮤지션들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해서 언급을 꺼렸다. 로버트 플랜트와의 만남을 단 10분만 잡아두고 별 얘기할 생각도 안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다만 플랜트의 사교력에 홀려 무려 2시간이나 수다를 떨었다고...). 존 레논 역시 시드 바렛을 비롯한 후대 뮤지션들에게 인신공격 수준의 욕설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60] 이때 하술할 인종차별 논란이 있어 욕을 좀 먹기도 한다. 본인이야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고 해명하긴 했지만...[61] 폴은 베이스 연주에 있어서 피크 피킹을 핑거링과 동등한 위치에 오르게 한 연주자다.[62] 화이트 앨범 녹음 당시에 일어난 일로 이 시기는 비틀즈 멤버들이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죽음과 오노 요코의 출현, 음악적 견해 차이 등으로 불화가 극에 달한 시기로 링고가 이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탈퇴했다. 그래서 'Back in the U.S.S.R.' 과 'Dear Prudence' 는 링고의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폴이 직접 드럼을 담당했다.[63] 이는 존 레논,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가 모두 해당하는 얘기다. 왜냐하면 이들은 가난한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태어나 전문적인 음악 교육은 커녕, 존 레논을 빼면 대학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기 때문. 심지어 링고 스타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선원 일을 해서 최종 학력이 초졸일 정도다.[64] 다만 지금도 악보 보는게 익숙하지는 않아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대신 사용한다고 밝힌 적 있다.[65] 또 다른 대표적인 경우가 프레디 머큐리. 악보를 볼 줄 몰라서 특수한 기호로 써 놓으면 나머지 멤버들이 그걸로 악보를 만들었다고 한다.[66] 영국에서 만 11세 아동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중등학교 입학시험. 여담으로 록 밴드 더 후의 보컬리스트 로저 달트리 또한 이 시험에서 1등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67] 곡들 사이 텀이 5분을 넘어가지 않는다.[68] 폴 경이 김 작가를 부르는 애칭은 M.J.[69] 실제로 이게 오블라디 오블라다의 첫 유명한 피아노 음이 되었다.[70] 아이러니하게도 마이클 잭슨은 비틀즈 판권을 사게 되고, 이로 인해 폴 매카트니와 사이가 나빠지기도 했다.[71] 라이브 버전. 원곡은 1970년 발매되었다.[72] 리한나, 칸예 웨스트와 함께 작업[73] 32년만에 10위 진입으로, 가장 긴 공백 기간을 가지고 10위에 진입한 기록이다![74] 칸예 웨스트의 싱글을 피처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