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매카트니

 








폴 매카트니의 주요 수상 및 수훈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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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기사 서임자 (남성)
British Kn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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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기사 서임자 (여성)
KBE
조지 숄티
(1971년)
시드니 포이티어
(1974년)
찰리 채플린
(1975년)
앨프리드 히치콕
(1980년)
앤드루 와일스
(2000년)
로저 무어
(2003년)
팀 버너스리
(2004년)
조너선 아이브
(2012년)






Knight Bachelor
아이작 뉴턴
(1705년)
코난 도일
(1902년)
알렉산더 플레밍
(1944년)
존 길구드
(1953년)
칼 포퍼
(1965년)
알프 램지
(1967년)
로저 펜로즈
(1994년)
팀 라이스
(1994년)
캐머런 매킨토시
(1996년)
리처드 브랜슨
(2000년)
숀 코너리
(2000년)
믹 재거
(2002년)
벤 킹슬리
(2002년)
리들리 스콧
(2003년)
케네스 브래너
(2012년)
다니엘 데이 루이스
(2014년)
마크 라이런스
(2017년)




CBE + Knight Bachelor
알렉 기네스
(1959년)
스탠리 매튜스
(1965년)
맷 버스비
(1968년)
에른스트 곰브리치
(1972년)
월터 윈터보텀
(1978년)
데이비드 애튼버러
(1985년)
윌리엄 골딩
(1988년)
이안 맥켈런
(1991년)
안소니 홉킨스
(1993년)
보비 찰튼
(1994년)
사이먼 래틀
(1994년)
조지 마틴
(1996년)
마이클 갬본
(1998년)
아서 C. 클라크
(1998년)
엘튼 존
(1998년)
존 엘리엇 가디너
(1998년)
톰 피니
(1998년)
알렉스 퍼거슨
(1999년)
프랭크 윌리엄스
(1999년)
마이클 케인
(2000년)
바비 롭슨
(2002년)
앨런 파커
(2002년)
그레고리 윈터
(2004년)
트레버 브루킹
(2004년)
제임스 다이슨
(2007년)
크리스토퍼 리
(2009년)
브래들리 위긴스
(2013년)
존 허트
(2015년)
칼 젠킨스
(2015년)
로드 스튜어트
(2016년)
레이 데이비스
(2017년)
배리 깁
(2018년)
마이클 페일린
(2019년)
샘 멘데스
(2020년)
스티브 매퀸
(2020년)
OBE + Knight Bachelor
어니스트 섀클턴
(1909년)
잭 브라밤
(1978년)
지미 새빌
(1990년)
클리프 리처드
(1995년)
트레버 맥도날드
(1999년)
스털링 모스
(2000년)
재키 스튜어트
(2001년)
톰 존스
(2006년)
테리 프래쳇
(2009년)
패트릭 스튜어트
(2010년)
밴 모리슨
(2015년)
앤디 머리
(2017년)
가즈오 이시구로
(2018년)

MBE + Knight Bachelor
폴 매카트니
(1997년)
제프 허스트
(1998년)
니콜라스 윈턴
(2003년)
닉 팔도
(2009년)
링고 스타
(2018년)
케니 달글리시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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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삼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로버트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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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가렛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라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런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루스
에드워드 엘가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아일랜드인)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차드 브랜슨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존 로널드 루엘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차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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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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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폴 매카트니
PAUL MCCARTNEY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99년
후보자격 연도
1993년
}}}#ffd700 후보선정 연도}}}
}}}#ffd700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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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음악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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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센터 공로상 수상자
[ 펼치기 · 접기 ]
20세기 수상자
<-5><:><#fff>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top:-7px;margin-bottom:-7px; margin-left:-11px; margin-right:-11px;"
1978년
매리언 앤더슨, 프레드 아스테어, 조지 발란신,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리처드 로저스
1979년
에런 코플런드, 엘라 피츠제럴드, 헨리 폰다, 마사 그레이엄, 테네시 윌리엄스
1980년
레너드 번스타인, 제임스 캐그니, 애그니스 데밀, 린 폰탠, 리언타인 프라이스
1981년
카운트 베이시, 케리 그랜트, 제롬 로빈스, 헬렌 헤이스, 루돌프 세르킨
1982년
조지 애벗, 릴리안 기쉬, 베니 굿맨, 진 켈리, 유진 오르만디
1983년
캐서린 던햄, 엘리아 카잔, 프랭크 시나트라, 제임스 스튜어트, 버질 톰슨
1984년
레나 혼, 대니 케이, 잔카를로 메노티, 아서 밀러, 아이작 스턴
1985년
머스 커닝햄, 밥 호프, 아이린 던, 앨런 제이 러너, 프레더릭 로, 베벌리 실즈
1986년
루실 볼, 레이 찰스, 제시카 텐디, 흄 크로닌, 예후디 메뉴힌, 앤서니 튜더
1987년
페리 코모,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베티 데이비스, 네이선 밀스타인, 알윈 니콜라이
1988년
앨빈 에일리, 조지 번스, 마이어나 로이, 알렉산더 슈나이더, 로저 L. 스티븐스
1989년
해리 벨라폰테, 클로데트 콜베르, 알렉산드라 다닐로바, 메리 마틴, 윌리엄 슈만
1990년
디지 길레스피, 캐서린 헵번, 라이즈 스티븐스, 줄리 스턴, 빌리 와일더
1991년
베티 콤덴, 로이 아커프, 아돌프 그린, 헤럴드 니콜라스, 로버트 쇼, 그레고리 펙
1992년
라이어널 햄프턴, 폴 뉴먼, 조앤 우드워드, 진저 로저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폴 타일러
1993년
조니 카슨, 아서 미첼, 조지 숄티, 스티븐 손드하임, 매리언 윌리엄스
1994년
커크 더글러스, 아레사 프랭클린, 모튼 굴드, 해럴드 프린스, 피트 시거
1995년
자크 당부아즈, 메릴린 혼, 비비 킹, 시드니 포이티어, 닐 사이먼
1996년
에드워드 올비, 베니 카터, 조니 캐쉬, 잭 레먼, 마리아 톨치프
1997년
로렌 바콜, 밥 딜런, 찰턴 헤스턴, 제시 노먼, 에드워드 빌렐라
1998년
빌 코스비, 프레드 엡, 존 칸더, 윌리 닐슨, 앙드레 프레빈, 셜리 템플
1999년
빅터 보르게, 숀 코너리, 주디스 재스민, 제이슨 로바즈, 스티비 원더
2000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척 베리, 플라시도 도밍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앤절라 랜즈베리

21세기 수상자
<-5><:><#fff>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top:-7px;margin-bottom:-7px; margin-left:-11px; margin-right:-11px;"
2001년
줄리 앤드루스, 밴 클라이번, 퀸시 존스, 잭 니콜슨, 루치아노 파바로티
2002년
제임스 얼 존스, 제임스 리바인, 치타 리베라, 폴 사이먼, 엘리자베스 테일러
2003년
제임스 브라운, 캐럴 버넷, 마이크 니콜스, 로레타 린, 이작 펄만
2004년
워렌 비티, 오시 데이비스 & 루비 리, 엘튼 존, 조앤 서덜랜드, 존 윌리엄스
2005년
토니 베넷, 수잔 파렐, 줄리 해리스, 로버트 레드포드, 티나 터너
2006년
주빈 메타, 돌리 파튼, 스모키 로빈슨, 스티븐 스필버그, 앤드루 로이드 웨버
2007년
레온 플라이셔, 스티브 마틴, 다이애나 로스, 마틴 스콜세지, 브라이언 윌슨
2008년
모건 프리먼, 조지 존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트와일라 사프, 더 후
2009년
멜 브룩스, 데이브 브루벡, 그레이스 범브리, 로버트 드 니로, 브루스 스프링스틴
2010년
멀 해거드, 제리 허먼, 빌 존스, 폴 매카트니, 오프라 윈프리
2011년
바바라 쿡, 닐 다이아몬드, 요요마, 소니 롤린스, 메릴 스트립
2012년
버디 가이, 더스틴 호프먼, 레드 제플린, 나탈리아 마라코바
2013년
마티나 아로요, 허비 행콕, 빌리 조엘, 셜리 매클레인, 카를로스 산타나
2014년
알 그린, 톰 행크스, 퍼트리샤 맥브라이드, 스팅, 릴리 톰린
2015년
캐롤 킹, 조지 루카스, 리타 모레노, 오자와 세이지, 시실리 타이슨
2016년
마르타 아르헤리치, 이글스, 알 파치노, 마비스 스태플스, 제임스 테일러
2017년
카르멘 드 라발라데, 노만 레어, 글로리아 에스테판, LL 쿨 J, 라이오넬 리치
2018년
셰어, 필립 글래스, 리바 매킨타이어, 웨인 쇼터, 해밀턴 팀 (린 마누엘 미란다, 토마스 카일, 알렉스 라카뫄르, 앤디 블렝큰불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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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미 평생 공로상 수상자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top:-7px;margin-bottom:-7px; margin-left:-11px; margin-right:-11px;"
1963년
빙 크로스비
1965년
프랭크 시나트라
1966년
듀크 엘링턴
1967년
엘라 피츠제럴드
1968년
어빙 벌린
1971년
엘비스 프레슬리
1972년
루이 암스트롱, 마할리아 잭슨
1984년
척 베리, 찰리 파커
1985년
레너드 번스타인
1986년
베니 굿맨, 롤링 스톤스, 안드레스 세고비아
1987년
로이 에이커프, 베니 카터, 엔리코 카루소, 레이 찰스, 패츠 도미노, 우디 허먼, 빌리 홀리데이, 비비 킹, 아이작 스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행크 윌리엄스
1989년
프레드 아스테어, 파블로 카잘스, 디지 길레스피, 야샤 하이페츠, 리나 혼, 레온타인 프라이스, 베시 스미스, 아트 테이텀, 사라 본
1990년
냇 킹 콜, 마일스 데이비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폴 매카트니
1991년
매리언 앤더슨, 밥 딜런, 존 레논, 줄리 스턴, 키티 웰스
1992년
제임스 브라운, 존 콜트레인, 지미 헨드릭스, 머디 워터스
1993년
쳇 앳킨스, 리틀 리처드, 셀로니어스 멍크, 빌 먼로, 피트 시거, 패츠 월러
1994년
빌 에반스, 아레사 프랭클린,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1995년
팻시 클라인, 페기 리, 헨리 맨시니, 커티스 메이필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1996년
데이브 브루벡, 마빈 게이, 게오르그 솔티, 스티비 원더
1997년
바비 블랜드, 에벌리 브라더스, 주디 갈란드, 스테판 그라펠리, 버디 홀리, 찰스 밍거스, 오스카 피터슨, 프랭크 자파
1998년
보 디들리, 밀스 브라더스, 로이 오비슨, 폴 로브슨
1999년
조니 캐쉬, 샘 쿡, 오티스 레딩, 스모키 로빈슨, 멜빈 토메
2000년
해리 벨라폰테, 우디 거스리, 존 리 후커, 미치 밀러, 윌리 넬슨
2001년
비치 보이스, 토니 베넷,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밥 말리, 더 후
2002년
카운트 베이시, 로즈메리 클루니, 페리 코모, 알 그린, 조니 미첼
2003년
에타 제임스, 조니 마티스, 글렌 밀러, 티토 푸엔테, 사이먼 앤 가펑클
2004년
밴 클라이번, 펑크 브라더스, 엘라 젠킨스, 소니 롤린스, 아티 쇼, 독 왓슨
2005년
에디 아놀드, 아트 블래키, 카더 패밀리, 모턴 굴드, 재니스 조플린, 레드 제플린, 제리 리 루이스, 젤리 롤 모튼, 파인톱 퍼킨스, 스태플 싱어즈
2006년
데이비드 보위, 크림, 멀 해거드, 로버트 존슨, 제시 노먼, 리처드 프라이어, 더 위버스
2007년
조안 바에즈, 부커 티 앤 엠지 에스, 마리아 칼라스, 오넷 콜맨, 더 도어즈, 그레이트풀 데드, 밥 윌스
2008년
버트 배커랙, 더 밴드, 캡 캘러웨이, 도리스 데이, 이작 펄만, 맥스 로치, 얼 스크럭스
2009년
진 오트리, 더 블라인드 보이즈 오브 알라바마, 포 탑스, 행크 존스, 브렌다 리, 딘 마틴, 톰 팩스톤
2010년
레너드 코헨, 보비 대린, 데이비드 "허니보이" 에드워즈, 마이클 잭슨, 로레타 린, 앙드레 프레빈, 클락 테리
2011년
줄리 앤드루스, 로이 헤인즈, 줄리아드 현악 콰르텟, 킹스턴 트리오, 돌리 파튼, 라몬즈, 조지 비벌리 시어
2012년
올맨 브라더스 밴드, 글렌 캠벨,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조지 존스, 더 멤피스 혼즈, 다이애나 로스, 질 스콧 헤론
2013년
글렌 굴드, 찰리 헤이든, 라이트닝 홉킨스, 캐롤 킹, 패티 페이지, 템테이션스
2014년
비틀즈, 클리프턴 체니어, 아이즐리 브라더스, 크라프트베르크,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아르만도 만사네로, 마우드 파웰
2015년
비 지스, 피에르 불레즈, 버디 가이, 조지 해리슨, 플라코 지메네즈, 루빈 브라더스, 웨인 쇼터
2016년
루스 브라운, 셀리아 크루즈, 어스 윈드 앤 파이어, 허비 행콕, 제퍼슨 에어플레인, 린다 론스태드, Run-D.M.C.
2017년
셜리 시저, 아마드 자말, 찰리 프라이드, 지미 로저스, 니나 시몬, 슬라이 스톤, 벨벳 언더그라운드
2018년
할 블레인, 닐 다이아몬드, 에밀루 해리스, 루이스 조던, 더 미터스, , 티나 터너
2019년
블랙 사바스, 조지 클린턴 / 팔리아먼트-펑카델릭, 빌리 엑스타인, 도니 해서웨이,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샘 & 데이브, 디온 워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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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ness World Records
[image]
Most-Successful Songwriter of All Time.
역사상 가장 성공한 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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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 '''기록자'''

#00000 '''등재 날짜'''

#00000 '''출처'''

폴 매카트니
200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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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11px;margin-top:-6px;margin-bottom:-6px"
롤링 스톤이 2015년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송라이터를 선정한 순위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밥 딜런
폴 매카트니
존 레논
척 베리
스모키 로빈슨
6위
7위
8위
9위
10위
믹 재거 & 키스 리처즈 (재거-리처즈)
캐롤 킹 & 제리 고핀
폴 사이먼
조니 미첼
스티비 원더
11위부터는 문서 참조.
<-5> {{{-2 같이 보기: 아티스트, 기타리스트, 가수, 드러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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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빌보드 직원들이 차트 성적이나 판매량 기준이 아닌 영향력, 음악적 유산 등을 고려하여 Top 25를 선정했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브루스 스프링스틴
프레디 머큐리
지미 헨드릭스
엘비스 프레슬리
재니스 조플린
6위
7위
8위
9위
10위
폴 매카트니
믹 재거
척 베리
데이비드 보위
패티 스미스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커트 코베인
스티비 닉스
짐 모리슨
조니 미첼
로버트 플랜트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오지 오스본
액슬 로즈
밥 딜런
보노
데비 해리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로라 제인 그레이스
조 스트러머
캐슬린 한나
스티븐 타일러
존 본 조비
{{{-2 {{{#000000
같이 보기: 빌보드 선정 가장 위대한 알앤비 가수
같이 보기: 빌보드 선정 가장 위대한 래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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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11px;margin-top:-6px;margin-bottom:-6px"
※ 2011년 영국의 대중음악 전문지 NME에서 대중들을 상대로 '가장 위대한 가수 Top 20' 투표를 진행. 1,000만 표 이상이 모여 순위를 정했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마이클 잭슨
프레디 머큐리
엘비스 프레슬리
액슬 로즈
존 레논
6위
7위
8위
9위
10위
데이비드 보위
로버트 플랜트
폴 매카트니
스티비 원더
아레사 프랭클린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매튜 벨라미
레이 찰스
짐 모리슨
밥 말리
엘튼 존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커트 코베인
스티븐 타일러
믹 재거
마빈 게이
티나 터너
<-5> {{{-2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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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11px;margin-top:-6px;margin-bottom:-6px"
※2018년 빌보드가 발표한 빌보드 Hot 100 차트 역사상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순위다. 얼마나 많은 곡들을 차트에 높은 순위로 진입시키고 유지했는가를 기준으로 산정한 리스트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싱글을 많이 낸 뮤지션들이 더 유리한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크다. 새롭게 순위가 업데이트된다면 수정 바람.
1위
2위
3위
4위
5위
비틀즈
마돈나
엘튼 존
엘비스 프레슬리
머라이어 캐리
6위
7위
8위
9위
10위
스티비 원더
자넷 잭슨
마이클 잭슨
휘트니 휴스턴
리아나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롤링 스톤스
폴 매카트니
비 지스
어셔
시카고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슈프림즈
프린스
홀 앤 오츠
로드 스튜어트
올리비아 뉴튼 존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드레이크
아레사 프랭클린
마빈 게이
테일러 스위프트
케이티 페리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필 콜린스
빌리 조엘
다이애나 로스
포 시즌스
템테이션스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도나 서머
비치 보이스
라이오넬 리치
브루노 마스
닐 다이아몬드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카펜터즈
마룬 5
보이즈 투 멘
잭슨스
코니 프랜시스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비욘세
브렌다 리
케니 로저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브라이언 애덤스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셰어
조지 마이클
블랙 아이드 피스
핑크
바비 빈튼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존 멜렌캠프
쓰리 도그 나이트
휴이 루이스 앤 더 뉴스
글로리아 에스테판
본 조비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처비 체커
레이 찰스
포리너
크리스 브라운
쿨 앤 더 갱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글래디스 나이트 앤 더 핍스
리키 넬슨
듀란 듀란
저스틴 팀버레이크
코모도스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이글스
레이디 가가
TLC
폴 앵카
배리 매닐로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디오네 워윅
하트
넬리
에벌리 브라더스
바비 다린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R. 켈리
제임스 브라운
폴라 압둘
에미넴
앨리샤 키스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켈리 클락슨
린다 론스테드
리처드 막스
스타쉽
데스티니스 차일드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카녜 웨스트
셀린 디옹
제이지
미라클스
밥 시거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플리트우드 맥
닐 세다카
저스틴 비버
브루스 스프링스틴
포인터 시스터스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존 덴버
포 탑스
토니 올란도 앤 던
50 센트
피프스 디멘션
출처
<-5> {{{-2 같이 보기: 앨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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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11px;margin-top:-6px;margin-bottom:-6px"
※2015년 빌보드가 발표한 빌보드 200 차트 역사상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순위다. 얼마나 많은 앨범들을 차트에 높은 순위로 진입시키고 유지했는가를 기준으로 산정한 리스트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앨범을 많이 낸 뮤지션들이 더 유리한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크다. 새롭게 순위가 업데이트된다면 수정 바람.
1위
2위
3위
4위
5위
비틀즈
롤링 스톤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가스 브룩스
엘튼 존
6위
7위
8위
9위
10위
머라이어 캐리
허프 알퍼트
테일러 스위프트
시카고
마이클 잭슨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레드 제플린
브루스 스프링스틴
로드 스튜어트
에미넴
휘트니 휴스턴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빌리 조엘
마돈나
산타나
이글스
플리트우드 맥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밥 딜런
스티비 원더
셀린 디옹
에릭 클랩튼
닐 다이아몬드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존 덴버
핑크 플로이드
자넷 잭슨
프린스
캐롤 킹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마일리 사이러스
니켈백
팀 맥그로
밴 헤일런
비치 보이스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U2
아델
엘비스 프레슬리
브리트니 스피어스
어셔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템테이션즈
린킨 파크
제이지
앨런 잭슨
본 조비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건즈 앤 로지스
샤니아 트웨인
캐리 언더우드
몽키즈
에어로스미스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제임스 테일러
슈프림즈
앨리샤 키스
메탈리카
데프 레파드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폴 매카트니
린다 론스테드
저니
메리 제이 블라이즈
제쓰로 툴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래스칼 플래츠
포리너
존 멜렌캠프
사이먼 앤 가펑클
케니 체스니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키드 록
앤디 윌리엄스
조지 스트레이트
백스트리트 보이즈
마이클 볼튼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피터 폴 앤 메리
라이오넬 리치
아레사 프랭클린
캣 스티븐스
밥 시거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AC/DC
비욘세
펄 잼
토비 키스
더 후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폴 사이먼
무디 블루스
저스틴 비버
노라 존스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넬리
두비 브라더스
핑크
조쉬 그로반
닐 영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프랭크 시나트라
그린 데이
딕시 칙스
어스 윈드 앤 파이어
하트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레이디 가가
R. 켈리
보이즈 투 멘
케니 지
비 지스
출처
<-5> {{{-2 같이 보기: 싱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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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빌보드에서 Hot 100 차트 60주년 기념으로 1958년부터 2018년까지 차트에 오른 곡들을 분석해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남성 아티스트들을 발표했다.
1위
2위
3위
4위
5위
엘튼 존
엘비스 프레슬리
스티비 원더
마이클 잭슨
폴 매카트니
6위
7위
8위
9위
10위
어셔
프린스
로드 스튜어트
드레이크
마빈 게이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필 콜린스
빌리 조엘
라이오넬 리치
브루노 마스
닐 다이아몬드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케니 로저스
브라이언 애덤스
조지 마이클
바비 빈튼
존 멜렌캠프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처비 체커
레이 찰스
크리스 브라운
리키 넬슨
저스틴 팀버레이크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폴 앵카
배리 매닐로
넬리
바비 다린
R. 켈리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제임스 브라운
에미넴
리처드 막스
카녜 웨스트
제이지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밥 시거
닐 세다카
저스틴 비버
브루스 스프링스틴
존 덴버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50 센트
플로 라이다
앤디 깁
로이 오비슨
디온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빌리 오션
토미 제임스
존 레논
브룩 벤튼
마이클 볼튼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릴 웨인
바비 브라운
에드 시런
루다크리스
에릭 클랩튼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조니 리버스
글렌 켐벨
릭 스프링필드
T.I.
더 위켄드
{{{-2 {{{#000000 출처
}}} }}}
}}}-2 }}}#000000 같이 보기: 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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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image]
이름
폴 매카트니
PAUL MC CARTNEY

분야
음악
입성날짜
2012년 2월 9일
}}}#ffd700 후보선정 연도}}}
}}}#ffd700 1999년}}}

Sir Paul McCartney
CH, MBE

본명
제임스 폴 매카트니
(James Paul McCartney)
출생
1942년 6월 18일 (78세)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주 리버풀
국적
영국 [image]
신체
180cm, 72kg, B형
작위
기사 (Knight Bachelor)[1]
직업
싱어송라이터, 작곡가, 프로듀서, 사업가,
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
소속
쿼리멘 (1957~1962)
비틀즈 (1963~1970)
윙스 (1971~1981)
서명
[image]
[ 그 외 정보 펼치기 · 접기 ]
링크
공식 홈페이지
학력
리버풀 인스티튜트 고등학교 졸업 (1953-1960년)
예일대학교 명예 음악 박사 (2008년)
종교
무종교
레이블

재산
$11억~[56] ~ $12억 8천만[57]
활동기간
1959년 ~
장르
, , 일렉트로닉, 클래식
사용 악기
보컬, 베이스, 기타, 건반 악기, 드럼[58]
가족
부모
짐 매카트니, 메리 매카트니
배우자
린다 매카트니 (1969년 ~ 1998년: 그녀의 사망)
헤더 밀스 (2002년 ~ 2008년: 이혼)
낸시 쉬벨 (2011년 ~)
자녀
헤더, 메리, 스텔라, 제임스, 베아트리체 / 1남 4녀

1. 개요
2. 경력
2.1. 비틀즈 (1957 ~ 1970)[2]
2.1.1. 결성에서 정상까지
2.1.2. 불화와 분열
2.1.3. 비틀즈는 계속된다: 미발표곡 발매를 위한 노력
2.2. Wings & 솔로 활동 (1970 ~ 현재)[3]
3. 음악적 성향
4. 트리비아
4.1. 가족
4.2. 채식주의자 및 동물애호가
4.3. 외모
4.4. 사망 음모론
4.5. 기타
4.6. 콜라보레이션
6. 솔로 디스코그래피
6.1. 앨범
6.2. 싱글
6.2.1. 빌보드 1위
6.2.2. 빌보드 2위
6.2.3. 빌보드 3위~10위
6.2.4. 빌보드 11위~20위
7. 참고 문서


1. 개요


나는 매카트니에게 경외감을 느낀다. 그는 내가 경외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밥 딜런[4]

영국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대중 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있고 위대한 그룹 비틀즈베이시스트다. 또한 존 레논과 함께 대중음악사 가장 위대한 파트너쉽으로 유명하다.
1979년 기네스 북은 폴 매카트니를 세계 최고 골드 디스크 기록을 60개 보유한 ‘음악사 가장 명예로운 음악가이자 퍼포머’로 발표했으며[5], 2009년 기네스북은 다시 ‘역사상 가장 성공한 송라이터’로 그를 발표했다.[6]가장 돈이 많은 연예인[7] 등의 기네스 기록을 가지고 있다. 또한 영국 차트에서 유일하게 솔로[8], 듀엣[9], 트리오[10], 콰르텟[11], 퀸텟[12], 그리고 자선 밴드[13]의 모임으로 1위를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또 빌보드 차트에서 솔로 경력과 비틀즈 경력의 빌보드 1위를 다 합치면 총 32개의 1위를 배출해냈다.[14] 또 2015년 롤링 스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송라이터에 폴 매카트니를 2위로 꼽았다.[15]
1965년에는 비틀즈의 멤버로서 대영제국 훈장 5등급(MBE)을, 1997년 3월 11일에는 단독으로 기사작위(Knight Bachelor)를 받았으며[16] 1992년에 음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폴라음악상을 처음으로 수상했다. 1987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 1999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솔로 아티스트로서 입성했다.[17] 2012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정되었다.[18] 2017년에는 영국 1.5등급 훈장에 해당하는 컴패니언 오브 아너(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 훈장을 받았다.

2. 경력



2.1. 비틀즈 (1957 ~ 1970)[19]


자세한 내용은 비틀즈 문서 참조. 여기서는 간략하게 폴 매카트니 위주의 설명만 한다.

2.1.1. 결성에서 정상까지


젊은 시절의 폴 매카트니
Hey Jude 생방송에서의 모습
1942년 리버풀에서 태어났으며 댄스 밴드의 리더였던 아버지에게서 음악을 접하게 된다. 아버지가 선물한 트럼펫을 배우고 있었지만 윗입술에 경련이 생기자 이 트럼펫을 어쿠스틱 기타와 바꿨는데 이 기타를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14세 되던 해에 어머니 매리 매카트니가 유방암으로 사망하였고 후에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존 레논과 더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57년부터 존 레논과 함께 쿼리멘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1958년 조지 해리슨의 가입으로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스튜어트 서프클리프, 피트 베스트의 5인조 밴드가 구성된다. 이후 이름을 '더 비틀즈(The Beatles)' 로 바꾸고 스튜어트 서프클리프가 탈퇴한 뒤 피트 베스트가 링고 스타로 교체되면서 현재 알려진 비틀즈의 기본 체제가 확립된다.
초기에는 존 레논과 함께 레논-매카트니 체제라는 환상의 콤비를 이뤘다. 로큰롤에 기반을 둔 이 둘의 음악은 서로에 의해 조율되었다. 하지만 존 레논이 개인적이고 독특한 음악을 지향했다면 폴 매카트니는 대중적이고 듣기 좋은 음악을 지향한 편이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의 음악에는 각자의 개성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1967년, All You Need Is Love 방송 직전의 모습
그러나 이 둘의 차이가 바로 둘 사이의 대립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Yellow Submarine' 이전까지만 해도 이 둘의 협력은 계속되었고 8번째 음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이하 페퍼 상사)' 에 수록된, 비틀즈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A Day in the Life' 는 이 둘의 곡을 합친 곡이었으며 당시 존 레논의 재혼으로 혼란을 겪었을 존 레논의 아들 줄리안 레논에게 'Hey Jude' 를 써주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불화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20] '페퍼 상사' 와 'Magical Mystery Tour' 는 폴 매카트니의 주도 아래 제작되었고 다른 멤버들은 이에 불만을 가졌다. 후기에도 폴 매카트니는 다른 멤버들을 이끌려고 하고 이에 대한 반발이 커지면서 사이가 더 벌어졌다.
그렇지만 무조건 폴의 탓만을 할 수도 없는 것이 비틀즈의 매니저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죽은 후부터 비틀즈는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오노 요코와 앨런 클라인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는데 폴은 와해를 막기 위해 노력한 거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마음대로 하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결국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소통의 문제.

2.1.2. 불화와 분열


1968년의 폴 매카트니
1969년 Get Back(Let It Be) 세션의 폴 매카트니
'The Beatles' 를 발표할 무렵 비틀즈 멤버들의 대립은 극심해진다. 링고 스타와 조지 해리슨은 비즈니스적인 문제로 인한 폴 매카트니와의 대립으로 비틀즈를 일시 탈퇴하기도 했으며 존 레논이 오노 요코를 녹음 스튜디오에 데려오면서 시작된 개인적인 대립은 비틀즈 해체 이후까지 계속된다. 게다가 폴 매카트니는 완벽한 녹음을 추구했기 때문에 음악을 녹음할 때 30~40번씩 다시 녹음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이런 일에서도 멤버들의 사이는 벌어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뭉치자는 취지 아래 계획된 'Abbey Road' 와 'Let It Be' 에서도 멤버들과의 충돌은 끊이질 않았고 결국 1970년도에 폴 매카트니가 견디다 못해 비틀즈를 탈퇴하며 비틀즈는 공식적으로 해체된다.
앞서 말했듯이 비틀즈 해체는 누구 하나의 잘못만이라고 보기 어렵다. 매우 복합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이 당시 정신적 지주였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죽음으로 비틀즈는 매일이 혼란의 연속이었다. 리더인 존 레논은 그룹에서 흥미를 잃고 점점 멀어지고[21] 나머지 멤버들은 지쳐있었는데 이에 폴 매카트니는 본인 나름대로는 밴드의 분열을 막겠다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시하며 주도하는 등) 노력한 것이었다. 폴이라도 나서서 주도하지 않았으면 아마 비틀즈는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사망 직후 해체됐을 것 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멤버들에게는 이것이 밴드를 자신의 입맛대로 끌고 가려는 독선으로 느껴졌던 것.
게다가 비틀즈에서 점점 멀어져가던 존 레논이 1968년 이혼하고 오노 요코와 본격적으로 연인 관계를 공표한 이후부터는 그 이전까지 멤버들 사이에서 암묵의 룰이었던 '비틀즈 멤버들과 고용된 세션맨들을 제외하곤 외부인물 스튜디오 출입금지'를 무시하고 스튜디오에 꼭 오노 요코를 끼고 등장하거나 심지어는 약속 날짜에 스튜디오에 안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스튜디오에서 요코는 조지 해리슨이 먹으려고 놔둔 과자를 허락도 없이 먹거나 침대 매트를 가져와서 누워있으면서, 사사건건 끼어들며 "아티스트인 자신이 생각하기에 지금 녹음하고 있는 음악은 이러이러한 부분에서 잘못되었다."라며 음악적인 부분에 도가 지나친 훈계를 하고 멤버들이 연주 중인 앰프를 깔고 앉는 등 무례한 행동을 보였다. 그래서 존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이 (특히 조지와 폴) 오노 요코를 싫어하게 된다. 때문에 후에 폴 역시 아내 린다를 스튜디오에 데려오고[22]조지는 존과 요코 앞에서 존이 존경하던 밥 딜런까지 얼마나 요코를 안 좋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털어놓은 적도 있다. 존은 이 때 요코를 변호할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Let It Be'를 녹음할 때는 나머지 세 멤버들이 애플 레코드의 매니저로 추대한 앨런 클라인이 개입하며[23] 폴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폴의 곡을 조지 마틴이 아닌 필 스펙터에게 넘겼고 필 스펙터는 폴이 예전의 화기애애한 시절로 돌아가자며 단순한 밴드 사운드로 작곡한 원곡을 자신의 장기인 '월 오브 사운드(Wall of Sound)'를 사용하여 오케스트레이션을 입혀서 곡의 장르 자체가 바뀌는 일도 발생했다. 이를 들은 폴은 분노하여 앨범의 발매를 계속 반대하다가[24] 밴드 탈퇴 선언 직전인 1970년, 타이틀을 'Get Back'에서 'Let it Be'로 바꾼다는 조건으로 앨범 발매를 허락했다고 한다. 또한 훗날 자신이 생각한대로의 사운드를 수록한 'Let It Be Naked' 앨범을 내기도 했다.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과의 대립은 비틀즈 해체 후 70년대 초반까지도 계속되었고 조지 해리슨은 "4인조 밴드 비틀즈의..." 라고 말하는 오노 요코에게 "3인조 밴드야" 라고까지 말했다. (이때가 조지와 폴의 사이가 매우 틀어져있던 때로 폴 매카트니를 비틀즈 멤버로 인정 안하겠다는 뜻.) 하지만 존과 폴, 조지와 폴은 오히려 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사이가 완화되고, 오히려 1980년 경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참고로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두 사람이 1971년 발표한 솔로 앨범들은 서로에 대한 디스를 담고 있다. 폴 매카트니는 자신의 솔로 앨범 'Ram' 에서 짝짓기하는 딱정벌레 사진을 집어넣었으며 존 레논은 이를 자신과 오노 요코를 비유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분개하였다. 또한 해당 앨범의 첫 곡 'Too Many People' 의 가사에는 존 레논에 대한 비꼬기가 담겨 있다. 존 레논도 이에 맞받아쳤다. 자신의 앨범 'Imagine' 의 부클렛 내부에는 폴이 'Ram' 에서 양의 뿔을 당기는 포즈를 따라하며 돼지의 귀를 당기는 사진을 넣었고 폴 매카트니를 디스한 곡 'How Do You Sleep?'을 수록하기도 하였다.
1974년 3월 29일 로스 엔젤레스. 5년만에 재회한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위와 같은 예화들 때문에 존과 폴의 불화가 존 레논이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링고의 중재 노력이 빛을 발해 1973년 무렵 폴이 먼저 화해를 제스쳐를 취하게 된다. 1974년 3월에는 로스 엔젤레스에 머물며 해리 닐슨의 앨범을 프로듀싱 중이었던 존 레논을, 폴 매카트니가 아내 린다 매카트니, 그리고 스티비 원더와 함께 깜짝 방문한다. 이 당시 스튜디오에서 연주를 함께할 정도로 사이가 회복된다. 사실 폴에 대한 나머지 멤버들의 반감은 브라이언 엡스타인 사후 비틀즈와 애플사의 매니지먼트 문제로 증폭된 부분이 큰데, 폴은 자신의 장인어른인 리 이스트먼을 후임 매니저로, 나머지 셋은 앨런 클라인을 후임 매니저로 밀면서 대립하였다. 그러나 앨런 클라인의 사기 행각이 밝혀지면서 ‘폴의 말이 틀리지 않았어.’로 분위기가 바뀌었고, 폴에 대한 멤버들의 반감이 상당히 누그러들게 되었다.[25]

1974년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가 해리 닐슨, 스티비 원더 등과 함께 'Stand By Me'를 함께 연주한 음원.
<A Toot and a Snore in '74>라는 이름의 부틀렉으로 돌아다닌다.
물론 화해를 하긴 했지만 예전만큼 허물없이 지낸 건 아니었다. 1975년부터 음악계에서 은퇴하고 션을 돌보면서 전업주부로 살아가고 있었던 존 레논은 20대 시절처럼 연락도 없이 갑자기 기타 하나 달랑 들고 나타나 음악을 연주하는 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폴도 "지금은 20대도 아니고 비틀즈 시절도 아니야"라는 존의 말에 상처받아 나중에 자신의 말에 후회한 존이 연락을 해도 받지 않는 등 티격태격 하긴 했다고 한다. 그래도 서로 으르렁거리던 1970년대 초반의 분위기와 달리 교류도 꽤 있었으며, 존이 죽기 전에는 사이가 많이 회복됐었다. 폴은 존 레논이 살고있는 다코타 아파트에 자주 놀러갔으며 어느날은 함께 술을 마시며 TV에 나오는 SNL 방송을 보면서 출연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물론 둘이 술에 많이 취한 상태라 결국 그 계획은 무산됐지만.
존 레논은 폴 매카트니가 McCartney II 앨범을 발표할 때 'Coming Up'을 듣고 좋은 싱글이라고 칭찬했으며 폴 매카트니 역시 존 레논이 5년의 공백기를 깨고 Double Fantasy를 발표했을 때 응원차 전화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일화는 1994년 폴 매카트니는 오노 요코에게 완성되지도 않고 상업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존 레논의 홈 레코딩 노래들이 수록된 두 개의 테이프를 받았는데, 한 테이프에는 (폴,조지,링고가) 작업을 마치고 발표한 "Free as a Bird"와 "Real Love"가 수록되어 있었다. 나머지 하나의 테이프에는 "Now and then" (원제:I Don't Want to Lose You)와 "Grow Old With Me"가 수록되어 있었는데 테이프의 겉면엔 "for Paul" 이라고 급하게 휘갈겨 쓴 존의 필체가 남아 있었다..... 존은 훗날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기도 했으며[26] 폴은 존이 죽었을 때 추모곡 'Here Today' 를 작곡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대중들은 "역시 폴과 존의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말한다.

2.1.3. 비틀즈는 계속된다: 미발표곡 발매를 위한 노력


아직까지도 비틀즈에 대한 애착이 남아있는 듯 폴 매카트니는 발매되지 않은 비틀즈의 곡들을 재발매하려고 애쓰고 있다.
2003년에는 본래 의도대로의 사운드로 비틀즈의 곡을 복원하기 위해 'Let It Be... Naked' 를 발매하기도 했다. 필 스펙터의 프로듀싱을 못마땅해한 폴의 원래 의도대로 곡을 다시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노래들을 다시 편집했다. 수록곡과 곡 순서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최근에는 'Carnival of Light' 를 발매하려 하고 있으나 조지 해리슨의 유족들이 반대해 성사되지 않고 있다. 'Carnival of Light' 는 14분 가량의 곡이라고 하며 현재 비틀즈 곡 중 가장 긴 곡인 'Revolution 9'(8분 가량) 보다도 2배 가까이 긴 곡이다. 조지 해리슨의 유족들은 생전에 조지 해리슨이 이 곡을 무척 싫어했다는 이유로 이 곡의 발매를 반대하고 있다.
존 레논이 죽은 이후에는 존 레논의 유족과 화해했고 오노 요코를 초청한 자리에서 존 레논의 곡을 부르기도 했다. 존이 사망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레논-매카트니의 이름으로 된 곡을 매카트니-레논으로 바꾸려 한다는 논란이 펼쳐졌지만 굉장히 왜곡된 것으로 폴 매카트니가 바꾸려고 한 것은 오직 'Yesterday' 한 곡 뿐이었다. 'Yesterday' 는 완전히 폴 혼자서 만든 곡이기에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 일이 크게 왜곡되어 모든 곡들을 바꾸려 했다는 식으로 보도되었고 큰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Hey Jude' 마저도 존 레논이 작곡했다는 말까지 나오는 치욕까지 경험을 해야 했다.
비틀즈 노래들의 판권을 되찾기 위해 요코와 힘을 합치기도 했다. 실패했지만...
비틀즈의 노래를 새로 리믹스해 재탄생시킨 앨범 'LOVE'로 다시금 전 비틀즈 멤버로서 그래미 무대에 서기도 했다.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 행사가 열린 현지 시각 7월 28일 0시 50분 경에 피날레 무대에 등장하여 'The End' 와 'Hey Jude' 를 열창하였다. 그는 영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음악계의 전설이니 어찌 보면 마땅한 일[27]. 개막식에 참석한 관중들이 함께 후렴구인 "나나나 나나나나~" 를 외치는 떼창 장면은 개막식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

2.2. Wings & 솔로 활동 (1970 ~ 현재)[28]


윙스 시절의 폴 매카트니[29]
폴은 비틀즈 탈퇴를 발표하고 일주일 후인 1970년 4월 17일, 가족을 주제로 녹음한 셀프 타이틀 앨범 'McCartney' 를 발표했다. 이 앨범에서 폴은 기타, 베이스, 피아노, 드럼 등 다양한 악기를 모두 혼자서 다루었다. 폴의 아내 린다 매카트니는 그저 하모니와 백보컬만 할 정도로 앨범의 기획부터 녹음, 믹싱까지 모두 폴 혼자서 해낸 앨범으로,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 1위까지 오를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비틀즈 해체를 폴이 발표하고 뒤이어 바로 솔로 앨범을 냈다는 점에서 폴은 "자신의 솔로 앨범을 위하여 비틀즈를 이용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30]
비틀즈가 해체된 이후인 1971년, 폴은 아내 린다를 비롯한 몇몇 세션맨들과 작업한 'Ram' 을 발표한다. 이 앨범 역시 영국과 미국에서 각각 1, 2위에 오를 정도로 히트를 했다. 하지만 앨범 뒷면에 있던 딱정벌레의 짝짓기 사진 때문에 존 레논과 한바탕 디스전이 일어난다. 이에 대해서는 How Do You Sleep 문서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 뒤 폴은 자신과 린다 매카트니, 기타리스트 데니 레인을 주축으로 윙스(Wings)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윙스의 자세한 역사는 역시 해당 문서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윙스의 명의로 발표된 첫 앨범 Wild Life는 믹싱을 최소화하여 최대한 자연스러운 느낌이 나게 하려는 의도로 발표되었다. 실제로 몇 번의 테이크만 사용하여 만들어 수수한 느낌이 든다. 다만 차트 성적이나 대중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고, 특히 '윙스'라는 이름의 낮은 인지도 탓이라고 생각한 폴은 윙스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질 때까지 Paul McCartney & Wing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로 한다.
Paul McCartney & Wings로 이름을 바꾼 윙스는 1973년 'Band on the Run'을 발표한다. 이 앨범은 폴 매카트니의 가장 성공적인 솔로 앨범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명작으로 평가를 받는다. 차트에서도 폴의 솔로 앨범 중 처음으로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1위를 하기도 했다. Band on the Run으로 윙스라는 이름을 널리 알린 폴 매카트니는 1975년 발매된 Venus and Mars부터 다시 밴드의 이름을 Wings로 되돌린다. Venus and MarsWings at the Speed of Sound의 연이은 대성공을 거둔 윙스는 Wings over Europe, Wings over America 투어 등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거두어들인다. 들어보자 이 시기 윙스는 브라스 밴드를 동원하여 재즈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팝 음악을 주력으로 하였다. 1976년 히트한 "Silly Love Songs"와 "Let 'Em In"가 그 대표적인 예.
1977년 11월 발매한 싱글 "Mull of Kintyre"는 영국 사상 최초로 판매량 200만 장을 넘기며 1977년 크리스마스 차트 1위, 1977년 최다 판매 싱글은 물론 1970년대 최다 판매 싱글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폴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최다 판매 싱글 기록을 모두 가진,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31] 윙스는 1979년의 투어 역시 성황리에 마무리를 하며 많은 인기를 누렸다. 한편, 윙스의 투어 활동을 한창 하던 1980년 5월에는 자신의 이름으로만 발매한 두번째 셀프 타이틀 앨범 McCartney II를 발매한다. 이 앨범 역시 1970년 발매된 McCartney처럼 폴 본인이 앨범 제작의 전 과정을 혼자서 진행하였다. 이 앨범은 기존의 록이나 재즈풍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신디사이저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일렉트로닉 테크노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당시의 이러한 파격적인 행보는 차트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영국과 미국에서 1위와 3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1980년 12월 8일, 폴에게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일이 발생한다. 바로 한 때 최고의 음악적 파트너였던 존 레논이 뉴욕에서 피살당한 것. 존의 죽음을 계기로 폴은 자신의 신변에도 문제가 생길 것을 두려워하며 1981년 윙스를 해체시키고 다시 솔로로 전향한다.[32]
다시 솔로로 돌아온 폴은 1982년작 'Tug of War'를 통해 또 한번 찬사를 받는다. 조지 마틴이 프로듀싱한 앨범으로, 비틀즈 시절의 멜로디 감각이 제대로 나타난 수작으로 평가 받는다. 폴의 팬이라면 꼭 들어봐야 할 앨범. 폴의 솔로 시절 음악에 관심이 없더라도 이 앨범 쯤은 'Band on the Run' 과 함께 들어봐도 좋을 것이다. 이 앨범에는 스티비 원더와 함께한 곡이 두 곡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Ebony and Ivory다.
이듬 해 발표된 1983년작 'Pipes of Peace' 이후 폴은 다소 축 처진 중년 분위기의 곡을 발표하게 되고 톱스타의 자리를 지키기 보다는 자신만의 음악을 발표하는 성향을 굳히게 되었다.[33] 1986년작 Press to Play는 흥행면에서 폴 매카트니 답지 않게 흥행하지 못한 앨범으로 손꼽히며, 폴 매카트니도 꽤 충격을 받고 다음 작품인 Flowers in the Dirt에 엄청나게 공을 들이게 된다. 그 덕분인지 이 앨범은 영국 음반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1989년 Flowers in the Dirt 앨범이 발매된 후부터 폴 매카트니는 10년 만에 투어를 재개하게 된다. 1989년 7월 26일 런던 공연을 시작으로 1990년 7월 29일 미국 시카고 공연까지 총 103회의 공연이 진행되었던 "The Paul McCartney World Tour" 이후로 폴 매카트니는 1993년 Off the Ground를 발매한 이후 "The New World Tour"를 진행한다.[34] 1994년부터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 Anthology 작업에 들어가게 되면서 앨범 발매는 물론 투어도 중단한다. 그러다가 1997년, 비틀즈 시절의 느낌과 폴 매카트니 특유의 느낌이 살아있는 곡들로 채워진 Flaming Pie가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영국, 미국 할 것 없이 좋은 평가를 받았고, 차트 성적도 영국과 미국에서 2위에 오르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앨범 역시 폴 매카트니에 관심이 있다면 꼭 들어봐야 할 앨범.
하지만 Flaming Pie의 발매 후에도 폴 매카트니는 투어를 진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폴의 아내 린다가 유방암으로 투병하다가 1998년 사망했기 때문이다. 폴 매카트니의 투어는 2001년 Driving Rain이 발매되면서 다시 진행된다. "Driving World Tour", "Back in the World Tour" 등이 진행되었으며, 특히 후자는 라이브 앨범으로도 발매되었다.
2005년에는 음악적으로 꽤나 좋은 평가를 받은 폴 매카트니 표 발라드 앨범인 Chaos and Creation in the Backyard가 발매되며, 2007년에는 반대로 강렬한 록 사운드 위주의 Memory Almost Full이 발매된다. 2010년부터는 다시 전세계를 도는 투어가 개시됐으며, 2013년에는 비틀즈 스타일의 음악에 현재의 일렉트로니카 사운드를 결합한 New 앨범을 발매하며 호평을 받았다.
2018년 현재에도 폴 매카트니는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18년 안에 새 정규앨범을 발매한다는 것 또한 언급했다. 2018년 6월 폴의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의 모든 사진들이 삭제되고 새 앨범을 암시하는 게시물들을 올렸고, 6월 20일 새 싱글 I Don't Know/Come on to Me가 공개되었다. 8월 15일 또 다른 싱글 Fuh You가 공개되었다. 9월 7일 신보 Egypt Station을 발매했다. 발매 이후 빌보드 200 1위에 올랐는데, 이는 Tug of War이후 36년 만의 1위이며 폴 매카트니 커리어 사상 최초의 1위 데뷔 앨범이다.
폴 매카트니는 솔로 시절에도 수많은 히트곡들을 써냈다. 윙스 시절 007 죽느냐 사느냐의 주제가인 'Live and Let Die'[35], 'Band on the Run', 'Jet', 'Silly Love Song' 등의 숱한 히트곡을 남겼다. 70년대에 엘튼 존 다음으로 가장 많이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한 게 솔로 시절의 폴 매카트니이다. 또한 솔로 전향 이후에도 스티비 원더와 듀엣으로 부른 'Ebony & Ivory' 를 히트시켰으며 마이클 잭슨과 듀엣으로 부른 'Say Say Say', 'The Girl is Mine' 도 유명하다.
비틀즈 시절 벌어들인 돈보다 윙스 시절에 벌어들인 돈이 훨씬 더 많았다고 한다. 일단 솔로 폴 매카트니의 정점은 윙스 시절에 만든 'Band on the Run' 앨범이라는 게 중론. 'Jet', 'Band on the Run' 등 솔로 폴 매카트니의 최고 히트곡이 수록되어 있으며 음악적으로도 폴 매카트니의 멜로디 메이킹 실력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는 앨범이다. 하지만 이후의 음반들도 폴 매카트니의 천재적 멜로디 실력이 잘 드러나있다. 'Tug of War' 앨범 역시 폴 매카트니 앨범 중 정수로 꼽히는 명작.

3. 음악적 성향


앞에서 언급했듯 존 레논에 비해 대중성이 강한 곡을 썼으며 한국 내에서 일반 대중들에게 유명한 비틀즈의 곡도 대부분 폴 매카트니의 곡인 편이다.
존 레논은 비틀즈 해체 이후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법을 연마해나간 반면,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 때부터 완성된 자신만의 작법 스타일이 있었다. 폴 매카트니가 사기캐적인 작곡가로 불리는 이유는 그 누가 들어도 아름다운 멜로디를 순식간에 만들어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음악적 실험을 추구했다는 것에 있다.
아케이드 파이어의 보컬 윈 버틀러가 말하길, 자신이 작곡하다가 막힐 때면 폴에게 이메일을 보내 도움을 요청한다고 한다. 바빠서 대충 답장할 만도 한데 폴은 단 한 통의 메일도 빼놓지 않고 그때마다 그냥 연습용으로 작사 작곡을 끝마친 완성된 곡을 뚝딱 내놓으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하니 흠좀무.
락 역사상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페퍼 상사'를 구상하고 컨셉을 주도한 것 역시 폴 매카트니이며 대중적인 곡들만이 아닌 실험적인 곡들도 많이 만들었다. 오히려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보여준 것만으로 보면 그는 존 레논보다 더 화려한 면모를 자랑한다. 그가 작곡한 'Helter Skelter' 가 헤비메탈의 시초가 된 것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1980년에 테크노 음악을 시도했었다.[36]
존 레논 역시 그가 대중적으로 만든 곡들을 비판하면서도 그의 음악적 재능을 소중히 여겼다. 이러한 존의 행동은 폴의 재능을 존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용하지 않고 결국엔 다른 성향을 가지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게 되어 츤데레적 성향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싶다. 'Here, There And EveryWhere' 을 들으며 감탄에 잠기다가도 'Obladi Oblada' 를 들으며 "이게 노래니?" 하고 비웃는 츤데레(?) 레논을 상상해보자...
앞서 언급했듯이 폴 매카트니는 다양한 음악을 시도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클래식 음반도 5여장 냈으며 Fireman이란 가명으로 일렉트로니카 음반을 3장 냈었다. 전에는 모두 호평을 받았다고 서술되어 있었지만 대개 일반 앨범들에 비해선 잘 안알려져 있고 평가도 장르 평론가 사이에서는 많이 떨어진다. 그래도 평작 정도는 된다는게 중론. 폴 매카트니가 존 레논에 비해 음악적 시도나 실험정신이 떨어진다는 평가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얘기다.
최근에는 오히려 폴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 그의 음악적 능력과 그 진가가 다시금 알려지고 있다. 사실 비틀즈 전성기 시절 평가는 폴>=존이었다가 레논 사후 존>=폴이 된 것이지만 시간이 더 흐른 후 폴=존이 됐다고 할 수도 있다. 그냥 애초에 비교가 불가능한 당대의 위대한 작곡가들이다. 허나 먼 훗날 폴마저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게 된 뒤라면,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비교 우위는 또 달라질지 모를 일이다.

4. 트리비아



4.1. 가족


아버지 제임스 매카트니는 트럼펫과 피아노를 연주하였는데, 이는 어린시절 폴 매카트니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어머니 메리 매카트니[37]는 간호사였는데 폴 매카트니가 15살이 되던 해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뜨게 된다. 이는 역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존 레논과 유대를 쌓게 되는 계기가 된다. 형제 관계로는 동생 마이클 매카트니가 있다.[38]
영국의 하이틴 스타 재인 애셔와 함께
비틀즈 시절 폴은 영국의 하이틴 스타이자 여배우인 제인 애셔와 동거 관계였다. 화이트 앨범 이전에 쓴 폴의 러브송은 본래 제인 애셔를 위해 쓴 곡들이었다. 1964년 둘은 제인 애셔의 집에서 동거생활을 시작했으나 이들의 사랑은 순탄하지 않았다. 1965년, 한창 비틀즈가 전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10대 시절부터 영국에서 인기가 높은 배우였던 제인이[39] 비틀즈와 폴의 인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충실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폴이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기도 했다. 참고로 존 레논도 비틀즈의 인기에 취해서 아내를 놔두고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웠다. 이들이 1965년 녹음한 Help!Rubber Soul 앨범에는 여자를 까는 가사가 많다. 그래도 1966년 비틀즈가 투어를 중단하자 폴과 제인은 시골에 별장을 구입해서 재결합하고 1967년 크리스마스에는 결혼을 발표했다. 그러나 돈은 자신이 벌테니 결혼 후에는 배우일을 은퇴하고 가정에 충실해달라는 폴의 부탁을 자신의 일에 무척 자부심이 컸고 폴의 상태도 대마초와 LSD에 중독되어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제인이 거절하면서 둘의 관계는 최종적으로 끝이났다. 이후 폴은 제인이 여행을 다녀온 틈을 타서 그녀와 같이 살고 있던 집에 다른 여자들을 데려오기 시작했고 결국 폴 매카트니가 시나리오 작가인 프랜시스 슈와츠와 바람을 피고 있는 장면을 제인이 목격하여 1968년 공식적으로 약혼이 파기된다. 제인 애셔는 훗날의 인터뷰에서 "당시 비틀즈의 멤버들이 LSD 트립 체험 등 최신 트랜드를 접할때 자신은 늘 배제되어 있었다."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이에 폴 매카트니는 "제인 애셔는 늘 그녀의 일과 인기에만 신경썼을 뿐 자신이나 비틀즈에 큰 관심을 두고있지 않았다."라며 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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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매카트니는 1969년 사진작가 린다 이스트먼과 결혼한다. 린다는 유명 록밴드와 동행하며 그들의 모습을 담는 사진작가였는데, 런던에서 활동하던 록밴드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 1967년 영국에 왔고 비틀즈와 알게되었다. 폴의 회고에 따르면 서로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당시 린다는 딸(헤더)을 한명을 둔 이혼녀였는데, 폴은 그 딸을 정식으로 입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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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는 폴의 뮤즈로써, 폴은 린다와 윙스활동까지 같이하며 어디든지 함께 하였다. 폴에게는 안습이지만 '뮤지션'으로써 린다의 평가는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러나 애초에 밴드에 그녀를 부른 이유는 그녀가 좋은 뮤지션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함께 하고 싶었던 이유였기 때문에 당사자들은 신경쓰지 않았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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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린다는 1998년에 유방암으로 인해 투병생활을 지속하던 중 5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평생을 함께한 배우자의 사망으로 폴은 큰 슬픔에 빠졌으며, 후에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암 치료제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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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와의 사이에서는 2녀 1남을 두었다. 장녀 메리는 사진작가이자 사형제의 어머니로 살고 있으며, 차녀 스텔라 매카트니는 성공한 의류 디자이너다. 막내아들 제임스는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워낙 성공한 아버지를 둔 탓인지 크게 뜨지는 못하고 있다. 그럴만도 한게 아버지가 성공했다 정도가 아니라 세계 음악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전설의 그룹 비틀즈 츨신이니... 본인도 유명세에 대한 욕심없이 현재에 만족하며 사는 듯.[40]
2014년 11월 6일부터 서울 대림 미술관에서 린다 매카트니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기간은 2015년 4월 2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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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02년 헤더 밀즈[41]라는 환경운동가와 재혼하였다. 그 이듬해에 늦둥이 딸을 보게 되는 등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나 이와 같은 시간이 지속되지 못하고 2007년에 결국 이혼하게 된다. 둘 사이에서 난 딸의 양육권은 조건부로 헤더 밀즈가 가져가게 되었다. 이혼시 헤더 밀즈는 엄청난 위자료를 챙겨 결국 돈을 보고 결혼했던게 아니냐는 여론의 뭇매를 받기도 하였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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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다시는 결혼하지 않을 것 같던 폴 매카트니는 19세 연하의 낸시 쉬벨을 만나 2011년 세번째 결혼을 했다. 헤더 밀즈와 달리 낸시 쉬벨은 미국의 유명한 자산가의 상속녀로 재산과 관련한 의심에서 벗어난 상태. 최근 폴 매카트니와 여러 매체에서 보여주는 훈훈한 모습으로 팬들에게도 호의적인 응원을 받고 있다.

4.2. 채식주의자 및 동물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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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폴 매카트니는 여느 영국인과 같이 육식을 하던 사람이었다. 당대 사람들의 생각처럼 채식주의는 신체를 허약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 그러다가 채식주의자인 제인 애셔와 동거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녀의 영향으로 채식주의자가 된다. 물론 식단을 갑자기 바꾸는 과정에서 꽤나 힘들었지만 끝내 성공했다고 한다.
1975년의 어느 날, 폴과 린다 매카트니 부부는 양고기를 파는 식당에 가게 되었다. 그들은 이때 사람들이 식당에서 열심히 양고기를 먹는 동안 밖에서 평화롭게 초원을 거니는 양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 길로 폴과 린다는 채식주의에서 나아가 동물애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43].
현재는 채식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열성 채식주의자다. 그래서 폴 매카트니의 공연을 함께 다니는 스태프들도 공연 준비와 공연 기간 동안은 채식만 먹는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는 '도살장 문이 유리로 되어있다면 여러분은 고기를 먹지 않을 겁니다'라는 영상을 만들어 현대 축산업의 어두운 면을 고발한 바 있으며, 월요일에는 고기를 먹지 않는 'Meat Free Monday'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2006년에는 중국 모피 시장에서 개와 고양이가 잔인하게 도살되는 영상을 눈물을 흘리며 보고 중국 공연은 절대 하지 않을것을 선언했고[44], 2008년에는 달라이 라마에게 육식을 그만둘 것을 주장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린다 매카트니는 채식주의 식품 사업을 런칭했으며 그들의 딸이자 유명 디자이너인 스텔라 매카트니 또한 동물의 가죽으로 제품을 만드는데 반대하고 있다. 2013년부터는 비건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였으나, 2018년의 인터뷰에서 치즈는 즐겨 먹는 편이고, 비건이 아닌 ‘락토’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4.3. 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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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활동 시절 사진들
곱상한 외모로 60년대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속눈썹이 길고, 선이 날렵한 덕에 예쁘다는 의견도 있다.
그리고 존이나 조지와는 달리 외모 변화가 크지 않다.

4.4. 사망 음모론


폴 매카트니 사망설 문서 참조.

4.5. 기타


  • 현재의 리이슈 (Reissue)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자신의 앨범의 음질 상태가 마음에 안 들었던 폴이 그걸 직접 리마스터해서 재발매한 게 그 시초라 한다.
  • 또 자신의 파트인 베이스를 비롯하여[45] 기타, 피아노 등 많은 악기들을 잘 다룬다. 그의 첫 솔로 앨범 'McCartney' 는 전곡이 폴의 독주로 채워져있으며 후에도 그런 시도를 자주 보여줬다. 심지어 조지 마틴은 드럼 실력이 기술적으론 (롤 주법에 한해서) 비틀즈의 드럼 담당인 링고 스타를 능가한다고 말했다.[46]
  • 특이하게도 '폴'이 중간이름임에도 '제임스'가 아닌 '폴'로 불린다. 집안에서도 태어나서부터 폴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도 정확히 잘 모른다고 한다. 아버지 이름도 제임스였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동생 피터 마이클도 중간이름 마이클로 부르는 걸 봤을 때 아일랜드계의 특징이 아닌가라고 폴 매카트니 본인이 추측하였다.
  • 젊은 시절의 폴 매카트니는 악보를 볼 줄 몰랐다고 한다. 나이 들어서 교향시를 작곡하면서 악보를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젊은 시절 폴 매카트니가 메모지나 종이에 쓴 노래 원고들을 보면 가사를 쭉 적고 위에 코드를 표기하거나 가사 따로, 코드 따로 적어놓았다. 현재도 클래식 곡이 아닌 일반 팝곡을 쓸 때는 악보에는 잘 쓰지 않는다. 사실 프로 연주자들은 물론이고 유명한 싱어송라이터들도 악보를 볼 줄 모르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47] 특히 무단표절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악보를 자기만 알아보게 쓰기도 한다.예시
  • 또한 젊은 시절 엄청난 골초였다. 사실 비틀즈 멤버들 다 그랬으나 담배 뿐만 아니라 연기를 흡입하는 형태의 마약을 좋아했는지 비틀즈 멤버들 중에 가장 대마초에 중독된 멤버였다.[48] 다만 비틀즈의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LSD는 별로 안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도 현재는 손자, 손녀, 그리고 늦둥이 막내딸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다 끊었다고 한다.
  • 어렸을 때 공부를 상당히 잘 했다고 한다. 90명의 수험생 중 3명만이 통과한 일레븐 플러스 시험[49]을 통과해 당시 리버풀에서 명문 그래머 스쿨로 통하던 리버풀 인스티튜트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입학 후에도 상위권 성적을 유지한 것은 물론 교우관계도 좋아서 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또한 초등학교 시절부터 여러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탈 정도로 글쓰기에도 재능이 있었다.
  • 왼손잡이이다. 굳이 왼손잡이를 언급하는 이유는 지금이야 왼손잡이도 양손, 오른손잡이 같이 정상에 속하지만 약 20년 전에는 왼손잡이는 장애인과 동급 취급을 받았을 정도로 사회 풍조가 좋지 않았다. 실제로 한국도 과거에는 자식이 왼손잡이면 기겁을 하면서 오른손잡이로 교정을 시키던 풍조가 있었으니... 실제로 존 레논이 폴 매카트니를 본 첫인상이 '기타도 똑바로 못 드는 놈이 무슨 연주를 한다고'였다고 한다. 게다가 1950년대 당시에는 왼손잡이용 기타는 거의 없다시피 했을 정도라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개조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베이스 기타 또한 위아래가 대칭이라 개조를 해도 불편하지 않은 것으로 골랐다고 한다. 물론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그냥 왼손으로도 칠 수는 있다. Yesterday 잘 보면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거꾸로 들어서 픽가드가 위로 올라간것이 보인다. 나중에는 # 왼손잡이용 기타를 구입해서 사용했으나 지금은 거의 폴 매카트니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초기의 베이스 기타를 다시 사용하고 있다.
  • 한국에는 '음악을 차별하는 것은 인종차별과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고 알려져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김태원라디오 스타에 출연해서 음악 장르에 편견을 가져선 안된다는 얘기를 하면서 폴 매카트니가 그런 말을 했다고 즉흥적으로 지어서 내뱉은 말이 마치 진짜인 것처럼 퍼져버린 것.
  • 세계에서 가장 라이브 공연이 경험이 많은 음악가로, 공연 한 번 할 때마다 엄청나게 많은 곡들을 부른다. 대부분의 가수들이 20곡 내외를 부르는 데 반해 폴 매카트니는 공연 한 번에 앵콜 두 번을 포함해 쉬지않고[50] 35곡 정도를 부른다! 거기다가 내한 때는 곡들 사이 텀에 악기를 교체할 때, 기타 끝 쪽을 잡고 한 손으로 올리는 묘기를 하는 등 건장함을 자랑한다. 만 74세임에도 대단히 정정하다고 볼 수 있다.
  • 인터뷰를 할 때 'you know'를 자주 쓰는 말버릇이 있다. #
  • 비 지스배리 깁이 형제들을 모두 잃고 슬퍼할 때 많은 위로를 해주었다고 한다.
  • 시트콤 프렌즈 시즌4 마지막편의 결혼식 장면에서 로스 겔러의 시아버지 역할로 특별출연 제의를 받았었으나 바빠서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후에 폴은 시트콤 30 ROCK에 특별출연하게 된다.
  • 2012 런던 올림픽에 개막식에서 피아노를 치며 경기장의 모든 참가국 선수들 관중, tv를 통해 시청하고있는 모든 전세계 사람들과 함께 비틀즈의 명곡 Hey Jude를 열창하며 피날레를 장식했다.
  • 2016년 2월 15일 래퍼 타이가가 개최한 그래미 어워드 뒷풀이 파티장에 참석하려다가 경비원이 그를 알아보지 못해서 쫓겨나는 엄청난 굴욕을 당했다. 주최측에서 '우리는 더 유명한 사람을 원한다'면서 쫓았다고. 이에 폴 매카트니는 '어떻게 하면 VIP가 될 수 있느냐, 히트곡을 더 내야겠다'는 말을 남겼다. 영상 황당해하는 Beck과 푸파이터스의 표정이 백미. 폴 입장에서는 정말 어이가 이민을 가는 경험이었을 듯하다. 타이가 본인도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하고 '내가 그를 막을 이유가 어디 있나. 그가 온줄을 몰랐었다.'라고 트위터로 해명했다. 사실 폴 매카트니도 약간의 실수를 하기는 했다. 본래 다른 행사에 참석하려다가 장소를 착각해서 그래미 어워드 뒷풀이 장소에 오게 된 것. 하지만 그래도 '죄송하지만 초대장이 없으면 폴 매카트니 님도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혹시 장소를 착각하셨나요?'라는 식으로 좋게 대처할 수도 있는 일을 이렇게 망가뜨린 건 담당자의 잘못이 맞다.
  • 현재 함께하고 있는 밴드 멤버들이 있다. 2000년대부터의 공연 영상에 꼭 얼굴을 비추는 맴버들로 오른쪽부터 기타를 맡고 있는 Rusty Anderson(흑발)과 Brian Ray(금발), 드럼을 담당하는 Abe Laboriel Jr.(스킨 헤드+수염), 키보드를 담당하는 Paul 'Wix' Wichens(가장 왼쪽의 탈모인). 곡마다 어우러지는 화음들이 도드라지는 폴 매카트니 작곡의 노래 특성상 각각의 멤버들이 백보컬을 담당하고 있다. Brian Ray는 폴이 피아노를 연주할땐 베이스를, 폴이 베이스를 잡으면 일렉기타를 연주한다. Hey Jude 인트로때는 템버린을 치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드러머 Abe는 위 사진도 그렇고 영상을 보면 엄청난 고도비만이다. 뒷목의 살이 접힌게 보일 정도. 때문에 드럼을 치는게 매우 힘겨워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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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줄리안 레논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다. 존 레논이 오노 요코와 재혼을 하며 아내인 신시아와 이혼하며, 신시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줄리안을 홀대했기 때문. 이에 폴은 줄리안과 휴가를 보내거나 악기를 가르쳐주는 등 아버지 존 레논의 빈자리를 채웠주었다. 앞서 언급했듯 줄리안을 위해 Hey Jude를 작곡하기도 했다.

4.6. 콜라보레이션



마이클 잭슨의 앨범 Thriller에 수록된 'The Girl Is Mine'
폴 매카트니는 윙스 해산 후 1980년대에 완전히 솔로로 전향하면서 여러 뮤지션과 교류하여 다양한 콜라보 작업을 남겼다. 1982년 스티비 원더와 함께 Ebony and Ivory를 부르고 마이클 잭슨과 'The Girl Is Mine', 'Say Say Say'를 발표한 것은 매우 유명하다. Flowers in the Dirt 앨범에서는 엘비스 코스텔로와 협연하였고, 'No More Lonely Nights'나 'We Got Married'에서는 핑크 플로이드의 기타리스트 데이비드 길모어와 함께하기도 하였다. 스티비 원더는 이후 폴 매카트니의 2012년작 앨범 Kisses on the Bottom의 '"Only Our Hearts'란 곡에 하모니카 연주를 해주기도 했다.
폴 매카트니는 가장 좋아하는 현대 밴드로 라디오헤드더 킬러스를 꼽았다. # 폴은 개인적으로 라디오헤드에게 콜라보를 제안하고싶지만 라디오헤드가 너무 바빠 거절할까봐 제안을 못하겠다고 했었다.#

2014년에 데스티니의 곡들을 공동작곡하였다. 특히 Hope for the Future라는 제목의 싱글도 발매했다. 게임팬들의 반응은 노래는 좋은데 황금기를 누리던 인류가 미지의 적에 의해 몰락해버린 배경인 게임하고 맞지 않는 가사가 문제라고 한다.

리한나의 싱글 'FourFiveSeconds'에도 기타 반주 피처링으로 참여하였다.

카녜 웨스트와의 콜라보 'Only One'이 공개되었다. 오토튠이 인상적이다.

5. 내한


폴 매카트니/내한 문서 참조.

6. 솔로 디스코그래피



6.1. 앨범



6.2. 싱글



6.2.1. 빌보드 1위



6.2.2. 빌보드 2위



6.2.3. 빌보드 3위~10위


  • Another Day (1971)
  • Hi, Hi, Hi (1972)
  • Helen Wheels (1973)
  • Jet (1974)
  • Junior's Farm (1974)
  • Let 'Em In (1976)
  • Maybe I'm Amazed (1977)[51]
  • Goodnight Tonight (1979)
  • Take It Away (1982)
  • No More Lonely Nights (1984)
  • Spies Like Us (1985)
  • FourFiveSeconds (2015)[52] [53]

6.2.4. 빌보드 11위~20위


  • Venus and Mars/Rock Show (1975)
  • Getting Closer (1979)
  • All Day (2015)[54]
폴 매카트니의 솔로시절 히트곡들은 윙스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 많다.

7. 참고 문서


[1] 1965년에 5등급 대영제국 훈장(MBE)을 받고 1997년에 2등급 훈장에 준하는 기사작위 Knight Bachelor로 한번에 뛰어오른 경우다. 그리고 2017년 6월 16일 1.5등급에 해당하는 컴패니언 오브 아너(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 훈장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이에 따라 그의 풀 네임은 'Sir James Paul McCartney, CH, MBE'가 된다.[2] 쿼리멘 시절 포함.[3] 윙스 후기에 이미 솔로 앨범을 여러장 낸 상태였으므로, 시기 구분이 애매하여 같이 이어지는 흐름으로 설명함.[4] 2007년 롤링 스톤지 인터뷰에서[5] McWhirter, Norris (1980). Guinness Book of World Records. London: Sterling Publishing. pp. 235, 250, 251.[6] Glenday, Craig (2009). Guinness World Records 2009. London: Bantam Books. p. 290.[7] 추청 재산 12억 달러[8] Pipes of Peace [9] "Ebony and Ivory" with Stevie Wonder [10] Mull of Kintyre, Wings [11] "She Loves You, The Beatles [12] "Get Back", The Beatles and Billy Preston [13] Do They Know It's Christmas? Band Aid 2[14] McCartney has written, or co-written 32 number-one singles on the Billboard Hot 100: twenty with the Beatles; seven solo or with Wings; one as a co-writer of "A World Without Love", a number-one single for Peter and Gordon; one as a co-writer on Elton John's cover of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one as a co-writer on Stars on 45's "Medley"; one as a co-writer with Michael Jackson on "Say Say Say"; and one as writer on "Ebony and Ivory" performed with Stevie Wonder.[15] 1위는 밥 딜런, 3위는 존 레논.[16] 그래서 "폴 매카트니 경(Sir Paul McCartney)" 혹은 "폴 경(Sir Paul)"이라고도 불린다.[17] 존 레논은 기준이 충족되자마자 바로 헌액되었으나 매카트니는 후보 자격이 주어지고 7년 후에 헌액되었다.[18] 비틀즈 멤버 중 가장 늦게 헌정되었다.[19] 쿼리멘 시절 포함.[20] 이때부터 불화가 시작된 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중기로 접어들며 존과 폴의 음악적 성향으로 인해 충돌이 생기고 그 사이에서 조지는 소외되는 현상들이 발생하다보니 팀워크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던 것. 후에 브라이언 앱스타인의 죽음과 이로 인한 비즈니스적인 문제, 사생활에 관련된 문제까지 겹치며 사단이 난 것이다.[21] 제일 먼저 비틀즈를 떠난 것도 존 레논이었다. 두 차례나 비틀즈 탈퇴를 멤버들에게 언급했다고... 지치다 못해 결국 비틀즈를 놓게 된 폴이 나중에 공식 발표만 했을 뿐 이미 내부적으로 비틀즈는 해체됐던 상황.[22] 이 시기 사진가였던 린다가 촬영한 스튜디오 작업 사진이 남아있다.[23] 당시 폴은 장인이자 법률가인 리 이스트먼에게 애플의 매니지먼트를 맡기자고 주장했고 존과 요코는 당시 판권업자들에게 있던 저작권을 원가수에게 돌려주는 행위로 음악계의 로빈 훗이라 불리며 인기를 얻고 있었던 앨런 클라인에게 매니지먼트를 맡기자고 주장했다. (이후에 앨런 클라인의 연속된 월권행위와 돈에 집착하는 행위들로 인해 앨런의 본성을 알게 된 존 레논이 그를 비판하는 곡을 쓰기도 했다.) 이 때 조지와 링고는 폴이 비틀즈를 제멋대로 하려는걸 넘어서 이제는 자신의 처가까지 비틀즈에 끌어들인다며 존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다.[24] 이때 존 레논은 "그는 최악으로 녹음된 짐들을 받았지만 거기서 뭔가를 만들어냈다. 내가 들었을 때는 나쁘지 않았다"라며 필 스펙터를 두둔했다.[25] 앨런 클라인은 롤링 스톤즈와의 협업에서도 문제를 일으켰는데, 이 혼란의 시기에 녹음된 롤링 스톤즈의 명반이 Exile on Main St.이다.[26] 존이 폴을 디스하려고 요코와 함께 작곡한 'How Do You Sleep?'은 존이 나중에 아주 많이 후회한 곡이다.[27] 폐막식에서는 영상을 통해 존 레논이 등장함.[28] 윙스 후기에 이미 솔로 앨범을 여러장 낸 상태였으므로, 시기 구분이 애매하여 같이 이어지는 흐름으로 설명함.[29] 투어 때 장발로 무대에 많이 섰다.[30] 이 비판을 가속화 시킨게 빌보드 차트였는데, Let It Be보다 먼저(!) 3주 동안 빌보드 1위를 해버렸다....[31] 1960년대 최다 판매 싱글은 비틀즈의 "She Loves You"로 대략 130만 장이 팔렸다. 또한 "Mull of Kintyre"의 기록은 1984년 밴드 에이드 자선 싱글 "Do They Know it's Christmas?"가 298만 장을 기록하며 깨기 전까지 깨지지 않았다. 현재도 "Mull of Kintyre"는 영국 내에서 최다 판매 싱글 순위 3위에 올라있다. 참고로 1위는 1997년 엘튼 존이 "Something About the Way You Look Tonight" / "Candle In The Wind 1997"로 기록한 477만 장이 최고.[32] 물론 이 시기에 폴이 일본 공연차 방일했을 때 대마초를 소지하던 것이 적발되어 추방되는 사례 때문에 데니 레인을 비롯한 윙스 멤버들의 피로감도 해체의 원인이었다.[33] Pipes of Peace는 Tug of War와 동시에 작업했던 앨범이었다. 그런데도 차트 성적이나 평단의 반응에서 큰 차이가 난다는 점이 아이러니.[34] 전자의 공연 일부를 담은 것이 "Tripping the Live Fantastic"이며, 후자의 공연 일부를 담은 것이 "Paul is Live" 앨범이다.[35] 건즈 앤 로지스가 커버 앨범으로 발표한 적이 있는 곡이다. 이 곡은 007 매니아들에게 최고의 주제가 중 하나로 뽑히고 있다.[36] 'McCartneyII' 앨범 수록곡 'Temporary Secretary'.[37] 폴이 밝힌 바로는 'Let it be'에 등장하는 'mother mary'는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어머니를 뜻한거였다고.[38] 마이클이 어린시절 뒤뜰에서 기타를 치던 폴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폴 매카트니의Chaos and Creation in the Backyard 앨범의 표지가 되기도 하였다.[39] 심지어 비틀즈의 무명시절에는 제인 애셔가 오히려 비틀즈보다 인기가 높았다. 폴과 제인이 첫 만남을 가진 계기도 1963년 4월 18일, 방영된 영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리포터로 출연한 17살의 제인이 비틀즈와 인터뷰를 한 것이었다.[40] 아버지의 앨범인 Driving Rain에 공동작곡한 곡이 있다. 문서 참고.[41] 지뢰사고를 당해서 지뢰 해체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는 루머가 있지만 틀린 사실로 경찰 오토바이와 부딪혀서 왼쪽 발목 아래가 날아갔다. 현재 의족 착용 중. 하지만 지뢰를 반대하는 것은 사실이다.[42] 그런데 헤더 밀즈는 몇 해 뒤 이걸 다 탕진했단다.[43] 비단 해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농가의 소고기집 가보면 소 울음소리를 들으며 소고기를 먹거나, 닭요리집 가면 창밖에 닭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44] 하지만 후에 폴은 한 인터뷰에서 중국 공연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45] 폴은 베이스 연주에 있어서 피크 피킹을 핑거링과 동등한 위치에 오르게 한 연주자다.[46] 화이트 앨범 녹음 당시에 일어난 일로 이 시기는 비틀즈 멤버들이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죽음과 오노 요코의 출현, 음악적 견해 차이 등으로 불화가 극에 달한 시기로 링고가 이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탈퇴했다. 그래서 'Back in the U.S.S.R.' 과 'Dear Prudence' 는 링고의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폴이 직접 드럼을 담당했다.[47] 또 다른 대표적인 경우가 프레디 머큐리. 악보를 볼 줄 몰라서 특수한 기호로 써 놓으면 나머지 멤버들이 그걸로 악보를 만들었다고 한다.[48] 심지어 윙스 시절 일본 공연을 하기 위해 공항에서 수속을 받다가 아이들 옷가방 아래에서 대량의 대마초가 발견되어 일본에서 쫓겨난 적도 있었다.[49] 영국에서 만 11세 아동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중등학교 입학시험. 여담으로 록 밴드 더 후의 보컬리스트 로저 달트리 또한 이 시험에서 1등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50] 곡들 사이 텀이 5분을 넘어가지 않는다.[51] 라이브 버전. 원곡은 1970년 발매되었다.[52] 리한나, 칸예 웨스트와 함께 작업[53] 32년만에 10위 진입으로, 가장 긴 공백 기간을 가지고 10위에 진입한 기록이다![54] 칸예 웨스트의 싱글을 피처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