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해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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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1960년대에 등장해 대중음악 역사를 바꾼 밴드 비틀즈의 리드 기타리스트로,[6] 비틀즈 시절엔 레논-매카트니 콤비에 다소 묻힌 감이 없잖아 있었으나 '''결코 그들에게 꿀리지 않는 최정상급 작곡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7] 또한 뛰어난 기타 연주 실력을 겸비했던 위대한 기타리스트였다.[8] 특히 슬라이드 기타 주법에 있어 독보적인 수준으로 평가 받아, 롤링 스톤 선정 100대 기타리스트 리스트에 11위로 랭크되었다. 힌두교에 심취한 것을 계기로 철학적인 성찰을 보여 팬들에게는 주로 '비틀즈의 정신(Spirit)'으로 불린다.
솔로 시절에도 두각을 드러냈으며, 1988년 비틀즈 멤버들의 마지막 빌보드 1위곡인 Got My Mind Set on You[9] 를 내며 나이 들어서도 엄청난 입지를 가진 아티스트로 음악계 최고 선배들 중 하나로 대우받았다.
사후 3년 후인 2004년 솔로 아티스트로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랐으며, 8년 후인 2009년에는 할리우드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솔로 커리어에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린 곡은 Give Me Love(Give Me Peace on Earth), My Sweet Lord/Isn't It a Pity, Got My Mind Set on You 세 곡이다.
2. 생애
2.1. 출생부터 청년기까지
1943년 2월 25일[10] 영국의 리버풀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조지 6세의 이름에서 따왔으며, 아버지 해럴드 해리슨은 버스 운전사로 안정적인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비틀즈 멤버 중에서 유일하게 어렸을 때 가정문제 없이 순탄하게 자랐다. 1948년 조지는 존 레논과 같은 도브데일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1954년에는 리버풀 인스티튜트 중등학교에 입학했다. 인스티튜드 시절에 같은 학교를 다니던 폴 매카트니를 만났고, 폴의 추천으로 1958년 존 레논이 이끌던 쿼리맨에 가입했다. 1959년 7월에는 쿼리멘 활동을 위해 리버풀 인스티튜드를 중퇴했다. 중퇴 후 부모님께 죄책감을 가진 조지는 취직을 위해 블래클래스 백화점에서 견습 전기공으로 취직했다. 1960년 1월 쿼리멘에 존의 친구 스튜어트 서트클리프가 가입하면서 조지는 5월에 전기공을 그만두고 전업 뮤지션의 길을 걷기로 한다. 이로써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스튜어트 서트클리프, 피트 베스트의 5인조 밴드가 완성된다.
이후 '더 비틀즈(The Beatles)'로 밴드 이름이 바뀌었다. 스튜어트 서프클리프는 그 뒤 탈퇴한 뒤 사망하고, 피트 베스트는 링고 스타로 교체되어 현재 우리가 아는 비틀즈가 출범한다.
2.2. 비틀즈 시절
초기에는 레논-매카트니와 함께 몇 곡을 작곡했으나, 그 수는 적은 편이었다.[11] 조지 해리슨은 불세출의 명반 페퍼상사 전후로 갈리는 활동 후반기에도 점진적인 음악적 성장을 보인다. 페퍼상사에서 작곡한 몽환적이고 로맨틱한 곡 'Within You Without You', 화이트 앨범에 수록된 걸작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등으로 듣보잡 논란을 완벽히 종결시켰다. Abbey Road에서도 'Here Comes The Sun'과 'Something' 같이 주옥같은 명곡들을 수록해 입지를 굳건히 했는데, 특히 'Something'은 존과 폴 못지않은, '''앨범 최고의 곡으로 평가받는다!'''[12] Let It Be에도 'I Me Mine', 'For You Blue' 등 조지 특유의 가녀린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감성이 돋보이는 곡들을 수록한다.[13][14]
조지가 비틀즈 활동 중반기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작곡을 하기 시작한 것은 비틀즈 멤버들 중 최연소자였다는 점도 있겠지만 자신보다 먼저 폴 매카트니와 친했다는 이유로 해리슨을 질투한 존 레논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1958년 폴의 소개로 조지가 존과 마주했을 때, 존은 폴과 1살 차이임에도 조지의 나이를 이유로 들며 그의 가입을 반대했다.(물론 그의 기막힌 기타 실력을 본 직후 바로 태도를 바꿨지만.) 존은 With The Beatles를 녹음했을 때만 하더라도 처음으로 자작곡을 가져온 조지의 면전에다 "그렇게 앨범에 네가 만든 곡을 싣고 싶으면 비틀즈를 나가서 따로 밴드를 만들던가"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그를 견제했다고 한다. 그래도 비틀즈가 정상급의 인기를 얻기 시작한 즈음부터는 서로 화해했다고 알려져있다.
1965년부터 조지 해리슨과 존 레논은 '아이돌'이라는 지위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화이트 앨범 세션에 가서 오노 요코를 만나고 이를 해소한 존과는 달리, 조지는 비교적 금방 해결책을 찾아냈다. 바로 종교였다. 원래 비틀즈 멤버들 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성격이었던 조지는[15] 1965년 영화 Help 촬영 도중 인도 문화와 철학에 매료되었고 얼마 뒤인 1966년 부인인 패티 보이드와 함께 힌두교의 한 분파인 크리슈나교로 개종하였다.[16][17] 이후, 자신뿐만 아니라 비틀즈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인도 요기, 구루들과 교류하게 되었으며, 훗날 종교적 가르침에 따라 마약을 끊기도 했다.
조지는 비틀즈 멤버들 중 인도 문화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비틀즈 6집 Rubber Soul의 트랙 '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에 서양음악 최초로 시타르 연주를 도입했고[18] , 같은 앨범에서 'Think For Yourself', 'If I Needed Someone'과 같이 사이키델릭하고 나름 독창적인 곡들을 작곡하여 앨범 내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명상과 철학에 조지 다음으로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사람은 역시 존 레논. 훗날 'Sexy Sadie'로 구루를 조롱하고, 'God'에서 '나는 만트라를 믿지 않아', '나는 요가를 믿지 않아'라며 울부짖기는 했지만...
비틀즈 후기에 폴 매카트니와 크게 대립하여 비틀즈를 잠시 나가기도 했다. 비틀즈 해체 이후 링고 스타와 함께 존 레논의 집에 놀러갔을 때 오노 요코가 "4인조 밴드 비틀즈..."라고 말을 하자 폴은 비틀즈의 멤버로 인정하지 않겠다며 "3인조 밴드"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그래도 시간이 지난 후 폴과의 관계는 회복했다. 사이가 소원해진 쪽은 오히려 존 레논이었는데, 70년대 후반 저술한 전기 <I Me Mine>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존 레논을 누락시켜 버렸다. 존은 이걸 무척 불쾌하게 받아들였고, 살해되기 직전까지 화해조차 하지 못했다. 후에 조지는 존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한으로 여겼다. [19]
비틀즈가 해체하기 전 조지는 솔로 앨범 두 장을 내게 되는데 한장은 영화 Wonderwall의 OST인 'Wonderwall Music'이고 [20] 또 한장은 'Electronic Sound'으로 각각 1968년과 1969년에 발매 되었다. 다만 Electronic Sound는 너무 실험적이라 그냥 묻혔다.[21]
2.3. 솔로 활동
비틀즈 시절 폴과 존 사이에 존재했던 극도의 유대감 탓에 조지는 밴드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기 어려웠고 이러한 상항에서 멤버들 간의 음악적 이견차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비틀즈는 해체한다. 밴드가 해체하게 되며 역설적으로 조지의 작곡 전선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조지의 활동과 업적은 존과 폴의 업적에 비해 비교적 빛을 못 보았다. 해체 후 그는 힌두교도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인도 음악과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솔로 시절 작곡과 가사들에서 그 영향을 알 수 있다.
비틀즈 해체 이후에는 'All Things Must Pass' 등의 음반을 내면서 솔로로 활동했으며, 영화계에서도 활동했다. 비틀즈 멤버중 '''가장 먼저 솔로곡으로 빌보드 1위'''를 한것도 조지 해리슨이었다.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 앨범은 첫 앨범인 'All Things Must Pass'이며, 이 앨범은 무려 '''3LP'''나 되는 트리플 앨범이다.(컴필레이션이 아닌, 뮤지션이 낸 최초의 정규 트리플 앨범이다. 물론 CD로는 더블 앨범) 조지의 대표 히트곡 역시 여기서 쏟아져 나왔다.(그러나 이는 1LP~2LP 한정이며, 연주곡으로 가득찬 3LP에 대한 평은 그다지이다. 나쁘진 않지만 굳이 연주곡을 넣어야 할 이유가 있냐는게 중론.) 앨범 수록곡 중 상당수는 '비틀즈 시절' 작곡한 곡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조지가 얼마나 쌓인게 많았는지 알 수 있다. 어떤 평자는 조지 해리슨을 '비틀스 전설의 당당한 주역이었음을 죽을 때까지 증명해야 했던 희생자'라고 평하기도 했다.
뒤이어 발표한 앨범 'Living in the Material World'도 상업적과 비평적인 면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뒤 이어 발표한 후속작들도 이전까지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다. 다만 1981년 발표된 ‘Somewhere in England’에서 배급사인 워너 브라더스의 간섭을 크게 받아 음악적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조지 해리슨은 'Gone Troppo'을 대충 제작하고 프로모션을 일절 하지 않아 반쯤 '자발적'인 상업적 실패를 맛보게 된다. 이후 워너와 재계약을 하지 않고 계약 기간이 만료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활동을 중단한다.
그러다가 5년 뒤인 1987년, 조지 해리슨은 Electric Light Orchestra의 리더였던 제프 린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팝 성향이 강한 'Cloud Nine'을 발표하며 다시한번 화려하게 재기한다. 음악적으로도 All Things Must Pass 이후의 최고작품으로 꼽을만한 작품이고, 첫 싱글 Got My Mind Set On You도 오랜만에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하며 크게 히트했다.
이후 뚜렷한 음악적 행보를 보이지 않던 조지 해리슨은 밥 딜런, 로이 오비슨, 제프 린 등과 함께 떠돌이 윌버리스(The Traveling Wilburys)를 결성하여 간헐적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사후 발표된 유작 'Brainwashed'이며 다시 한번 대중과 평단의 호평을 얻는다. 이 앨범은 그래미에서 총 3개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수록곡 Marwa Blues는 최고의 팝 연주곡 부문에서 수상하였다.
리썰 웨폰2의 엔딩 Cheer Down은 그가 부른 곡이다.
2.4. 사망
1997년 후두암을 발견하여 치료에 전념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폐암으로의 전이를 발견해 폐암 치료를 병행하게 된다. 1999년 12월 28일 괴한의 침입으로 칼에 가슴부위를 찔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큰 부상을 입지 않고 퇴원하지만 이 사건은 조지의 건강에 영향을 줬고, 그의 죽음을 앞당기는 원인이 되었다.
폐암에서 전이된 뇌종양을 치료하기 위해 2001년 봄에는 스위스에서 몇 달 간 요양하며 지냈다. 그때는 누워있기만 할 정도로 많이 쇠약해진 상태였는데 링고가 병문안을 가서 조지를 만나고 딸의 뇌종양 때문에 보스턴으로 이제 가봐야한다고 하자 조지가 한 말이 '''"내가 같이 가 줄까?"''' 였다고. 이는 링고가 들은 조지의 마지막 말이라고 한다. 링고는 이 일을 회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사망 2주 전에는 뉴욕 맨해튼의 병원에서 보냈는데 이때 폴과 링고가 병문안을 갔다고 한다. 링고가 먼저 떠난 뒤 조지는 폴에게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함께하지 못할 것 같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비틀즈 후기부터 협업과 갈등을 함께한 과거 동료의 고백 앞에 폴도 무너져내려 조지의 손을 꼭 잡은 채 엉엉 울었다고 한다.
2001년 11월 29일, 폴이 소유한 로스 엔젤레스 베벌리 힐스 자택에서 휴식하던 중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인도식으로 화장해 갠지스 강에 뿌려졌다고 한다.
조지 해리슨의 오랜 친구였던 에릭 클랩튼은 그의 추모 공연인 Concert for George를 기획했으며, 이 공연에는 비틀즈 멤버였던 폴 매카트니와 링고 스타를 포함해, 생전에 친분이 있었던 많은 유명 아티스트들이 참석했다.
3. 사생활
위에서 말했듯 인도 사상에 무척 심취해 있었는데, 이후에는 아예 힌두교로 개종하고 술을 끊었다. 담배도 끊으려 시도를 했지만 1997년에서야 비로소 완벽하게 끊었다고 한다. 여기서 담배의 중독성을 더욱 깨달을 수 있다. 조지는 말년에 담배 때문에 인후두염과 폐암에 걸렸고 결국 폐암으로 숨진다. 인도 사상의 영향으로 비틀즈 시절에도, 해체 이후에도 간간히 인도 음악을 작곡하고[22] 장례까지 힌두교 식으로 치를 정도니 말 다했다.
어린 시절부터 모터 스포츠의 열성팬이였고, 비틀즈 해체 후에는 더 적극적으로 경기를 관전하러 다녔으며, 레이싱을 모티브로 한 "Faster"라는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니키 라우다 등의 레이서와 친분이 있어서 직접 레이스에 참여한 경력도 있다. 데이먼 힐과도 친분이 있어 F3에 참가할때, 출천 자금이 부족했던 데이먼을 지원해줬는데, 훗날 그가 F1 월드 챔피언이 되었을 때, 지원금을 돌려주려고 하자 웃으며 거절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대인배...에릭 클랩튼과는 절친한 친구로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의 기타는 그가 연주해 주었으며, 조지 해리슨 추모 공연 때도 그 곡을 연주했다. 그러나 조지 해리슨의 연인이었던 패티 보이드를 사이에 놓고 벌인 삼각 관계로도 유명한데, 이는 후술.
두번째 아내인 올리비아 해리슨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으며, 아들의 이름은 다니(Dhani) 해리슨. 아들의 이름은 인도 음악의 6번째와 7번째 음계인 dha와 ni에서 따왔다고 한다. 여러 모로 크리슈나교 신자였던 조지다운 작명. 수염을 안 기르면 안 기른 대로, 수염을 기르면 기른 대로 아버지랑 참 많이 닮았다. 외모 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굉장히 비슷해서 마치 조지 해리슨이 환생한 듯한 느낌을 준다. 조지가 1973년에 설립했던 'The Material World Foundation'에서 2020년에 진행한 'The Inner Light' 챌린지에 참가한 다니의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1968년의 조지가 그대로 튀어나온 수준. 영상 속 댓글들도 하나같이 감탄을 금치 못한다. 실제로 조지는 어린 대니를 보고 "넌 나보다 더 나같구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23]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 가장 젊은 영국 20대 부자들 순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음악적인 감각도 아버지를 닮았는지 'Here Comes The Sun' 속 숨겨진 기타 솔로가 처음 밝혀진 영상에서 다니가 리듬 일부가 인도 음악 스타일 같다는 이야기를 하자 옆에 있던 조지 마틴이 '참 너희 아버지 같구나'라고 하기도 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폴 사이먼과 친분이 깊었다. 제3세계의 문화에 대해서 애착을 가졌던 점이 유대관계를 가지게 만든 계기였다. 조지 해리슨은 인도의 문화에, 폴 사이먼은 중남미의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말년에 캐나다인 코미디언 마이크 마이어스의 팬이 되었다고 한다. 조지는 죽기 전날 마이어스에게 "미니 미가 너무 재미있어서 유럽을 돌아다니는 내내 미니 미 인형을 들고 다녔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는데, 마이어스가 나중에 그 편지를 받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2011년에는 그의 명곡 "While My Guitar Gently Weeps"가 멕시코 출신 기타리스트 산타나에 의해 리메이크되어 발표되기도 하였다. 여담으로 피처링에 첼리스트 요요마가 참여했다.
2012년 조지 해리슨의 삶과 음악을 다룬 마틴 스콜세지의 다큐멘터리 영화 'Living in the Material World'가 개봉되었다. 국내에서는 "조지 해리슨 : 물질 세계에서의 삶"이란 제목으로 개봉하였다.
3.1. 패티 보이드, 에릭 클랩튼과의 삼각관계
10대 후반부터 모델로 활동 중이던 패티 보이드는 비틀즈의 첫 영화 A Hard Day's Night에 캐스팅 되면서 조지 해리슨을 처음 만났다. 참고로 이 당시 조지 해리슨은 21세, 패티 보이드는 20세였다.
패티에게 반한 해리슨이 먼저 대쉬를 했는데, 이때 조지가 그녀에게 구애하며 했던 말은 '''결혼해줄래요? 안된다면 저녁이라도 같이 먹어요.''' 였다고..
허나 그녀는 이미 오랫동안 사귄 남자친구인 Eric Swayne이 있었기에 그를 거절했으나, 조지는 패티가 비틀즈의 팬이었던 점을 이용해 패티에게 계속해서 사랑을 고백했고, 패티는 결국 조지에게 마음을 열어 사귀던 남자친구와 결별을 선언한 다음, 조지 해리슨과 교제하게 된다.
연애 초창기에 둘은 공식 석상에서 키스를 나누는 등 나름 좋은 사이를 유지했다. 허나 얼마 안 가 조지는 대놓고 그루피를 비롯해 여러 여성들과 어울렸고, 투어를 중단하고 본격적으로 인도 사상에 심취한 이후에는 인도 사상에만 몰두하며 패티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게다가 이 후에도 패티를 내버려두고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웠던 건 마찬가지였다.
사실 크리슈나교로 먼저 개종한 것도 패티였으며, 크리슈나교도 당시 마음 고생이 심했던 조지를 위해 패티가 소개해준 것이었는데 패티는 이렇게까지 조지가 종교에 심취해 주객전도를 당할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패티와 싸울 때면 조지는 패티가 아이를 가지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며 그녀를 압박했고,[24] 패티는 가정을 돌보지 않는 조지의 마음을 돌리고자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던 에릭 클랩튼과 친분을 쌓고 어울린다. 그런데 에릭이 정말로 패티에게 반해 버리고 조지의 관심을 자신에게 돌리려던 의도밖에 없던 패티는 당황했다고 한다.
조지는 에릭과 패티의 관계를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알고 난 후에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고 오히려 한 술 더떠서 패티와 마찬가지로 비틀즈의 팬에서 멤버와 결혼에 골인한 '''링고 스타의 아내인 모린 콕스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때 링고는 갖은 실패를 연달아 경험하며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 상태였고 모린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조지는 부부 침실에서 모린과 꽁냥거렸고 모린은 링고 앞에서 대놓고 조지가 선물한 목걸이를 매고 돌아다녔다. 마침내는 '''조지와 모린이 링고와 패티를 불러내어 두 사람이 사귀고 있다는 고백까지 한다.''' 조지와 모린의 관계를 알게된 링고는 모린과 이혼했고[25] 일련의 과정에서 매우 큰 충격과 상처를 받은 패티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는 에릭 클랩튼에게 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에릭 클랩튼은 'Layla', 'Wonderful Tonight' 등의 곡을 내놓으며[26]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막상 패티와 결혼하고나자 결혼 전이나 후나 똑같이 계속 바람을 피우고 술을 마시고 마약을 했으며, 패티가 아이를 낳지못한다는 사실을 알자 밖에서 '''사생아를 둘이나 데려왔다.''' 결국 또 다시 상처를 받은 패티는 에릭과 이혼한다.
심지어 에릭은 나중에 자기 자서전에 "패티를 원했던 건 그저 조지 해리슨이 질투났기 때문이다. 조지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 훌륭한 차와 믿기지않는 경력, 그리고 아름다운 아내 등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그저 패티는 그 모든걸 갖고있는 남자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패티를 탐냈다. 이는 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전혀 새로운 면이었다. 예전의 나는 내것보다 훨씬 비싼 장난감을 갖고 있는 이복형의 장난감을 탐내했다. 이게 내가 패티에 대한 감정과 정확히 같았을 것."이라고 저술하며 진정한 상똥차의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여담으로 에릭 클랩튼은 나이가 들고 나서 사죄의 의미로 곡 Layla의 소유권을 전부 패티 보이드에게 넘겨주었다. 1년에 최소 수천만원에 달하는 불로소득이 나온다고.
패티는 오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했으며, 그 이후로 쭉 독신으로 살다가 2015년에 로드 웨스턴이라는 사람과 황혼 결혼을 했다. 최근에는 알코올 중독자와 마약 중독자를 위한 자선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후 패티는 조지와도 화해했고,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90년대 초에 조지와 패티가 함께 촬영한 사진이 있다.서프라이즈 방송에서는 조지 해리슨과 패티 보이드, 에릭 클랩튼 삼각관계를 다뤘었는데 방송에서 위의 내용은 전혀 다루지않고 패티를 오노 요코 수준으로 몰아가며 왜곡된 방송을 했지만[27] 이는 사실이 아니다. 조지 해리슨과 에릭 클랩튼은 패티 보이드에게는 매우 나쁜 남자들이었고 진실을 알고있는 그들의 팬들은 패티를 매우 안타까워 하고 있다.
한때 조지 해리슨이 작곡한 Something이 패티를 붙잡으려고 한 노래가 아니었냐는 의혹이 있었는데( 패티 보이드도 2007년 자서전에서 그렇게 주장했다.) 생전 조지 본인이 직접 이를 부인했다.
조지 해리슨은 후에 올리비아 아리아스와 재혼, 사망할 때까지 함께했다. 다행인지는 몰라도 재혼한 올리비아와는 큰 불화없이 괜찮은 관계를 유지한 듯 싶었으나 사실 이 때도 바람끼를 버리지 못했다고... 4. 여담
- 상당한 독설가. 인터뷰에서 '자신이 받았던 최악의 상이 무엇이었냐고 묻는 방송인에게 왕실 훈장이라고 대놓고 말했을 정도다. 이 업계에 워낙 어마어마한 인물들이 많은지라 그리 부각되진 않았지만 젋었을 땐 비틀즈 멤버들 역시 마찬가지로 꽤 막 나가는 성격이었고, 무대 설비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존과 함께 공연 도중에 그냥 나와버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한참 후배인 밴드 오아시스에 대해 "30년 후면 잊혀질 밴드다. 리암은 모자란 놈이고 쓸모없다."는 식으로 혹평했다가 리암 갤러거에게 "내가 아직 비틀즈와 조지 해리슨을 음악가로서는 좋아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당신은 사람으로서는 젖꼭지(nipple) 같은 인간이야."라는 디스를 당한 적이 있다.[28]
- 1972년, 아내였던 패티 보이드와 함께 타고 운전 중 부주의로 인해 자칫 사망할 수도 있었던 큰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인해 그녀는 갈비뼈가 부러져 큰 수술을 받았고, 그 역시 머리를 크게 다쳐 출혈이 심했는데, 구급차로 이송되는 둘의 모습이 기자의 의해 촬영된 적도 있었다. 이 사고로 인해 그의 메르세데스는 폐차됐다.
- 1965년부터 종교적인 이유로 채식을 했다고 한다. 그에게서 사상적인 영향을 받은 링고 스타도 뒤따라 채식 대열에 합류했다. 폴 매카트니, 존 레논도 채식주의자였기 때문에 비틀즈 멤버 전원이 채식을 한 셈이 된다. 다만 존은 고기를 너무 좋아해서(...) 결과적으로는 완벽한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에는 실패했다고 한다.
- 종교적으로는 신념이 꽤나 강력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존 레논과는 다르게, 폴 매카트니와 마찬가지로 논쟁을 하는 것을 꺼렸다. 다만 UN의 인도주의적 행보를 지원하기도 했고 서구권의 힌두교 정당을 지지하는 등 아예 정치 활동을 안한 것은 아니다.
- 동정을 땠을때 비틀즈 멤버들이 박수를 쳐줬다고 한다(...). 함부르크에서 같이 지냈을때 첫 관계를 가졌는데, 이불 속이라서 아무도 못볼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모두들 깨어서 지켜보고 있었고, 관계를 끝냈을때 멤버들이 박수를 쳐줬다. 조지는 후일 첫 경험을 망치지 않도록 알면서도 가만히 있어준 멤버들이 고맙다고 소회했다(...).
- 비틀즈 초창기 시절 어려운 기타 리프를 틀리면 폴 매카트니가 화를 내면서 완벽하게 기타 리프를 연주하면서 훈계질을 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5. 디스코그래피
5.1. 앨범
- 조지 해리슨/음반 목록 참고.
5.2. 싱글
5.2.1. 빌보드 1위
- My Sweet Lord/Isn't It a Pity (1970)
- Give Me Love(Give Me Peace on Earth) (1973)
- Got My Mind Set on You (1988)
5.2.2. 빌보드 2위
- All Those Years Ago (1981)
5.2.3. 빌보드 3위~10위
- What Is Life (1971)
5.2.4. 빌보드 11위~20위
- Dark Horse (1975)
- You (1975)
- Crackerbox Palace (1977)
- Blow Away (1979)
[1] 미들 네임은 종종 생략된다. 미들 네임이 해럴드였다는 증언은 있지만, 출생 신고에서는 누락되었기 때문.[2] 성, 이름, 미들네임이 모두 영국에서 가장 흔한 이름들이다(...). 비슷한 경우로는 야마모토 타로가 있다.[3] 기록에 따라서는 2월 24일로 되어있는 곳도 있다. 생전 빌보드지 인터뷰에 따르면 24일 밤에 태어났다고. 일단 공식 문서상 생일은 2월 25일이다.[4] 현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리버풀.[5] 사인은 폐암이다.[6] 비틀즈 멤버 네 명 모두 보컬을 맡았으므로, 조지 역시 보컬을 맡았다.[7] 비틀즈 후기에 조지 해리슨이 작곡한 화이트 앨범의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Abbey Road의 'Something'과 'Here Comes The Sun'은 앨범 내 최고 명곡으로 자주 꼽히며, 비틀즈 시절 작곡했으나 발표하지 못한 곡들을 모아 작업한 All Things Must Pass는 평단과 대중의 환호를 받았다. 이후 솔로 커리어의 평가도 1970년대 중반과 1980년대 초반의 침체기를 제외하면 매우 좋았다.[8] 연주 실력은 모두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었다고 평가받는 비틀즈 내에서도 테크니션으로서의 면모까지 더해져 가장 좋게 평가받았다. 명실상부 비틀즈 내 연주 담당.[9] 이 노래는 자고로 역대급 레드오션인 1988년 빌보드 연말차트 3위를 달성했다. 비틀즈 솔로 멤버들의 노래들 중에서도 최고 히트곡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10] 출생신고는 25일로 돼있지만 실제 태어난 시각은 24일 밤 11시 42분이다. 하지만 본인이나 팬들 모두 25일을 공식 생일로 친다.[11] 최초로 작곡한 곡은 2집 With The Beatles에 수록된 'Don't Bother Me'. 처음 만든곡치고는 무척 고퀄이지만, 어디까지나 존과 폴의 영향을 받아 작곡한 아류작. 훗날 조지 자신도 이 곡을 혹평한다. 그러나 이후 그가 보여준 행보는 그야말로 월취월장, 청출어람.[12] 'Something'에 대한 프랭크 시내트라의 반응은, '가장 아름다운 레논-매카트니 발라드'(...) 여기에 대한 폴의 반응이 "고마워요, 프랭크"로 걸작이다. 존과 폴 역시 'Something'의 진가를 시원하게 인정한다. 링고도 뒤에서 나름 기뻐했다고.[13] 여담이지만 'I Me Mine'은 존 레논을 제외한 비틀즈 멤버들이 작업한 곡이다.[14] 그런데 사실 조지 해리슨은 원래 가녀린 목소리가 아닌 굵직한 목소리였다. 당장 초기 곡인 'Don't Bother Me'나 'I'm Happy Just Dance with You'만 들어봐도 굵직한 목소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967년 'Within You Without You'를 기점으로 비음을 가미한 창법으로 변화를 주었다.[15] 1966년 발매한 7집 Revolver에서는 당시의 지나쳤던 세금 징수를 비아냥거리는 노래 'Taxman'을 작곡하기도 했다.[16] 크리슈나교 자체는 길거리에서 변발+승려복 비슷한 차림으로 눈에 확 띄게 행동하는지라 서구권에서는 코미디 프로그램 등에서 패러디가 된 적도 있었다.[17] 조지는 허울좋은 천주교계였다고 한다. 부모님들의 종교적 강압은 딱히 없었다고.[18] 사실 이 곡의 작곡자는 존 레논이며, 새로운 방식의 사운드를 표현할 악기를 찾다가 당시 라비 샹카라는 시타르 연주가의 음반을 통해 처음 시타르를 접한 이후 시타르를 배우고 있던 조지 해리슨에게 연주를 권하면서 사운드가 완성된 것이다. 이후 비틀즈 앨범에서 나오는 시타연주에 비해 이 당시 해리슨의 연주가 비교적 설익은 느낌을 주는 것은 이런 과정으로 만들어진 노래이기 때문이다.[19] 훗날 Cloud Nine을 발표한 1987년, 조지는 존 레논의 영향을 축소 서술한 이유를 질문 받자, "제가 존 레논에게 미친 영향도 스스로 상당 부분 생략해서 서술했어요. 저는 상호 영향을 쌤쌤이 치기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라고 답하면서 오히려 가까운 관계였기에 일일이 서술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음을 시인했다.[20]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조지 해리슨은 훗날 오아시스를 혹평했으며 특히 리암 갤러거의 싸움꾼 기질을 두고 '모자란(Silly) 놈'이라고 깠다.[21] 앨범명에서 알 수 있듯이 신디사이저를 이용해 전자음을 만들었는데 너무 실험에 치중한 앨범이라 묻혔다. 빌보드 Hot 200에서는 191위에 오르며 간신히 턱걸이를 하였고 UK차트엔 오르지조차 못했다.[22] Love You To, Within You Without You, The Inner Light, Living in the Material World, Brainwashed 후반부의 챈트 등등.[23] 위 연주 영상에서 쟁쟁한 뮤지션들 사이에 있는 젊은 조지 해리슨 같이 생긴 사람이 다니 해리슨이다.[24] 크리슈나교는 불임한 여성과의, 즉 아이를 갖기위함이 아닌 쾌락을 위한 성관계를 일체 금지하기 때문. 사실 이외에도 리버풀 출신 특유의 꼴마초 성향이 주된 원인이었다는 설도 있다.[25] 모린은 링고에게 자신은 링고를 많이 사랑하고 있으며 이혼은 안된다고 애걸복걸 했다고 한다.[26] 'Layla'의 가사만 보면 에릭 클랩튼은 말 그대로 애걸복걸하고 있다. 결국 패티가 오랜 망설임 끝에 에릭의 구애를 받아주었다는 것을 감안하면(...).[27] 여담이지만 왜곡은 서프라이즈 방송의 주특기이다. 그 이전에는 폴 매카트니의 사망설이 신빙성 있는 설인 것처럼 묘사했고 이후에는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가 앙숙이라도 되는 것 마냥 방송했으며, 비단 비틀즈뿐만이 아니라 퀸과 닥터후 등도 왜곡된 내용들로 방송해서 덕후들의 분노섞인 욕을 먹었다. 오죽하면 서프라이즈 작가쪽에 소설가라도 있냐는 말까지 나올정도.[28] 여담으로 리암 갤러거는 개인적으로 조지 해리슨을 매우 존경한다고 한다. 애초에 비틀즈 광팬으로 유명하니.. 나중에 이 발언에 대해서 사과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