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FS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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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FS 228'''
1. 개발 배경
1940년 초, 독일 글라이더 연구소(Deutsche Forschungsanstalt für Segelflug : DFS)는 초음속으로 비행할 수 있는 항공기에 관한 야심 찬 계획을 진행하는데 착수하였다. 대추력 엔진이 없던 당시 기술로는 음속 장벽을 돌파하기 위한 수단으로는 오직 로켓 엔진 밖에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이들의 목표는 성층권에서 비행하는 새로운 형태의 로켓 비행기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무렵 DFS가 세운 개발 계획은 3단계로 나뉠 수 있었다.
- 탑승자가 대기압이 낮은 고공에서 조종할 수 있으며, 위급한 상황에서의 탈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종석의 여압 테스트와 연구 제작.
- 초음속 비행에 알맞는 에어포일과 날개 형상을 찾아내는 작업으로, 당시 DFS에서는 이미 하인켈 P.1068의 설계 방안이 있었고 거기서 얻어진 풍동 실험 데이타로 인해 새로운 날개에 대한 많은 참고자료가 있었다.
- 상기 2가지 연구 성과를 통합시켜 실제 초음속 비행이 가능한 항공기를 완성.
2. 시제기 완성
이 야심찬 프로젝트의 명칭은 '''DFS 346'''이었다. 언급한 3가지 목적을 차례대로 실현하기 위해, DFS는 여압 캐빈부터 실험하기 위해 설계번호 DFS 54의 도면을 완성시켰다. 1941년에 제국 항공성(RLM)은 DFS 설계안에 '''DFS 228'''이라는 설계번호를 부여했는데, 이 실험기는 반드시 군용, 그것도 고공 전략정찰기(Höhen-Fernaufklärungsflugzeug)로 연구하기를 명령하였다. 아헨 공대를 나와 유체역학과 에어포일 이론에 밝은 젊은 엔지니어였던 펠릭스 크라흐트(Felix Kracht : 1912~2002)가 실제 기체의 설계와 제작을 이끌어나갔다. 비행면허를 딴 조종사이기도 했던 크라흐트 기사는 항공기 개발 경험은 많지 않았더라도, 글라이더 설계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어서 1937년에 손수 만들어낸 글라이더인 라인란트(FVA-10b Rheinland)로 알프스 산맥의 상승기류를 타고 무동력으로 횡단하는 쾌거를 달성하기도 했을 정도였으니, 활공 성능이 중요한 이 기체의 개발 작업에는 적임자였을 것이다. 1943년에 기체 일련번호 D-IBFQ가 그려넣어진 원형 1호기가 완성되었고, 이 프로토타입 기체는 1944년 말에 테스트 파일럿 롤프 뫼델(Rolf Mödel)이 타고 무동력 비행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무동력 활공 비행을 거치면서 DFS 228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문제점이 발견되었는데, 예를 들면 고공에서 보조 날개의 타면 효과가 떨어지고, 승강타가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증상이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DFS 228의 기능은 개발진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결정적인 문제는 추진력을 제공해줄 엔진에 있었는데, 탑재가 예정된 발터 HWK 509A-1와 HWK 509A-2 로켓 모터는 작동시간이 짧은데다가 초고공에서 직면하게 된 극도의 낮은 기온과 기압 상황 속에서 얼어버리는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렇지만 독일인들은 로켓 엔진을 개량하는 작업을 계속했고 곧 메틸알코올과 산소를 촉매로 써서 낮은 온도에서도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가열 시스템의 개발이 완성될 예정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뜻밖의 장애물에 걸려 나아가지 못하고 있던 DFS 228의 연구 작업은 다시 역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고, DFS는 원래의 3단계 프로그램에서 예정하고 있던 다음 2번째, 3번째 순서로 진행될 수 있었다.
3. 너무 늦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고, 결국 제3제국이 패망하면서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1945년 5월에 DFS 228 V2호기가 연합군의 공습으로 인해 파괴되어 기체의 절반만 남게 되었다. DFS 228 V1호기는 전쟁을 겪고도 온전히 남았지만, 연합군에게 노획되어 영국으로 옮겨졌다.
DFS 228은 일반적인 이륙 방식과는 판이하게 다른 비행 방식을 채용했다. 도르니어 Do 217 폭격기에 업히는 피기 백 방식이나 또 다른 방법으로는 예인하여 이륙하는 방법이 그것이었다. 10,000m 상공까지 올라가 모선과 분리된 DFS 228은 발터 로켓 엔진을 점화해 얻은 1.7톤의 추진력으로 23,000m에서 25,000m라는 초고공까지 상승하게 된다. 그 다음 연료를 모두 소모해버려 동력이 꺼지고 중량이 4.2톤에서 1.7톤으로 가벼워진 DFS 228은 무동력 활공으로 고도를 유지하면서 목적지 상공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글라이더처럼 날아 기지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4. 한계
50년대 중반에 미국이 개발해 실제 전략정찰 임무에 이용한 고공 정찰기 U-2도 가로세로비가 23 : 0에 달하는 엄청나게 긴 날개를 활용하여 장거리 활공을 하는 실험이 실시된 바 있다. U-2 파일럿들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작전 고도에서 엔진이 꺼진 기체는 1시간 이상 활공이 가능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연료가 떨어진 후 최후의 수단으로나 시도해볼 일이었지 임무 중에는 오히려 재상승하기 위해 연료가 더 필요했다. 게다가, 40년대 기술과 재료로 제작된 DFS 228이 50년대 중반에 출현한 U-2와 맞먹는 비행 성능을 가졌다고는 빈말로라도 할 수 없었다. 개발진들이 예상한 DFS 로켓 글라이더의 활공비는 15 : 1 이상을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11 : 1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무엇보다, 독일의 실험기는 발터 엔진의 작동시간이 지나치게 짧았던 탓에 필히 장거리를 오래 비행해야만 하는 전략정찰 비행에는 알맞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300 km 정도의 활공이 가능했을 것으로 예상된 이 기체가 전투 종심이 짧은 서유럽을 임무 지역으로 한정하면 실전에 투입되어 활약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정말로 DFS 228이 2만 미터 이상의 고공에서 정찰과 촬영을 했다면 당시 연합군이 보유한 항공기 중에서 이 비행물체를 요격하거나 저지할 수 있는 기종은 없었다. 사실 당시의 원시적이고 조잡한 레이더로는 찾아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가정에는 그 정도 고공에서 구름 아래 가려지고 멀리 떨어진 정찰 목표를 제대로 찾아내서 염탐하고 촬영할 수 있는 고감도 센서나 카메라가 개발되어야만 한다는 또다른 선행 과제를 클리어해야만 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또한 당시 연합군이 보유한 웨스트랜드 웰킨(Westland Welkin) 같은 고공 전투기들은 12 km 상공에서 추축군 항공기를 격추시킨 예도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DFS 228이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구간은 최대 고도인 25,000 m 부터 12,000 m 고도까지의 영역일 것이다. 여기에 독일 정찰기의 활공비 11 : 1을 대입하면 140 km 정도만 안전한 정찰 비행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거리가 과연 전략정찰 임무에 쓸 수 있는 수준인지는 굳이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