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드래프트/1994년
1. 개요
1993년 11월 23일 시행된 K리그 드래프트.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생팀이 참가하지 못한 드래프트가 되었다.
2. 진행방식
- 신생팀 전북 버팔로가 참가 예정이었지만, 참가하지 않고 6개 구단만이 진행했다.
- 일반 드래프트 지명은 6차 라운드로 진행되고 그외 번외지명에선 제한없이 여러명 뽑을 수 있다.
- 일반 드래프트 지명은 1라운드에 1명만 지명 가능하다.
- 4라운드 지명은 연고지명으로써 각 구단이 후원하는 대학의 선수를 지명할 수 있는 라운드다.
- 1993년 리그 성적의 역순으로 순번이 부여됐고, 다음과 같이 지명권 순번이 정해졌다.
3. 지명결과
앞선 드래프트에서 거부 의사를 표현하고 1년간 실업 무대에 뛰었던 정재권이 드래프트에 참여해 전체 1순위로 대우에 입단했다. 무려 계약금을 1억이나 주고 데려온 특급 영입이었던 것. 이외에도 대우는 폭풍영입을 이번 드래프트에서 하는데, 김주성으로 대표되던 전성기 멤버들이 하나 둘 이적과 은퇴를 하면서 리빌딩이 시급해진 대우였고, 때문에 6차지명까지 꽉꽉 채운 지명에도 모자라 번외지명으로 무려 '''12명'''이나 뽑는 드래프트의 큰손을 자처한다. 하지만 이렇게 뽑힌 12명의 번외지명 선수들은 2군을 전전하다가 결국 축구계를 떠나며 대우의 야심찬 리빌딩 계획은 실패하고 만다.
1991년 남북 단일팀을 경험했던 세계 청소년 선수권 8강 주역들이 대거 드래프트에 나왔던 시즌이기도 하다. 당연히 이들을 영입하기 위한 경쟁도 뜨거웠는데, 특히 조진호는 1억이 넘는 계약금에 포철에 입단하면서 슈퍼 루키로써 대우를 받는다. 또한 당시 핵심 수비수였던 이임생도 유공에 입단하며 프로에 입문한다.
단일팀 구성 과정에서 아쉽게 대표팀에 낙마한 유상철도 현대에 입단하며 화려한 프로선수 생활의 첫 시작을 알렸고, 1993년 세계 청소년 선수권 멤버였던 박철과 최용수는 나란히 LG에 입단했다. 또한 우승팀 일화도 한정국과 이영진을 영입하며 어느정도 소기의 전력보강은 성공했다.
4. 특이사항
두고두고 논란이 되었고 드래프트 거부사태의 핵심 원인 중 하나였던 '''계약금 상한선 문제'''가 해결되었다. 계약금에 상한선을 두는 대신 1순위, 2순위 선수들에 한해 5000만원의 하한선을 두고 자유롭게 협상을 할 수 있게끔 제도가 바뀌면서 대어급 선수들에 대한 제대로 된 금액적 보상이 가능해졌다.
창단팀이 드래프트에 참여하지 못한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인데, 이는 1993 드래프트 당시 선수까지 다 지명해놓고 정작 시즌도 못치뤄보고 해체한 완산 푸마의 재림을 우려한 축구계의 극렬한 반대 때문이었다. 축구계는 완산 푸마 처럼 재정이 취약한 전북 버팔로가 드래프트에 참여할 경우 드래프트 참가 거부를 할 것이라는 반대 의사를 확고하게 표현했고, 이에 굴복해 전북 버팔로는 기존의 완산 푸마 지명선수 중 잔류한 선수단과 각 팀의 2군 선수 무상영입권을 인정받고 드래프트 참가를 포기한다. 태생부터 극약의 선수단이 만들어진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