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발

 



''' 대구 FC '''
'''Daegu FC'''
''' 이름 '''
'''이용발'''
'''李容跋 | Lee Yong-Bal'''
''' 출생 '''
1973년 3월 15일 (51세) /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 국적 '''
대한민국
''' 신체 '''
183cm
''' 직업 '''
축구선수(골키퍼 / 은퇴)
축구코치
''' 소속 '''
''' 선수 '''
유공 코끼리/부천 SK (1994~2001)
전북 현대 모터스 (2002~2005)
경남 FC (2006)
''' 지도자 '''
연세대학교 (2009~2013 / 골키퍼 코치)
인천 유나이티드 (2014 / 골키퍼 코치)
대구 FC (2015~ / 골키퍼 코치)
''' 국가대표 '''
없음
''' 별명 '''
카우보이
1. 개요
2. 선수 시절
2.1. 유공 코끼리 / 부천 SK
2.2. 전북 현대
2.3. 경남 FC
2.4. 플레이 스타일
3. 지도자
4. 모자
5. 기타


1. 개요


前 축구선수이자 現 대구 FC의 골키퍼 코치이다.

2. 선수 시절



2.1. 유공 코끼리 / 부천 SK


[image]

동아대학교를 졸업하고 1994년 이용발은 드래프트 4순위로 유공 코끼리에 입단하였다.
당시 유공에는 최고의 외국인 골키퍼 알렉산드르 포드쉬발로프 (K리그 등록명 : 샤샤)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고, 이용발은 샤샤의 그늘에 가려져 2선발 골키퍼에 머물렀다.
1996년 외국인 골키퍼 쿼터제가 시행되면서 샤샤의 출전이 제한되자 이용발은 한 해 동안 14경기에 출전 자신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지만, 1997년 경찰청 입단 테스트에 불합격해 현역으로 입대하여 2년 동안 복무했다. 본격적인 선수 생활은 1999년에 제대한 후 K리그로 돌아와서부터였다.
복무하는 사이 외국인 골키퍼 기용 금지 규정으로 샤샤가 떠나면서, 1999년에 제대하자마자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게 되었다. 일반 군대를 간 탓에 골키퍼 이용발의 안정감은 극히 떨어졌다. 순발력은 있었지만 집중력이 심하게 떨어져서, 강하고 높게 들어오는 슈팅에 취약한 면모를 보였다. 이게 부천의 공격 일변도 축구와 부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박철, 이임생, 강철 등의 뛰어난 수비수들[1]의 보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38경기에서 55실점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윤환 감독은 그를 계속 주전으로 기용했는데, 이용발에게는 다른 토종 골키퍼들이 가지지 못한 빠르고 정확한 '''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킥을 활용한 빌드업 능력은 윤정환이라는 뛰어난 플레이 메이커를 보유한 부천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옵션이었다. 윤정환과 함께한 마지막 해였던 이 해 부천은 정규리그 2위에 등극한다.
이듬해인 2000년, 부천은 1998-1999년 2연패에 빛나는 수원을 개막전 상대로 맞아 5-1로 격파하는 괴력을 발휘한다. 이용발은 더욱 빠르고 정교해진 킥으로 전반 17분 자신의 통산 1호 도움이자 K리그 최초의 골키퍼 어시스트를 기록하더니, 전반 40분에는 페널티킥 키커로 나서 자신의 통산 1호 득점까지 기록하며 눈길을 끌었다. 2000 시즌 내내 43경기에 출장하여 59실점 1골 3어시스트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팀의 대한화재컵 우승과 정규리그 준우승을 일구어 냈다.
이용발이 부천에서 기록한 1골 3도움은 K리그 골키퍼 역대 최다 공격포인트로 남아 있다.

2.2. 전북 현대


[image]
이후 2002년 조윤환 감독을 따라 이적료 4억원에 전북 현대 모터스에 자유 계약으로 이적하였다.
전북에서는 영 좋지 않은 모습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기량은 점점 하향세를 이어갔고, 2005년 그의 든든한 지지자였던 조윤환 감독이 시즌 중 사임하자 전북과의 인연을 끝냈다.
특히 기존 전북의 1선발이었던 서동명과 비교해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지 못했던데다, 연봉이 당시로서는 최고수준인 2억 5천만원을 받았기 때문에 전북팬들에게 늘상 비난을 듣곤했다. 특히 AFC 챔피언스 리그 4강 알 이티하드전에서 어이없는 실책을 두 번이나 저질러 전북의 결승 진출을 막아버린 것은 두고두고 아쉽다.

2.3. 경남 FC


2006년 신생팀 경남 FC로 이적하였으나, 경남은 이정래를 1키퍼로 기용하면서 이용발은 단 한경기도 뛰지 못했고 결국 2006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2.4. 플레이 스타일


K리그 팬들에게 정성룡보다 먼저 골키퍼 킥을 중요성을 알려 준 선수이다. 이용발보다 세이브 능력이 뛰어난 골키퍼는 많지만, 이용발의 킥력을 뛰어넘은 골키퍼는 드물다.[2] 낮게 깔리면서도 빠르고 날카롭게 전방을 향하는 킥이 정말 탁월했는데, 공격 작업은 결국 골키퍼의 킥에서 시작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세이브 능력만 강조한 한국 축구에서 매우 드문 유형의 선수. 단순히 킥만 좋은 게 아니라 그 킥을 적재적소에 보내는 시야와 판단력도 겸비하고 있었다.[3] 이성재, 이원식이라는 발 빠른 공격진과 윤정환, 윤정춘, 이을용, 김기동으로 이어지는 황금의 미드필더진을 보유한 1999년의 부천에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골키퍼였다.[4]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처럼 프리킥이나 페널티킥 키커로 나서기도 하였으며, 2000 시즌에는 한 시즌 3개의 어시스트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전북 시절에는 발목 부상이 생기면서 과거같은 킥을 보여주지 못했다.
킥을 제외한 기량은 김병지이운재, 최은성 등 동 시기 대한민국 축구를 풍미했던 골키퍼들에 비해 한 수 아래라는 게 중론이다. 순발력에 기반한 캐칭은 괜찮았지만, 수비진 조율과 집중력에 발목을 잡혔다. 미친 선방을 보여주다가도, 경기중에 집중력을 잃어 막아야할 골을 허용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특히 전역하고 본격적으로 리그 출장이 늘어난 1999년에는 떨어진 감각 때문에 고생이 심했다.

3. 지도자


[image]
은퇴한 후 이용발은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연세대학교에서 골키퍼 코치를 맡았으며, 2014년 인천 유나이티드의 골키퍼 코치로 부임하여 프로 무대 지도자로 변신했다. 2015년부터 이영진 감독이 이끌었던 대구 FC에 합류하였으며, 조현우대한민국 최고의 골키퍼 중 한명으로 지도하였다.

2015년, 같은 시기에 대구 FC의 코치로 부임한 안드레와 프리킥 대결을 했는데, 안드레가 잘 차기도 했지만 유효슈팅 4개 중 꼴랑 1개 만을 막아내며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주었다.

4. 모자


[image]
이용발은 2000년부터 은퇴 전까지 두건과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경기에 나서면서 카우보이로 불리면서 모자는 이용발의 상징과도 같았는데, 모자를 쓴 이유는 팬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5].
당시 감독이던 조윤환 감독도 이용발의 패션에 대해 독려하기도 하였지만 이용발에게 써서는 안되는 모자를 알려주기도 했는데, 바로 카우보이 모자였다. 이용발은 벗겨지기 쉽고 시야가 좁아지는(?!) 카우보이 모자에 신경쓰는 탓에 경기에 집중하지 못했으며, 2003년 K리그 올스타전에서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출전했다가 카우보이 모자가 떨어져서 줍는 사이에 실점을 허용하기도 했었다.
결국 조윤환 감독은 이용발에게 카우보이 모자를 쓰지 말것을 주문하였었다.[6]
이렇듯 경기에서 모자를 쓸 만큼 모자에 대한 애정이 강한 이용발은 모자 수집광으로서 60개의 다양한 모자 외에 두건만도 10여 개나 갖고 있다는 후문이다.

5. 기타


  • 군대를 일반 현역으로 다녀왔다. K리그가 당시 인기가 없어서 자대에서 그가 프로 축구 선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이용발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자대에서는 축구 정말 잘 하는 후임으로 선임들에게 사랑 받으며 군생활 편하게 했다. 프로선수 레벨 쯤 되면 골키퍼라도 발 기술은 일반인과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기 때문. 그리고 킥 파워도 일반인이 보기에는 엄청난 파워였을 것이다.[7]군대스리가시절 이용발은 골키퍼가 아닌 필드 플레이어로 뛰었다. 최전방 공격수까지 해 봤다고.
[1] 참고로 이들은 1991년 U-20 월드컵 당시 남북 단일팀의 주전 3백으로 맹활약, 조별리그 3경기 2실점을 기록하며 단일팀의 8강 진출에 보이지 않는 기여를 한 톱클래스 수비수들이었다. 여담으로 이 때 남북단일팀의 주전 골리는 이용발에게 밀려 단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한 채 은퇴한 최익형이었다(...)[2] 이에 비견될 골키퍼는 동시대엔 김병지, 후배중엔 정성룡 정도다. 정성룡은 연령대 대표팀은 물론 월드컵 무대에서 유려한 공격루트로 활용되었고, 김병지는 윙으로 뛰어도 되겠다는 농담을 들을 정도로 발밑이 부드러웠다.(그 유명한 파라과이전 사건도 발밑이 좋다보니 오버를 해버린 것 이다.) 다만 김병지는 골키퍼의 빌드업에 대한 인식이 미약했던 시절 부천과 팀 컬러가 달랐던 울산, 포항에서 전성기를 보낸 탓에 이용발 정도로 적극적으로 관여하진 못했다.[3] 시야와 패스선택은 킥력보다 더 중요하다. 킥이 아무리 좋아도 바로 앞밖에 못보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 다른 포지션 이야기지만 김영권홍정호가 선배 홍명보보다 월등한 테크닉을 가지고 있지만 홍명보같은 빌드업 리더가 못 되는건 경기 보는 시야와 판단력에 기반한 패스 선택이 받쳐주지 못하기 때문이다.[4] 이 환상의 미드필더진이 왜 환상인고 하니 실력도 좋았지만 1998~1999년 딱 2시즌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고신인 이을용이 전역 후 1998년에야 팀에 합류했고 2000년에 윤정환이 세레소 오사카로 떠났다.[5] 사실 과거는 물론 현재도 종종 모자를 쓰는 골키퍼들이 해외에 일부 있다. 리버풀의 골키퍼 알리송 베케르가 대표적. 경기 중에 태양과 마주 보게 되는 경우 눈이 부셔서 슈팅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쓰는데, 아래에서 조윤환 감독이 지적하듯이 모자의 챙 때문에 시야가 좁아지는 단점도 있기에 애용하는 편은 아니다. 체흐의 경우 경기 중 심한 부상으로 이후 머리 보호를 위해 헤드기어를 착용하면서 아이덴티티가 되기도.[6] 근데 다음 경기에 새로운 모자를 쓰고 나왔다고 한다.[7] 게다가 K리그 역사상 골키퍼 포지션에서 발기술과 킥력이 좋기로 손꼽히는 인물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