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사본

 

1. 개요
2. 공관 복음서 문제
3. 마태오(마태)와 루카(누가) 복음서의 형성
4. Q문서의 특징
4.1. 예수의 직접 발언의 특징
5. 비판
6. Q 사본으로 유추되는 어록


1. 개요


'''Q문서''' 혹은 '''Q자료''' 혹은 '''예수 어록'''은 기독교 신학에서 복음서에 관한 매우 유력한 가설이다. 이름은 독일어에서 '원천'을 가리키는 단어인 크벨레(Quelle)의 머릿글자를 따왔다.

2. 공관 복음서 문제


신약성경에서 예수의 말과 행적을 다룬 책 4권을 복음서라고 부르는데, 각각 마태오(마태)복음서마르코(마가)복음서루카(누가)복음서요한 복음서이다. 이 중 마태오(마태)ㆍ마르코(마가)ㆍ루카(누가) 등 세 문서는 요한 복음서에 비해 겹치는 서술이 많아서 공관복음서라고 부른다. 여기서 '공관(共觀)'이란 관점이 공통되었다는 뜻이다.[1]
특히 공관복음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리스어 원문으로 보면 글자나 단어 한두 개 정도만 차이나고 나머지는 완전히 일치하는 문단이 여럿 있다는 것이다. 한 예로 마태 3, 7-10절과 루카 3, 7-9절을 들 수 있다.
이로써 어휘와 어순까지 일치하는 이 상황은 복음서들이 서로를 보고 썼거나, 아니면 해당 복음서보다 더 먼저 쓰인 특정한 문서를 복음사가들이 똑같이 보고 썼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는데, Q복음서는 이중 후자에서 가리키는 '''먼저 쓰인 문서'''를 가리킨다.

3. 마태오(마태)와 루카(누가) 복음서의 형성


1838년 신학자 크리스티안 빌케(Christian Wilke)의 연구로, 현대 성서학에서는 4대 복음서 중 제일 먼저 마르코 복음서가 쓰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마태오 복음서에는 마르코 복음서의 90%, 루카(누가)복음에도 70% 가량이 포함되었다. 마르코 복음서는 비교적 초기 신학의 견해를 취하였고 문체 역시 간결하다. 또한 루카 복음서는 서문에서 '많은 이들이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데에 손을 대었다.'는 말이나 '이 것은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전해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이다.'는 말을 통해 이미 그 이전에 예수에 관한 서술이 여럿 있었고, 루카 복음서는 그것을 편집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정황을 통해 루카와 마태오는 마르코 복음을 참조해서 서술했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마르코 복음서와 중복되는 서술을 제외해도 역시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에 적지 않은 중복된 구절이 있다. 마르코에는 없지만 마태오와 루카에 공통된 내용의 출처가 Q문서라고 상정한다. 그리고 그 중복을 제외하고 다시 자료를 보면 루카 복음서만의 서술과 마태 복음만의 서술이 약간씩 있는데, 전자를 L자료, 후자를 M자료라고 한다. 당연히 루카(Lukas) 와 마태오(Mattew)의 앞글자를 딴 것. 이 L자료와 M자료는 서술된 문서일수도, 아니면 저자의 교회에서 구전되던 이야기일 수도 있다.

4. Q문서의 특징


예수어록이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듯이, Q 문서는 예수의 입에서 직접 나온 말씀만 기록한 것으로 추정 혹은 상정한다. 종교학에서는 종교가 발생할 때 제일 먼저 기록되는 것이 일반적으로 창시자가 주창한 교리나 가르침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Q 문서가 기록된 시기는 50-60년대로 추정된다. 예수의 직접적인 증언을 할 수 있는 사도들이 하나 둘 씩 죽어갔을 시기이기 때문.
Q문서와 반대로 기적 이야기만 모은 문서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기적 이야기의 배열순서가 비슷하고, 마르코 복음서는 없지만 마태오와 루카에서 중복되는 기적도 존재하기 때문. 그러나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데에는 기적 이야기는 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큰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물론 기적 이야기가 그리스도교 극초기에 생성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예수의 사상과 밀접하게 관련된 교훈을 주는 에피소드들이기 때문에 초기 교회의 신학이 어땠는지 참고할 사항은 될 수 있다.
그리고 외경토마스(도마) 복음서가 발굴되면서 Q문서가 단지 상정된 가상의 문서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으리라는 추정에 힘이 실렸다. 토마스 복음서 역시 공관복음서와 원천자료를 공유하기 때문. 일부 학자는 토마스 복음서가 바로 그 Q문서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다만 좀 더 후기에 쓰인 자료들의 특징[2]이나 신학적 관점[3]을 보이고 있어서 토마스 복음서가 완전한 Q자료일 가능성은 낮다. 게다가 발굴된 건 콥트어 번역본이라 이미 변개가 가해진 것이기 때문에, 현존하는 토마스 복음서는 Q문서를 온전히 보존하진 못했을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심도가 있는 신학서에서는 Q자료에 대한 지식을 기본전제로 하기 때문에, Q자료에 대한 개념을 아예 모르면 읽기가 힘들다.

4.1. 예수의 직접 발언의 특징


공관 복음서와 토마스 복음서를 바탕으로 Q자료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 시도들에서 공통적으로 보는 예수의 입에서 직접 나오는 말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역설적인 비유가 자주 쓰인다.
  • 상식을 뒤집는 비유가 자주 쓰인다.
  • 종말론적 테마가 자주 나온다. [4]
  •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음을 선언한다.
  • 약자들의 행복을 선언한다.
  • 강자들의 불행을 선언한다.
  • 가부장적 가정과 대립된다.

5. 비판


Q문서 가설에 따르면 마르코 복음서마태오 복음서/루카 복음서의 자료가 됐기 때문에 마르코 복음서가 좀 더 원형에 가까운 문장을 써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겹치는 부분은 대부분 그러하다. 하지만 몇몇 구절은 거꾸로 마르코 복음서마태오 복음서루카 복음서를 보고 쓴 듯 보여서, 소수긴 하지만 Q문서 가설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러한 학자들 의견에 따르면 복음서가 쓰이는 동안 관여한 전승/편집적 요소는 훨씬 복잡하다.
간단하게 서술하자면, 애초에 사도들이 입으로 전한 전승은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시작한다. 사도들이 온 교회에 퍼져서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전한 이야기가 '''각 교회들에서 독자적으로 기록되었고''' 그 기록들이 섞이고 편집되고 합쳐지면서 최종적으로 공관 복음서가 되었다는 것. 또한 이들이 전하는 전도는 각기 보는 관점이 달랐을 확률이 크다. 실제로 한 말이더라도 전도자의 관점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니면 그냥 사장된다는 것. 이 가설대로라면 완전히 하나로 서술된 Q 문서는 존재하지 않고, 여러 문서가 점점 수렴해가면서 현 복음서에 Q 문서의 형태를 남긴 것이다. 또한 현 복음서들은 저자들이 서술했다기보단 이런 다양한 자료와 문서들을 자신의 신학과 관점에 맞춰 취사선택해서 만들어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초기 교부들은 저서에서 Q문서라고 생각될 만한 문헌을 언급하지 않았다. 만약 복음사가들이 공통적으로 참조할 만한 문서라면, 초대교회 시절에도 분명히 중요한 자료로 간주되었을 텐데 말이다.
또 다른 문제점은 Q 문서 가설로 내놓은 결과물이 역사적인 관점에서 본 예수, 즉 연구자들 스스로가 현실적이라고 납득하는 부분만을 실제 예수의 발언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했다거나 최후의 만찬에서 한 발언 등도 공통되게 공관복음서에 기술되었지만, 신성성을 배제하고 현실성에만 치우친 태도를 견지한 채 연구한 결과물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신학 이전에 신앙으로 Q문서가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복음서의 성립 연대에 대해서 가장 고전적인 해석은 아우구스티노가 주장한 마태오-마르코-루카-요한의 순서다. 현 성경도 이 순서에 따라 복음서를 배치하였다. 현대 신학자 중 존 웬햄 등 학자도 같은 순서를 주장하며 Q문서를 부정하는데, 이것을 어거스틴 가설이라고 한다.
비슷하게 마태오-루가-마르코-요한의 순서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를 그리스바흐 가설이라 부르는데 윌리엄 파머 등이 지지하였다.
현대 학계에서 마르코 복음서가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위와 같은 가설들은 비주류 소수설에서 벗아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Q문서를 부정하지만 마르코-마태오-루가 설을 주장하는 파러(또는 파러-굴더) 가설 쪽이 Q 문서 가설(또는 두 자료설)에 대한 가장 진지한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편이다.
결론적으로 Q문서라는 '확실하게 정립된 하나의 문서'가 실존했는지 증명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그러나 현 복음서의 문제를 가장 확실하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이기 때문에 널리 받아들여진다.

6. Q 사본으로 유추되는 어록


'''성경에서 예수가 말하는 부분의 대사를 무분별하게 쓰지 말고, Q 문서 가설에서 '예수의 실제 발언'으로 간주하는 부분만을 쓸 것.'''
다만 Q문서의 한계점도 있거니와, 아래의 발언들이 복음서의 과장성을 쳐내고 실제 예수의 발언만 간추렸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어디까지나 가설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실제로 발견된다 하더라도 아래 나와있는 발언들만이 전부는 아닐 확률이 높다. 오히려 복음서에 나온 모든 어록을 다 포함하고도 더 많은 어록이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어서 사도행전 20장 35절에는 "나는 여러분도 이렇게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하신 주 예수의 말씀을 명심하도록 언제나 본을 보여왔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발언은 복음서에는 기록이 없다. 또한 초창기 몇몇 교부들이 남긴 문서에는 복음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예수의 발언'이 남아 있다. 이런 목록을 '아그라파(Agrapha)'라 부른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5장 17절 ~ 18절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6장~ 3,4절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7장 1-2절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오 복음서 5장 44절


'할 수만 있다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안 되는 일이 없다.

마르코 복음서 9장 23절


그러나 이제 내 말을 듣는 사람들아, 잘 들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루카 복음서 6장 27절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마태오 복음서 22장 37절 ~ 40절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인 줄을 알고 있었다면 내 돈을 돈 쓸 사람에게 꾸어 주었다가 내가 돌아 올 때에 그 돈에 이자를 붙여서 돌려 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

마태오 복음서 25장 26~27절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마태오 복음서 10장 28절


손이나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던져버려라.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구의 몸이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 또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불붙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한 눈을 잃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

마태오 복음서 18:8~9


그러나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날이 올 것이다.

루카 복음서 6:24~25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거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고 말할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7:21~23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카 복음서 5:31~32, 마태오 복음서 9:12~13, 마르코 복음서 2:17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르코 복음서 2:27~28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루카 복음서 9:48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5]

루카 복음서 9:58, 마태오 복음서 8:20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루카 복음서 9:62, 마태오 복음서 8:22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놓고 갔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루카 복음서 10:29-37 [6]



[1] 단, 후대 성서비평학에서는 공관복음서끼리도 저자의 의도나 관점은 상당히 차이가 있음을 확인했다.[2] 예수의 비유나 발언은 역설적이거나 비상식적인 면을 보이는데, 후대에 쓰인 문서일수록 그 역설이나 비상식적인 면을 순화하려고 한다.[3] 토마스 복음에서는 신을 부정적인 맥락에서 언급하고, 영혼과 육신의 이분법적 관점을 강조한다.[4] 이에 대해서는 복음서 편찬 당시 이미 유대독립전쟁으로 예루살렘이 페허가 되었기 때문에 이를 예수 생전에 예언했다는 식으로 수정하였다는 의견이 있다. 이러한 것을 '사후예언'이라고 부르는데, 일이 끝난 뒤(사후事後)에 한 예언이란 뜻이다. [5] 민초의 난의 가사는 이 성경 구절에서 따온 것이 맞다.[6]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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