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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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루카 복음서에서 등장하는 이야기.
2. 원문
2.1. 공동번역성경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놓고 갔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의 복음서 10장 25-37절
2.2. 개역성경
(눅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 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 10: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눅 1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눅 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눅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1]
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눅 10:33) 어떤 사마리아[2]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눅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눅 10: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2.3. 가톨릭 성경
루카 복음서 제10장 25-37절: 가장 큰 계명(마태오 복음서 22,34-40 ; 마르코 복음서 12,28-34)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두들겨서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3]
,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예수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율법교사에게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3. 해설
예수가 가르침을 펼치고 있는데 어느 율법학자가 딴지를 건다. (성경에는 이 율법학자가 스스로 옳아보이려고 이 질문을 했다고 전한다.) 그 내용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이웃을 사랑하라 했는데, 이웃이 과연 누구냐?"는 것. 이에 예수는 일화를 들어 설명한다.
어느 유대인 상인이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되어 맨몸으로 길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사제가 길을 가다 이를 보고는 피해 가 버렸다. 뒤따라 레위인이 지나갔으나 역시 무시하고 지나가 버렸다.[4] 그러나 유대인들이 멸시해 마지않던 사마리아인은, 길바닥의 상인을 보자 응급처치를 하고 여관에 돈을 내며 유대인을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한다. 심지어 비용이 더 들면 '''자신이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하기까지 했다.
예수가 이 셋 중 누가 강도 만난 상인의 이웃이냐 묻자 율법학자는 자비를 베푼 이라고 대답한다.[5] 이에 예수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고 답한다.
예수의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이해하려면 우선적으로 사마리아인들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사마리아인은 아시리아에 의해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 후 유대인과 타민족의 혼혈로 생긴 종족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의 피를 더럽힌 존재라 멸시받고 박해받았으며, 그 반목은 매우 깊었다. [6]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사마리아인이라도 진정으로 자비를 베푸는 자는 이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이웃이란 율법학자와 같은 유대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혈통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뜻을 행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어려운 이들을 돕고 사랑하는 자들이란 것이다. 비유에서 부정적으로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게 된다는 율법조문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 즉 사랑을 실행하지 못하였으므로 진정한 이웃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은 누가복음(루카 복음서) 8장 22절에서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있다는 말에 "내 어머니와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대답한 것에서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요새도 중동은 자폭테러가 일상화된 나라임을 생각해보면... 씁쓸해지는 대목이다.
<예수, 하버드에 오다>라는 책에 의하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인물들은 랍비들의 예화에 나오는 단골인물들이다. 예수의 예화가 다른 점은, 마지막에 보통 이스라엘 사람[7] 대신에 사마리아인이 온다는 것. 우리나라 식으로 치면 양반와 선비, 농부 대신에 양반와 선비 그리고 여진족이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후술되어 있듯이, 사제나 레위인은 사제 계급으로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지게 되지만 이들의 행동은 종교법상으로는 다시 정화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만 좀 걸릴 뿐 아무런 문제는 없다. 또한 보통 깔끔을 떨거나 율법을 방패로 선한 일을 하지 않는 역할이라서 예화에서 이들이 보인 행동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준. 이야기의 포인트는 마지막에 보통 이스라엘 사람 대신 사마리아인이 나온다는 것이다. 즉, 이 이야기의 논점은 "누가 이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과 함께 보통 이스라엘 사람들도 사제 계급과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마리아인들이 더 낫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또한 예수의 시대에는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는 길은 꼬불꼬불하고 거칠며 강도가 들끓기로 악명이 높았다. 거기다 전술했듯이 사제나 레위인같은 유대인 사제 계급은 시체같은 부정한 것을 만지면 그 날로 자격 박탈이므로, 다친 사람을 잘못 만지다가 죽거나 하면 자신들이 크게 곤란해졌을 것이다. 이 때문에 성서고고학자 김성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예수가 뭘 잘 몰랐다"라는 느낌의 디스를 시전했으나, 이에는 반론이 존재한다. 예수는 당시 상당히 급진적인 인물이었는데, 원래 유대인은 안식일에 일을 하면 안됐지만 예수는 이를 부정하면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도 했고, 율법만 지키던 바리사이들이 주요 적대세력으로 신약성경에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예수는 그 사람이 어느 자리에 있던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던 분이었다. 쉽게 생각해봐도 "자기 제사장 자격을 지키려고 죽어가는 사람을 모른 체 하는 일"이 성서적으로 옳은 행동일 리가 없다. 또한 자기 희생을 동반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 성경의 기본적인 모티브이기도 하다.
예수가 활동하던 시대의 유대 사회에서 이런 비유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은 자신들의 일상에서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류였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이 정도로 취급을 당하는 부류가 존재하지 않지만, 굳이 비유를 하자면, 외국인 노동자, 동성애자나 노숙자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다. 위 본문을 현대적인 시각에서 재구성을 한다면 매우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어떤 신학자가 예수께 '이웃이 누구냐'고 여쭈었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무슬림 외노자가 진정한 이웃이다'는 대답을 들은 것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당시의 예수의 이런 비유는 기존 종교계의 기득권층에 대한 엄청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상식적인 선'에서의 해석이고, 실제로 사마리인의 비유는 곧 '예수를 대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하는 말과 같다. 율법학자가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29절에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예수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하며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라고 되묻는다. 이를 그대로 치환한다면 결국 '내 = 강도 만난 자 '라고 할 수 있는데, 결국 예수가 하고자 하는 말은 '강도 만난 것과 같은 너희를 내가 구원하기 위해 왔는데, 너희는 자신의 의, 자신의 깨끗함을 내세워서 나(=예수)를 사마리아인으로 취급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구하러 온 나를 십자가에 박히게 하였다.' 라는 것을 반증해서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남을 도와주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자(=비유 상 사마리안, 실제로 예수)' 마저 자신의 의, 자신들의 율법을 기준으로 사마리아인, 죄인 취급하는 (죄인과 세리, 창녀와 어울린다고 손가락질하면서) 너가있는데 네가 생각하기에 너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내려온 나를 생각하라' 라는 의미이다. 성경을 올바르게 보려면 큰 틀에서 봐야하는데, 루카복음 10장은 전체가 이러한 구성으로 되어있다. 곧, 자신의 정의감에 심취하여, 인간의 기준으로 21~24절 '지혜있고 슬기있는 자에게는 숨겨져 있다' 라는 말이 곧 실제로 지혜있는자가 아니라, 인간의 기준으로 자신이 지혜있다고 여기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그들 스스로의 인간적 틀이 너무 확고한 나머지 하나님의 의가 들어갈 수가 없고,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숨겨진 것'이 되어서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뒤의 마리아와 마르다 비유에서도 이는 그대로 드러난다. 마르다에게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나 몇 가지만 하던지, 하나만 하라' 라고 하였다. 이는 예수를 섬기는 일, 곧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 딴에는 하는 일들로 인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마르다의 경우는 아직 예수에게 책망받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러한 '자신의 의'가 더 발전한다면 바로 앞의 예시의 율법학자처럼 자신의 의가 너무 커져서 자신의 생명을 구한 자 마저 자비를 베푸는 것을 거절하게 된다는 것이 이 해석의 진정한 의미이다.
기존 문서 역사 중에 이러한 해석 자체가 '알레고리적 해석'이라고 삭제된 적이 있는데, 이는 과거 교부 어거스틴의 알레고리적 해석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삭제한 것이다. '알레고리'와 '알레고리적 해석'은 다른 것인데, 어거스틴의 해석은 지나치게 자의적인 부분이 많아 '알레고리적 해석'이라고 비합리적이라고 오늘 개신교 교단에서 대부분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과 다르게 성경 자체의 풍유적 해석으로서 '알레고리'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 해석이 무리한 '알레고리적 해석'인지 아닌지를 따지려면 해당 에피소드의 전후 맥락과 앞뒤 절을 보면서 해석을 해야 하는데, 루카복음 10장 전체에서 나타내는 '어떠한 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인가' 라는 주제에서 이러한 에피소드가 들어간 것을 보면 이러한 해석은 과도한 알레고리적 해석을 빼고 핵심적인 부분에서는 알레고리로서 풍유법이 사용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4. 인용
근래에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역사가 많이 안 알려져서 함의가 좀 희석되었고 어째 대가를 바라지 않고 기꺼이 남을 돕는, 자비심 많은 인간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경향이 있다. 때문에 서구권에서는 병원 이름에 '선한 사마리아인(Good Samaritan)'을 많이 쓴다. 영화 다이 하드 시리즈 3편에선 별 생각없이 맥클레인을 돕다가 같이 곤경에 휩쓸리게 된 흑인 상인 제우스을 두고 악당 사이먼이 시종일관 사마리아인(Samaritan)이라고 비꼬는데 이 장면 역시 그런 의미에서 나온 것이다.
위기에 처한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의도치 않은 피해를 입히면 죄가 경감되거나, 자신이 위험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피해자를 돕지 않은 경우에는 처벌받는 선한 사마리아인 법의 개념도 여기서 나왔다.
교회나 성당에서 흔히 예제로 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주제로 설교를 준비하던 신학생들조차, 설교에 늦지 않기 위해서 실제로 복도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돕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가더라"라는 내용의 예화가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종교계에 돌고 있는 예화들의 거의 상당수가 출처 불명의 왜곡된 뜬소문 위주라는 것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부분인데, 1973년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실제 수행된 실험이 유래이다.[8]
해당 실험은 시간적 압박의 여부가 이타성을 감소시키는가에 대한 실험이었다. 신학생들에게 특정 주제에 대한 발표를 준비시키고 대학 내의 어떤 길로 지나오게 한 다음, 그 길목에 어딘가 아파보이는 척 하는 연기자를 배치했다. 길목에 있는 건물 문 앞에 있었기 때문에 예화로 들어지는 것처럼 환자를 뛰어넘어간 사람은 없었겠지만, 그냥 지나친 사람은 확실히 있었다. 흥미로운 건 이 실험에선 피험자들을 시간이 촉박하다고 한 경우, 시간에 여유가 있다고 한 경우를 나누고, 다시 준비시킨 발표 내용도 신학과에서 선호하는 직업에 대한 것과 '''선한 사마리아인의 일화에 대한 것'''으로 나눴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시간의 여유였다는 것이다. 즉 시간이 널널한 사람이 보다 많이 이 환자를 도와줬으며, 사마리아인 일화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느냐는 놀랍게도 그다지 차이를 내지 못했다.
이 실험이 민간 설교에 크게 퍼진 이유는 이 실험의 피험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크게 부끄러워하거나 결과를 보고 인상깊게 여겼는지, 후일 정식으로 목사가 된 뒤 이 일화를 반면교사로 직접 언급하는 경우가 여럿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2018년 기준으로 초등학교 6학년 도덕책에도 이 비유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