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복음서
그리스어 Ευαγγέλιο του Θωμά
라틴어 Evangelium secundum Thomam
영어 The Gospel According to Thomas
근현대에 들어서 새롭게 발견된 복음서. 도마복음이라고도 한다. 예수 어록(Saying) 총 114개로 구성되었다.
예수가 사망한지 10년 ~ 100년 후에 지어진 문서라고 추측된다.[2] 여러 역사적 맥락 때문에, 20세기 들어서 여러 가지로 그리스도교에 떡밥을 던진 뜨거운 감자이다.
1945년 이집트의 나그함마디에서 2000년 전 당시 이집트어였던 콥트어로 적혀진 그리스도교 계통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퇴비를 찾던 농부 무하마드 알리가 발견했는데, 이 문서들이 돌고 돌아서 카이로의 시장에까지 나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발견된 것이다. 이를 발견된 지역의 이름을 따서 나그함마디 문서(Nag Hammadi Library)라 부른다.
토마스 복음서가 있었다는 사실은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에 학자들도 알긴 했지만, 그 전까지는 실물이 전혀 없었으므로 그 내용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천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비록 사본 단 1개지만 실물이 나타난 것이다. 이집트 고문서성이 공개하지 않다가 1956년에 영인본[3] 을 출판하자 학자들이 연구에 들어갔다.
이후 연구가 진행되면서 1898년 이집트의 고대 로마 유적지에서 발견된 그리스어로 된 옥시링쿠스 파피루스 중에도 토마스 복음서 내용의 일부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4] 심지어 1장~37장 까지 앞부분이 3~4개의 묶음으로 부분 부분 나뉘어져서 그 부분에 맞는 순서대로 남아 있다.(일부 결손) 그 내용은 나그함마디와 비교하면 똑같은데, 다만 2장과 36장만이 기존의 내용에다가 아주 조금 더 추가 되어 있으며, 그 추가된 내용은 기존 내용의 의미를 해치지도 않는다. 따라서 37장 이후의 내용도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데, 이는 이집트 나그함마디 문서보다 앞서면서도, 똑같은 내용의 사본이 과거 그리스에 온전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거꾸로 추측해본다면, '그리스의 토마스 복음이 150년 뒤 이집트에도 똑같은 내용으로 전승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소수의 일부가 봤던 것이 아니라, 적어도 과거에 그리스와 이집트에서 이런 자료들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5] [6]
나그함마디 문서는 서기 340년 경에 필사된 것으로 보여지고, 옥시링쿠스 문서는 서기 200년 경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들은 '사본'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원본이 지어진 연대는 훨씬 더 이른 시기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도마복음은 예수가 사망한지 10년 ~ 100년 후에 지어진 문서라고 추측된다.
토마스 복음서에서 예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요약하면, 자신의 삶을 살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이란 무엇일까? 예수는 "나이 먹은 어른이 7일된 작은 갓난 아기에게 삶의 자리에 대해 묻는 것을 주저치 않는다면, 그 사람은 살 것이다." (도: 4) 라고 하였는데, 삶이란, 어린 아이의 순수함을 닮는 것을 말한다. 이는 마태 18장 1~5절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나를 받아들이듯이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에서도 나온다.
또한, 이러한 삶에 대한 고민은 힘든 삶 속에서도 항상 이루어져야 한다. "힘들게 일하면서도 삶을 발견하는 자여, 복이 있도다!" (도:58) 라고 하였는데, 현실적인 생활에 쫓기면서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되어야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삶은 어떻게 알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도: 2) , "구하는 자는 찾을 것이다. 두드리는 자에게는 열릴 것이다. " (도: 94) 와 마찬가지로 그 뜻을 구해야 그 삶에 대해서 알게 된다. 또한 그것은 스스로 구해야 하는 것인데, "너희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만들어낸다면, 너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이 너희를 구원하리라. 너희가 너희 안에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너희 안에 가지고 있지 않는 것으로 인해 너희는 죽으리라. " (도: 70) 이라 하였다. 따라서 그 뜻을 가진 자는 그 결과를 더 얻을 것이고, 뜻을 지니지 않는 자는 도리어 가지고 있던 것도 없어지게 될 것인데, 그래서 예수는 "손에 무엇이라도 가진 자는 더욱 받게 될 것이요, 그리고 가지지 못한 자는 그가 조금 가지고 있는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다. "(도: 41) 라고 말했던 것이다.
삶의 구체적인 실천은 '아이와 같이 순수해지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나이 많은 어른이 7일된 작은 갓난 아기에게 삶의 자리에 대해 물을' 정도로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 하지만 제자들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는 아기가 되어야지만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예수는 "너희들이 둘을 하나로 만들 때, 그리고 너희들이 속을 겉과 같이 만들고, 또 겉을 속과 같이 만들고, 또 위를 아래와 같이 만들 때, 그리고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 된 자로 만들어 남자가 남자 되지 아니하고 여자가 여자 되지 아니할 때, 그리고 너희가 눈 있는 자리에 눈을 만들고, 손 있는 자리에 손을 만들고, 발 있는 자리에 발을 만들고, 모습 있는 자리에 모습을 만들 때, 비로소 너희는 나라에 들어가게 되리라" (도: 22) 라고 했는데, 이는 '아이와 같은 시선'을 가지라는 것이다. 아이는 마음에 있는 바가 바로 겉으로 드러나고, 겉의 표정으로 그 마음을 알 수 있으며, 여자를 섹시한 여성으로 보지 않고, 남자를 매력있는 남성으로 보지 않는다. 아이는 그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구별하지 않고, 그냥 하나의 사람으로만 바라본다. 따라서 위선과 가식이 사라진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 보아야 하느님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예수는 "너희가 그 둘을 하나로 만들 때, 너희는 인간의 자식이 될 것" (도: 106)[166] 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이 먹은 어른이 7일된 작은 갓난 아기에게 삶의 자리에 대해 묻는 것을 주저치 않는다면, 그 사람은 살 것이다. [...] 그리고 '하나된 자'가 될 것이니라." (도:4) 라는 문장과, "너희들이 '둘을 하나로 만들 때', 그리고 너희들이 속을 겉과 같이 만들고, 또 겉을 속과 같이 만들고, 또 위를 아래와 같이 만들 때, 그리고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 된 자로 만들어 남자가 남자 되지 아니하고 여자가 여자 되지 아니할 때" (도:22) 에서 나오는 "하나된 자"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를 알려면 우선, '바리새인'[167] 이 무엇인지 알아야 된다. 바리새라는 명칭은, 히브리어의 페루쉼(perushim), 아람어의 페리샤야(perishayya'), 헬라어의 파리사이오이(Pharisaioi)에서 유래하고, 파-루슈(parush)의 복수형으로서 "'''분리된 자들, 분리주의자, 구별된 자'''"를 뜻한다.
여기서 '분리되고 구별된 것'은, 바리새인의 엄격한 가르침(율법)으로 인해 '형식'과 '그 본래의 속뜻'이 분리된 것을 말하며,[168] 바리새인들이 형식에 집착하였기 때문에 그 본래의 속뜻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예수는 "너희는 유대사람들처럼 되어버렸도다. 그들은 나무(가르침)를 사랑하지만 그것의 열매(삶의 풍요로움)는 증오하며, 열매를 사랑하지만 그 나무는 증오하기 때문이다. " (도:43) 라고 말했던 것.
또한 도마 61장을 보면, 「 "하나가 온전(whole)하면, 하나는 빛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요. 그러나 하나가 나뉘어지면(divided), 하나는 어둠으로 가득차게 되리라." 」라고 말했는데, 이는 나뉘어진 것(divided)에 상대되는 말로써 '하나의 온전함(whole)'을 이야기 하였으며,
도마 72장에서도, 「 "남자여! 나를 나누는 자(divider)로 만들었는가? 그는 몸을 돌려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말했다: "나는 나누는 자(divider)가 아니로다. 그렇지 않은가? " 」 라고 말했는데, 마찬가지로 예수는 '나누는 자'를 부정적으로 해석했음을 알 수 있다.
도마복음에서의 예수는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형식보다는 마음을, 가식보다는 솔직함을, 외면보다는 내면을 더 중요시 하였는데, 이를 종합해보면 "하나된 자"의 뜻은, 바리새인으로 통하는 형식적, 물질적, 외면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위선과 가식을 떨쳐버리고 내면의 온전한 삶의 가치에 집중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예수는 기존에 문제가 되었던 바리새인(분리된 자)의 형식주의를 반대하므로써, 아이와 같이 계산하지 않고 가식과 위선이 없는 "하나된 자"를 말했던 것인셈.[169] [170] [171]
아이와 같이 순수해야 되지만, 그렇다고 아이와 같이 순진해서는 안된다. 예수는 이를 두고, "아이들은 밭을 돌려주기 위하여 주인들 앞에서 그들의 옷들을 벗는다. [...] 이러한 연유로 내가 말하노니, 한 집의 주인이 한 도적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주인은 그 도적이 도착하기 이전에 방비 태세에 있을 것이요, 그 도적이 그의 소유인 집을 뚫고 들어와 그의 물건을 훔쳐 내가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그렇기에 너희들이야말로 이 세상에 대하여 방비 태세에 있으라." (도:21) 고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은 가식의 옷을 벗어버리고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되지만, 그렇다고 도적이 우리들의 물건을 훔쳐가게 놔둬서는 안되며, 항상 방비태세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는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여라. "(도: 39) 라고 말하였다. 비둘기처럼 순수해야되지만, 그렇다고 순진해서는 안되며, 뱀처럼 지혜로울 줄도 알아야 된다는 것.[172]
도마에서는 사람을 밝게 만드는 예수의 따뜻한 말과 가르침을 빛에 비유하였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이렇게 어둠을 밝히는 빛이 있다는 것이다. "빛의 사람 속에는 빛이 있나니, 그것은 온 세상을 비추리라. 그것이 비추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어둠이니라." (도: 24) 라고 말했듯이, 누구에게나 자신의 마음속에는 따뜻한 마음씨가 존재하며, 이는 온 세상을 비출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비추지 않는다면 어둠이 되는 것이다.
또한 예수는 그 빛을 주변 사람들에게 널리 비추어라고 말하였다. "너의 귀로 네가 듣는 것을, 너의 집 지붕 위에서 타인의 귀로 전파하라. 그 어느 누구도 등불을 켜서 바구니 아래 감추거나, 숨겨진 장소에 두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등잔대 위에 올려놓나니, 이는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니라. " (도: 33) 따뜻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과 행동은 숨겨두지 말고, 널리 알려서 서로를 따뜻하게 만들어라는 것.
이러한 빛은, '''정경'''인 '''야고보서''' 1장 17절에서도 "모든 선한 선물과 모든 완벽한 선물은 위로부터 온다. 그리고 절대 변화하지 않는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온다. " 라고 말했듯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도마 83장에서 "모습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속에 있는 그 빛은, 아버지의 빛의 모습 안에 숨겨져 있다. 그는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그의 빛에 의해 숨겨져 있다. " 라고 말한 것이며, 또한, 도마 77장에서는 "나는 모든 것 위에 있는 빛이다. 나는 전부이다. 나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으며, 나에게로 모든 것이 도달한다. 한 편의 장작을 쪼개 보아라! 나는 거기에 있다. 그 돌을 들어 보아라! 그러면 너희는 거기서 나를 찾을 것이다. " 라고 말한 것이다.
바로 위, 기존 신약성경 내의 '''빛의 자식''' 들에 관한 수많은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기서의 빛은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섬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도마의 빛이 영지주의라면, 공관복음서의 빛도 영지주의라 해석해야 되며, 만약 기존 성경에서 나오는 빛은 말씀과 가르침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도마의 빛도 말씀과 가르침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 때문에 도마복음을 영지주의로 볼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가 '너희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본다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빛에서 왔고, 빛의 자식이며,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선택받은 자'라고 말해라고 하였다. (도:50) 여기서, 빛의 자식이라는 말은 위의 야고보서(1:17)에서도 있었듯이 성경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이기에 문제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선택받은 자'는 문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다음 구절을 보면 다시 그 의혹이 풀린다. "그들이 너희에게 묻기를, ' 너희 속에 너희 아버지가 계신다는 증거는 무엇이냐? ' 라고 한다면, 그들에게 말하라. ' 그것은 움직임이요, 안식이로다. ' " (도:50)
즉, 우리 속에 하느님이 계신 증거는, 우리가 '''움직이고 휴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움직이고 휴식을 취하는 것(motion and rest)은 누구나 '하는 것'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속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증거가 이적(異蹟, miracle)을 행하는 것이었다면 '선택받은 자'는 소수에 그칠 것이고 이것은 영지주의 영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가 말한 그 증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움직임(motion)과 안식(rest)일 따름이다.
빛은 온 세상을 비출 수 있고,(도:24) 그 등불빛은 숨기지 말고 누구나 볼 수 있게 등잔대에 올려놓으며,(도:33) 하느님에게 선택받은 인간이라는 증표가 누구나 하고 있는 움직임과 휴식(도:50)인 것을 볼 때, '''이 빛은 보편적인 것이고 외부에 개방적인 것이며 동시에 누구나 하고 있는 평범한 것이다.'''
누구나 하느님의 선택받은 존재이고, 빛의 자식이며,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느님이 계신다고 예수는 외치는 것이다.
도마에서는 복음을 씨 뿌리는 것과 나무 심기로 비유하였는데, 씨앗에서 나무가 자라고, 열매를 맺어 그 결실을 얻게 된다는 것에 착안을 한듯 보인다. 즉 도마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씨앗과 나무' 는 예수의 말과 가르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똑같은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어떤 곳에서는 그것을 거부하고 어떤 곳에서는 앞서서 그것을 받아드리니, 복음이란 그 행위의 결과를 기대하지 않고 행하는 것이다. "보라! 씨 뿌리는 자는 나갔다. 한 줌의 씨를 손에 가득쥐고 그것들을 뿌렸다.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쪼아 먹어 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땅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이삭을 내지 못했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기운을 막았고 벌레가 삼켜버렸다. 그리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그것은 좋은 열매를 내었다. 그것은 육십 배, 그리고 백이십 배의 결실이 되었느니라." (도: 9)
그렇게 한다면, 아주 보잘 것 없어보이는 가르침이라도 진실된 가르침이었다면, 엄청나게 많은 결실로 돌아올 것이다. 이는 "아버지의 나라는 한 여인과도 같다. 그 여인은 아주 소량의 효모를 가져다가 밀가루 반죽 속에 숨기어, 그것을 많은 갯수의 빵으로 만들었다." (도:96) 라고 말한 것과 같다.
하지만 선지자는 고향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도:31) 왜냐하면 고향 사람들은 선지자의 어린 시절을 알기 때문에 그가 선지자라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복음을 펼칠 때, 기존 유대교의 가르침과 새로운 예수의 가르침은, 동시에 믿어져서는 안되는데, "한 종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기"(도:47) 때문이다. 또한 기존 유대교[173] 의 가르침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은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힘든데, 따라서 "어떤 사람도 숙성된 포도주를 마시고 나서 금방 새 포도주를 마시기를 원하지 않는다." 고 말했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도 억지로 기존 가르침에 익숙한 사람에게 강권하지 않는데, 따라서 "새 포도주를 오래된 가죽부대에 쏟아부으면 그것들이 터져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복음은, 그 가르침을 변형시켜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왜곡하려는 자들에게 줘서는 안된다. 이러한 자들은 본래의 순수한 가르침을 변형시키고, 잘못된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면서 속으로는 비웃고 조롱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성스러운 것을 개들에게 주지말라. 개들은 그것들을 거름 무더기 위에 던질지도 모른다. 진주들을 돼지들에게 주지 말라. 그들은 그것들을 진창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 (도:93) 라고 말했던 것이다.
도마에서 기도(복음)의 대상은, 충동을 인내하는 자(도: 7). 시작에 서 있는 자(18). 존재하고 있기 이전에 존재한 자(하느님)(19), 홀로된 자(49), 가난한 자(54), 힘들게 일하면서도 삶을 발견하는 자(58), 미움받고 박해당하는 자(68), 자신의 마음속에서 박해를 받아온 자(69), 영혼이 굶주린 자(69),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진심으로 지킨 자(79), 여자를 여자로 보지 않는 자(79), 위험을 예측한 자(103) 이다.
즉, 가난하면서도 인내하고 박해받는 자, 자신의 순수성을 찾는 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진심으로 지키는 자를 위해서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도마 6장에 이런 일화가 나온다. 「 그를 따르는 자들이 예수께 여쭈어 가로되, "우리가 금식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자선은 해야 합니까? 무슨 식사를 준수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거짓말 하지 말고, 너희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라. 모든 것은 하늘 앞에서 밝혀지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않을, 숨겨진 것은 없고, 벗겨지지 않을, 덮어진 것은 없나니라."(도:6) 」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기도와 자선(Charity) 마저도, 그것이 위선적이라면 해선 안된다. 기도하기를 싫어하는데 기도하는 척하고, 자선하기 싫은데 자선하는 척 하지 말라는 뜻.
심지어 예수는 그런 위선적인 기도와 자선은, 오히려 죄를 짓는 것이고 영혼에 해악을 끼치게 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는 이런 말까지 한다. "너희가 금식한다면, 너희는 너희 자신에게 죄를 자초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기도한다면, 너희는 죄를 지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구제(救濟)한다면, 너희는 너희 영혼을 해롭게 하는 것이다." (도:14) 하지만 그 다음 구절에서는, 순수한 마음으로 대접받을 때는 그들을 위해서 그들의 영혼을 위로해 줘라고 나온다. 시골사람들이 형편없는 음식을 순수한 마음으로 대접할 때는 거리낌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들을 위해 위로하고 그들의 영혼을 치료해 줘라고 말하였다.
그럼 누구를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것인가? 위의 챕터에도 나와있듯이 예수님은, '가난하면서도 인내하고 박해받는 자, 자신의 순수성을 찾는 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진심으로 지키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다.
또한 화려한 옷과 멋진 차림새도 가식과 다름없다고 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종일 무슨 옷을 입을까 신경쓰지도 않으며" (도:36), "권력자들이 좋은 옷을 입고도 진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 (도:78) 이다.
기존 권위의 타파와 복음의 전파는 필연적으로 가족의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그 당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란, 스스로를 박해의 길로 몰아넣는 행위나 다름없다. 따라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부터 그들을 말릴 것이다. 가정에서는 이로 인해 다툼이 생기겠지만, 이를 극복해야만 그가 원하는 삶을 찾을 수 있으며,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따라서 예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마도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던지러 온 줄로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이 땅 위에 충돌을 던지러 온 줄을 알지 못한다. 불과 칼과 싸움을 선사하노라. 한집에 다섯이 있게 될 때, 셋은 둘에, 둘은 셋에, 아비는 아들에게, 아들은 아비에게 대항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각기 홀로 서게 되리라." (도:16) 또한, 이러한 일은 스스로의 강한 책임감을 요구한다. "나(예수)의 길에서 그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받아들일 자격이 없나니라." (도:55)
이렇기 때문에 예수는 자신의 가족이 밖에 서 있어도, 그 제자들에게 "나의 아버지[174] 의 뜻을 실천하는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나의 형제들이요 나의 어머니이니라. 이들이야말로 나의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이니라." (도:99) 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싸움뒤에는 다시 하나되는 과정이 동반된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다시 화해로 나아가야 되니, "한 집안에서 두 명이 서로 화해할 수 있으면, 그들이 산을 보고 ' 여기서 움직여라! ' 라고 말하였을 때 그것은 움직이리라."[175] (도:48) 라고 하였던 것.
이런 일들이 쉬운 일이겠는가. 종종 그들은 애미애비도 없는 후레자식이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진정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는 자는 누구든지 창녀의 자식이라 불리게 되리라. " (도:105)
예수는 강자의 권위에 대해서도 맞서서 소리낼 줄 알아야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예수의 메세지가 널리 퍼지면, 약자를 약탈해왔던 강자의 활동반경은 점점 좁아지게 되어, 어느 순간 강자는 약자를 마음대로 못하게 된다. 이러한 예수의 메세지가 상식이 된 사회에서, 강자의 잘못은 적나라하게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강한 사람의 집에 쳐들어가 힘으로 그 집을 가지려는 자는 누구든지, 그 강한 사람의 양손을 결박하지 않는 한, 가능하지 않도다. 결박한 후에야 그 사람의 집을 샅샅이 뒤질 수 있으리라. " (도:35)[176]
이러기 위해서 약자는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연습을 해야되는데, 이렇게 약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하는 연습을 해야지만 조금씩 강자들의 설 자리를 없앨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아버지의 나라는 어떤 강자를 죽이기를 원하는 사람과도 같다. 집에 있을 때 그는 그의 칼을 뽑아, 자신의 팔이 그것을 감당해낼 수 있을까를 알기 위하여, 벽 속으로 칼을 박아 넣었다. 그 때, 그는 그 강자를 죽이고 말았다. "(도:98) 라고 말했던 것이다.
부자가 된 자는 어느 순간 권력이 쓸모없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예수는 말하였다. "부자가 된 사람이 다스리게 놔두어라. 그리고는 그렇게 힘을 가진 자가 그것을 포기하게 놔두어라. " (도:81) 그리고 그렇게 돈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서야, 자신의 삶을 직시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세상을 발견하여 부자가 된 자는 누구든지, 그에게 그 세상을 포기하게 하라. "(도:110)
또한 삶과 죽음앞에서 부의 허망함을 말하기도 했다. "많은 돈을 가진 부자가 있었다. 그가 말하기를, ' 나는 뿌리고 거두고 심어서 나의 창고를 곡물로 가득 채우기 위해서 나의 돈을 투자하리라. 부족함이 아무것도 없기를..! ' 이것들이 부자가 그의 가슴속에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그는 죽었다.'''"(도:63) "아버지의 나라는 음식으로 가득찬 항아리를 이고 가는 한 여인과도 같다. 그녀가 먼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항아리의 손잡이가 깨졌다. 그래서 길을 따라 그녀 뒤로 음식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문제를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그 항아리를 내려놓고서야 그것이 비어있음을 발견하였다. "(도:97)
예수는 고리대금업자, 부동산업자, 부유 엘리트 계층, 지주에 대해서 비난하였지만(도:64), 상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당신이 상인이라면 돈을 벌어서 "자신의 보물로 삼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가치"에 투자하라고 충고하였다.(도:76)
남자를 매력적인 남성으로 보지 말고, 여자를 섹시한 여성으로 보지말아라고 하였다. 남자 또는 여자라는 성별로 구별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람으로 보아라고 하였다. 따라서 예수는 이런 말을 한다.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 된 자로 만들어 남자가 남자 되지 아니하고 여자가 여자 되지 아니할 때, [ ... ] 비로소 너희는 나라에 들어가게 되리라."(도:22)
또한, '엄마'라는 정체성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사람이라는 정체성으로 살아라고 하였다. 이는 이 에피소드를 통해 알 수 있다. 「 무리 속의 한 여인이 예수에게 말했다. "너를 낳은 자궁과 너를 먹인 유방에 복을 빌어라! " 그러자 예수가 그 여인에게 말하였다. "[ ... ] 너희가 ' 아기를 가진 적이 없는 자궁과 젖을 먹인 적이 없는 유방이여, 복되도다 ' 라고 말할 그런 날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니라. "(도:79) 」
하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그 시대의 관습에 따라 여자들을 무시하곤 했는데, 예수는 '여자는 여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남자로 보라'고 하여, 남녀의 구별이 의미없음을 일관되게 말하였다. 여자는 여자라는 정체성으로 살지 말고, 사람이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가라고 예수는 말했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 역시 도마 22장에서 말했던 것처럼 "'''남자를 남자로 보지 않고, 여자를 여자로 보지 않아야'''" 이해할 수 있다. 「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가로되, "마리아는 우리를 떠나야 한다. 여자들은 삶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보라! 나는 그녀를 인도하여 그녀가 남성이 되도록 할 것이니라. 그리하여 그녀 또한 너희 남성들을 닮은 살아있는 영혼이 될지도 모르리. 그녀 스스로를 남성으로 만드는 모든 여자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니라. "(도:114) 」
이렇게 예수는 형식과 권위의 불합리한 세상에, 모든 권위에 저항하는 작은 불씨를 던졌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그것을 지키다 돌아가셨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던졌노라. 그리고 보라! 나는 그 불이 활활 타오를 때까지 그 불을 지키노라." (도:10)
따라서 예수를 믿고 따르는 누구든지, 그 불합리한 세상에 대해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기존의 권위는 잘못된 권위라고 말이다. 예수는 그렇지 않는 자는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누구든지 나와 가까이 있는 자는 불과 가까이 있는 것이니라. 그리고 누구든지 나로부터 멀리 있는 자는 천국으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니라. " (도:82)
마태복음 23장 27절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라고 비유했듯이.
여기서의 '죽음'은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있는 것"과 같다."''' 의 뜻이다. 죽은 것처럼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것이지, 실제로 죽었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아이고, 죽겠다', '못 살겠다' 할 때랑 비슷한 의미이다.
'삶' 역시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 는 뜻이다. 여기서의 삶(life, live)은 '죽음'의 반대로써의 '영원한 생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177] '이제 좀 살겠다', '사람답게 산다' 할 때의 '''충실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이해하고, 도마 4장를 보자. "어른이 갓난 아기에게 삶에 대해 거리낌 없이 묻는다면, 그 사람은 살 것이다." 이라고 했다. 여기서 "살 것이다."(will live)는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 것이다''''는 뜻이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178] [179]
도마 11장도 이런 의미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죽은 자는 살아있지 아니하다. 그리고 살아있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죽은 것을 먹던 그 날에, 너희는 그것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었도다."(도:11) 에서도, '죽은 거랑 다름없는 자는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 제대로 살고 있는 자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너희가 죽음의 공포를 삶의 원동력으로 바꾸던 그 날에, 너희는 제대로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되리라' 로 해석해야 한다.
또한 이 문장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해석한다. "그 세상을 알아버린 사람은 누구든지 시체를 발견하게 되느니라. 그리고 시체를 발견하게된 그 어떤 사람에게도, 세상은 그 사람을 받을 자격이 없느니라. "(도:56)[180] 여기서 '시체를 발견했다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 삶의 즐거움과 충만함을 느끼지 못하고 목적없이 시체처럼 살아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의미이지, 실제 시체를 발견했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도마는 이를 종합하여, 제일 마지막 부분에 또 다시 말한다. "살아있는 자로부터 살아있는 어떤 사람이든지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181] " 예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자기자신을 발견한 어떤 사람에게도, 세상은 그를 가질 자격이 없느니라. "(도:111)
다음 문장은 '악한 육체와 고귀한 영혼'을 대비시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대비는 성경에 수없이 많이 나온다.[182] 「 "육신이 영혼으로 인하여 존재케 되었다면, 그것은 기적이로다. 그러나 영혼이 몸으로 인하여 존재케 되었다면, 그것은 기적들 중의 기적이로다. 진실로 나는 어떻게 이토록 거대한 부유함이 이토록 빈곤함 속에서 살게 되었는지 놀랍기만 하구나 "(도:29) 」 육적인 삶을 살지 말고, 영적인 삶을 살자고 말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한 몸에 매달리는 그 몸은 얼마나 비참한가! 그리고 이들 둘에 매달리는 그 영혼은 얼마나 비참한가! "(도:87) [183] 육적인 방탕에만 매달리는 그 육체 또한 얼마나 비참하겠는가. 이런 육적인 방탕한 몸에 의지해야되는 그 영혼은 얼마나 비참하겠는가.
그렇다고 영혼과 육신 중 어떤 하나만 중요한 건 아니다. 영혼과 육신은 서로가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보완해가는 상태가 되어야지, 하나가 하나에 의존하는 상태가 되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둘 중 하나에게만 의존하는 삶은 부끄럽게 여겨야 되는 것이다. "부끄러울지어다. 영혼에 의지하는 육신이여! 부끄러울지어다. 육체에 의지하는 영혼이여!. "(도:112)
영지주의 핵심은 하느님 이외에, 생명을 만들어내는 제작자(데미우르고스)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과 제작자의 이원론이 만들어진다. 이는 플라톤적 사유에서 발전했는데, 영지주의에 따르면, 본질(이데아)과 현상(물질)은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법칙이기 때문에, 제작자[184] 는 본질에 해당 되는 지식(설계도)을 이용하여, 이미 만들어져 있는 육신에 자신이 창조한 영혼을 불어넣었다는 것. 이러한 영혼은 완전한 지식(그노시스)를 알게 되면 육체에서 해방되어 다시 하느님으로 돌아간다.(또는 하느님의 권능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창조주는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하느님 이외의 무언가가 생명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것은 이단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주의하여야 할 점은, 성경에서 악령이나 악신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악령과 악신은, 이미 창조된 생명에 들어가서 그 생명(영혼)을 현혹시키고 유혹하여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이지, 그 악령이나 악신이 새로운 생명(영혼)을 창조해내지는 않는다는 것.
또한 '악한 육체와 고귀한 영혼'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에 수도 없이 나오는 것이 악한 육체와 고귀한 영혼이다. 하느님 이외의 창조주가 있다고 하는 것이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이원론의 핵심이지, '''단순히 육체와 영혼을 언급했다고 이원론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육체와 영혼을 대비시켜 말했다고 영지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 자체가 영지주의의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성경에도 그런 예가 수도 없이 많으니까..)
도마복음은 하느님 이외의 창조주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고, 누구나 알 수 있는 보편적 지식을 주장하였으며,[185] [186] 그렇다고 지나친 금욕주의나 쾌락주의로 가지도 않았고,[187] 예수의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188] 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천국은 언제 올까? 예수는 말한다. "그것은 그것을 기다린다고 오지 않으리라. '보아라! 여기 있도다. ' 또는 '보아라! 저기 있도다. '라고 말해져서는 안될 것이다. 차라리 아버지의 나라는 이 땅 위에 널리 가득차 있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고 하리라. " (도:113)
따르는 자들이 예수께 말했다. "우리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우리에게 말하여 주옵소서." 이에 대한 예수의 답이 걸작이다. "너희가 시작을 발견하였느냐? 그러하기 때문에 너희가 종말을 구하고 있느냐? 보아라! 시작이 있는 곳에 종말이 있을지라. 시작에 서있는 자여, 복되도다. 그 자야말로 종말을 알 것이니, 죽음을 맛보지도 아니할 것이라."(도:18) 종말을 생각하지말고, 시작을 생각하라는 것. 시작도 알지 못하면서 종말을 구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에 대해 꾸짖고 있다. 여기서 시작이란, 도마 4장에서 말했듯이 '나이 먹은 어른이 7일 갓난 아기한테 물어보는 것'을 말한다.[189]
또, 따르는 자들이 예수께 말했다, "언제 죽은 자의 안식이 이루어지리이까? 그리고 언제 새 세상이 오리이까? "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바라는 것은 이미 와 있노라. 단지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니라. "(도:51)
도마 60장에서는 죽어 있는 듯한 삶을 극복하려면 안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사마리안의 양'에 비유했으며, 도마 90장에서도 자기 자신을 위한 안식은 꼭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안식(휴식)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도마 50장에서는, 우리 속에 아버지가 계신다는 증거로 '움직임(노동)과 안식'을 말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안식을 취하려고 하지도 않고 일에만 몰두하여 자신의 삶자체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도마 86장에서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는데, 인간의 자식들은 머리를 뉘어 안식할 곳조차 없다"고 말하며 예수는 한탄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 "너의 형제를 네 영혼과 같이 사랑하라. 그 사람을 네 눈동자처럼 보호하라."(도:25) 」[190] 고 말하였다. 여기서 형제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자를 뜻한다.
또한 이렇게 예수와 제자들이 만들어 놓은 공동체는, 믿음으로 단단히 하나가 되었으므로 쉽게 무너지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숨길 수도 없으니, 당당해지라고 하였다. 「 "높은 산 위에 지어졌으며 요새화된 도시는, 무너질 수도 없고 또한 숨겨질 수도 없다. "(도:32) 」
어떤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바탕에 두지 않는 가르침은, 견고하지 못하므로 뽑혀나갈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므로써 그 가치가 있다.
따라서 예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한 그루의 포도나무가 아버지[191] 밖에 심어졌다. 그 나무는 견고하지 못하므로, 그것은 뿌리채 뽑힐 것이며, 죽어 없어질 것이다. " (도:40)
야고보서는 예수의 형제 중 하나로 알려 있는 야고보가 쓴 글이다. 예수 사후에 초대교회를 이끌던 제일 첫번째 수장이 바로 이 야고보인데, 그가 지은 야고보서를 읽다보면 묘하게 도마복음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음을 알 수 있다. 도마복음에서는 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보아서 겉과 속이 다르지 않는 마음가짐을 가져라고 강조하는데, 이를 야고보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야고보서 3장 17절을 보자. "오직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는 '''첫째 순수(pure)'''이고, 다음은 온화하고, 부탁을 잘 들어주는, 자비와 선한 결실들로 가득참, 편애하지 않음, 위선적이지 않는 것이다."[192]
이는 도마복음에서 가장 강조하고, 일관되게 주장하는 '아이와 같이 순수해라'는 가르침과 같다.
야고보서 2장 1~10절 까지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야고보서 1장 17절은 빛의 아버지[193] 를 언급하고 있다.
야고보서 4장 8절에서는 "'''너희 두 마음을 가진 자들이여! 너희의 마음들을 순수케하라.'''"[194] 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도마 22장의 "너희들이 둘을 하나로 만들 때, 그리고 너희들이 속을 겉과 같이 만들고, 또 겉을 속과 같이 만들고, 또 위를 아래와 같이 만들 때, 그리고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 된 자로 만들어 남자가 남자 되지 아니하고 여자가 여자 되지 아니할 때" 와 비슷하다.
야고보서 5장 12절. "그러나 너희가 맞는 것은 맞다고 하고, 너희가 틀린 것은 틀렸다고 하라. 너희들은 정죄에 빠지지 않도록."는 도마 6장 "거짓말 하지 말고, 너희가 싫어하는 것 하기를 하지 말라."에서 과장된 형식을 통해 가식과 위선을 행하지마라는 뜻과 유사하다.
야고보서 3장 1~10 자신의 입을 조심해라는 것은, 도마 14장에 "차라리 너희를 더럽히는 것은 너희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라."와 비슷.
예수와 동시대를 살았고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집필했던 사도 바울이 쓴 고린토서에서도 비슷한 부분이 존재한다. 매우 유명하고 잘 알려져 있는 구절이기도 한, '사랑'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 뜬금없이 '''아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라'''고 말한다.
(고린토서 13장 6~13절)
「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특권도 사라지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도 끊어지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도 불완전하고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도 불완전하지만
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집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
어리다고 '남에게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195] 을 잘 할 수 있는 것도 아닐텐데,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뜬금없이 어린이를 꺼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이것은 도마 22장에서 나오는, '계산하지 않고 남을 편견으로 구분하지 않는, 아이와 같은 시선을 가지라'는 뜻과 많이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도마복음은 영지주의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여러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데, 도마복음은 하느님 이외의 창조주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고, 누구나 알 수 있는 보편적 지식을 주장하였으며,[196] [197] 그렇다고 지나친 금욕주의나 쾌락주의로 가지도 않았고,[198] 예수의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199] 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도마복음이 영지주의가 아니라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200] 우리는 도마복음을 통해서 예수 사후 당시에 '부활을 믿는 제자'와 '부활을 믿지 않았던 제자'[201] 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도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는데, 예수 사후 당시 제자들이 분열되지 않았을 때는 그 어록이 제자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었으나, 이후 부활과 영생에 대한 의견차이로 인해 분열되었으며 도마복음은 이렇게 부활을 믿지 않았던 제자들이 만든 서적이었을 것이다.[202]
다만 도마복음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고 실천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그 명맥이 점차 줄어들었지만, 부활을 믿었던 제자들은 '믿음'을 강조하면서도 '부활할 수 있다'는 그 메세지가 명료하였기 때문에 그 세력이 훨씬 더 커질 수 밖에 없었으며, 결국 부활을 믿지 않는 제자들이 쓴 저술은 소수만 남게 되었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혹자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 베드로 계열의 제자들은 로마로 흘러 들어가 주류로써 현재의 기독교를 형성하였고,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는 도마 계열의 제자들은 그 세력이 점점 약해져서 주변의 그리스, 이집트, 아라비아로 흩어졌다가 아라비아로 들어간 일부가[203] 이슬람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도 한다.[204] [205]
이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정식 성경으로 포함되지 않았기에 전승되지도 알려지지도 않았다가,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되므로써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미 세계 종교가 된 기독교에서, 천국의 존재와 예수의 부활, 언젠가 다가올 세계의 종말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도마복음을 가지고 '천국, 부활, 종말론'에 대한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도마복음의 의의는 '천국이 있다 없다'거나 '종말이 있다 없다'를 떠나서, 순수 고고학적 의미에서 그 시대 그 지역의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바라보았고 예수의 말이 어떤 것인가를 적어놓았는지를 자세히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내용의 상당부분이 기존 공관복음서와 일치한다. 이 점이 성서비평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이다.[211][212][213][214] 토마스 복음서
토마스 복음서는 상당한 떡밥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우선은 토마스 복음서의 저술연대부터 논란이다.
토마스 복음서를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기존 복음서의 어록 부분만 짜집기하여 만든 것으로 여겨 아무리 빨리 잡아도 2세기 혹은 3세기까지 내려간다고 본다. 또한 영지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기 때문에 무시하는 경향도 보인다. 기독교는 초기부터 영지주의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교부들중 상당수가 예수와 가장 밀접한 관계였던 12사도의 직계라인인데, 일관되게 영지주의와 투쟁했다.[215][216] 가설문서인 Q 사본을 제외하면, 신약정경의 대부분이 기원후 50~100년 사이 쓰여졌는데, 일관되게 영지주의와는 다른 입장에 서있다.
반면 토마스 복음서를 긍정하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4복음서 이전에 성립된 것일 수도 있으며, 기존 복음서들이 토마스 복음서 또는 그와 상응하는 예수의 어록들을 가지고 4복음서를 제작했을 것이라고까지 주장하기도 한다.[217] 또한 예수를 둘러싼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여러 문제, 예수의 탄생, 기적, 십자가 사건, 부활 등이 전혀 언급되지 않아 토마스 복음서야말로 진정한 예수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주장을 펴는 이들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역사적 예수의 연구자이자 예수 세미나의 중심적 인물인 존 도미닉 크로산이다. 도올 김용옥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펼치는데, 김용옥이 보기에 토마스 복음서 내용이야말로 대부분 원래 예수님 말씀이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한참 뒤에 첨가된 것이다. 또 김용옥이 보기에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 중에서 토마스 복음서와 다른 부분은 거의 바울과 마가와 마태와 누가와 요한이 원래 예수님 말씀에 자기 마음대로 덧붙인 내용이다.
Richard Valantasis에 의하면 학자들은 도마복음의 연대를 도마복음이 원본 말씀으로부터 저술되었는지, 콥트어나 희랍어 텍스트 혹은 다른 저자의 텍스트로부터 저술되었는지 등의 여부에 따라 성립시기가 빠르면 서기 40년이나 늦으면 서기 140년으로 추정한다. Robert E. Van Voorst에 의하면 전기설은 50~100년, 후기설은 2세기를 지지한다.[218] Valantasis는 도마복음이 서기 30~60년대전기자료의 일부를 참고하여 서기 100-110년대에 성립하는 것으로 추정하며 J. R. Porter는 서기 250년으로 추정한다. 바트 어만은 도마복음이 종말론 테마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톰 라이트는 도마복음이 전기 기독교인들의 세계관과 관점이 다르다는 이유로 후기설을 지지한다.
반대하는 측에선 도마복음이 공관복음서를 베낀 흔적이 발견된 것과 비유의 비정상성이 정상적으로 교정된 것[219] , 시리아어로 번역된 정경 복음서의 영향을 받은 문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공관복음서보다 후대에 나왔다고 주장한다.[220]
기존 그리스도교계에서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다. 기존 신약 27서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외경(내지는 위경)은 이미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사이비 위경도 정말 많지만, 클레멘트 1서/2서나 디다케처럼 정경 확립 이전에 다른 신약성서의 책들과 권위가 비슷했던 책들도 있다. 교리적으로는 이미 27권의 정경이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221] 신학계의 주장은 '위경의 아주, 아주 작은 분량만이 예수의 시대로부터 나왔으며, 모든 위경들 중에서 토마스 복음에 나오는 어록 몇몇 부분만이 고려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222]
그러나 토마스 복음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기존의 복음서나 위경이 가진 과장된 묘사나 꾸밈이 거의 없는 높은 사실성을 가진 기록이라고 주장하며, 옥스퍼드 대학의 앤드류 하비는 '''토마스 복음서가 주는 중요성은 핵폭탄과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223][224]
신약성경 27서에 포함되지 못했는데, 이는 더 후대 397년에 있었던 카르타고 공의회[225] [226] 에서 신약과 구약 성경이 확정되었을 때, 거기에 포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토마스 복음서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위경 논란도 없었고, 위경 논란은 토마스 복음서가 저술된지 300년 후에나 생겨난 문제. 따라서 초창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정경과 위경의 구분이 의미 없다.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앞에서는 구분이 의미없다고 했는데, 정경과 위경의 구분이 내키는대로 정해진게 아니다. 교부들 중 상당수는 예수와 가장 밀접한 관계였던 12사도의 직계라인이었고, 이들은 영지주의와 계속 투쟁했다. 교통이 불편한 고대와 신앙을 드러낼 수 없었던 초기기독교 특성상 영지주의적 가르침이 넓게 퍼진 지역도 있었지만, 교부와 주교들이 이를 파악하면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경과 위경의 구분은 이것의 연장선상이었다.
토마스 복음서의 영지주의 관련성도 대표적인 논란거리이다. 일단 현존하는 사실상 유일한 사본인 콥트어판을 기준으로 영지주의의 영향이 있다는 점까지는 모두가 인정한다. 다만 문제는 토마스 복음서가 원래부터 영지주의파의 작품인지, 아니면 현존 사본의 필사자(혹은 번역자) 중 영지주의 인물이 있어서 자기 믿음에 따라 그런 색채를 덧붙였는지를 모른다는 것. 사본이 하나밖에 없으므로 비교할 만한 대상도 없어서 의견이 분분하다. 이 문제는 토마스 복음서의 성립연대 논란과 연관되어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 토마스 복음서의 그리스어판 전문 기록을 찾는다면 상당수 의문이 풀리겠지만, 고대기록들이 다수 멸실된 현대에 과연 찾을 가망이 있는지는...
반면 영지주의가 아니라는 반론도 신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된다. 핵심을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이미 도마에서는 천국의 존재와 종말론을 인정하지 않는데, 시체나 죽음에 대한 언급을 삶에 대한 비유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를 신비스러운 영지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기존에 도마복음을 영지주의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가장 큰 오류라는 것이다.
라틴어 Evangelium secundum Thomam
영어 The Gospel According to Thomas
1. 개요
2. 발견 경위와 판본
4. 내용
4.1. 삶에 대해 물어라
4.1.1. 뜻이 있어라
4.2. 아이와 같이 순수하라
4.3. 밝게 비추어라
4.3.1. 누구에게나 아버지가 계신다
4.4. 복음
4.4.1. 주의할 점
4.5. 힘들게 살면서도 삶을 찾는자들에게 기도하라
4.6. 기존의 권위를 파괴하라
4.6.1. 위선적인 형식을 거부하라
4.6.2.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자가 나의 형제이다
4.6.3. 강자의 권위에 맞서라
4.6.4. 그날 밤 그는 죽었다
4.6.5. 남과 녀를 구별하지 말아라
4.6.6. 그 불씨를 지켜라
4.7. 죽어 있는 세계
4.8. 안식
4.9. 제자
4.10. 하느님을 믿어라
4.13. 도마복음의 의의
5. 특징
6. 기존 복음서와의 비교
7. 논란
1. 개요
근현대에 들어서 새롭게 발견된 복음서. 도마복음이라고도 한다. 예수 어록(Saying) 총 114개로 구성되었다.
예수가 사망한지 10년 ~ 100년 후에 지어진 문서라고 추측된다.[2] 여러 역사적 맥락 때문에, 20세기 들어서 여러 가지로 그리스도교에 떡밥을 던진 뜨거운 감자이다.
2. 발견 경위와 판본
1945년 이집트의 나그함마디에서 2000년 전 당시 이집트어였던 콥트어로 적혀진 그리스도교 계통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퇴비를 찾던 농부 무하마드 알리가 발견했는데, 이 문서들이 돌고 돌아서 카이로의 시장에까지 나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발견된 것이다. 이를 발견된 지역의 이름을 따서 나그함마디 문서(Nag Hammadi Library)라 부른다.
토마스 복음서가 있었다는 사실은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에 학자들도 알긴 했지만, 그 전까지는 실물이 전혀 없었으므로 그 내용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천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비록 사본 단 1개지만 실물이 나타난 것이다. 이집트 고문서성이 공개하지 않다가 1956년에 영인본[3] 을 출판하자 학자들이 연구에 들어갔다.
이후 연구가 진행되면서 1898년 이집트의 고대 로마 유적지에서 발견된 그리스어로 된 옥시링쿠스 파피루스 중에도 토마스 복음서 내용의 일부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4] 심지어 1장~37장 까지 앞부분이 3~4개의 묶음으로 부분 부분 나뉘어져서 그 부분에 맞는 순서대로 남아 있다.(일부 결손) 그 내용은 나그함마디와 비교하면 똑같은데, 다만 2장과 36장만이 기존의 내용에다가 아주 조금 더 추가 되어 있으며, 그 추가된 내용은 기존 내용의 의미를 해치지도 않는다. 따라서 37장 이후의 내용도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데, 이는 이집트 나그함마디 문서보다 앞서면서도, 똑같은 내용의 사본이 과거 그리스에 온전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거꾸로 추측해본다면, '그리스의 토마스 복음이 150년 뒤 이집트에도 똑같은 내용으로 전승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소수의 일부가 봤던 것이 아니라, 적어도 과거에 그리스와 이집트에서 이런 자료들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5] [6]
나그함마디 문서는 서기 340년 경에 필사된 것으로 보여지고, 옥시링쿠스 문서는 서기 200년 경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들은 '사본'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원본이 지어진 연대는 훨씬 더 이른 시기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도마복음은 예수가 사망한지 10년 ~ 100년 후에 지어진 문서라고 추측된다.
3. 영문 번역과 한국어 중역[7]
4. 내용
4.1. 삶에 대해 물어라
토마스 복음서에서 예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요약하면, 자신의 삶을 살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이란 무엇일까? 예수는 "나이 먹은 어른이 7일된 작은 갓난 아기에게 삶의 자리에 대해 묻는 것을 주저치 않는다면, 그 사람은 살 것이다." (도: 4) 라고 하였는데, 삶이란, 어린 아이의 순수함을 닮는 것을 말한다. 이는 마태 18장 1~5절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나를 받아들이듯이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에서도 나온다.
또한, 이러한 삶에 대한 고민은 힘든 삶 속에서도 항상 이루어져야 한다. "힘들게 일하면서도 삶을 발견하는 자여, 복이 있도다!" (도:58) 라고 하였는데, 현실적인 생활에 쫓기면서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되어야함을 알 수 있다.
4.1.1. 뜻이 있어라
이러한 삶은 어떻게 알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도: 2) , "구하는 자는 찾을 것이다. 두드리는 자에게는 열릴 것이다. " (도: 94) 와 마찬가지로 그 뜻을 구해야 그 삶에 대해서 알게 된다. 또한 그것은 스스로 구해야 하는 것인데, "너희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만들어낸다면, 너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이 너희를 구원하리라. 너희가 너희 안에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너희 안에 가지고 있지 않는 것으로 인해 너희는 죽으리라. " (도: 70) 이라 하였다. 따라서 그 뜻을 가진 자는 그 결과를 더 얻을 것이고, 뜻을 지니지 않는 자는 도리어 가지고 있던 것도 없어지게 될 것인데, 그래서 예수는 "손에 무엇이라도 가진 자는 더욱 받게 될 것이요, 그리고 가지지 못한 자는 그가 조금 가지고 있는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다. "(도: 41) 라고 말했던 것이다.
4.2. 아이와 같이 순수하라
삶의 구체적인 실천은 '아이와 같이 순수해지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나이 많은 어른이 7일된 작은 갓난 아기에게 삶의 자리에 대해 물을' 정도로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 하지만 제자들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는 아기가 되어야지만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예수는 "너희들이 둘을 하나로 만들 때, 그리고 너희들이 속을 겉과 같이 만들고, 또 겉을 속과 같이 만들고, 또 위를 아래와 같이 만들 때, 그리고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 된 자로 만들어 남자가 남자 되지 아니하고 여자가 여자 되지 아니할 때, 그리고 너희가 눈 있는 자리에 눈을 만들고, 손 있는 자리에 손을 만들고, 발 있는 자리에 발을 만들고, 모습 있는 자리에 모습을 만들 때, 비로소 너희는 나라에 들어가게 되리라" (도: 22) 라고 했는데, 이는 '아이와 같은 시선'을 가지라는 것이다. 아이는 마음에 있는 바가 바로 겉으로 드러나고, 겉의 표정으로 그 마음을 알 수 있으며, 여자를 섹시한 여성으로 보지 않고, 남자를 매력있는 남성으로 보지 않는다. 아이는 그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구별하지 않고, 그냥 하나의 사람으로만 바라본다. 따라서 위선과 가식이 사라진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 보아야 하느님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예수는 "너희가 그 둘을 하나로 만들 때, 너희는 인간의 자식이 될 것" (도: 106)[166] 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4.2.1. 하나된 자
"나이 먹은 어른이 7일된 작은 갓난 아기에게 삶의 자리에 대해 묻는 것을 주저치 않는다면, 그 사람은 살 것이다. [...] 그리고 '하나된 자'가 될 것이니라." (도:4) 라는 문장과, "너희들이 '둘을 하나로 만들 때', 그리고 너희들이 속을 겉과 같이 만들고, 또 겉을 속과 같이 만들고, 또 위를 아래와 같이 만들 때, 그리고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 된 자로 만들어 남자가 남자 되지 아니하고 여자가 여자 되지 아니할 때" (도:22) 에서 나오는 "하나된 자"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를 알려면 우선, '바리새인'[167] 이 무엇인지 알아야 된다. 바리새라는 명칭은, 히브리어의 페루쉼(perushim), 아람어의 페리샤야(perishayya'), 헬라어의 파리사이오이(Pharisaioi)에서 유래하고, 파-루슈(parush)의 복수형으로서 "'''분리된 자들, 분리주의자, 구별된 자'''"를 뜻한다.
여기서 '분리되고 구별된 것'은, 바리새인의 엄격한 가르침(율법)으로 인해 '형식'과 '그 본래의 속뜻'이 분리된 것을 말하며,[168] 바리새인들이 형식에 집착하였기 때문에 그 본래의 속뜻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예수는 "너희는 유대사람들처럼 되어버렸도다. 그들은 나무(가르침)를 사랑하지만 그것의 열매(삶의 풍요로움)는 증오하며, 열매를 사랑하지만 그 나무는 증오하기 때문이다. " (도:43) 라고 말했던 것.
또한 도마 61장을 보면, 「 "하나가 온전(whole)하면, 하나는 빛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요. 그러나 하나가 나뉘어지면(divided), 하나는 어둠으로 가득차게 되리라." 」라고 말했는데, 이는 나뉘어진 것(divided)에 상대되는 말로써 '하나의 온전함(whole)'을 이야기 하였으며,
도마 72장에서도, 「 "남자여! 나를 나누는 자(divider)로 만들었는가? 그는 몸을 돌려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말했다: "나는 나누는 자(divider)가 아니로다. 그렇지 않은가? " 」 라고 말했는데, 마찬가지로 예수는 '나누는 자'를 부정적으로 해석했음을 알 수 있다.
도마복음에서의 예수는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형식보다는 마음을, 가식보다는 솔직함을, 외면보다는 내면을 더 중요시 하였는데, 이를 종합해보면 "하나된 자"의 뜻은, 바리새인으로 통하는 형식적, 물질적, 외면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위선과 가식을 떨쳐버리고 내면의 온전한 삶의 가치에 집중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예수는 기존에 문제가 되었던 바리새인(분리된 자)의 형식주의를 반대하므로써, 아이와 같이 계산하지 않고 가식과 위선이 없는 "하나된 자"를 말했던 것인셈.[169] [170] [171]
4.2.2. 그렇다고 순진해서는 안된다
아이와 같이 순수해야 되지만, 그렇다고 아이와 같이 순진해서는 안된다. 예수는 이를 두고, "아이들은 밭을 돌려주기 위하여 주인들 앞에서 그들의 옷들을 벗는다. [...] 이러한 연유로 내가 말하노니, 한 집의 주인이 한 도적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주인은 그 도적이 도착하기 이전에 방비 태세에 있을 것이요, 그 도적이 그의 소유인 집을 뚫고 들어와 그의 물건을 훔쳐 내가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그렇기에 너희들이야말로 이 세상에 대하여 방비 태세에 있으라." (도:21) 고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은 가식의 옷을 벗어버리고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되지만, 그렇다고 도적이 우리들의 물건을 훔쳐가게 놔둬서는 안되며, 항상 방비태세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는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여라. "(도: 39) 라고 말하였다. 비둘기처럼 순수해야되지만, 그렇다고 순진해서는 안되며, 뱀처럼 지혜로울 줄도 알아야 된다는 것.[172]
4.3. 밝게 비추어라
도마에서는 사람을 밝게 만드는 예수의 따뜻한 말과 가르침을 빛에 비유하였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이렇게 어둠을 밝히는 빛이 있다는 것이다. "빛의 사람 속에는 빛이 있나니, 그것은 온 세상을 비추리라. 그것이 비추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어둠이니라." (도: 24) 라고 말했듯이, 누구에게나 자신의 마음속에는 따뜻한 마음씨가 존재하며, 이는 온 세상을 비출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비추지 않는다면 어둠이 되는 것이다.
또한 예수는 그 빛을 주변 사람들에게 널리 비추어라고 말하였다. "너의 귀로 네가 듣는 것을, 너의 집 지붕 위에서 타인의 귀로 전파하라. 그 어느 누구도 등불을 켜서 바구니 아래 감추거나, 숨겨진 장소에 두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등잔대 위에 올려놓나니, 이는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니라. " (도: 33) 따뜻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과 행동은 숨겨두지 말고, 널리 알려서 서로를 따뜻하게 만들어라는 것.
이러한 빛은, '''정경'''인 '''야고보서''' 1장 17절에서도 "모든 선한 선물과 모든 완벽한 선물은 위로부터 온다. 그리고 절대 변화하지 않는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온다. " 라고 말했듯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도마 83장에서 "모습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속에 있는 그 빛은, 아버지의 빛의 모습 안에 숨겨져 있다. 그는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그의 빛에 의해 숨겨져 있다. " 라고 말한 것이며, 또한, 도마 77장에서는 "나는 모든 것 위에 있는 빛이다. 나는 전부이다. 나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으며, 나에게로 모든 것이 도달한다. 한 편의 장작을 쪼개 보아라! 나는 거기에 있다. 그 돌을 들어 보아라! 그러면 너희는 거기서 나를 찾을 것이다. " 라고 말한 것이다.
바로 위, 기존 신약성경 내의 '''빛의 자식''' 들에 관한 수많은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기서의 빛은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섬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도마의 빛이 영지주의라면, 공관복음서의 빛도 영지주의라 해석해야 되며, 만약 기존 성경에서 나오는 빛은 말씀과 가르침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도마의 빛도 말씀과 가르침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 때문에 도마복음을 영지주의로 볼 수 없는 것이다.
4.3.1. 누구에게나 아버지가 계신다
누군가가 '너희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본다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빛에서 왔고, 빛의 자식이며,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선택받은 자'라고 말해라고 하였다. (도:50) 여기서, 빛의 자식이라는 말은 위의 야고보서(1:17)에서도 있었듯이 성경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이기에 문제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선택받은 자'는 문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다음 구절을 보면 다시 그 의혹이 풀린다. "그들이 너희에게 묻기를, ' 너희 속에 너희 아버지가 계신다는 증거는 무엇이냐? ' 라고 한다면, 그들에게 말하라. ' 그것은 움직임이요, 안식이로다. ' " (도:50)
즉, 우리 속에 하느님이 계신 증거는, 우리가 '''움직이고 휴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움직이고 휴식을 취하는 것(motion and rest)은 누구나 '하는 것'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속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증거가 이적(異蹟, miracle)을 행하는 것이었다면 '선택받은 자'는 소수에 그칠 것이고 이것은 영지주의 영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가 말한 그 증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움직임(motion)과 안식(rest)일 따름이다.
빛은 온 세상을 비출 수 있고,(도:24) 그 등불빛은 숨기지 말고 누구나 볼 수 있게 등잔대에 올려놓으며,(도:33) 하느님에게 선택받은 인간이라는 증표가 누구나 하고 있는 움직임과 휴식(도:50)인 것을 볼 때, '''이 빛은 보편적인 것이고 외부에 개방적인 것이며 동시에 누구나 하고 있는 평범한 것이다.'''
누구나 하느님의 선택받은 존재이고, 빛의 자식이며,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느님이 계신다고 예수는 외치는 것이다.
4.4. 복음
도마에서는 복음을 씨 뿌리는 것과 나무 심기로 비유하였는데, 씨앗에서 나무가 자라고, 열매를 맺어 그 결실을 얻게 된다는 것에 착안을 한듯 보인다. 즉 도마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씨앗과 나무' 는 예수의 말과 가르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똑같은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어떤 곳에서는 그것을 거부하고 어떤 곳에서는 앞서서 그것을 받아드리니, 복음이란 그 행위의 결과를 기대하지 않고 행하는 것이다. "보라! 씨 뿌리는 자는 나갔다. 한 줌의 씨를 손에 가득쥐고 그것들을 뿌렸다.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쪼아 먹어 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땅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이삭을 내지 못했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기운을 막았고 벌레가 삼켜버렸다. 그리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그것은 좋은 열매를 내었다. 그것은 육십 배, 그리고 백이십 배의 결실이 되었느니라." (도: 9)
그렇게 한다면, 아주 보잘 것 없어보이는 가르침이라도 진실된 가르침이었다면, 엄청나게 많은 결실로 돌아올 것이다. 이는 "아버지의 나라는 한 여인과도 같다. 그 여인은 아주 소량의 효모를 가져다가 밀가루 반죽 속에 숨기어, 그것을 많은 갯수의 빵으로 만들었다." (도:96) 라고 말한 것과 같다.
4.4.1. 주의할 점
하지만 선지자는 고향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도:31) 왜냐하면 고향 사람들은 선지자의 어린 시절을 알기 때문에 그가 선지자라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복음을 펼칠 때, 기존 유대교의 가르침과 새로운 예수의 가르침은, 동시에 믿어져서는 안되는데, "한 종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기"(도:47) 때문이다. 또한 기존 유대교[173] 의 가르침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은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힘든데, 따라서 "어떤 사람도 숙성된 포도주를 마시고 나서 금방 새 포도주를 마시기를 원하지 않는다." 고 말했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도 억지로 기존 가르침에 익숙한 사람에게 강권하지 않는데, 따라서 "새 포도주를 오래된 가죽부대에 쏟아부으면 그것들이 터져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복음은, 그 가르침을 변형시켜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왜곡하려는 자들에게 줘서는 안된다. 이러한 자들은 본래의 순수한 가르침을 변형시키고, 잘못된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면서 속으로는 비웃고 조롱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성스러운 것을 개들에게 주지말라. 개들은 그것들을 거름 무더기 위에 던질지도 모른다. 진주들을 돼지들에게 주지 말라. 그들은 그것들을 진창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 (도:93) 라고 말했던 것이다.
4.5. 힘들게 살면서도 삶을 찾는자들에게 기도하라
도마에서 기도(복음)의 대상은, 충동을 인내하는 자(도: 7). 시작에 서 있는 자(18). 존재하고 있기 이전에 존재한 자(하느님)(19), 홀로된 자(49), 가난한 자(54), 힘들게 일하면서도 삶을 발견하는 자(58), 미움받고 박해당하는 자(68), 자신의 마음속에서 박해를 받아온 자(69), 영혼이 굶주린 자(69),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진심으로 지킨 자(79), 여자를 여자로 보지 않는 자(79), 위험을 예측한 자(103) 이다.
즉, 가난하면서도 인내하고 박해받는 자, 자신의 순수성을 찾는 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진심으로 지키는 자를 위해서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4.6. 기존의 권위를 파괴하라
4.6.1. 위선적인 형식을 거부하라
도마 6장에 이런 일화가 나온다. 「 그를 따르는 자들이 예수께 여쭈어 가로되, "우리가 금식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자선은 해야 합니까? 무슨 식사를 준수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거짓말 하지 말고, 너희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라. 모든 것은 하늘 앞에서 밝혀지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않을, 숨겨진 것은 없고, 벗겨지지 않을, 덮어진 것은 없나니라."(도:6) 」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기도와 자선(Charity) 마저도, 그것이 위선적이라면 해선 안된다. 기도하기를 싫어하는데 기도하는 척하고, 자선하기 싫은데 자선하는 척 하지 말라는 뜻.
심지어 예수는 그런 위선적인 기도와 자선은, 오히려 죄를 짓는 것이고 영혼에 해악을 끼치게 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는 이런 말까지 한다. "너희가 금식한다면, 너희는 너희 자신에게 죄를 자초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기도한다면, 너희는 죄를 지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구제(救濟)한다면, 너희는 너희 영혼을 해롭게 하는 것이다." (도:14) 하지만 그 다음 구절에서는, 순수한 마음으로 대접받을 때는 그들을 위해서 그들의 영혼을 위로해 줘라고 나온다. 시골사람들이 형편없는 음식을 순수한 마음으로 대접할 때는 거리낌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들을 위해 위로하고 그들의 영혼을 치료해 줘라고 말하였다.
그럼 누구를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것인가? 위의 챕터에도 나와있듯이 예수님은, '가난하면서도 인내하고 박해받는 자, 자신의 순수성을 찾는 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진심으로 지키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다.
또한 화려한 옷과 멋진 차림새도 가식과 다름없다고 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종일 무슨 옷을 입을까 신경쓰지도 않으며" (도:36), "권력자들이 좋은 옷을 입고도 진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 (도:78) 이다.
4.6.2.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자가 나의 형제이다
기존 권위의 타파와 복음의 전파는 필연적으로 가족의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그 당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란, 스스로를 박해의 길로 몰아넣는 행위나 다름없다. 따라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부터 그들을 말릴 것이다. 가정에서는 이로 인해 다툼이 생기겠지만, 이를 극복해야만 그가 원하는 삶을 찾을 수 있으며,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따라서 예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마도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던지러 온 줄로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이 땅 위에 충돌을 던지러 온 줄을 알지 못한다. 불과 칼과 싸움을 선사하노라. 한집에 다섯이 있게 될 때, 셋은 둘에, 둘은 셋에, 아비는 아들에게, 아들은 아비에게 대항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각기 홀로 서게 되리라." (도:16) 또한, 이러한 일은 스스로의 강한 책임감을 요구한다. "나(예수)의 길에서 그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받아들일 자격이 없나니라." (도:55)
이렇기 때문에 예수는 자신의 가족이 밖에 서 있어도, 그 제자들에게 "나의 아버지[174] 의 뜻을 실천하는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나의 형제들이요 나의 어머니이니라. 이들이야말로 나의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이니라." (도:99) 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싸움뒤에는 다시 하나되는 과정이 동반된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다시 화해로 나아가야 되니, "한 집안에서 두 명이 서로 화해할 수 있으면, 그들이 산을 보고 ' 여기서 움직여라! ' 라고 말하였을 때 그것은 움직이리라."[175] (도:48) 라고 하였던 것.
이런 일들이 쉬운 일이겠는가. 종종 그들은 애미애비도 없는 후레자식이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진정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는 자는 누구든지 창녀의 자식이라 불리게 되리라. " (도:105)
4.6.3. 강자의 권위에 맞서라
예수는 강자의 권위에 대해서도 맞서서 소리낼 줄 알아야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예수의 메세지가 널리 퍼지면, 약자를 약탈해왔던 강자의 활동반경은 점점 좁아지게 되어, 어느 순간 강자는 약자를 마음대로 못하게 된다. 이러한 예수의 메세지가 상식이 된 사회에서, 강자의 잘못은 적나라하게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강한 사람의 집에 쳐들어가 힘으로 그 집을 가지려는 자는 누구든지, 그 강한 사람의 양손을 결박하지 않는 한, 가능하지 않도다. 결박한 후에야 그 사람의 집을 샅샅이 뒤질 수 있으리라. " (도:35)[176]
이러기 위해서 약자는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연습을 해야되는데, 이렇게 약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하는 연습을 해야지만 조금씩 강자들의 설 자리를 없앨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아버지의 나라는 어떤 강자를 죽이기를 원하는 사람과도 같다. 집에 있을 때 그는 그의 칼을 뽑아, 자신의 팔이 그것을 감당해낼 수 있을까를 알기 위하여, 벽 속으로 칼을 박아 넣었다. 그 때, 그는 그 강자를 죽이고 말았다. "(도:98) 라고 말했던 것이다.
4.6.4. 그날 밤 그는 죽었다
부자가 된 자는 어느 순간 권력이 쓸모없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예수는 말하였다. "부자가 된 사람이 다스리게 놔두어라. 그리고는 그렇게 힘을 가진 자가 그것을 포기하게 놔두어라. " (도:81) 그리고 그렇게 돈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서야, 자신의 삶을 직시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세상을 발견하여 부자가 된 자는 누구든지, 그에게 그 세상을 포기하게 하라. "(도:110)
또한 삶과 죽음앞에서 부의 허망함을 말하기도 했다. "많은 돈을 가진 부자가 있었다. 그가 말하기를, ' 나는 뿌리고 거두고 심어서 나의 창고를 곡물로 가득 채우기 위해서 나의 돈을 투자하리라. 부족함이 아무것도 없기를..! ' 이것들이 부자가 그의 가슴속에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그는 죽었다.'''"(도:63) "아버지의 나라는 음식으로 가득찬 항아리를 이고 가는 한 여인과도 같다. 그녀가 먼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항아리의 손잡이가 깨졌다. 그래서 길을 따라 그녀 뒤로 음식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문제를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그 항아리를 내려놓고서야 그것이 비어있음을 발견하였다. "(도:97)
예수는 고리대금업자, 부동산업자, 부유 엘리트 계층, 지주에 대해서 비난하였지만(도:64), 상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당신이 상인이라면 돈을 벌어서 "자신의 보물로 삼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가치"에 투자하라고 충고하였다.(도:76)
4.6.5. 남과 녀를 구별하지 말아라
남자를 매력적인 남성으로 보지 말고, 여자를 섹시한 여성으로 보지말아라고 하였다. 남자 또는 여자라는 성별로 구별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람으로 보아라고 하였다. 따라서 예수는 이런 말을 한다.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 된 자로 만들어 남자가 남자 되지 아니하고 여자가 여자 되지 아니할 때, [ ... ] 비로소 너희는 나라에 들어가게 되리라."(도:22)
또한, '엄마'라는 정체성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사람이라는 정체성으로 살아라고 하였다. 이는 이 에피소드를 통해 알 수 있다. 「 무리 속의 한 여인이 예수에게 말했다. "너를 낳은 자궁과 너를 먹인 유방에 복을 빌어라! " 그러자 예수가 그 여인에게 말하였다. "[ ... ] 너희가 ' 아기를 가진 적이 없는 자궁과 젖을 먹인 적이 없는 유방이여, 복되도다 ' 라고 말할 그런 날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니라. "(도:79) 」
하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그 시대의 관습에 따라 여자들을 무시하곤 했는데, 예수는 '여자는 여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남자로 보라'고 하여, 남녀의 구별이 의미없음을 일관되게 말하였다. 여자는 여자라는 정체성으로 살지 말고, 사람이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가라고 예수는 말했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 역시 도마 22장에서 말했던 것처럼 "'''남자를 남자로 보지 않고, 여자를 여자로 보지 않아야'''" 이해할 수 있다. 「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가로되, "마리아는 우리를 떠나야 한다. 여자들은 삶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보라! 나는 그녀를 인도하여 그녀가 남성이 되도록 할 것이니라. 그리하여 그녀 또한 너희 남성들을 닮은 살아있는 영혼이 될지도 모르리. 그녀 스스로를 남성으로 만드는 모든 여자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니라. "(도:114) 」
4.6.6. 그 불씨를 지켜라
이렇게 예수는 형식과 권위의 불합리한 세상에, 모든 권위에 저항하는 작은 불씨를 던졌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그것을 지키다 돌아가셨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던졌노라. 그리고 보라! 나는 그 불이 활활 타오를 때까지 그 불을 지키노라." (도:10)
따라서 예수를 믿고 따르는 누구든지, 그 불합리한 세상에 대해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기존의 권위는 잘못된 권위라고 말이다. 예수는 그렇지 않는 자는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누구든지 나와 가까이 있는 자는 불과 가까이 있는 것이니라. 그리고 누구든지 나로부터 멀리 있는 자는 천국으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니라. " (도:82)
4.7. 죽어 있는 세계
마태복음 23장 27절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라고 비유했듯이.
여기서의 '죽음'은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있는 것"과 같다."''' 의 뜻이다. 죽은 것처럼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것이지, 실제로 죽었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아이고, 죽겠다', '못 살겠다' 할 때랑 비슷한 의미이다.
'삶' 역시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 는 뜻이다. 여기서의 삶(life, live)은 '죽음'의 반대로써의 '영원한 생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177] '이제 좀 살겠다', '사람답게 산다' 할 때의 '''충실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이해하고, 도마 4장를 보자. "어른이 갓난 아기에게 삶에 대해 거리낌 없이 묻는다면, 그 사람은 살 것이다." 이라고 했다. 여기서 "살 것이다."(will live)는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 것이다''''는 뜻이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178] [179]
도마 11장도 이런 의미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죽은 자는 살아있지 아니하다. 그리고 살아있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죽은 것을 먹던 그 날에, 너희는 그것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었도다."(도:11) 에서도, '죽은 거랑 다름없는 자는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 제대로 살고 있는 자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너희가 죽음의 공포를 삶의 원동력으로 바꾸던 그 날에, 너희는 제대로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되리라' 로 해석해야 한다.
또한 이 문장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해석한다. "그 세상을 알아버린 사람은 누구든지 시체를 발견하게 되느니라. 그리고 시체를 발견하게된 그 어떤 사람에게도, 세상은 그 사람을 받을 자격이 없느니라. "(도:56)[180] 여기서 '시체를 발견했다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 삶의 즐거움과 충만함을 느끼지 못하고 목적없이 시체처럼 살아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의미이지, 실제 시체를 발견했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도마는 이를 종합하여, 제일 마지막 부분에 또 다시 말한다. "살아있는 자로부터 살아있는 어떤 사람이든지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181] " 예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자기자신을 발견한 어떤 사람에게도, 세상은 그를 가질 자격이 없느니라. "(도:111)
4.7.1. 영혼과 육신
다음 문장은 '악한 육체와 고귀한 영혼'을 대비시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대비는 성경에 수없이 많이 나온다.[182] 「 "육신이 영혼으로 인하여 존재케 되었다면, 그것은 기적이로다. 그러나 영혼이 몸으로 인하여 존재케 되었다면, 그것은 기적들 중의 기적이로다. 진실로 나는 어떻게 이토록 거대한 부유함이 이토록 빈곤함 속에서 살게 되었는지 놀랍기만 하구나 "(도:29) 」 육적인 삶을 살지 말고, 영적인 삶을 살자고 말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한 몸에 매달리는 그 몸은 얼마나 비참한가! 그리고 이들 둘에 매달리는 그 영혼은 얼마나 비참한가! "(도:87) [183] 육적인 방탕에만 매달리는 그 육체 또한 얼마나 비참하겠는가. 이런 육적인 방탕한 몸에 의지해야되는 그 영혼은 얼마나 비참하겠는가.
그렇다고 영혼과 육신 중 어떤 하나만 중요한 건 아니다. 영혼과 육신은 서로가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보완해가는 상태가 되어야지, 하나가 하나에 의존하는 상태가 되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둘 중 하나에게만 의존하는 삶은 부끄럽게 여겨야 되는 것이다. "부끄러울지어다. 영혼에 의지하는 육신이여! 부끄러울지어다. 육체에 의지하는 영혼이여!. "(도:112)
4.7.1.1. 영지주의와의 차이점
영지주의 핵심은 하느님 이외에, 생명을 만들어내는 제작자(데미우르고스)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과 제작자의 이원론이 만들어진다. 이는 플라톤적 사유에서 발전했는데, 영지주의에 따르면, 본질(이데아)과 현상(물질)은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법칙이기 때문에, 제작자[184] 는 본질에 해당 되는 지식(설계도)을 이용하여, 이미 만들어져 있는 육신에 자신이 창조한 영혼을 불어넣었다는 것. 이러한 영혼은 완전한 지식(그노시스)를 알게 되면 육체에서 해방되어 다시 하느님으로 돌아간다.(또는 하느님의 권능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창조주는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하느님 이외의 무언가가 생명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것은 이단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주의하여야 할 점은, 성경에서 악령이나 악신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악령과 악신은, 이미 창조된 생명에 들어가서 그 생명(영혼)을 현혹시키고 유혹하여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이지, 그 악령이나 악신이 새로운 생명(영혼)을 창조해내지는 않는다는 것.
또한 '악한 육체와 고귀한 영혼'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에 수도 없이 나오는 것이 악한 육체와 고귀한 영혼이다. 하느님 이외의 창조주가 있다고 하는 것이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이원론의 핵심이지, '''단순히 육체와 영혼을 언급했다고 이원론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육체와 영혼을 대비시켜 말했다고 영지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 자체가 영지주의의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성경에도 그런 예가 수도 없이 많으니까..)
도마복음은 하느님 이외의 창조주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고, 누구나 알 수 있는 보편적 지식을 주장하였으며,[185] [186] 그렇다고 지나친 금욕주의나 쾌락주의로 가지도 않았고,[187] 예수의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188] 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4.7.2. 천국
천국은 언제 올까? 예수는 말한다. "그것은 그것을 기다린다고 오지 않으리라. '보아라! 여기 있도다. ' 또는 '보아라! 저기 있도다. '라고 말해져서는 안될 것이다. 차라리 아버지의 나라는 이 땅 위에 널리 가득차 있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고 하리라. " (도:113)
4.7.3. 종말
따르는 자들이 예수께 말했다. "우리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우리에게 말하여 주옵소서." 이에 대한 예수의 답이 걸작이다. "너희가 시작을 발견하였느냐? 그러하기 때문에 너희가 종말을 구하고 있느냐? 보아라! 시작이 있는 곳에 종말이 있을지라. 시작에 서있는 자여, 복되도다. 그 자야말로 종말을 알 것이니, 죽음을 맛보지도 아니할 것이라."(도:18) 종말을 생각하지말고, 시작을 생각하라는 것. 시작도 알지 못하면서 종말을 구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에 대해 꾸짖고 있다. 여기서 시작이란, 도마 4장에서 말했듯이 '나이 먹은 어른이 7일 갓난 아기한테 물어보는 것'을 말한다.[189]
또, 따르는 자들이 예수께 말했다, "언제 죽은 자의 안식이 이루어지리이까? 그리고 언제 새 세상이 오리이까? "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바라는 것은 이미 와 있노라. 단지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니라. "(도:51)
4.8. 안식
도마 60장에서는 죽어 있는 듯한 삶을 극복하려면 안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사마리안의 양'에 비유했으며, 도마 90장에서도 자기 자신을 위한 안식은 꼭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안식(휴식)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도마 50장에서는, 우리 속에 아버지가 계신다는 증거로 '움직임(노동)과 안식'을 말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안식을 취하려고 하지도 않고 일에만 몰두하여 자신의 삶자체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도마 86장에서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는데, 인간의 자식들은 머리를 뉘어 안식할 곳조차 없다"고 말하며 예수는 한탄했던 것이다.
4.9. 제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 "너의 형제를 네 영혼과 같이 사랑하라. 그 사람을 네 눈동자처럼 보호하라."(도:25) 」[190] 고 말하였다. 여기서 형제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자를 뜻한다.
또한 이렇게 예수와 제자들이 만들어 놓은 공동체는, 믿음으로 단단히 하나가 되었으므로 쉽게 무너지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숨길 수도 없으니, 당당해지라고 하였다. 「 "높은 산 위에 지어졌으며 요새화된 도시는, 무너질 수도 없고 또한 숨겨질 수도 없다. "(도:32) 」
4.10. 하느님을 믿어라
어떤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바탕에 두지 않는 가르침은, 견고하지 못하므로 뽑혀나갈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므로써 그 가치가 있다.
따라서 예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한 그루의 포도나무가 아버지[191] 밖에 심어졌다. 그 나무는 견고하지 못하므로, 그것은 뿌리채 뽑힐 것이며, 죽어 없어질 것이다. " (도:40)
4.11. 야고보서와의 관계
야고보서는 예수의 형제 중 하나로 알려 있는 야고보가 쓴 글이다. 예수 사후에 초대교회를 이끌던 제일 첫번째 수장이 바로 이 야고보인데, 그가 지은 야고보서를 읽다보면 묘하게 도마복음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음을 알 수 있다. 도마복음에서는 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보아서 겉과 속이 다르지 않는 마음가짐을 가져라고 강조하는데, 이를 야고보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야고보서 3장 17절을 보자. "오직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는 '''첫째 순수(pure)'''이고, 다음은 온화하고, 부탁을 잘 들어주는, 자비와 선한 결실들로 가득참, 편애하지 않음, 위선적이지 않는 것이다."[192]
이는 도마복음에서 가장 강조하고, 일관되게 주장하는 '아이와 같이 순수해라'는 가르침과 같다.
야고보서 2장 1~10절 까지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야고보서 1장 17절은 빛의 아버지[193] 를 언급하고 있다.
야고보서 4장 8절에서는 "'''너희 두 마음을 가진 자들이여! 너희의 마음들을 순수케하라.'''"[194] 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도마 22장의 "너희들이 둘을 하나로 만들 때, 그리고 너희들이 속을 겉과 같이 만들고, 또 겉을 속과 같이 만들고, 또 위를 아래와 같이 만들 때, 그리고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 된 자로 만들어 남자가 남자 되지 아니하고 여자가 여자 되지 아니할 때" 와 비슷하다.
야고보서 5장 12절. "그러나 너희가 맞는 것은 맞다고 하고, 너희가 틀린 것은 틀렸다고 하라. 너희들은 정죄에 빠지지 않도록."는 도마 6장 "거짓말 하지 말고, 너희가 싫어하는 것 하기를 하지 말라."에서 과장된 형식을 통해 가식과 위선을 행하지마라는 뜻과 유사하다.
야고보서 3장 1~10 자신의 입을 조심해라는 것은, 도마 14장에 "차라리 너희를 더럽히는 것은 너희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라."와 비슷.
4.12. 고린도서와의 관계
예수와 동시대를 살았고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집필했던 사도 바울이 쓴 고린토서에서도 비슷한 부분이 존재한다. 매우 유명하고 잘 알려져 있는 구절이기도 한, '사랑'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 뜬금없이 '''아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라'''고 말한다.
(고린토서 13장 6~13절)
「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특권도 사라지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도 끊어지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도 불완전하고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도 불완전하지만
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집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
어리다고 '남에게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195] 을 잘 할 수 있는 것도 아닐텐데,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뜬금없이 어린이를 꺼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이것은 도마 22장에서 나오는, '계산하지 않고 남을 편견으로 구분하지 않는, 아이와 같은 시선을 가지라'는 뜻과 많이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4.13. 도마복음의 의의
도마복음은 영지주의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여러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데, 도마복음은 하느님 이외의 창조주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고, 누구나 알 수 있는 보편적 지식을 주장하였으며,[196] [197] 그렇다고 지나친 금욕주의나 쾌락주의로 가지도 않았고,[198] 예수의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199] 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도마복음이 영지주의가 아니라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200] 우리는 도마복음을 통해서 예수 사후 당시에 '부활을 믿는 제자'와 '부활을 믿지 않았던 제자'[201] 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도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는데, 예수 사후 당시 제자들이 분열되지 않았을 때는 그 어록이 제자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었으나, 이후 부활과 영생에 대한 의견차이로 인해 분열되었으며 도마복음은 이렇게 부활을 믿지 않았던 제자들이 만든 서적이었을 것이다.[202]
다만 도마복음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고 실천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그 명맥이 점차 줄어들었지만, 부활을 믿었던 제자들은 '믿음'을 강조하면서도 '부활할 수 있다'는 그 메세지가 명료하였기 때문에 그 세력이 훨씬 더 커질 수 밖에 없었으며, 결국 부활을 믿지 않는 제자들이 쓴 저술은 소수만 남게 되었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혹자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 베드로 계열의 제자들은 로마로 흘러 들어가 주류로써 현재의 기독교를 형성하였고,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는 도마 계열의 제자들은 그 세력이 점점 약해져서 주변의 그리스, 이집트, 아라비아로 흩어졌다가 아라비아로 들어간 일부가[203] 이슬람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도 한다.[204] [205]
이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정식 성경으로 포함되지 않았기에 전승되지도 알려지지도 않았다가,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되므로써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미 세계 종교가 된 기독교에서, 천국의 존재와 예수의 부활, 언젠가 다가올 세계의 종말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도마복음을 가지고 '천국, 부활, 종말론'에 대한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도마복음의 의의는 '천국이 있다 없다'거나 '종말이 있다 없다'를 떠나서, 순수 고고학적 의미에서 그 시대 그 지역의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바라보았고 예수의 말이 어떤 것인가를 적어놓았는지를 자세히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5. 특징
- 토마스 복음서를 요약하자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기위해서, 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살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불교의 '공(空)사상'과 노자의 '허(虛)사상'와는 다른데, 토마스 복음서에서는 순수하지만 순진해서는 안되며, 부당한 권위에 대해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야 된다고 강조한 점이 다른 점이다. 불교의 경우에는 '부당한 것과 부당하지 않은 것은 다르지 않다'며 합리화하고[206] , 도교의 경우 '부당함에도 이를 이해하고 져주는 것이 사실 이기는 것이다[207] '로 합리화 하겠지만, 토마스 복음서는 이러한 부당한 권위에는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굴복해서는 안되며 이를 방비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토마스 복음서를 단순히 인도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를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자의 단견에 지나지 않는다.
- 토마스 복음서는 모두 114개 구절인데 단지 예수의 발언만 기록한 어록 형식으로, 예수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이런 말을 했는지 배경을 설명하지 않는다. 진짜로 예수의 발언 그 자체만 실려 있다.
- 기존 권위를 전복하라는 것은 니체의 사상과 통하는 면이 있다. 만약 도마복음의 예수가 사실이라면, 니체가 죽였던 것은 사랑과 믿음으로 대표되는 바울의 노예도덕[208] 을 죽였던 것이지, 자신의 삶으로 충만한 예수의 주인도덕은 죽인 것이 아닌 셈이다.
- 플로티노스의 일자에서 쓰이는 용어인 'the one'과 도마복음에서 강조하는 'the one'이라는 용어는, 언뜻 보기에 같아 보인다. 그렇기에 도마복음을 영지주의라고 보는 신학자들은 이러한 'the one'이라는 용어가 플로티노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도마복음을 자세히보면 그 용어의 의미와 쓰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로티노스는 일자에서 분출되어 나온 물질과 정신이 사람의 영혼을 구성한다고 보아서 그 연속적인 계층관계가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도마복음에서는 계층적 연속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도마복음은 현세 중심의 철학이어서 부활과 메시아와 종말론을 부정하는데 비해, 플로티노스는 일자를 이데아와 신으로 보고 내세를 긍정하기에 부활과 메시아와 종말론을 믿는 영지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The one' 은 도마복음과 플로티노스에서 동일하게 나오지만, 다른 개념으로 쓰였다고 말해야 한다. 이 둘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 애초에 일자(the one) 개념은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는 흔한 사상이라서 시대를 건너서 겹치는 내용이 나온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다. 심지어 이 일자(the one)라는 개념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도 존재했었던 개념이다. BC 5세기 파르메니데스의 일자(the one)에서 출발한 관념론은, 플라톤에 의해서 이데아(idea)로 발전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로 수렴되었다. 예수가 살았던 시기는 로마에 의해 지배당하던 시대였므로, 예수가 이러한 개념에 어느정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다. 물론 예수가 말하는 일자(the one)는,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이 말한 것과도 다르며,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로티노스가 말한 것과도 다르다.
- 도마복음에서 예수가 말하는 일자(the one)란, 겉과 속이 달라서 외면과 내면이 분리된 자가 아닌, 겉과 속이 하나로 합치된 자, 또는 자신의 진실된 삶을 방해하는 가식과 위선을 던져버리고 세상의 모든 권위를 부숴버린 자, 그래서 아이와 같이 순수한 그 자를 일자(the one)라고 한 것이다.
- 도마복음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가 부활을 믿지 않았다면, 예수는 그의 짧은 삶 속에서 3번의 큰 부정을 당하게 된 셈이다. 첫번째는 그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예루살렘 민중들 한테서 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예수의 말에 감화받고 그를 살려야 된다고 주장했으나, 기존 랍비들이 예수를 비판하기 시작하자 민중들은 그들을 따라서 예수를 비판하고 부정해 버린다. 두번째는 그의 열두제자들 한테서 이다. 열두제자들은 예수를 버리지 않겠다고 수없이 맹세하였으나, 결국 자신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만다. 셋째는 예수가 죽은 후의 세상사람들 한테서 이다. 예수는 죽음으로써 자신의 삶과 사상을 증명해 냈지만[209] 세상사람들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음으로써 '예수의 죽음' 마저 부정해 버린 것이다. 예수는 죽음으로써 그의 철학을 보여주려고 하였으므로, 그의 죽음을 부정한다는 것은 그의 철학을 부정한다는 것이고, 이는 그야말로 예수의 모든 것이 부정당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환호했던 민중들이 그를 결국 부정하였고, 가장 믿는 제자들이 그를 부정하였으며, 마침내 그의 사상과 죽음마저 부정당했던 예수는, 그야말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최악을 경험했던 셈. 하지만 이러한 비극은 도리어 예수를 성스럽게 보이게 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삶은, 마주하는 모든 고통에 허덕이며 결국엔 죽음을 향해 걸어가게 되는, 모든 인간의 삶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는 모든 인간의 비극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모든 인간들이 필연적으로 느끼는 한없는 고독과, 감정마저 사라진 참혹한 삶의 비극을, 바로 예수가 보여준다. 예수의 비극을 통해, 나만이 이런 비극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도 이런 비극을 느끼고 있다는 것에서 우리는 커다란 위안을 얻고는, 또한 어떤 작은 행복에도 희망을 느끼고자 노력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예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절망 속에서도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순수'를 노래하였던 혁명가 예수는, 죽고 나서 신(God)으로 불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210]
6. 기존 복음서와의 비교
내용의 상당부분이 기존 공관복음서와 일치한다. 이 점이 성서비평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이다.[211][212][213][214] 토마스 복음서
- 마르(막), 마태(마), 루카(눅)
7. 논란
토마스 복음서는 상당한 떡밥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우선은 토마스 복음서의 저술연대부터 논란이다.
토마스 복음서를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기존 복음서의 어록 부분만 짜집기하여 만든 것으로 여겨 아무리 빨리 잡아도 2세기 혹은 3세기까지 내려간다고 본다. 또한 영지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기 때문에 무시하는 경향도 보인다. 기독교는 초기부터 영지주의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교부들중 상당수가 예수와 가장 밀접한 관계였던 12사도의 직계라인인데, 일관되게 영지주의와 투쟁했다.[215][216] 가설문서인 Q 사본을 제외하면, 신약정경의 대부분이 기원후 50~100년 사이 쓰여졌는데, 일관되게 영지주의와는 다른 입장에 서있다.
반면 토마스 복음서를 긍정하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4복음서 이전에 성립된 것일 수도 있으며, 기존 복음서들이 토마스 복음서 또는 그와 상응하는 예수의 어록들을 가지고 4복음서를 제작했을 것이라고까지 주장하기도 한다.[217] 또한 예수를 둘러싼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여러 문제, 예수의 탄생, 기적, 십자가 사건, 부활 등이 전혀 언급되지 않아 토마스 복음서야말로 진정한 예수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주장을 펴는 이들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역사적 예수의 연구자이자 예수 세미나의 중심적 인물인 존 도미닉 크로산이다. 도올 김용옥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펼치는데, 김용옥이 보기에 토마스 복음서 내용이야말로 대부분 원래 예수님 말씀이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한참 뒤에 첨가된 것이다. 또 김용옥이 보기에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 중에서 토마스 복음서와 다른 부분은 거의 바울과 마가와 마태와 누가와 요한이 원래 예수님 말씀에 자기 마음대로 덧붙인 내용이다.
Richard Valantasis에 의하면 학자들은 도마복음의 연대를 도마복음이 원본 말씀으로부터 저술되었는지, 콥트어나 희랍어 텍스트 혹은 다른 저자의 텍스트로부터 저술되었는지 등의 여부에 따라 성립시기가 빠르면 서기 40년이나 늦으면 서기 140년으로 추정한다. Robert E. Van Voorst에 의하면 전기설은 50~100년, 후기설은 2세기를 지지한다.[218] Valantasis는 도마복음이 서기 30~60년대전기자료의 일부를 참고하여 서기 100-110년대에 성립하는 것으로 추정하며 J. R. Porter는 서기 250년으로 추정한다. 바트 어만은 도마복음이 종말론 테마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톰 라이트는 도마복음이 전기 기독교인들의 세계관과 관점이 다르다는 이유로 후기설을 지지한다.
반대하는 측에선 도마복음이 공관복음서를 베낀 흔적이 발견된 것과 비유의 비정상성이 정상적으로 교정된 것[219] , 시리아어로 번역된 정경 복음서의 영향을 받은 문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공관복음서보다 후대에 나왔다고 주장한다.[220]
기존 그리스도교계에서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다. 기존 신약 27서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외경(내지는 위경)은 이미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사이비 위경도 정말 많지만, 클레멘트 1서/2서나 디다케처럼 정경 확립 이전에 다른 신약성서의 책들과 권위가 비슷했던 책들도 있다. 교리적으로는 이미 27권의 정경이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221] 신학계의 주장은 '위경의 아주, 아주 작은 분량만이 예수의 시대로부터 나왔으며, 모든 위경들 중에서 토마스 복음에 나오는 어록 몇몇 부분만이 고려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222]
그러나 토마스 복음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기존의 복음서나 위경이 가진 과장된 묘사나 꾸밈이 거의 없는 높은 사실성을 가진 기록이라고 주장하며, 옥스퍼드 대학의 앤드류 하비는 '''토마스 복음서가 주는 중요성은 핵폭탄과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223][224]
신약성경 27서에 포함되지 못했는데, 이는 더 후대 397년에 있었던 카르타고 공의회[225] [226] 에서 신약과 구약 성경이 확정되었을 때, 거기에 포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토마스 복음서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위경 논란도 없었고, 위경 논란은 토마스 복음서가 저술된지 300년 후에나 생겨난 문제. 따라서 초창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정경과 위경의 구분이 의미 없다.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앞에서는 구분이 의미없다고 했는데, 정경과 위경의 구분이 내키는대로 정해진게 아니다. 교부들 중 상당수는 예수와 가장 밀접한 관계였던 12사도의 직계라인이었고, 이들은 영지주의와 계속 투쟁했다. 교통이 불편한 고대와 신앙을 드러낼 수 없었던 초기기독교 특성상 영지주의적 가르침이 넓게 퍼진 지역도 있었지만, 교부와 주교들이 이를 파악하면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경과 위경의 구분은 이것의 연장선상이었다.
토마스 복음서의 영지주의 관련성도 대표적인 논란거리이다. 일단 현존하는 사실상 유일한 사본인 콥트어판을 기준으로 영지주의의 영향이 있다는 점까지는 모두가 인정한다. 다만 문제는 토마스 복음서가 원래부터 영지주의파의 작품인지, 아니면 현존 사본의 필사자(혹은 번역자) 중 영지주의 인물이 있어서 자기 믿음에 따라 그런 색채를 덧붙였는지를 모른다는 것. 사본이 하나밖에 없으므로 비교할 만한 대상도 없어서 의견이 분분하다. 이 문제는 토마스 복음서의 성립연대 논란과 연관되어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 토마스 복음서의 그리스어판 전문 기록을 찾는다면 상당수 의문이 풀리겠지만, 고대기록들이 다수 멸실된 현대에 과연 찾을 가망이 있는지는...
반면 영지주의가 아니라는 반론도 신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된다. 핵심을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이미 도마에서는 천국의 존재와 종말론을 인정하지 않는데, 시체나 죽음에 대한 언급을 삶에 대한 비유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를 신비스러운 영지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기존에 도마복음을 영지주의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가장 큰 오류라는 것이다.
[1] 최대한 직역을 하되, 과도한 수동태와 완료구문, 많은 대명사 등으로 글을 자연스레 읽기 ||힘든 부분에서만, 문장의 의미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의역.[2] Richard Valantasis가 신학계의 의견을 종합한 주장이다. 4복음서보다 먼저 지어졌으면 예수가 돌아가신지 10~20년 내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측되지만, 만약 영지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라면 영지주의가 시작했던 1세기 후반에 편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나그함마디 문서는 서기 340년 경에 필사된 것으로 보여지고, 옥시링쿠스 문서는 200년 경에 필사되었다고 추정되지만, 이들은 사본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원본이 지어진 연대는 훨씬 더 이른 시기이다.[3] photoprint: 원본을 사진 등으로 이미지 그대로 촬영, 인쇄한 책, 주로 고전의 아주 희귀한 사본들을 원본 그대로 복제 출판하는 용도로 사용됨.[4] 이를 그리스 토마스 복음서라고 한다. 또는 발견지 이름을 따서 '옥시링쿠스 문서'라 부른다.[5] 학자들은 '원래 토마스 복음서가 그리스어로 쓰였다가 콥트어로 번역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6] 그리스 토마스 복음서가 발견됨에 따라서 '카르타고 공의회 정경 확립(397년)에 의해서 위서로 지정된 토마스 복음서만 따로 항아리에 숨겨진 것'이라는 추측은 거짓일 확률이 높아졌다.[7] 최대한 직역을 하되, 과도한 수동태와 완료구문, 많은 대명사 등으로 글을 자연스레 읽기 ||힘든 부분에서만, 문장의 의미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의역.[8] 콥트어로 Didymos Judas Thomas라고 나오는데, 여기서 Didymos는 희랍어로 쌍둥이라는 뜻, Thomas 역시 아람어로 쌍둥이라는 뜻이다. 요한복음에도 "쌍둥이(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라는 명칭으로 명료하게 4번 나온다(요한 11,16; 14,5; 20,24-29; 21,2). 하지만 여기 나오는 저자가 예수의 12사도 중의 토마스인지는 불명. 위키피디아 영문판에 따르면, 12사도 중 토마스가 지었다는 학설은 신학계에서 이미 파기되었다고 한다.(April D. DeConick 2006 The Original Gospel of Thomas in Translation)[9] 비밀스럽기(secret) 때문에, 비유와 상징이 가득찰 수 밖에 없고, 비유와 상징을 잘 파악하여 이해해라는 것을 의미한다.[10]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지 않으리라'는 말이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다는 뜻.[11] 그리스 판본에는 '괴로워하다(be troubled)'이 없고 대신 제일 마지막에 "And after they have reigned they will rest.(통치한 후에는 안식을 취할 것이다)"가 추가되어 있다.[12] 순서: 구하여 찾음 → 괴로움 → 경이 → 지배 → 안식.[13] 도마에서 나라(the kingdom) 은 이상적인 세상. 또는 그러한 천국을 의미한다.[14] 천국은 하늘 위나 바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기준으로 있는 것이다. 따라서, '너희 안에 있는' 상황은 3장 4번째 구절에 해당되고, '너희 밖에 있는' 상황은 3장 5번째 구절에 해당된다.[15] 도마에서 아버지(the father)는 대부분 하느님을 말한다.[16] 7일 지난 갓난 아기에게 묻는다는 것은, 어머니가 7일 지난 자신의 아기에게 속삭이듯 말하는 것과 같다. 알아듣는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아기에게 배려하고 사랑하겠다는 어머님의 다짐이, 사랑스러운 속삭임으로 나오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 스스로 꼴지를 자처하여 자식이 1등이 되게끔 하는데, 이런 마음가짐으로 서로 양보한다면, 겉과 속이 다르지 않는 '하나된 자(a single one)'가 될 수 있다.[17] 또는, "아기(모든 권위와 차별이 없었던 순수한 상태)한테 묻고, 아기가 되어라. 그러면 기존 권위를 가진 자들이 꼴지로 물러날 것이요. 그러면 하나된 자(a single one)이 되리라."라고 해석가능하다.[18] 여기서의 사자는 '자기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격렬한 내면적 충동'을 말한다.[19] 여기서 '먹는다(eat)'는 것은 '이겨 낸다'는 의미. 따라서, '사람이 그대(사자)를 이겨내기에' 로 해석한다.[20] 말을 퍼뜨리는 것을 씨 뿌리는 것에 비유하였다. 따라서 씨 뿌리는 자는 복음을 전도하는 자를 뜻한다.[21] 복음을 할 때, 어떤 곳은 잘 믿지 않을 것이고 어떤 곳은 잘 믿고 따를 것이다. 복음하는 자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하는 그 토양에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그 행위의 결과를 미리 생각하지 말고 행하여야 한다.[22] 불은 나쁜 잡초를 태워 버린다.(도마 57장 참조) 불은 2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째, 작은 불씨에서 큰 산불로 번져나간다. 둘째, 기존의 모든 것을 태워서 불살라 버린다. 이를 합치면, 기존의 질서를 태워버리는 조그만 불씨를 세상에 던졌고, 그 불씨는 크게 번져 나가리라는 예수의 확신이라고 볼 수 있다.[23] 그 불씨가 커져서 기존의 모든 불합리한 권위들이 불살라지기를 원하는 예수의 절실하고 애뜻한 마음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만약 이 불이 종말론에서 말하는 징벌의 불이라면, 굳이 이렇게까지 지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24] 도마 3장과 18장을 참조해보면, 적어도 살아가는 동안에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기 보다는 살아가고 있는 지금을 더 소중히 여겨야 된다는 것이다. '''현실의 삶에 집중하라.''' 여기서 하늘 위에 있는 것은, 하늘 위의 하늘. 즉, 또다른 하늘을 말한다. 예수 시대의 사람들은 하늘이 여러 겹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성경에 킹제임스바이블 기준으로 하늘의 복수형인 'heavens'의 단어가 127번 나온다. 구약에서 108번, 신약에서 19번이다.[25] 죽은 자를 계속해서 생각하고 슬퍼하여 고통스럽게 살지 말고, 지금 살아있는 자의 삶에 집중하여 스스로의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면, 삶에서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죽음의 공포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으리라.[26] 여기서 죽은 것(what is dead)은 앞의 죽은 자(The dead)와 다르다. 도마 60장을 참조하면, 실제로 '죽은 동물'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즉, 죽은 동물을 먹어서, 살아 있는 내 몸을 살찌운다는 뜻. 죽음은 삶과 떨어져 있지 않지만,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은 '''죽음의 공포를 삶의 원동력으로 바꾼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27] 도마 60장에는 "너희 스스로가 안식의 장소를 찾지 않으면, 시체가 되어 남한테 먹히리라."라고 말했다. 지금 11장에서는 '자신이 먹는 상황'이다. 비슷한 내용을 서술했지만, 말하고자 하는 방향은 조금 다르다는 것을 인지해야 된다. 60장은 '스스로 휴식의 장소를 찾아둬라'는 뜻이고, 11장은 '죽음의 공포를 삶의 원동력으로 바꾸어라'는 뜻이다.[28] 도마 24장과 33장을 동시에 참조해보면, 여기서 빛은 자신의 내면을 밝게 만들기도 하고, 남을 밝게 만들게도 하는 삶의 진실된 가르침, 희망, 진리라고 볼 수 있다. 또는 나에게 희망을 주고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말(words)을 빛(light)에 비유한 것이다.[29] 도마복음 22장 참조해서 보면, '하나'라는 말은, 계산적이지 않고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아서 위선 떨지 않는 아이 같은 마음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하나에서 둘이 되었다'는 것은, 겉과 속이 같은 순수한 마음에서, 겉과 속이 다른 음흉한 마음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하나였던 바로 그 날'에 둘이 되어버린다. 마음 속 충실함이 가득차 있어도, 조금만 방심하면 그 마음을 잃어리게 된다는 뜻이다.[30] 여기서 야고보를 'James the Righteous'라고 했는데, 이는 야고보서에서 "for man's anger does not bring about '''the righteous''' life that God desires.(그 사람의 분노로는, 하느님께서 바라는 "그 의로운 삶"을 초래하지 못한다.)" (야고보서1;20)라고 하여, 의로운 삶을 강조한 것과 맥락이 통하다. 야고보서를 읽어보면 도마복음과 그 내용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31] 예수의 복음을 거품이 이는 샘물로 비유. 즉, '예수를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도마의 말은, 도마가 예수의 복음을 곁에서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 기분에 취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 앞의 구절, '나는 그대의 스승이 아니로다'와 더불어, 예수의 겸손한 표현을 엿볼 수 있다.[32] 도마가 편집했기 때문에 도마를 높여주는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제자들이 어떤 말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천사같이 정의로운 사람', '현명한 철학자'로 예수를 봤음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는 '''의롭고 철학자 같은 면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33] 죄가 있다고 선언하는 것.[34] alms: 가난한 자나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는 일. 여기서는 형식적인 소량의 적선을 말한다.[35] 여기서 '병자를 고쳐주어라'(heal the sick)는 것은, 마음이 아픈자들을 복음을 통해 치료해주어라는 뜻.[36] 14장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부탁하는 말이다. 금식하거나 기도하거나 가난한 자를 돕는 것에, 마음도 없으면서 겉으로 하는 척 위선 떨지마라는 것.(형식의 위선에 대한 격렬한 비판) 또한, 시골동네에서 주는 형편없는 음식이라도 대접한다면, 기꺼이 그 음식을 먹어라는 것. 그리고 대접을 받았으면, 공짜로 먹지 말고 반드시 마음이 아픈자를 복음으로 치료해 주어라는 것.[37] 보통 생명은 여자에게서 태어난다. 근데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는 자란 무엇인가? 이는 여자 이외에서 새롭게 창조된 무엇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는 하느님만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38]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 스스로의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는 자는 예수 뒤를 따라 갈 수 없다. 도마 55장, 101장 참조. 특히, 101장에서 "부모님을 증오해야 하고, 동시에 부모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나오는데, 가족이라는 기존의 정체성에서만 머물러 있으면 안되며, 그렇다고 가족을 사랑하지 않아서도 안된다는 것.[39] 죽음(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기보다는, 태어남(시작)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고, 태어나고 자라나는 자신의 삶에 집중하라는 뜻. 여기서 시작(the beginning)은 도마 4장에서 '7일된 갓난 아기'를 이야기한 뜻과 같다.[40] 도마 40장과 43장 등으로 유추해 보면, 나무는 가르침이다. 즉 다섯 그루의 나무란, 예수가 심어 놓은 5개의 가르침을 상징한다. 도마 복음 전체를 요약하면, '빛(light), 불(fire), 하나됨(single one), 제자공동체(disciples), 안식(rest), ' 으로 나뉘어 지는데, 대략 이 다섯개의 가르침을 뜻하는 듯.[41] 제자들을,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 그나마 순수한 어린 아이'로 비유했다. '''자기 삶의 주인은 자신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했다.[42] 스스로가 스스로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43] 정체성를 찾지 못한 자신이, 스스로의 주인이 되고자 '밭을 돌려달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말하는 셈.[44] '순진하지만 어리석은 자신'은, '자기자신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자신'에게, 옷을 벗음으로써 그 순수함을 드러내고 있다. 도마 37장 참조.[45] 맨 앞의 구절과 합쳐서 해석하면, '어린 아이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에는, '집에 들어오려는 도둑을 막는 것'과 같은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아이같이 순수한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이같이 세상 물정모르고 순진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아이의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그저 아이를 흉내내서는 안된다는 뜻. 순수하되 순진해서는 안된다.[46] 여기서 수확은 어떤 '상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앞의 문장과의 맥락을 통해 이해하여야 한다. 앞의 도둑이 언급되므로, 지금 '곡식이 익었을 때 손에 낫을 들고 재빨리 수확해가는 사람은 도둑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의 '수확'은 그냥 평상시의 '수확'이다.[47] 위선과 가식이 사라진, 겉과 속이 같은 순수한 아이와 같은 마음가짐.[48] 어린아이 시각으로 보면,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다. 아이들은, 섹시한 여자나 매력적인 남자를 보는 식의, 성적(性的)으로 대상을 바라보지 않는다.[49] 눈과 손과 발과 이미지를 모두 새롭게 바꾸어라는 뜻. (물론, 어린 아이의 시각으로..)[50] 자신 속에 빛이 있다는 말이다. 빛의 특성은 주변을 밝게 만든다. 따라서 자신의 빛으로 남을 밝혀줘라는 뜻.[51] 도마 99장에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자만이 나의 형제들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형제란, 혈연관계의 형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자'''를 말한다.[52] 도마 12장에서 '예수가 죽은 뒤, 지도자 자리를 야고보에게 물려주라'고 나오는데, 그 야고보가 지은 신약 야고보서에서는, 이 말을 매우 강조한다. "If you really keep the royal law found in Scripture,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you are doing right. But if you show favoritism, you sin and are convicted by the law as lawbreakers.(만약 너희가 정말로 성경에서 찾은 그 고귀한 법인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를 지킨다면, 너희는 잘하고 있는 것이니와, 그러나 만약 편애함을 보인다면, 너희는 죄를 지어 범죄자로써 법에 의해 유죄를 선고 받으리라.)"[53] 작은 잘못을 '티(speck)'로 비유.[54] 큰 잘못을 '들보(beam)'에 비유.[55] 사람들은 남의 작은 잘못은 잘 보면서, 자신의 큰 잘못은 모른척 넘어간다. 하지만, 자신의 큰 잘못을 고칠 수 있어야만, 남의 작은 잘못을 고쳐줄 수 있으리라.[56] fast from: 끊지~[57] '세상을 금식한다'는 말은 세상의 물질적 욕망을 금식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도 자주 나온다. '안식일을 안식일로서 지켜라'는 것는 휴식을 가져라는 목적에 충실해야되지 안식일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하지말고 불편하게 지내라는 것은 아니라는 말. 실제로 유대교 중 일부는 안식일에 아무것도 움직이면 안된다고해서 자동차나 자전거도 사용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와같이 휴식이라는 목적을 잃어버리고 안식이라는 형식에만 집착하지 말라는 뜻. 드라이브나 자전거타기가 휴식인 사람들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안식이리라.[58] 신의 아들이 아니라,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의 육신으로, 예수 자신의 사상을 세상에 펼쳐내었다는 뜻.[59] 영혼→육신: 기적이고, 육신→영혼: 기적들 중의 기적이다. 둘다 믿을 수 없을 만큼의 기적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60] 거대한 부유함은 영혼(spirit)을 말하고, 빈곤함은 육신(flesh)을 말한다. 따라서 '무한한 영혼의 세계를 유한한 육신이 어떻게 담을 수 있는가? (그래서 나는 육신 또한 영혼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뜻.[61] 당시 로마는 다신교 사회였으며, 예수가 살던 시기에 유대지방과 갈릴리 지역은 로마의 통치하에 있었다. 하지만 종교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아무 신이나 믿을 수 있었다. 여기에서 '세 명의 신들'이란 여러 명의 신들을 모시는 로마의 신앙을 말한다. 그들은 그냥 신'들'일 따름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당시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믿는 부족과 바알을 믿는 부족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둘이나 하나가 있는 곳'이란 이러한 상황에 있던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 중 '하나'(that one)인 하느님을 믿겠다는 뜻.[62] 예수와 제자들이 만들어 놓은 공동체는 높고 요새화되었기에 무너질 수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숨겨질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탄압하려는 자들을 피해서 숨어지낸다는 사실에 집중하거나 의식하지말고, 오로지 예수 공동체의 윤리를 높히며,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요새처럼 단단히 구축하라는 뜻.[63] 도마 98장, 도마 65장 차례대로 참조. 여기서 강자는 탐욕스럽고 게걸스러운 권력자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도마 98장을 보면, '하느님은 '''의도하지 않지만''' 강자를 죽인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여기서 '강자의 손을 묶고 약탈하는 것'은 실제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은유를 통한 메세지라고 봐야된다.[64] 예수의 가르침은 베푸는 사랑인데, 이 '베품의 메세지'는 강자를 서서히 죽게 만든다.(도마 98장) 이런한 '베품의 메세지'와 약자의 목소리가 세상에 점점 커진다면, 강자는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강자의 두 손은 묶인 것과 같다는 것. 이런 메세지가 상식이 되는 사회에서는, 강자가 숨겨둔 잘못들은 명명백백하게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65] 남의 시선에 신경쓰지 말라는 뜻. 또는 옷을 예복으로 보아서, 형식이나 절차에 신경쓰지 말라는 뜻. 남의 시선과 형식과 절차로부터 자유를 얻어라. 도마 37장에서 '어린아이처럼 옷을 벗을 때'와 의미가 통한다.[66] 가식과 위선의 형식을 말한다.[67] 도마 114장을 통해서, 살아 있는 자는 '자신의 삶(life)을 살아가는 자'임을 알 수 있다. 즉, '살아 있는 자의 아들'이란, '가식과 남의 시선을 아이와 같이 던져버리고, 자신의 삶을 살아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말하는 것.[68] 뱀처럼 은밀하고 교활하고 과감한 지혜를 가지되, 비둘기처럼 순수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지녀라는 뜻. 뱀 같기만 하고 비둘기 같지 않으면 자신의 이익만 챙길 것이고, 비둘기 같기만 하고 뱀 같지 않으면 순진하게 당하기만 할 것이다.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수를 둘 다 가진 자만이 지식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으며, 또한 그런 자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처럼 하지 않고 숨겨진 지식들을 세상에 공개할 것이다.[69] 마태복음 10:16 에도 동일하게 나온다.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70] 어떤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바탕에 두지 않는 가르침은, 견고하지 못하므로 뽑혀나갈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므로써 그 가치가 있다는 것.[71] 70장 참조. '추구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더욱 발전해 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도 없이 포기한 자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마저 잃어 버릴 것' 이라는 뜻.[72] 짧은 구절을 하나의 장으로 만들어서, '~이 되라(Be ~)'라고 지시했다는 점에서, 예수가 굉장히 강조한 말임을 알 수 있다. 도마 50장 마지막 구절,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증거가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서, '그것은 움직임이요, 안식이로다' 라고 대답했는데, 42장의 "오고가는 사람들이 되어라"와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나에게 큰 의미가 없듯이, 스스로도 남의 시선에 의식하지 말고 살며 남에게도 눈치를 주고 권위를 내세우며 살지말아라. 마치 지나가는 사람들 처럼.' 또는, '특별한 사람이 되기보다, 평범한 사람이 되기가 힘든 법이다. 그것을 추구하라' [73] 도올은 의역하여 "방랑하는 자들이 되어라"고 해석했다.[74] 내(예수)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예수)가 했던 말에서 나(예수)를 알아차려야(파악해야) 된다는 것.[75] 진리. 가르침. 말.[76] 삶의 충만함. 자신감. 행복. 선함.[77] 유대인들은 진리(나무)를 추구하면서도, 형식에 얽매이기 때문에 삶의 진정한 충만감(열매)을 얻지 못한다. 유대인들은 또한, 삶의 진정한 행복(열매)을 추구하면서도, 그 진리(나무)들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78] blasphemes: bless(신의 축복) + pheme(모욕): 신성모독 하는 자.[79] 도마 29장에 "빈곤한 육체 속에 거대한 영혼이 거하는 것이 놀랍기만 하구나"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헤아릴 수도 없이 거대한 영혼의 가능성을, 무시한다는 것은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뜻. 다시 말하면, 하느님과 그 자식을 욕하는 것은 차라리 참을 수 있으나, '영혼(spirit)이 성스럽게(holy)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부정하는 것은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80] 예수의 가르침은 하나이고 이것을 믿어야 되지만, 이것을 믿으면, 기존 권위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 것이다.[81] 기존 권위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은( 또는 오래된 유대 종교를 믿던 사람들은),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82] 예수의 가르침도 유대인들에게 억지로 강권하지 않는데, 터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83] 유대 종교의 가르침을 지금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적용하지 않는데, 그 가르침이 변질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84] 유대 종교의 가르침을 예수의 가르침과도 섞여서는 안 되는데, 결국 그렇게 조합된 가르침은 말의 앞뒤가 맞지않아 찢겨나갈 것이기 때문이다.[85] 도마 55장 '그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라', 16장 '각기 홀로서게 되리라.', 101장 '참된 어머니는 나에게 삶을 주었다'가 비슷하다. 특히 101장에서 "부모님을 증오해야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고, 또한 동시에 부모님을 사랑해야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나온다. 이를 참조하면, 기존 유대 집안 내의 가족의 권위와 싸워야 됨과 동시에, 자신의 가족을 사랑해야 됨을 알 수 있다.[86] 도마 106장에 '산이여! 움직여라 하면 산이 움직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 48장도 동일한 것으로 보아,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했을 때' 사용되는 관용문구라고 볼 수 있다. 절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물론 성경에도 나오는 관용구다.[87] motion and rest은 움직임과 멈춤을 말한다. 도마 90장과 비교하면, 움직임(motion)은 실제적인 '노동과 일'이고, rest는 노동 후의 휴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속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증거는 우리가 '움직이고 휴식한다'는 것. 이는 누구나 하고 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에, 도마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보편적인 것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88] 도마복음에서 예수는 하느님이 있다는 것을 믿었지만, 천국을 생각하기 보다는 지금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에 더 집중하라고 하였다. 이 문구 역시 도마복음의 현세 지향적인 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89] 도마 113장 참조.[90] 유대교 성서(구약)는 토라 5편, 네비임 8편, 케투빔 11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합치면 24편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구약성서에 예언한 메시아가 예수 당신이 아닙니까?' 라고 묻는 장면이다.[91] 과거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나, 그 예언자들이 올 것이라고 말한 메시아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말고, 자신 존재의 삶의 충실함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예언자나 메시아를 말하는 것은 중요하지않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라는 것.[92] 하느님을 뜻한다.[93] 부모님을 미워해야 된다고 나오지만, 도마 101장에서는 부모를 미워도 해야되고, 동시에 사랑도 해야된다고 나온다. 여기서는 책임의식을 강조하기 위해서 전자만 말한 것이다.[94] 도마 111장과 비교하면, '시체(carcass)를 발견하는 것'과 '자기자신(oneself)을 찾는 것'은 같다. 따라서, 스스로의 삶을 가진 자는 그 전의 세상이 죽어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삶을 충실히 영위할 때에만 그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이요, 그 전에 남의 눈치와 자신의 허세로 살아왔던 삶은 죽어 있는 세상이었다는 것을 깨달아라는 말이다.[95] 도마 80장과 동일.[96] 독보리 zizania. 영어로 darnel. 보리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독성이 강하여 먹을 수가 없다. 작을 때는 밀과 구분하기 힘들지만, 다 자라고 나면 밀과 확연히 구분된다. 때문에 추수 때가 되면 뿌리째 뽑혀 불에 태워졌다.[97] 도마 11장에서도 말했듯이, 자신의 삶으로 충만한 자를 산자로, 자신의 삶에 불성실한 자를 죽은자로 비유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두 명이 안식(휴식rest)을 취하더라도, 누구는 삶을 깨달을 것이고, 다른 누구는 삶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는 뜻. [98] 여기서 침상은 바로 앞에서 말했듯이 안식을 취하는 장소이고, 식사하는 곳은 도마 64장 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느님(아버지)의 장소이다. 즉 예수의 가르침이 살로메에게 영혼의 안식을 주고, 삶의 충만함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살로메는 비유와 상징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예수를 통해 얼마나 충만해 졌는지와 그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을 두고 예수가 실제로 '살로메의 침상에 올라와서 식사를 한 것'이라고 봐서는 안된다.[99] 고리대금업자, 부동산업자, 부유 계층, 지주는 각각 정중한 태도로 저녁을 거절하고 있다. 하지만 그 핑게를 보라. 고리대금업자는 빚을 거두기를, 부동산업자는 부동산 투자를, 부유 계층은 그들만의 연회를, 지주는 소작료를 챙기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자들은 예수가 주최하는 영혼의 만찬에는 초대받지 못할 것이다.[100] 여기서는 상인을 부정적으로 묘사했지만, 도마 76장의 상인은 긍정적 묘사의 주인공으로 나온다.[101]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포도원 주인은 앞서 2명의 하인이 다쳐서 죽기 직전 까지 갔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재물을 갈취하고 모으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으로 몰아넣는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되는데, 이는 똑똑하다는 사람도 탐욕에 눈이 멀면 이상한 판단을 하게되어 결국 파멸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그런 와중에, 소작농들은 결국엔 진압당해 죽을 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오는 사람을 죽이기만 하는, 극단적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찬 세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삶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어야되지, 삶 이외의 재물이나 분노에 포커스를 맞추면 안된다는 것.[102] 마 21:33-46 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기존 성경에서는, 주인은 하느님으로, 하인은 선지자로,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서, 소작농으로 상징되는 일반 백성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파멸에 이르는 알레고리(상징)로써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도마복음에서의 해석은 다르게 보아야 한다. 도마복음의 내용을 살펴보면 '주인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주인'을 알레고리에 맞추어 '하느님'으로 보게 되면 '하느님이 어리석다'는 결론이 나기 때문에 기존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것에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애초에 하느님을 '소작농을 착취하는 부유한 자'나 '고리대금업자'로 해석하는 것에 무리가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알레고리나 상징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소작농들이 왜 화가 나서 하인과 아들을 죽였는지.. 그리고 하인이 죽을 뻔한 것을 보면서도 자신의 아들마저 사지에 빠뜨리는 주인의 어리석음에 대한 이야기로 보아야 하며, 이를 통해 앞의 63장 64장과 마찬가지로 '''부유한 자가 저지르는 어리석음에 대한 경계'''에 대한 메세지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기존 성경(정경)의 해석과 도마복음에서의 해석에는 미묘하지만 큰 차이가 있음을 인지.[103] cornerstone: 건물을 제일 처음 기획할 때에, 위치를 맞추기 위해서 각 모서리에 놓아두는 기준이 되는 돌. 집을 짓는 일 중, 제일 처음 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주춧돌의 의미와는 약간 다르다.[104] 세상과 남들이 규정하는 바에 의해서, 아주 힘들게 자신의 마음을 억눌러 왔던 그런 사람들을 말한다. 세상의 틀에 맞추고자 스스로가 스스로를 끊임없이 못살게 굴었던,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는 축복을 내리고 있다.[105] 직역하면, 그들의 마음들 속에서 박해를 받아온 그들이여. '그들의 마음들 속'에서 '그들은' 그들 자신을 말하기 때문에 '자신의'로 바꾸었다.[106] 여기서는 실제로 굶주린 사람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앞의 문장과 연결하여 영혼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괜찮은듯.[107]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은 '''자신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낼 때''', 이루어진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그 "무엇"을 원동력으로 살아간다. 보통은 목표에 해당되고, 삶의 가치나 원칙, 신념, 희망 등도 그 "무엇"에 들어 갈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어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108] 이는 하느님의 말씀으로도 내가 내안의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며, 남의 가르침에 의해서도 배워서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는 마음. 즉 '의지'라고 하는데, '''자신의 마음 속에 "뜻"을 가져야 된다'''는 말이지,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원한다'느니 해서 불교의 가르침과 비슷한 것이 아니냐고 해서 영지주의로 몰고가거나 폄하해선 안될 것이다. 자세히 들어가면 전혀 다른 말이다.[109] 도마 35장 참조. 여기서 집은, 강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의 집을 상징한다. 실제 집이라면 헐어도 다시 지을 수 있겠지만, 탐욕과 권력의 집은 실제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집이 상징하는 탐욕과 권력은, 예수의 말과 가르침으로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110] 예수의 말이 상식으로 통하는 세상이 온다면, 다신 그 집이 지어질 순 없을 것이다.[111] 재산을 나누는 도구로써 사람을 보지 말아라는 뜻. 예수는 질문한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영리하게 말을 돌려서, 자신은 삶을 계산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제자들에게 항변하는 장면이다.[112] 일꾼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 할 일은 많은데 일꾼은 적어서 힘들다는 것. 그런 어려움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토로하고 있다.[113] 상황만 놓고 살펴보자면, 우물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우물 속에 누군가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but) 우물 속을 보니 아무도 없다는 것. 사람들이 소문만 듣고 우르르 몰려왔다가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한심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기서 우물의 물은, 도마 13장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나 가르침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 앞에서 소문을 듣고 온 많은 사람들이 서성거리기만 하고 있고, 그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 실천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세태(世態)에 대한 한탄이라고 볼 수 있겠다.[114] 혼자 사는 사람. 솔로라는 뜻이 가장 적절하다.[115] 삶이 외롭고 슬프고 상처받아,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오히려 혼자라는 감정을 지니게 된, 고독한 사람들에게 하는 위로.[116] 도마 65장과는 다르게, 돈 버는 상인을 긍정하고 있다. 이 상인은 돈을 벌어 단 하나의 진주를 샀는데, 여기서 진주는 변하지 않는 '가치'를 의미한다. 당신이 상인이라면, 돈을 벌어서 "자신의 보물로 삼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가치"에 투자하라는 것.[117] 여기서 빛은 진리나 가르침 등의 예수의 말이거나 따스함, 행복, 희망 등을 상징하는 사랑을 뜻한다. 이 빛은 내 마음 속을 밝히기도 하고, 남에게 비추면 남을 밝혀주기도 한다. 이러한 빛에는 한계가 없으니 모든 것에 어디든지 이르게 될 것이며, 또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확신을, 재차 선언하는 말이기도 하다.[118] 사막이란 예수와 제자들의 힘든 처지를 말한다. 예수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라다니기란, 사막을 헤메이는 것과 같이 힘든 일이라는 것. '너희가 이렇게 힘든 일을 자처한 것은 개인의 성공이나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것이다.[119] '스스로 자신의 흔들리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냐?'라고 다시 반문하고 있다.[120] 좋은 옷을 입고 편안한 생활을 한다고 해서, 삶의 중요한 진실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방해만 될 것이다.[121] '여기서 축복을 비는 등의 사람을 현혹시키는 헛된 짓거리 하지말고, 너를 낳아준 어머니한테나 가서 복을 빌어라'는 경멸의 뜻.[122] "내가 복을 빌었던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지킨 자들에게 한 말이었지, 나를 낳고 기른 어머니를 부정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자식을 낳고 기른 어머니'라는 정체성에서 머물지 않고, '자식을 낳은적도 없고 기른적도 없는' 여자라도, 축복받은 존재임을 아는 그런 날들이 올 것이다." 라고 말하였던 것. 즉, '엄마'라는 정체성으로 보지 말고, 여자를 하나의 '사람'으로 봐야된다는 것이다.[123] 56장과 동일.[124] '부유한 사람이 권력을 가지게 놔두고, 그래서 권력을 가지게 되면, 그 권력에 결국엔 신물이 나서, 그것을 스스로 포기하게 됨을 지켜봐라'는 말이다. 즉 부자가 된 사람이 권력을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없으나, 막상 권력을 잡게 되면 그 권력이 막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뜻함. (도마 110장과 비슷한데 약간 다름.)[125] 예수로부터 멀리 있는 자는 나라(천국)으로부터 멀리 있다는 말은, 예수로부터 가까이 있는 자는 천국으로부터 가까이 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그 앞의 구절, "예수와 가까이 있는 자는 불과 가까이 있는 것이다"와 비교해 보면, 천국으로부터 가까이 있는 자는 불과 가까이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불을 긍정적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이것이 종말론에서 말하는 징벌의 불기둥이었다면, 불과 가까이 있는 자는 천국으로부터 멀리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니, 여기서는 불을, 징벌의 의미로써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126]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외적인 모습(이미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마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가르침 속에 숨겨져 있는 말씀(words)을 빌려, 자신 마음속의 따뜻한 마음씨를 지켜낸다. 이러한 사람의 따뜻한 마음씨는 결국 세상에 드러날 것이나, 그의 선량한 마음은 그렇게 드러난 모습 마저 숨기려고 할 것이다. 이는 도마 62장 "너의 왼손에게 너의 오른손이 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라."라는 말과 통한다.[127] 자신의 내면 속, 진정한 모습을 직면하게 될 때, 스스로가 그것을 감내해 낼 자신이 있는지를 물어보고 있다. 그리고 '그만큼 힘겨울 것이나, 필연적으로 겪을 수 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스스로 견뎌낼 자신이 있겠느냐'는 격려의 말이기도 하다.[128] 81장에서 "부유해서 권력을 원하나, 결국 권력에 스스로 질리게 된다"는 것이 나온다. 즉 아담은 거대한 권력과 부를 원했으나 스스로 감당하지 못한 세속적 인간이었다는 것. '비록 그가 가진 부와 권력은 대단했으나,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을 감당할 자격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가 그럴 자격이 되었다면, 죽음의 공포도 극복하였을 것이다.(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것)[129] 여기서의 rest(안식, 휴식)은 육체의 휴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영혼의 안식을 보다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식들은 왜 영혼이 안식할 곳을 찾지 않는 것인가?"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130] 도마 80장과 56장을 비교해보면, 그 몸(the body)은 시체(carcass)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영혼이 가난해 죽어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그 몸(the body)을 말한다. 죽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 외면적인 몸에만 의존한다면(depend on), 그러는 사람 역시 죽어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몸을 보지 말고 영혼을 살펴라는 얘기.[131] 천사와 예언자가 했줬다는 이야기는, 사실 이미 너희 머리 속에 있던 말이다. 자신 스스로의 평소 생각이, 꿈이나 무의식 속에 천사의 말로 나타난 것이라는 뜻.[132] 그러고는 결국엔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천사나 예언자'에게 줘 버린다. 이 말은, 자신의 생각인데도 불구하고, 그 말이 자신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천사나 예언자'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뜻.[133] 하지만 그러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천사의 말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134] 내면을 깨끗이 씻어야 하는데, 도리어 외면을 씻으려는 제자들을 보고 꾸짖고 있다. 이는 겉모습과 외양에만 치중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겉과 안을 구분짓는 이원론이 무의미하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컵의 안쪽과 바깥쪽을 따로 만들 수 있는가?[135] 바리새인처럼 엄격하고 형식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훨씬 융통성있고 젠틀한(gentle) 사람다운 가르침이라는 것.[136] 도마 50장에 "그것은 움직임이요, 안식이로다"와 비슷한다. 여기서는 "멍에(yoke)와 안식". 공통되는 안식을 제외하면, '움직임'은 '멍에'와 같다. 따라서 움직임(motion)이란 일종의 노동이나 일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137] '너희 존재 안에 있는 자'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가 누구인지 궁금하고 물어본다는 것이다. 도마 52장에서, '너희 존재 안에 있는 자'(the one who is in your presence)의 the one을 '살아 있는 자'(the living one)로 서술했는데, 이로써 유추해보면, '예수가 누구인지를 물어본다는 것은, 바깥으로 드러난 커리어에 대한 문제이지, 그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정으로 궁금해서 질문한 문제는 아님을, 지적하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138] 앞의 '너희 존재 안에 있는 자'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말하니까, 주위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서 예수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그 사람들을 꾸짖고 있다.[139] 성스러운 말은,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줘서는 안된다는 뜻. 그 성스러운 말을 조롱하고 더럽힐 것이기 때문이다.[140] 소량의 효모는 '소박해보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뜻한다. 하지만 부풀어 올라 수많은 결실(빵)들을 만들어낸다. [141] 사람의 욕심과 겉모습에 대한 호감, 부와 권력 등을 음식에 비유했다. 우리는 살아가는데에 있어서 부와 권력을 가지고자 애를 쓰고 그것을 항상 머리 속에서 되뇌이지만,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서 그 항아리를 내려놓고서야, 그것이 비어 있었음을 알게 된다.[142] 집에 있을 때 왜 칼을 뽑아 벽에 찔렀을까?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어느 정도 자신의 삶이 충만해지고 자신감이 생겼을 때, 불의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는 연습을 하라는 것이다. 그 불의에 대해 목소리를 높히다보면, 어느 순간, 의도치 않았더라도, 강자는 그 칼에 맞고 무너진다.[143] 사적인 삶의 정체성보다, 공적인 삶의 정체성을 더 중요시함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하물며 공생애 기간에 있는 예수에게는 당연한 이야기였을 것이다.[144] 그 당시 그 지역을 지배했었던 로마인들을 말한다.[145] 당시 금화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돈을 많이 가진 상인이었을 것이다. 또한 금화에는 카이사르 시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으며, 돈을 많이 가진 상인은 로마와 관계가 돈독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예수는 "너희가 이 지역에서 사람을 갈취해서 번 돈은 로마인에게 주고, 너희 신(로마인의 신 또는 그 사람이 믿는 신)의 것들은 너희 신에게 주고, 나의 것(영혼의 목마름을 갈구하는 자)은 나에게 주어라."라고 말했던 것이다.[146] 가족의 권위에 매달려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그 자신의 가족을 버려서도 안된다는 것.[147] 여기서 나의 어머니는 선의의 거짓말을 한 것이다. 아들 잘되라고... 하지만 그런 거짓말들은 자신만의 삶을 구축해 가는데 도움이 안된다. 진리라는 참된 어머니야말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자신감과 자존감을 나 예수에게 주었다는 것.[148] the bridal chamber는 예식장, 결혼식장을 말한다. 여기서는, 서로 다른 두 명이 하나가 되는 장소를 상징한다. 따라서, 하나 됨의 가르침을 버렸을 때, 그제서야 금식하고 기도하게 할 것이라는 것. 예수가 '하나됨'의 가르침을 버릴리가 없으니, 절대로 기도하거나 금식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앞에서 봤듯이, 바리새인들의 매우 형식적인 기도와 금식은 예수가 가장 거부한 것 중의 하나다.[149] 도마 99장을 보면, 예수는 자신의 형제들과 어머니가 밖에 서 있는 것을 알고도, "나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나의 형제들이요 나의 어머니이니라."고 말했다. 101장에서는 "나의 어머니는 나에게 거짓을 줬지만, 나의 참된 어머니는 나에게 삶을 주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고도 사람들에게 욕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아마도 이 때 예수는 사람들에게 '애미애비도 없는 창녀의 자식'이라는 욕설을 듣고 이런 대답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당시 사람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꿋꿋하게 펼쳐 나가겠다는, 예수의 담담한 신념을 엿볼 수 있는 어록이라 하겠다.[150]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 현실적인 것과 이상적인 것을 하나로 만들 때, 너희는 너희 삶에 충실할 수 있으리라.[151] 너 스스로가 한마음 한뜻이 될 때, 너에게는 그 어떤 것도 장애물이 되지 못하리라는 뜻. 산을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가능해질 수 있다는 관용어적인 말이지, 결코 신비주의적 말로 봐선 안된다. 물론 성경에도 이 관용구가 나온다.[152] 이 부분은 정경과 해석이 다르다. 정경에서는 없어진 한마리라도 끝까지 찾겠다는 의미이지만, 도마복음에서는 자신 속 100개의 가치 중에서도 그 중 가장 큰 '단 하나의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 진정 살아있는 삶이며, 이를 위해서는 나머지 99마리를 잃어버려도 나는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단 하나의 가치에 만족하겠다는 의미이다.[153]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말'이고, 그것을 마신다는 것은 자신의 것으로 체득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는 자'를 말한다.[154] 예수 자신도 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만큼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기란 어렵다는 것이고, 그렇게 실천한 자 앞에서는 나도 그에게서 배우겠다는 겸손의 말을 하고 있다.[155] 도마 97장의 구조와 같다. 따라서 '밭에 보물이 숨겨져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는 한 사람'을,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로 봐야한다. 이 사람이 그 보물을 발견하였다면 욕심이 생겨서, '이자를 붙이고 돈 빌려주기'를 시작할 것이다. 보물을 발견하지 않았던 것이 이 사람에게는 행운이었던 셈. 그의 아들도 그 행운을 얻었지만, 마지막에 산 사람이 경작하면서 보물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삶을 살지 않고 그 보물을 통해서 남을 착취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156] 기존 복음서에서는 마지막 산 사람을 긍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경작해서 보물을 발견한 것은 행운에 불과하다. 자신의 삶이 행운으로 결정된다는 것이, 예수가 말하는 메세지는 아닐 것이다.[157] 경작하는 것 자체가 어떤 노력을 한 것이 아니냐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행운도 무언가를 하려고하는 결단과 노력에 의해서 발견되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발견된 그 보물을 가지고 이자놀이 하는 건... 좀.. 많이 이상하다. 그러면, 이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고 감정이입해보자. 만약 한국에서 땅을 샀는데 그 전 주인이 숨겨논 골동품을, 나중에 그 땅을 산 사람이 발견하였다면, 그리고 그것을 판 돈으로 부자가 되어 고리대금업을 하였다면? 이걸 긍정하여서 예수의 메세지로 봐야할까? 이것이 영혼을 감동케하는 적절한 예시가 될 수 있을까? 음..[158] 부자가 되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 삶과 그러한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적당히 벌면서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는 삶 중에,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자신의 삶을 살고 싶다면 후자를 선택해라는 뜻.[159] 도마 81장과 비슷한데, 조금 다르다. 81장에서는 "부자는 권력을 탐하고, 권력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 권력이 막상 좋은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된다"는 의미이고, 110장은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재빨리 파악해 부자가 된 자는, 그 부(富)의 세상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어 포기한다"는 의미이다.[160] 그 이전부터 예수 시대에 이르기까지, 하늘은 여러 겹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성경에 킹제임스바이블(kjv) 기준으로 하늘의 복수형인 'heavens'라는 단어가 총 127번 나온다. 구약에 108번, 신약 19번이다.[161] 도마 56장, 80장과 같다. 자신의 삶을 긍정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라는 뜻. 그러면 세상이 그를 괴롭혀도 그 사람의 삶의 충실함을 방해할 순 없을 것이다.[162] 도마 87장을 심화시켰다. 영혼과 육신은 서로가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보완해가는 상태가 되어야지, 하나가 하나에 의존하는 상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163] the kingdom(나라)는 천국을 말한다.[164] 베드로의 말을 거꾸로 살펴보면, 예수와 베드로가 추구하던 궁극적인 가치를 알 수 있다. '여자들은 삶(life)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에서 거꾸로 생각을 더듬어 간다면, 예수와 베드로가 추구하던 가치가 '''삶(life)'''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핵심 가르침은 '자신의 '''삶(life)'''을 살아라'는 말이었던 것이다.[165] 여자라는 정체성으로 삶을 살지말고, 인간이라는 정체성으로 자신의 삶을 살라는 뜻.[166] 이 문장 뒤에 "그리고 너희가 ' 산이여! 여기서 움직이라 ' 고 말할 때, 그것은 움직이리라. "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마태에서도 나오는 관용구절이지, 초자연적인 것(Supernatural)을 말하는 게 아니다.[167] 간단하게 말하면, 율법과 형식에 엄격했던 유대교 종파 사람들.[168] 사전에는 "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불결하고 부정한 것으로부터 분리해 나온 무리"로써 '분리된 자'를 뜻하는 바리새인을 말하고 있으나, 도마복음에서의 바리새인이란 '형식에 집착해서 그 가르침이 진짜로 가르키는 본 뜻을 잃어버렸다'는 맥락으로 많이 쓰인다. (도마 39장과 도마 43장 참조)[169] 이 가르침이 우연하게 불교의 공사상과 비슷할 뿐이다. 사실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다르다고 봐야한다. 불교의 공사상은 언어나 물질의 절대성에 대한 의문에서 비롯되어 그 개념은 상대적 기준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비어있다고 말하는 것인데에 비해, 도마의 예수는 '상대성'과 그로 인한 '개념의 비어있음'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를 두고 불교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170] 어떤 사람은 또다른 외경인 《도마행전》에서 도마가 인도로 갔기 때문에 《도마복음》이 인도의 사상과 비슷한 것이라고 말하는데, 결론적으로 틀린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도마복음》에서 예수는 강자와 부자의 권위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소작농과 하인을 부리는 지주와 상인들은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도마행전》에서 '''예수는 도마를 노예로 여겨서 상인에게 돈을 받고 팔아버린다.''' 《도마복음》의 시각에서 보면 《도마행전》의 예수는 처음부터 말도 안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또한 《도마행전》은 일관된 하나의 이야기 형식으로 한사람이 편집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첨삭되지 않고 비교적 후대에 작성되었음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최근 신학자들의 견해이기도 하다.[171] 《도마복음》과는 다르게 《도마행전》은 기존 복음서와도 그 이야기 서사구조가 하나도 맞지 않는다. 후대의 위작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도마행전》에서는 예수에 의해 인도상인에게 팔린 도마가, 마침내 인도에 가서 인도왕 마저 개종시키고는, 결국 거기서 순교한다. 그렇다면 《도마행전》의 도마는 기존 《성경》에 나오는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였던 '의심하는 도마'"는 아닌셈. (인도에 팔려서 거기서 죽었는데, 그 뒤 예수가 죽었을 때도 12사도 중 한명인 도마가 나오니까 말이다. 죽은 도마가 살아나서 예루살렘의 예수를 보러갔을리도 없고, 만약 그렇다하더라도 그런 도마가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니까.) 그럼, 이름이 같지만 서로 다른 두명의 도마가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도마행전》에서는 도마가 12사도 중 한명이라고 분명히 나온다. 이야기 구조가 애초부터 틀린 셈. 조금만 생각해도 도마행전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 수 있는데, 현재 인터넷 상에서는 이렇게 잘못된 《도마행전》을 가지고 '도마인도행'을 말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172] 이는 마태복음 10장 16절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 라고 말한 것과 같다.[173] 보통 바리새인을 말한다[174] 여기에서 아버지(the father)는 하느님을 말한다. 앞의 도16장에 나온 가정에서의 아비와 다르게 해석해야함. 가정 내에서 father를 지칭할 때는 진짜 아버지로, 그 밖에 광의 뜻을 말할 때는 '하느님'으로 해석해야 한다.[175] 여기서 '산이 움직여라 했을 떄 산이 움직이는 것'은 관용어구로 사복음서에서도 나온다. 결코 초자연적인 문장이 아니다.[176] 언뜻, 과격하게 보이지만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에서도 공통적으로 다 나오는 내용이다. (마태 12:29 / 마가 3:27 / 루카11: 21-22)[177] 반면 성경에서는, 대부분 '죽음'과 '영원한 생명'의 이분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178] 애초부터 도마복음은 천국의 존재와 종말론을 부정(도113, 도18, 도51)하여 '''사후세계 보다는 현실의 삶에 집중하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시체'나 '죽음'을 영지주의로 해석할 수 없다. 도마복음에서 '현실의 삶을 중시'하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하기 때문에 하나의 일관된 관점으로 해석을 한다면, 시체나 죽음의 발견을 영지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도마라는 이야기의 구조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는 한 이야기에 두가지 서로 다른 관점을 집어넣은 것이니, 따라서 영지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이다.[179] 간단히 얘기하면, '하느님의 존재는 믿기는 해도, 현실의 삶을 매우 중시 하기 때문에 사후세계도 안 믿었는데, 뜬금없이 왜 삶과 동떨어진 신비스러운 영지주의를 믿겠느냐' 이말이다.[180] (도:80)와 유사. 시체가 몸으로 바뀌었다. "그 세상을 알게된 사람은 누구든지 몸을 발견하게 되느니라. 그리고 몸을 발견한 어떤 사람에게도 세상은 저 사람을 받을 자격이 없느니라. "[181] '살아있는 자'는 the living father 즉 하느님을 말한다. 따라서 '살아있는 자로부터 살아있는 자'는, '하느님을 믿고 자신의 삶에 충실한 인간들'을 뜻한다. 이렇게 하느님을 믿고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리라는 뜻.[182] 너무 많이 나와서 전부다 언급 불가 바로 아래 챕터 '영지주의와의 차이점'에서 신약성경에서 그러한 대비가 얼마나 나오는지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그건 일부분이다.[183] 로마서8:5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 와 비슷하다.[184] 그리어로 데미우르고스라 부른다. 악신, 혼돈 같은 불완전한 존재. 영지주의에서는 하느님은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악에 해당하는 육신에 손을 댈 수는 없으며, 그 역할을 하는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아이온'인데, 이 아이온에서 나온 불완전한 존재가 '데미우르고스' 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데미우르고스는 이미 만들어진 인간의 육체에, 자신이 만든 '영혼'을 넣을 수 있는데, 이러한 영혼은 완전한 지식이자 비밀스럽게 전해지는 '그노시스'를 얻게 되면, 육체에서 해방되어 다시 하느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185] "너의 귀로 네가 듣는 것을, 너의 집 지붕 위에서 타인의 귀로 전파하라. 그 어느 누구도 등불을 켜서 바구니 아래 감추거나, 숨겨진 장소에 두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등잔대 위에 올려놓나니, 이는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니라. " (도마 33장)[186] 도마에서 일관되게 나오는 것이 '''숨겨질 수 없고, 숨겨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비밀을 최우선으로 하는 영지주의와는 그 결이 다르다.[187] 부자 중에서도 고리대금업자와 부동산업자, 소작농장주인 등을 질책하였을 따름이다. 또한 가난한 사람에 축복을 빌었던 것이지, 지나친 금욕을 하자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마에서는 형식적인 금식은 위선적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도마 6장과 14장 참조)[188] 도마 28장: 예수께서 말씀하셨다,"나는 이 세상 한가운데에서 내 입장을 가졌으며, 육신으로 그들에게 드러내었다."[189] 구체적인 것은 위의 '아이와 같이 순수하라' 챕터에 나온다.[190] 기존 성경에는 "네 이웃을 네 몸(thyself=youself=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Thou shalt love thy neighbour as thyself.(KJV)(마태22;39)로 나와 있다.[191] 여기서 아버지는 하느님을 말한다.[192] 원문과 가장 가깝다는 킹제임스바이블(KJV)을 해석. 다른 한글 번역판도 크게 다르지 않다. -KJV 원문: But the wisdom that is from above is first pure, then peaceable, gentle, and easy to be intreated, full of mercy and good fruits, without partiality, and without hypocrisy. And the fruit of righteousness is sown in peace of them that make peace. (James 3:17)[193] Every good gift and every perfect gift is from above, and cometh down from the Father of lights, with whom is no variableness, neither shadow of turning. (KJV) 모든 선한 선물과 모든 완벽한 선물은 위로부터 온다. 그리고 절대 변화하지 않는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온다. [194] Draw nigh to God, and he will draw nigh to you. Cleanse your hands, ye sinners; and purify your hearts, ye double minded.(KJV) 하느님을 가까이해라, 그리고 하느님은 너를 가까이 할 것이다. 너희 죄인들여! 너희의 손들을 깨끗히 하라, 그리고 너희 두 마음을 가진 자들이여! 너희의 마음들을 순수케하라.[195] 예수의 '아가페'적인 사랑을 말한다.[196] "너의 귀로 네가 듣는 것을, 너의 집 지붕 위에서 타인의 귀로 전파하라. 그 어느 누구도 등불을 켜서 바구니 아래 감추거나, 숨겨진 장소에 두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등잔대 위에 올려놓나니, 이는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니라. " (도마 33장)[197] 도마에서 일관되게 나오는 것이 '''숨겨질 수 없고, 숨겨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비밀을 최우선으로 하는 영지주의와는 그 결이 다르다.[198] 부자 중에서도 고리대금업자와 부동산업자, 소작농장주인 등을 질책하였을 따름이다. 또한 가난한 사람에 축복을 빌었던 것이지, 지나친 금욕을 하자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마에서는 형식적인 금식은 위선적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도마 6장과 14장 참조)[199] 도마 28장: 예수께서 말씀하셨다,"나는 이 세상 한가운데에서 내 입장을 가졌으며, 육신으로 그들에게 드러내었다."[200] 영지주의가 아니라면 그 저술연대가 예수시대에 근접하게 된다. 영지주의가 시작한 것은 예수 사후 100년 후부터 시작하여 250~350년 사이에 극성을 이루었기 때문에, 영지주의 여부에 따라서 연대추정에 결정적인 차이가 나는 것이다. 만약 도마복음이 영지주의가 아니라면, 우리는 이 책이 예수 시대와 그리 차이나지 않는 시기에 저술되었음을 알 수 있다.[201] 사도 바울이 저술한 고린토서에서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언급하는 내용이 나온다. 도마복음은 그 유파이었을 것이다.[202] 기존의 성경에서는 도마를 ‘doubting Thomas’(의심 많은 도마)라고 하여, '예수의 부활을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았다.'(요 20:24-25) 면서 부활을 믿지 않는 도마를 디스했고, 반대로 도마는 도마복음 13장에서 '베드로와 마태는 예수님의 진정한 가르침을 얻지 못했다'며 부활을 믿는 대표적인 제자 두명을 디스하는 것으로 볼 때, 그들 사이에서 '부활이라는 교리'를 두고 다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203] 정확히는 그 일부가 남긴 서적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4세기까지는 도마의 세력이 약하긴 했어도 그리스 터키 등지에서 기존 주류와 공존하고 있었다가, 4세기말 로마 국교화와 정경(정식 성경) 확립 이후 5세기 초부터는 아예 이집트 남부와 아라비아 지역으로 흩어졌으며, 이 아라비아 지역에서 남아 있던 도마 계열의 서적이 7세기초 이슬람이 탄생할 때 영향을 줬다고 보는 시각이다.[204] 이슬람은 예수의 신성을 믿지 않는다. 「 코란 3:61 그대에게 지식이 이른 후에도 예수(의 신성)에 관하여 논쟁하는 자가 있다면, 거짓말 하는 자들 위에 하느님의 벌이 있게 하여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라. 」[205] 또한 이슬람은 삼위일체도 믿지 않고, 예수를 메시아라고 하지도 않으며, 단지 뛰어난 인간(하느님의 사도)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는 도마복음의 관점이랑 매우 유사하다.[206] '불이'의 사상을 근거로 이런 입장을 보이는 불교 신자들이 있음은 사실이나, 원래 대승 불교에서 강조하는 불이는 '양쪽 극단의 관념은 연기법으로 인해 나타날 뿐 집착할 만한 실체가 없으므로, 양극단에 얽매이거나 탐착해서 마음에 불을 지피지 말고 올바르고 유연한 관점을 지닌 채 삶의 문제들을 대하라'는 것에 가깝다. 다만 불교는 성립 초창기부터 부당한 권위에 대해 항거하기보다는 그 권위자를 설득해서 감화시키는 온건한 방식으로 사회문제에 개입해 온 역사가 더 깊은데다, 고대보다 삶의 양상이 훨씬 복잡해진 현대에서는 불교계 인사들이 권력에 사실상 야합하거나 권력자들에게 통치 명분을 주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합리화나 다름없는 태도는 미얀마의 친정부적 불교계와 일본 제국 당시의 무사화된 일본 선종 종파들, 5공 당시 한국 불교계 등 대승과 상좌부를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나타나 왔다.[207] 이는 도덕경은 물론 손자병법에도 나타나는 처세 태도인데, 손자병법에도 도가 사상의 영향이 많이 묻어나고 있다.[208] 독수리가 토끼를 사냥하는 상황을 보자. 토끼는 자신을 죽이는 독수리를 악으로 보고 그것을 감내하는 자신의 마음을 선으로 볼 것이지만, 독수리는 토끼를 선과 악으로 보지 않고 단지 좋아하는 음식으로 볼 것이다. 여기서 니체는 선악을 구분하는 토끼의 마음을 노예도덕으로 보았고, 호불호로 구분하는 독수리의 마음을 주인도덕으로 보았다. 즉, 토끼와 같이 약자이기 때문에 당하는 것을, 어쩔 수 없다고 여겨서 이것을 사랑과 희생으로 긍정하고 합리화하며, 현세가 아닌 내세의 천국과 종말론에 의지하는 기독교는 노예도덕이라는 것.[209] 도마 1장 『 그리고 그가 말하였다. "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 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는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면, 삶에서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210] 이 내용은 도마복음의 예수를 전제로 한 이야기이다. 유니테리언, 이슬람 등의 입장에서는 받아드릴 수 있지만, 기존 기독교 내의 입장에서는 이단에 해당된다.[211] 김용옥(金容沃), <<도올의 도마복음 한글역주 2>>통나무, 2010[212] 김용옥(金容沃), <<도올의 도마복음 한글역주 3>>, 통나무, 2010[213] 권영흠, <<도마복음서>>, 해, 2014[214] 공병효,《예수의 인성교육》, 2014[215] 이게 정통교회에서 토마스복음서를 신경쓰지 않는 이유다. 알기쉽게 불교로 바꿔 말하면, 숫타니타파나 아함경 등 초기불경과 많은 구절을 공유하는 문서가 새로 발견됐다. 그런데, 구절은 공유하지만 윤회를 부정하고 깨달음보다 믿음을 강조하는등 기존불교의 핵심가치와 결이 다르다. 문제는 이 '이단아'가 정통불경이나 아라한의 구전에 비하면 소수란 것이다. 이래선 성립연대가 숫타니타파보다 먼저여도 문제인데, 심지어 성립연대부터 논쟁거리다. 그렇다면 정통불교에서는 이 문서를 석가모니와 외도의 가르침을 섞은 파의 경전이라고 여길까, 아니면 기존불경과 십대제자, 아라한의 구전이 다 잘못됐고 이 문서가 진짜 석가모니의 가르침이었다고 여길까. 몇 가지 가능성만으로 후자라 주장하는건 지나친 비약일 것이다. [216] 단, 이는 토마스 복음서가 확실하게 영지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가정했을 경우에 한한다. 애초에 토마스 복음서가 기존 정경의 핵심가치를 부정하지 않고 어울린다면 이런 논쟁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217] 성서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어록이 정본복음서보다 먼저 있는 것에 대해 동의한다. # [218] Jesus Outside the New Testament: An Introduction to the Ancient Evidence (2000)[219] 예수의 비유는 후대의 저서일수록 저자들이 비유의 비정상성을 인지하여 정상적으로 고쳐놓는다.[220] 크레이그 에반스 <만들어진 예수>, 이형일 <예수와 하나님의 아들 기독론>[221]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학자들로 크레이그 A. 에반스, (이 양반은 학자가 아니라 저널리스트), 폴 마이어 등이 있다[222] E. P. Sanders, The Historical Figure of Jesus, p. 64 [223] April DeConick, The original Gospel of Thomas in translation[224] Stevan Davis, The Gospel of Thomas: Annotated and Explained[225] 카르타고 공의회: 기독교 역사상 카르타고 지역(히포 시노드)에서 열린 지역 공의회. 이 곳에서 열린 회의는 지역 공의회 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상당히 주목할만한 결정 몇 개가 이뤄졌다. 특히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걸쳐 열린 신약 및 구약 성경이 확정되어 선포된 회의는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226] 물론 카르타고 공의회가 이전에도 정경 목록에 대한 논의가 있어서 어느 정도 틀이 있었다. 하지만 그 기준은 느슨했으며, 27서 이외의 각종 서적들이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서 성경으로 취급되었다. 토마스 복음서의 의의는 정경이냐 위경이냐가 아니라, 순수 고고학적 의미에서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