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BC 석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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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기간'''
1972년 4월 ~ 1980년 11월 30일
'''방송 시간'''[1]
월~금 21:00 ~ 21:35
토요일 20:45 ~ 21:20
일요일 20:45~21:15
'''진행자'''[2]
봉두완 논평주간, 박종세 방송주간, 구박 정치부장, 노계원 경제부장,
성대석 편제부 차장, 이희준 사회부장, 길종섭 정치부 기자,
박초아 아나운서, 최희선 아나운서, 이영혜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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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종섭 기자, 이영혜 아나운서
1. 개요
2. 탄생비화
3. 역대 진행자
4.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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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양방송 보도 프로그램의 정신적 지주.''' TBC의 후신임을 자처하는 JTBCJTBC 뉴스룸에 해당하며, 채널 7을 이어받은 KBS2로 따진다면 KBS 8 뉴스타임의 전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72년 4월부터 1976년 8월까지 오프닝의 타이틀에는 '석간'이 한자(夕刊)로 표기되었다. 1976년 8월에 'TBC 리포트'로 타이틀을 변경하였으나, 1978년 6월에 다시 원래로 돌아왔다.[3] 초창기에는 저녁7시대에 방송했다가 얼마안가 밤 10시대로 편성시간을 변경해 MBC뉴스데스크와 경쟁했다.[4] 그러다가 1974년 시간대별 편성지침에 따라서 9시대로 옮겼다.
1973년에는 진행을 맡던 기자들이 모두 하차하고, 아나운서들이 진행을 맡기도 했으나,# 얼마안가 봉두완, 노계원을 투입하면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1978년에는 이정애, 박초아 아나운서를 투입하면서 방송 사상 최초로 여성 아나운서가 저녁종합뉴스 진행을 맡았으며, 이후 KBS 9시뉴스에 이병혜 아나운서가 투입되는 등 남녀 더블앵커 체제가 자리잡았다. 또한 이때부터 크로마키 영상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고별 방송때는 생방송이 아닌 녹화 방송 및 특집으로 방영했다.[5] 이후로 KBS 8시 뉴스라는 타이틀명으로 시간대를 옮겨방송되었지만 오래가지 않아서 사라졌다.
보통 4명의 기자들이 돌아가면서 앵커를 맡았으며 서울판과 부산판[6]이 따로 제작되어 방송되었다.
자매품으로는 아침 7시에 방영하던 TBC 조간이 있었으나, 아침방송 중단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7]
참고로 스포츠 뉴스와 날씨는 TBC 석간이 아닌 오늘의 스포츠[8]라는 프로그램에서 따로 소화했다.
현재까지 풀버전이 공개된 방송분은 1980년 11월 30일 마지막 방송분이 전부이다.마지막 방송분 KBS나 JTBC에서 자료화면으로 TBC석간이 가끔씩 등장하는것으로 보아 방영분이 더 존재하는것으로 보이나, KBS나 JTBC 그 어느쪽에서도 방영분을 공식적으로 공개한 적은 없다.
한편, 부산에서는 마이크로웨이브 사용허가가 나지않은 관계로 부산판이 따로 제작되어서 방송되었다.#1 #2 #3 #4[9]

2. 탄생비화


봉두완 앵커를 중심으로, 아나운서가 딱딱하게 원고를 읽어 내려가던 기존 뉴스와 다른 새로운 뉴스 쇼를 기획하고 있었는데, 미국 유학 시절 cbs 이브닝 뉴스를 애청하던 '''이건희'''[10] 당시 이사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면서 시작하게 되었다.

3. 역대 진행자


남성 진행자 (대부분이 논설위원이나 기자다.)
  • 봉두완(1972년 4월 ~ 1980년 11월) 당시 TBC 논평주간. 언론통폐합 후 KBS로 옮겨져 해설위원을 맡다 민정당 12대 국회의원, 국회 외무위원장, MBC 라디오 <전국패트롤 봉두완입니다> MC, 통일국민당 전당대회 의장, 광운대 신방과 교수, KBS 1R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 MC, <봉두완의 SBS 전망대> MC, 반핵반김국민협의회 4기 위원장, 원음방송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 MC, 한미클럽 초대 회장 역임.
  • 홍용기(1972년 4월 ~ 12월) 당시 TBC 논평위원. 1979년 미국에서 사망.
  • 조용중(1972년 ~ 1974년) 당시 TBC 논평위원, 퇴사 후 (주)문화방송·경향신문 신문담당 전무이사, 연합통신 사장, 제9대 관훈클럽 총무, 초대 신영언론재단 이사장, 문우언론재단 이사장, 한국ABC협회장 역임. 2018년 2월 24일 작고.
  • 양흥모(1972년 4월 ~ 7월) 당시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후 중앙일보 동서문제연구소장, 성균관대 법정대/사회과학대 교수, 한국국민윤리학회장,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역임. 2010년 7월 20일 작고.
  • 박종세(1972년 10월 ~ 1980년 11월) 당시 TBC 방송주간, 서울중앙방송국(KBS) 출신으로 5.16 군사정변 선포 방송을 한 이력이 있다. 언론통폐합 이후 KBS 방송주간, 코래드 부사장 및 사장, 해태 타이거즈 단장, 아시아컴 회장 등을 역임.
  • 원종관(1972년 10월 ~ 1974년) 당시 TBC 아나운서 부국장. 언론통폐합 이후 KBS로 옮겨져 아나운서실 방송위원 및 부국장을 맡으며 1986 멕시코 월드컵 캐스터로도 활약했고, 1997년부터 1998년까지는 한국스포츠TV에서 프로농구 중계 캐스터로도 활동함.
  • 박노설(1972년 10월 ~ 1974년) 당시 TBC 심의실장. 언론통폐합 후 KBS로 옮겨져 심의위원을 지냄.
  • 남정휴(1974년 4월 ~ 7월) 당시 제일기획 이사. 이후 동방기획(현 BBDO코리아) 대표이사, 경기대학교 인문사회대학 국제관계학과 교수 등을 지냄.
  • 노계원(1974년 10월 ~ 1980년 11월) 당시 TBC 외신부장, 정경부장, 보도국 부국장 역임. 언론통폐합 후 KBS로 이직되어 해설위원을 맡다가 중앙일보로 옮겨 편집국 부국장 및 특집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편집국장대우, 수석논설위원, 삼성언론재단 연구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함.
  • 임응식(1974년 1월 ~ 1975년) 1964년 RSB 1기 출신. 당시 TBC 논평위원, 언론통폐합 이후 KBS로 옮겨져 보도본부 해설위원, 전주방송국장, 시청자센터 주간, 시청자본부 홍보실장, 보도본부 해설위원장, 국제방송국장, 도쿄총국장 등을 역임함. 2018년 8월 20일 작고.
  • 구박(1975년 1월 ~ 1980년 11월) 당시 TBC 정치부장, 언론통폐합 이후 KBS로 옮겨져 해설위원, 심의실장, 부산방송국장, 국제방송국장, 방송연수원 교수, 뉴미디어국장, KBS영상사업단 감사, 우석대 객원교수 등을 역임함.
  • 이의일(1976년 8월 ~ 9월) 1977년 퇴사, 생몰여부 불투명.
  • 김성호(1978년 6월 ~ 1979년 7월) 1964년 RSB 1기 출신으로 당시 TBC 파리특파원을 지냄. 이후 중앙일보 논설위원, 동서문화연구소 부소장, 편집국 부국장 및 문화부장, 출판제작국 편집위원, <음악세계> 부주간, 출판기획위원, 국제부장, 중앙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한국판 뉴스위크 편집위원, 수석논설위원, 문화일보 논설위원, 파이낸셜뉴스 주필 역임. 2015년 10월 15일 작고.
  • 성대석(1978년 7월 ~ 1980년 11월) 1964년 DTV 수습 아나운서 출신으로 당시 TBC 편제부 차장 및 사회부 기자 역임,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KBS에 이직되어 보도본부 해외특집부장, LA지국장, 해설위원, 보도국 부국장, 홍보실장, 홍보국장, 중기발전기획단 방송주간, KBS시설사업단 감사, 한국언론인협회장 역임.
  • 이희준(1980년 10월 ~ 11월) 당시 TBC 사회부장, 논평위원, 보도국 부국장 역임. 언론통폐합 뒤 KBS로 이직되어 사회부장과 기획위원 등을 맡다가 1981년 퇴직 후 삼성물산 회장비서실 홍보팀장을 비롯해 제일제당 이사대우, 삼성물산 회장비서실 이사, 제일제당 상무, 삼성전자 상무, 제일기획 전무 및 부사장, 삼성그룹 비서실장 보좌역, 제일보젤 대표 등을 역임함. 2014년 8월 19일 작고.
  • 길종섭(1980년 10월 ~ 11월) 당시 TBC 정치부 기자, 언론통폐합 이후 KBS로 이직되어 2005년 퇴임시까지 정치부장, 기획홍보실 제작총무, 경제부장, 도쿄총국장, 대기자, KBS 뉴스 9, KBS 뉴스라인, KBS 뉴스광장, 길종섭의 쟁점토론, 생방송 심야토론 진행자 등을 역임했고, 퇴사 후 고려대학교 석좌교수, 청주방송 대표이사, 제7대 한국케이블TV 방송협회장 역임.
여성 진행자 (전부 아나운서) [11] 대부분 결혼후 퇴사해 그 이후 행적을 알 수 없거나 아나운서 교육자로 일하고 있는것이 대부분이다.
  • 이정애 아나운서(1978년 6월 ~ 1980년 7월) 1980년 7월 퇴사, 이후 KBS와 EBS 아나운서, 삼성전자 마케팅실 광고과, 사내방송 및 광고업무 담당,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프로그램 및 한국방송통신고등학교 과정 진행을 거쳐 지금은 이정애 아나레슨 원장으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다.
  • 박초아 아나운서(1978년 6월 ~ 1980년 11월) 생몰여부 불투명.
  • 이영혜 아나운서(1980년 7월 ~ 1980년 11월) 대학교 언론학 박사, 이후 SBS 방송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다.
  • 최희선 아나운서(1980년 7월 ~ 1980년 11월) 강제이직 후 김동건 아나운서와 함께 뉴스파노라마 진행.

4. 출처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인사기사들
  • 한국 방송기자 통사 - 김성호 저. 21세기북스. 2014.

[1] 1980년 11월 당시 기준.[2] 당시에는 종합뉴스 앵커가 평일/주말로 구분되지 않고 순번에 따라 앵커가 바뀌는 형식이었다. ARD Tagesschau가 이런 형식이다.[3] 이는 당시 정부에서 국어순화정책을 펴면서 방송에서 외래어 사용을 자제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당시 뉴스데스크도 뉴스의 현장으로 타이틀을 잠시 바꿨었다.[4] 그리고 원래 편성시간인 저녁7시대에는 아나운서들이 진행하는 종합뉴스프로그램인 '''TBC 뉴우스'''를 편성했다.[5] 당시 기독교방송이 보도 기능을 한국방송공사로 넘겨주기 전 마지막 라디오 뉴스에서 여자 아나운서가 울먹이며 진행하는 것이 화근이 되어 신군부는 고별방송 지침을 만들어 각 방송사에 배포했고 지침에 따라 검열할 수 있게 사전녹화를 해서 테이프를 보안사로 넘겨야 했다. 하지만 'TBC 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의 연출자는 녹화 테이프를 갖고 친구 집에서 자다가 마지막 날 주조정실로 넘겨서 방송을 했었다고..... 하지만 가수 이은하 씨가 울먹이며 노래를 부른 바람에 이은하 씨는 3개월 출연정지를 먹었고 배우 강부자 씨도 울먹이며 마지막 말씀을 읽어나가 한동안 드라마 출연이 금지된 적도 있었다.[6] 이는 마이크로웨이브 허가가 나지 않아서 동시방송이 불가했기 때문에 생긴일이다. 때문에 부산판은 지역뉴스 중심으로 제작하되, 중요한 서울소식이나 해외소식은 서울본국에서 비행기로 필름을 수송해와 제작했다고 한다.[7] 이유는 1973년 말 전 세계를 뒤흔든 오일 쇼크로 인한 에너지 절약 차원이었다. 결국 TBC의 아침방송은 폐국 이후 KBS로 통합되어서야 재개된다.[8] 당시 김동완 기상캐스터가 일기예보를 했다.[9] 해당 영상은 당시 앵커를 맡았던 전옥수 전 아나운서가 개인 소장한 영상인데, 이걸 춘하추동방송 측에서 분할 업로드했다.[10] 참고로 이건희 회장이 학업을 마치고 처음으로 발을 들인 삼성그룹 계열사는 대표 계열사인 제일제당이나 제일모직도 아닌 동양방송이었다. 사실상의 후계자 수업의 첫 무대를 방송국으로 삼은 것은 그만큼 삼성이 매스컴 사업에 대해 상당한 열의와 애착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11] 당시 여자아나운서가 메인뉴스에 등장하는것 자체가 드문 시절이었고, 또 있다하더라도 뉴스말미에 잠깐 나와서 단신몇개와 해외소식을 전하는것이 전부였다. 우리나라 최초 여성단독앵커인 신은경씨도 처음에는 해외소식과 날씨를 각각 1개씩 전하는 역할이 전부였다고 한다. 지금 라디오 뉴스쇼에서 말미에 아나운서가 나와서 간추린 뉴스를 낭독해주는 것을생각하면된다. 이마저도 1970년대 KBS에선 이병혜, MBC에서는 최경미 아나운서 빼곤 아예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