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두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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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斗玩
1935년 12월 08일 ~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언론인, 정치인이다. 호는 다위(多爲)이다. 종교는 가톨릭이며 세례명은 다윗이다. 본관은 하음(河陰).#
2. 일생
1935년 황해도(현 황해북도) 수안군에서 태어났다. 경복고등학교,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59년 동화통신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하여 1962~1968년까지 한국일보 미주특파원으로 근무했고, 1969년부터 중앙일보 논설위원 겸 동양방송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의 논평위원(아나운서)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며 "1호 앵커맨"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봉두완의 뉴스전망대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논평을 내놓기도 했는데, 육영수가 애청하던 방송이었다고 전해진다.[1]
아나운서 재직 당시 'TBC 뉴스전망대'라는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이 프로그램의 클로징 멘션이 [3] 유명했다. 당연하겠지만 1970년대 당시에는 2010년대의 손석희와 비슷한 이미지였다. 더군다나 당대 언론통제가 일상화 되던 시절임을 감안하면[4] 어찌어찌 해고당허가나 고문받지 않는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물론 너무 유명했던 인물인지라 함부로 집어넣었다가 난리가 날게 뻔해서 못 집어넣은것에 가깝다고 봐야되겠지만 말이다. [5]
1970년대에는 라디오의 뉴스전망대와 뉴스논평, 2시취재현장, TV의 TBC 석간, 동서남북, 봉두완입니다까지 거의 모든 시사보도 프로그램을 전담하다시피한 스타앵커였다. 그는 미국 CBS 뉴스앵커 월터 크롱카이트에 비견되어 '봉카이트'란 별명으로 불렸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언론통폐합 직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고 5공 통치에 적극적인 협력을 보이면서 용기있는 참 언론인에서 신군부의 부역자로 이미지가 추락하게 된다.'''[6][7] 허삼수, 허화평이 가톨릭 신자인 것을 인연으로 끌어들인 것. 더 아이러니하게도 허삼수와 한강동 본당에 다녔는데 주임신부가 민주화에 앞장선 함세웅 신부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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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야당 텃밭인 서울특별시 마포구-용산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한국당 김재영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는데 이름값은 있었고, 이때 거물인사 상당수가 출마하지 못한 영향도 있기에 46.8%로 이종찬에 이어서 서울에서 2번째로 득표율이 높은 민정당 당선자라나는 타이틀을 탈았다. 같은 해 4월부터 1982년 5월까지 민주정의당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다. 1983년 국회 외무위원장이 되어 1985년까지 역임하였다.
외무위원장에 선출된 직후인 1983년, 테드 카플이 진행하는 미국 ABC 나이트라인에 출연해 당시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김대중과 한국의 인권과 안보 상황에 대해 토론했다. 그는 여의도 스튜디오에서 현지의 KBS, 김대중 등과 영상으로 토론 했는데, 능변과 교묘한 논리로 전두환 정권을 방어하였다.
이 말은 당시 ABC 나이트라인의 앵커맨이던 테드 카풀에게 한 것으로, "나도 너처럼 앵커맨" 이라는 말은 봉두완, 테드 카풀이 앵커맨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앵커맨이 아니었다. (신문사를 운영한 언론인이기는 하였음.)# 봉두완의 회고를 다시 인용"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KBS 스튜디오가 가장 악랄한 북한 공산군과 대치하고 있는 휴전선으로부터 고작 28마일밖에 안 되는데 민주주의 한답시고 그런 위협 속에 민주적 절차에 의한 두 번째 총선을 치르고 있다. 국회도 선거를 통해 구성했고. 우리는 아직도 남북이 대치 중에 있어. 미국하고는 달라. 나도 너처럼 앵커맨 출신이야. 그 당시 방송할 때 정부 정책을 정면 비판하고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나는 그래도 몇 마디 지껄이고 살았어."
하지만 김대중은 카플에게 발언을 끝내 얻어내어 유엔 국제사면위원회와 미국 국무성의 1982년 보고서를 인용했다는 말로 논란을 잠재웠다. 봉두완의 승리를 예상하고 전 교포들에게 라디오를 홍보했던 정부로서는 제대로 관광당한 셈(...) # 이희호 여사의 회고. # 김대중 본인의 회고 전두환은 일단 김대중과 토론에 나선 자체를 칭찬한 반면, 권익현 사무총장에게 한소리 들었다고 한다. # 봉두완의 회고"지금까지 김대중 씨가 말한 인권 유린은 박정희 때의 일이다. 전두환 정권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전두환 정권은 모든 인권을 보장하고 있다. 어떤 형태의 인권 유린도 없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정의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한민주당 노승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러나 신민당 돌풍의 영향으로 2위로 당선되었고 득표율도 27.5%로 대폭 깎였다. 같은 해부터 1987년까지 국회 외무위원장으로 연이어 활동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노태우의 5공 색깔 지우기로 인해 공천 탈락하였고, 민정당의 지지세가 상대적으로 높았던 용산구에서 서정화가 출마했다. 이 탓인지 그는 충격을 많이 받았다고 회고하였다.
낙선 후 1989년 10월부터 MBC 라디오 <여성시대> MC를 거쳐 1990년부터 1년여간 <전국패트롤 봉두완입니다> 앵커도 맡았으며,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자유당 서정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정계 퇴진 이후 광운대 신방과 교수로서 강단에 서면서 1994~1998년까지 KBS 제1라디오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 진행을 맡았으며, 1999년 1월부터 2년간 <SBS 전망대> 앵커까지 했다. 이후 아리랑TV를 거쳐 2002년에 iTV 토론방송 <봉두완의 진단 2002>를 통해 지상파 브라운관으로도 잠깐 복귀했다가, 2005년 한방건강TV <봉두완의 의료계 진단>으로 돌아왔다. 그해 9월부터 원음방송 시사프로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 MC를 맡기도 했다.
그 외에 보수/가톨릭 인사로서 성 라자로마을돕기 회장을 비롯해 천주교북한선교후원회장, 남북한장애인걷기운동 고문, 생활개혁실천 범국민운동협의회 운영위원장,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대표, 천주교민족화해센터 및 천주교한민족돕기회의 회장 등을 맡았고, 광복 이후로 관제를 제외하곤 첫 보수집회인 2003년 3.1절 집회에서는, 이철승 당시 자유민족민주회의 회장을 두고 "전라도 사람입니다. 하지만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 이후 '반핵반김국민협의회'를 결성해 재정위원장을 거쳐 2004년에 4기 위원장으로 재직했다. 2006년에 전/현직 주미특파원 친목단체 '한미클럽'을 결성해 초대 회장을 맡다가 2018년에 자문위원장이 되어 운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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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환자촌 성 라자로 마을을 자주 다녔다고 한다.
4. 선거 이력
5. 출연작
5.1. 앵커/MC
- TBC
- TBC 뉴스전망대
- 2시 취재현장
- 뉴스논평
- TBC 석간 (1972~1980)
- 봉두완입니다
- 동서남북
- KBS
-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 (1994~1998)
-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국민과의 대화 (1998)
- MBC
- 여성시대 (1989~1990)
- 전국패트롤 봉두완입니다 (1990~1991)
- SBS
- 봉두완의 SBS 전망대 (1999~2001)
- iTV
- 봉두완의 진단 2002 (2002)
- 아리랑TV
- In Focus
- 한방건강TV
- 봉두완의 의료계 진단
- 원음방송
-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
5.2. 광고
- 보령제약 겔포스 CF (1998)
6. 저서
- 워싱턴 정가: 대권을 향한 질주(번역) - 케네스 P. 오도넬/데이빗 F. 파우어 저. 한서출판사. 1976.
-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 현장을 누비는 특파원 리포트 - 물결. 1977.
- 뉴스 전망대: 봉두완이 살펴보는 오늘의 세상 - 우신사. 1980.
- 정치전망대: 봉두완이 바라보는 오늘의 세계 - 우신사. 1984.
- 봉두완의 목소리: 문민시대는 과연 올 것인가 - 아카데미. 1988.
- 봉두완 칼럼: 안녕하십니까 MBC전국패트롤 봉두완입니다 - 성현출판사. 1991.
- 뉴스 전망대: 봉두완이 살펴보는 오늘의 세상 2 - 우신사. 1995.
- 봉두완의 세상읽기: 여자가 좋다 사람이 좋다 - 삶과 꿈. 2000.
- 앵커맨: 대한민국 앵커맨 1호 봉두완의 못다한 이야기 - 랜덤하우스중앙. 2004.
- 착한 이웃 따뜻한 세상(강은교 등 43명과 공저) - 착한이웃. 2007.
- 신문인 방우영 : 대한민국 名士 90인 '방우영을 말한다' : 미수(米壽) 문집(공저) - 21세기북스. 2016.
- 한국인의 자존심을 지켜준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김동길 등 8명과 공저) - 기파랑. 2017.
- 취재현장의 목격자들+.2, 명기자, 명데스크 못다한 뒷이야기 28(공저) - 대한언론인회 편. 청미디어. 2018.
[1] 이 영향으로 인해 청와대에 초청되기도 했었다.[2] 코미디언 김병조씨가 '일요일 일요일밤에'에서 진행하던 뉴스 형식의 코미디 코너에서 이 멘션을 거의 비슷하게 마무리 멘션으로 쓰기도 했다.70년대 생들은 이쪽만 기억하는 경우가 있다. 후술할 1998년 겔포스 광고에서도 써먹었다.[3] '''"0000년 0월 0일 TBC 뉴스전망대에서 봉두완이 바라본 오늘의 세계"'''라는 멘션으로 시작해서 그날 그날의 시국 상황 등을 요약한 멘션을 날렸는데 이 멘션에 뼈가 있어서 촌철살인이었다는 평이 전해지고 있다. 예를 들면, 3선 개헌 직후에 "봉두완이 바라본 오늘의 세계, 깜깜합니다. 왜냐면 밤이니까요." 라는 멘션을 날리기도 했다.[2] 최일구 앵커도 어릴때 이 앵커를 보고 인상깊어서 후에 특유의 멘션스타일을 정립하게 되었다고 한다.[4] 예를 들면 민족일보 사장을 사형에 처한 일이나 경향신문을 강제로 야당지에서 여당지로 만든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독재정권에 저항하자 동아일보에 각종 압력을 행사하여 굴복시키고 기자들을 해고시킨 일을 예시로 들수있다.[5] 마찬가지로 고바우 영감의 작가인 김성환도 당대에 독재정권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곤 했는데 고문이 당연시되던 시절임에도 딱히 고문같은것을 당해본적은 없다고 전해진다, 다만 검열때문에 상당수 연재분이 검열삭제되는 비운(?)은 맞기는 했다.[6] 더군다나 1980년 7~8월에 걸쳐서 신군부의 압력으로 기자들과 PD들이 대규모로 해고당하는 일이 벌어진데다가 언론통폐합으로 자신이 근무하던 회사가 사라졌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도의를 저버렸다고해도 할말이 없었으니 더더욱 까일수밖에 없었다.[7] 게다가 동양방송 폐국 다음날인 12월 1일 민정당 발기인 명단에 봉두완의 이름이 있었다. 동료 강용식 보도국 부국장 역시 폐국 전에 KBS로 이직해 보도국장으로서 땡전뉴스 제작을 총지휘했다.[8] 마포구, 용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