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 쇼크

 



Oil crisis / Oil shock[1]
1. 개요
2. 1973~74년 1차 오일 쇼크
3. 1979~81년 2차 오일 쇼크
3.1. 결과
3.2. 이후
4. 2014년 이후의 역 오일 쇼크
4.1. 2020년 오일 쇼크


1. 개요


1950년대부터 선진국들이 경제 성장과 중산층 확대를 동시에 누리던 "자본주의 황금기"를 끝장낸 사건. 유류 파동, 석유 파동이라고도 한다.
산유국들의 모임인 OPEC에서 유가를 왕창 올려서 전 세계 경제에 압박을 가한 사건. 말 그대로 '''중동판 잠가라 밸브''' 되시겠다.[2]

2. 1973~74년 1차 오일 쇼크


1973 oil crisis
제4차 중동전쟁이 시작되면서 OPEC의 이집트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리비아, 이라크, 이란 제국, 이집트, 시리아, 튀니지가 손잡고 석유를 감산하는 동시에 원유 가격을 인상했다.
제3차 중동전쟁 시절부터 아랍권은 석유 무기화를 시도한 적이 있으나 크게 실패한 적이 있었다. OPEC에서 석유 금수 조치를 결의하고 수출을 중단했으나, 이란 제국과 아프리카 지역,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베네수엘라, 미국까지 증산하면서 효과가 없었을 뿐 아니라 시장 점유율을 크게 상실했을 정도로 손해를 막심하게 입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OPEC는 시장 점유율 회복을 위해 증산을 해 원유를 헐값에 팔아야 하기도 했다.
제4차 중동전쟁 시절 오일 쇼크를 주도한 사람은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장관 아흐메드 자키 야마니(1930~, 석유 장관 역임: 1962~1986)였다. 그는 제3차 중동전쟁 시절 OPEC의 석유 금수 조치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으로 보며 반대했던 선구안이 있었다. 그는 완전한 석유 금수란 불가능하며, 부분적인 금수 조치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제3차 중동전쟁 이후 그의 주장대로 되었고, 그의 발언권이 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제4차 중동전쟁을 시작하면서 그는 금수 조치가 아닌 매월 단 5%만 감산해도 시장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제3차 중동전쟁 시절의 금수 조치가 아니었기 때문에 OPEC 회원국들의 참여도도 높일 수 있었다. 이 전략은 성공적으로 맞아 들어가 1배럴 당 2.9달러였던 원유가는 한 달 만에 12달러에 이르렀으며, 이는 현재 달러 가치로 환산하면 '''14.5달러'''에서 '''55달러'''로 폭등한 것이었다. 당장 세계 경제는 헬게이트가 활짝 열렸다. 그리고 당시 친미 국가였던 베네수엘라인도네시아,[3] 나이지리아와 비 OPEC 국가인 소련도 이틈을 타 석유 가격을 대대적으로 인상했다. 이 석유 무기화 전략은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일본과 유럽공동체의 지지를 얻어내는데 성공했으며, 박정희 정권의 한국도 1973년 12월 17일 아랍을 지지한 적이 있다.
중동과 베네수엘라, 가봉 등의 산유국들은 말 그대로 역사적인 호황기에 접어들었고, 소련도 산유국이었기 때문에 꽤나 쏠쏠하게 이득을 보았다. 그러나 기존의 저유가가 상식이던 시대의 세계 경제, 특히 미국과 영국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물론 그와 상관없이 다국적 석유 기업들이나 미국, 캐나다[4] 내에서도 석유 생산으로 먹고 살았던 지역은 나름대로 짭잘하게 이득을 보기는 했다. 그러나 석유 기업들에게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는데, 당시 영국과 미국이 주도하는 석유 메이저 세븐 시스터즈는 자국에 석유를 우선 공급하지 않아 큰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야만 했던 이유는 영국과 미국에 석유를 우선 공급해 경제 충격 완화를 시도했다가 OPEC 산유국들의 추가 보복이 두려웠을 뿐 더러, 냉전 시대 산유국이었던 소련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선택은 미국과 영국과 그의 우방국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에너지 역사 전문가 다니엘 예긴이 1991년에 쓴 에너지 역사 관련 유명한 서적인 The Prize에서는 equal misery 내지는 equal suffering이라 불렀다. 중동 산유국들이 경제 타격을 입히려 했던 표적은 미국과 영국 그리고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미국, 영국의 우방국들이었다. 참고로 그들은 자신들에게 지지 성명을 내보낸 일본과 유럽공동체에 5% 감산 유예를 해 준 적이 있다.
중동의 석유 감산은 제4차 중동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1974년 3월이나 되어서야 감산을 중단했다. 1차 오일 쇼크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는 스윙 프로듀서(석유 시장 질서 주도국)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이를 주도한 아흐메드 자키 야마니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장관은 그 이후 '미스터 오일', '석유 황제'라는 별명이 붙으며 1986년 사우디아라비아의 파흐드 국왕이 그를 경질할 때까지 OPEC와 석유 시장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한국은 이 때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던 초기[5]였기에 자칫 중단될 뻔 하였다. 오일 쇼크가 절정에 달했던 1980년에 가려질 뿐이지 이때도 커다란 시련을 맞이했다. 1981년 5월 25일 이전까지[6] 월요일-토요일 아침방송이 전면 중단되었고[7] 1973년 3.2%였던 물가상승률이 1974년과 1975년도에 걸쳐서 연 25%로 상승해 서민들은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여러 나라가 1973년 대비 성장률이 2~3배 이상 폭락한 경우가 부지기수였다는 것에 반해 대한민국의 성장률은 1974년, 1975년에 9.5%와 8%를 기록해 상대적으로 나았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원유도입값이 3배나 폭등해 무역적자액이 폭등하여 달러가 흐르는 중동에 기업들이 진출해 많은 액수를 벌어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중동에서 벌어온 막대한 외화자금을 통해서 예상외로 빠른 시일내에 1차 오일 쇼크를 극복하게 되었으며 1977년에 1인당 GNP 1000달러를 돌파하게 되었다. 하지만 외화가 많이 들어온 것은 좋았는데 유동자금이 대거 자산시장으로 쏠리면서 부동산 투기붐과 건설주 광풍이 불고, 주요물자가 부족한 현상이 만연하면서 물가상승률은 1970년대 중후반 내내 10%대를 유지했다. 하지만 인플레를 감안한 1인당 소득이 크게 상승하였다. 자세한 것은 여기를 참조.
여담으로 70년대 말에 지어진 아파트의 대다수가 엘리베이터 격층 정지 형태로 지어졌는데, 이것도 바로 오일 쇼크의 뼈아픈 유산이다. 2020년대 들어, 금싸라기 땅으로 변모한 여의도의 광장아파트라든가, '''전국 각지에 퍼진 삼익아파트 계열''' (부산 광안리 인근 삼익비치타운 등) 다수가 이런 요상한 형태로 되어 있다. 예를 들어 9층에 내리면 9층과 10층 사이의 계단참 부분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9층은 내려가고 10층은 올라가야 하는 형태다.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아파트로는 수서 신동아아파트[8](1992), 시지 천마타운(1994)가 있다.
한편으로 한창 경제성장 일로에 있던 일본은 한동안 헬게이트가 열렸다. 거리의 네온사인까지 꺼버릴 정도로 긴축에 들어갔는데, 당시 신인 만화가였던 모토미야 히로시의 작품에서 '북내륙(호쿠리쿠) 석유 비축기지'가 소재로 쓰이는 등 당시로서는 꽤나 대사건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오일 쇼크 이후로도 일본 제품의 대서방 수출이 계속 쾌조를 보였기 때문에 사실상 지금에 와서는 그 존재감이 묻혔다. 더 무시무시했던 건 그 당시 일본 기업들의 경영자들은 고용과 임금을 삭감하지 않았다. 오히려 임금을 높이고 고용을 늘렸다고 한다. ''''나도 열심히 노력할 테니 여러분도 함께 믿고 노력해주세요.\''''라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경기가 조금만 어려워져도 고용과 급여가 삭감되는 21세기 이후와 비교되는 대목. 특히 특촬팬과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 일을 상당히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 1차 오일 쇼크로 인하여 당시 인기의 정점을 누리고 있었던 특촬이 제작비 인상으로 작업환경이 많이 악화되고, 그로 인해 당시 수많은 특촬작품의 제작 명맥이 끊어지고 제작회사들이 망하는 결과를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의외로 빨리 극복은 되었는데 엔화가치를 의도적으로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수출경쟁력을 유지했고, 일본 자동차가 연비향상에 성공하면서 미국 시장을 잡아먹는 등의 호재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3. 1979~81년 2차 오일 쇼크


1979 (or Second) oil crisis or oil shock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슬람 주의에 입각한 공화국 신정부가 수립된 것이 원인이었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향방이 중동 국가에 어떤 결과를 미칠지에 대한 공포심이 2차 오일 쇼크의 원인이다. 실제로 이란은 하루 6백만 배럴 분량이던 석유 생산량을 1978년 12월 혁명으로 인한 파업으로 2백만 배럴까지 축소했고, 이듬해 이라크의 이란 침공으로 발발한 이란-이라크 전쟁 때문에 30달러선이 깨졌다. 또한 또 다른 산유국이었던 소련도 아프가니스탄의 이웃 국가였던 이란의 이슬람 혁명 여파를 차단하고[9] 친소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이를 부채질해 몇 달 만에 배럴당 40달러선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이란의 석유 감산은 얼마가지 않아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1979년 3월 정권을 잡는데 성공하면서 다시 증산했을 뿐더러, 북해, 멕시코만 등의 유전을 발견해 생산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유 가격은 내려가지 않았다. 이는 산유국들이 공급이 안정적으로 회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상승하자 상승한 가격 그대로 원유 가격을 고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물가는 상승하면서 실업 등의 문제는 오히려 심각해지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났으며, 미국의 FRB는 급작스럽게 불어난 달러를 미국 은행으로 회수하기 위해 금리를 '''21%'''까지 인상했다.[10] 이 결과 미국에 잔뜩 외채를 끌어다 국내의 산업화를 진행하고 있던 대한민국이나 폴란드 같은 비산유 개발도상국들은 졸지에 빚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상황을 맞았고 경제가 크게 휘청거리게 된다. 그리고 이 당시의 고금리 정책은 오일 쇼크가 끝난 뒤에도 지속되어서 1980년대 중남미[11]와 동유럽 외채 위기의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문서에 나와있는 "수입은 안하고 수출만 하는 정책"과 비슷한 경제 정책이 동유럽과 중남미에서 널리 펼쳐졌을 때가 바로 1980년대의 일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기본적인 복지 지출마저도 줄이면서 국민들의 삶이 막장화된 건 덤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공산권 붕괴에도 오일 쇼크가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60년대 동독, 체코슬로바키아를 제외한 동유럽 국가에서는 경제성장률 둔화 현상 극복과 수출 증대를 위한 투자를 늘리기 위해 서구권으로부터 많은 빚을 끌어 모았는데, 당장은 경제적으로 크게 윤택해졌지만, 문제는 갑작스럽게 오일 쇼크가 터지며 수출액이 줄어듬에 따라 세수가 줄어들고 갚아야할 부채가 급증하면서 재정 문제가 심각해짐에 따라 긴축 재정을 시행하는 상황이 왔다는 것이다. 인민들 입장에서 서구권에 비해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던 차에 그나마 누려왔던 복지가 축소되었는데 선거로 정권을 심판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으니, 자연스레 불만이 쌓이고 쌓이게 되면서 공산 정권을 지탱하던 토대가 취약해졌고, 그나마 버텨 주던 소련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인한 군비 증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로 인한 막대한 복구 비용에 후술할 1986년 유가 폭락으로 동구권 국가들은 물론이고 자국민들조차 먹여 살리기 힘들어지게 되면서 결국 1980년대 말에 공산권이 붕괴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마가렛 대처 내각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1981년 런던국제석유거래소를 설립했고,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이었던 1983년에 뉴욕상품거래소에서 원유 선물 거래를 취급하면서 수급 불균형이 들통나기 시작했다. OPEC는 이에 대응해 1983년 감산에 합의하고 가격도 배럴당 34달러에서 29달러로 완만하게 인하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스윙 프로듀서로서 홀로 감산을 했던 덕분이었고, 사우디아라비아 외의 다른 OPEC 회원국들은 감산 합의를 지키지 않았다. 이란과 이라크는 전쟁 중이라 감산할 턱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다른 회원국들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비 OPEC 회원국들의 북해, 멕시코만 유전은 합의 대상도 아니라 감산할 이유가 없었고, 소련도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감산할 수 없었다. 2년 동안 감산 고통을 홀로 감내한 사우디아라비아는 결국 1986년에 석유 치킨 게임에 참전해 생산량을 1일 200만 배럴에서 1000만 배럴로 증산했다. 1985년 배럴당 30달러였던 유가는 1986년 7달러까지 폭락하면서 2차 오일쇼크는 역쇼크로 막을 내렸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의 파흐드 국왕은 아흐메드 자키 야마니 석유 장관에게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해 경질시켰다.
1979년 상반기부터 원유 도입값이 인상되어 하반기들어 오일 쇼크의 조짐이 보여 박정희 정권 몰락의 원인들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특히 이 시기 한국 경제는 석유 의존도가 높은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며 연간 제조업 성장률이 20% 이상을 상회해 1차 석유 파동 당시보다 석유 의존도가 훨씬 높아진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타격이 컸다. 또한 물가 상승률도 1978년에 14%의 물가 상승률에서 1979년는 18%로 상승하였으며 고도 성장을 뒷받침하였던 역대 최고의 설비 투자 증가율은 꺾여져 파산, 해고가 급속히 늘어 본격적인 불황으로 접어들었다. 1979년에는 8.6% 성장을 하였지만 1980년 1분기에 전후 최초의 역성장인 -1.7%, 물가상승률이 29%로 급등해 1차 오일 쇼크 때보다 극심한 경제적 시련을 겪었다. 제5공화국의 병크라고만 알려진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도 알고보면 오일 쇼크로 인한 자동차 수요 급감이 한몫했다. 이러한 불황을 능가하는 상황은 외환 위기가 정점에 달했던 1998년이었다.

3.1. 결과


두 차례의 석유 파동을 계기로 OPEC 아래 뭉친 중동권은 국제 무대에서 어느 정도 발언권을 얻게 되었다. 물론 서방과의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더 이상 제국주의의 유산 아래 휘둘리지 않는다는 선언을 한 것이나 다름 없는 사건이었다. 특히 이스라엘중동전쟁에서는 승리했으나 석유 파동으로 역관광을 타면서 운신이 굉장히 조심스러워졌다.[12]
흔히 구() 7공주(Seven Sisters)라고 불리는 당시 앵글로 페르시안 석유, 뉴저지 스탠더드 오일, 뉴욕 스탠더드 오일, 로열 더치 쉘, 셰브론, 걸프오일, 텍사코 등을 위시한 다국적 기업 (IOC: International Oil Companies)들이자 지금의 슈퍼메이저의 전신인 기업들은 전세계 석유고의 85%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오일 쇼크 이후의 현재 슈퍼메이저는 고작 5% 정도를 가지고 있으며 산출량은 10%에 불과하다. 이들에게서 국유기업으로 넘어간 석유고는 현재 전세계의 88%에 달하며, 그중 가장 큰 7개 회사인 신() 7공주(사우디 아람코, NIOC(National Iranian Oil Company), INOC(Iraq National Oil Company, PDVSA(Petroleos de Venezuela), 가즈프롬, CNPC(China National Petroleum Corp.), 페트로브라스(브라질), 페트로나스(말레이시아) 등 National Oil Companies (NOC))는 매장량의 40%, 생산량의 1/3를 쥐고 있다. 하지만 수직독점 체계를 완성한 슈퍼메이저들인지라 국영회사들은 이들에게 매출에서 발린다. 허나 석유고를 가짐으로 나오는 영향력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겠다.
한편으로 석유 파동[13]은 '''복지국가의 원수이자 신자유주의의 구세주'''이기도 하다. 사실 이 시기에는 복지국가 자체의 문제도 지적받고 있었고 석유 파동으로 기존의 필립스 곡선[14]에 기반한 이론이 큰 타격을 받으면서 낙관적 세계관에 기반을 둔 복지국가론도 흔들리게 되었다.
터키의 경우 1960년대 대한민국과 비슷한 시기에 공업화를 이루기 시작해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자체적으로 자동차도 생산하고 전통적인 섬유 산업을 기계화시켜 오늘날까지도 주력 산업으로 육성시키고 있었지만 두 차례에 걸친 석유 파동으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참고로 1971년 미국이 금태환을 거부하자 그동안 달러에 고정환율제로 운영하던 터키는 외화 고갈로 더 이상 그렇게 운영이 불가능해져 변동환율제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터키 리라의 가치는 1971년 1달러=9리라에서 1980년에는 1달러=90리라, 1988년에는 1달러=1300리라, 그리고 2005년 디노미네이션 직전에는 1달러=149만리라(...)로 폭망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터키는 당시 어떻게 해서든 중동 국가들이랑 쇼부를 쳐서 원유 공급 만큼은 유지하려 했던 대한민국과는 달리, NATO에 가입하여 서방 진영에 속해 있었고 중동과의 관계는 오스만 제국 시대에 대한 나쁜 기억도 있고 세속주의와 서구화의 길을 걷는 터키와 이슬람 신정주의 체제였던 중동 산유국들의 차이도 있어 관계가 정말 최악이었기 때문에 이슬람 형제들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현재도 터키는 원유를 중동 국가에서 직접 사오지 못하고 미국이나 유럽, 한국에서 재가공한 석유를 수입해서 쓰고 있기 때문에 옆나라인 시리아, 이라크에 비해 유가가 터무니없이 비싸다. 유럽 국가 기준으로 해도 터키의 유가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3.2. 이후


브레튼우즈 체제 아래 금본위제도의 붕괴와 석유 파동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의 상처를 회복하고 경제적인 성장을 맛보던 유럽 내 약 25년 간 '영광의 시대'는 무너지며 주류를 이루던 케인즈주의 경제학파가 심한 타격을 받아,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과 영국의 마가렛 대처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왔고 후의 원자재값 하락이 고금리와 겹치면서 중남미와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국가와 동유럽 국가에도 신자유주의 정책이 시행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후 세계 경제는 유동적인 자본의 흐름에 크게 의존하는 '불안정의 시대'로 접어들어, 현재까지도 유동성 위기가 하나의 화두로 제시되고 있다. 한편 오일 쇼크가 끝나가자 그 동안 호황을 누리던 상당수 산유국들은 경제가 망하고 격변기를 겪었다.
상술한 사우디아라비아의 1986년 석유 치킨 레이스로 영국과 미국의 석유 업체도 큰 피해를 입었는데, 영국의 북해 유전은 심해 유전이었으므로 채굴비가 비쌌기 때문에 무지막지한 증산에 버티지 못했고, 미국의 석유업체도 가격 하락에 버티지 못하여 줄줄이 도산하였다. 당연히 영국과 미국 입장에서는 자국의 석유업체가 줄줄이 망해가는 것이 '''좋을 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15] 치킨 게임이 장기화되자, 당시 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가 직접 나서서 가격 전쟁을 끝내려고 했다. 결국 조지 H. W. 부시는 1986년 4월에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관세 부과 의지를 천명해 사우디아라비아를 압박하였으며, 일본 역시 미국이 관세를 부과한다면 같이 관세를 부과하겠다며 공조하였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는 다 같이 감산하지 않는다면 증산 기조를 유지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1986년 하반기부터 OPEC 회원국들과 산유국들은 결국 사우디아라비아의 힘에 밀려 감산에 합의하였고, 1987년 유가가 18달러 선으로 다시 오르면서 안정되었다. 이때의 석유 전쟁은 3차 오일 쇼크로 불리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석유값 하락으로 물가 상승률이 떨어지면서 경제가 살아나는 효과[16]가 커서 묻혔다. 뭐, 세계 각국의 석유업체와 산유국들의 경제가 급속히 부실해졌지만...
하여간 그 후에 석유값이 다시 오르기는 했지만 1981년의 고점에 비해 절반에도 못미치는 수준이었고 그 결과 재정적으로 취약했던 알제리, 멕시코, 베네수엘라, '''소련'''은 재정 수입이 크게 줄어들며 줄줄이 경제적으로 파국을 맞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전쟁을 치루고 있던 이라크에도 발등이 떨어진 건 마찬가지라서 결국 이란과 전쟁이 무승부로 끝난 후 이라크는 이를 메꿀려고 쿠웨이트를 침략하지만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참패한 다음에 경제 제재까지 받으면서 완전히 몰락했다. 다만 모든 산유국이 망테크를 탄건 아니라서 충분히 채굴 단가가 낮은 나라들이었던 사우디아라비아리비아, 아랍 에미리트, 쿠웨이트 등은 오일 역쇼크의 시기에도 여전히 부유한 국가들이다.
또한 한, 미, 일 등 주요 국가에 에너지 관련 부서가 생기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일본 - 자원에너지청. 1973.7, 미국 - 에너지부. 1977.10, 한국 - 동력자원부. 1977.12). 게다가 중동 산유국들을 불신한 주요 국가들이 석유를 항상 적정분을 비축하게 되면서 역 오일쇼크가 계속 벌어지는 사태도 생긴다.
이후 유가는 1991년 걸프 전쟁 때 잠깐 급등했다가, 전쟁 종결과 함께 다시 배럴당 10달러대로 내려갔으며,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때는 9달러까지 떨어졌다. 그러다가 1999년부터 유가 하락에 따른 경제난에 지친 산유국들이 감산에 나서면서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21세기 들어서는 중국과 인도, 인도네시아, 브라질 등 인구 대국들의 경제 성장으로 인한 에너지 소비 급증으로 인해 2008년 봄에는 석유값이 배럴당 100달러를 훨씬 넘어 150달러에 가까워지기도 했다. 세계 금융 위기가 몰아친 2009년을 제외하면 2014년 중반기까지도 꾸준히 100달러의 고유가를 유지했다. 물가 상승률을 감안해 보더라도 이 시기의 유가는 2차 오일 쇼크 때를 넘어선 수준이었지만, 그동안 대체에너지 개발과 에너지 효율성 증대로 석유의 비중이 과거에 비해서 떨어졌고, 각 국가들의 석유 비축분, 그리고 셰일 가스 생산으로 그 충격을 상당 부분 흡수했기 때문에 3차 오일 쇼크라고 불리지는 않는다.[17]

4. 2014년 이후의 역 오일 쇼크


2014년 후반기 이후 석유값이 급속도로 떨어지면서 산유국들을 중심으로 비상이 걸렸다. 셰일 가스를 본격적으로 채굴하면서 미국의 석유 공급이 급속도로 증가하였고, 여기에 석유 시장에서의 점유율을 유지하려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지역 산유국들도 석유 공급을 늘리는 치킨 게임을 벌여서 유가가 급속도로 떨어졌다. 예전과 다른 건 미국이 이번엔 치킨 게임에서 밀리지 않았다는 것. 생산량이 딸려 유가를 맞출 수 없던 업체들은 생산 중지를 외쳤으나, 전반적으로는 엄청난 채굴 효율 증가로 인해[18] 미국도 밀리지 않고 생산량을 늘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문에 오히려 OPEC 국가들 중 생산성이 떨어지는 국가들이 직격탄을 맞았는데, 석유 수출에 경제를 의존하던 베네수엘라, 알제리 등 개발도상 산유국들은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한 때 신흥 경제 강국을 뜻하는 '브릭스'의 축이었던 브라질러시아 역시 큰 타격을 입었다. 이 때문에 대침체 이후 간신히 회복세를 보이던 세계 경제는 이런 경제 위기의 연쇄 효과로 심각한 불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비중동 지역의 OPEC 국가들은 꾸준히 감산을 주장해 왔고, 이로 인해 2016년 초에 들어서야 간신히 석유 생산량 동결을 위한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등의 중동 지역 OPEC 가입국들은 입장을 번복하며 합의를 이행하지 않을 듯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4.1. 2020년 오일 쇼크


WTI유 2020년 5월물
2020년 1월 8일 배럴당 64.39달러
2020년 4월 20일 배럴당 '''-40.32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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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스 40.32 달러. 오타도, 시스템 오류도 아니다. '''
2020년 3월 코로나로 인한 수요급감으로 50~60달러대에서 놀던 오일이 40달러대까지 추락했는데, 이 수요급감으로 인한 가격폭락을 해결하고자 OPEC을 위시한 산유국들은 긴급 감산 협의에 들어갔다. 당연히 감산이 이루어질것으로 기대했지만 러시아의 반대로 감산 합의에 실패 하고, 감산실패에 야마가 돌아버린 사우디가 이렇게 된 이상 원유생산 풀파워로 가동한다! 어디한번 자본주의 시장논리의 물량맛좀 봐라![19] 라며 너죽고 나죽자식 초증산 선포까지 해버린다. 월요일 개장하자마자 금요일보다 10달러 내린[20] 32달러로 시작한 뒤 순식간에 30달러를 붕괴시키는 대폭락을 겪는다. 하필 이 회의가 주말이라서 금요일에 저가라고 원유선물을 매수했던 개미들은 월요일에 '캐시콜'[21] 이라는 지옥을 겪게 된다.
이 감산 실패의 원인을 러시아의 셰일가스업계 고사전략이라고 보는것은 매우 잘못된 시각이다. 애초에 셰일가스 업계가 도산한다 쳐도 지층에 묻혀 있는 셰일가스가 사라지는것도 아닌데 1차산업에서 고사전략을 쓴다는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일이다. 고사전략은 반도체처럼 한번 백기를 들면 다시는 진입할수 없는 자본집중,기술집약산업에서나 가능한 전략이다. 심지어 미국의 전통적 원유 기업들은 셰일가스업체가 도산하면 이를 기회로 보고 M&A를 벼르던 참이었다.
감산실패의 원인은 미국은 반독점법에 의해 감산합의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입장이라 OPEC같은 감산협의체에 끼지 '못'하기 때문인데, 문제는 이렇게 되니 과거 러시아와 중동이 감산을 하면 미국은 제한없이 무한대로 생산하며 감산으로 인한 가격상승의 꿀을 마음대로 빨아먹는 패턴이 매번 반복 되었던 것이다. 물론 감산국들도 이런 사태를 진작에 예상을 했기에 '미국기업이 참여하지 않는한 감산은 없다'를 고수하고 끝까지 감산을 하지 않았으나 그 결과는 셰일가스 혁명으로 일컫어지는 가격폭락 뿐이었다. 채굴 원유가 원가면에서는 비교도 안되게 쌌지만[22] 셰일가스업체는 '사기업'이고, 감산협의체들은 국민을 책임지는 '국가'인 만큼 손해보는 쪽은 원유국이었다.[23] 그래서 러시아는 '이번에도 감산하면 그 꿀은 미국이 다 빨아먹는것 아니냐' 며 감산을 거부한것이 감산불발의 원인이었다.
다만 이 저유가는 미국 입장에서도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트럼프도 중재에 나섰으나, 러시아의 미국내 원유기업 참여요구에 트럼프는 '우리는 자유시장이다 그들이 알아서 할 것' 이라며 대신 감산합의를 안하면 관세부과라는 말로 미국의 힘을 믿고 배짱을 부렸다.[24]
그 사이 유가는 하염없이 계속 흘러 내렸고 결국 더이상의 유가하락을 두고볼수 없었던 산유국들이 두손두발 다 들고 감산합의를 했으나 코로나로 인한 수요급감은 상황이 훨씬 심각해서 감산합의에도 불구하고 대폭락을 거듭했고 급기야 '''마이너스 유가 배럴당 -40달러라는, 역사적으로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하지도 않을 가격을 보게된다!''' 이게 무슨 의미냐면 해당 인도분을 팔려면 '''40달러를 받는 게 아니고 줘야 한다는 뜻이다!''' 어떻게 이런일이 발생할수 있냐면 유가는 보관비용이 들기 때문인데, 전세계 오일창고가 모조리 가득차서 넣을 공간조차 없기에 이런일이 발생한 것이다.[25] 마이너스 유가를 예측한 사람이 극소수 있었지만 그 어떤 누구도 -40달러라는 말도 안되는 수치는 감히 예상하지 못했다. [26]
이로인해 ETF, 해외선물을 통해 유가 상승에 배팅한 개미들이 줄줄이 삼도천을 건너는 레전드를 찍게 된다.[27] 사실 개미들도 개념없이 들어간것도 아닌게 배럴당 20달러대도 모든 생산자가 만족할수 없는 역사적인 저가였기에 앞으로 상승하리라 보는건 어찌보면 상식이었다. 시장은 항상 상식을 벗어나서 문제였을뿐..
엎친데 덮친격으로 증권사는 마이너스호가 라는 개념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비를 해놓지 않았고, '뭐야 유가 한자리수? 이건 기회잖아?!' 라며 우수수 뛰어든 개미들이 계약당 수천만원에 달하는, 상식을 넘어서는 손해를 보게 된다.[28] 본래 실물인수도 방식[29] 상품의 거래 마감날에는 진입할수가 없었지만 하필 원유 mini라는 상품이 있었고, 이 상품은 실물인수도 방식이 아니라서 진입이 가능했다. 아침이 밝아오며 오일가격은 양수로 전환 했지만 이 mini 상품은 마감이 하루 빨랐고, -37.175달러에 확정이 나버리며 증권사도, 투자자도 모두 패닉에 빠지게된다. 물론 투자에 대한 위험은 전적으로 투자자들 본인몫이지만 이 경우는 전무후무한 마이너스 호가에 진입하며 '''호가창이 증발'''해버려서 손절을 아예 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특히 개인투자자 비율이 매우 높은 키움증권의 피해가 매우 막대했다. 증권사도, 투자자도 모두 울게 된 상황. [30]
다만 이 가격대는 코로나로 인한 수요급감으로 전세계 오일 보관창고가 가득 찬 상태에서, 거래만기날에 도저히 재고를 풀 곳이 없어 생긴 일시적인 가격[31]일뿐 전체 오일가격이 이정도로 내려간것은 아니다. 6월물 가격은 20불대를 유지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6월물도 '''6불대'''를 보며 코로나로 인한 경제상황의 심각성을 알렸다.
실제로 이번 폭락은 마이너스 유가로 마감하지는 않았다. 실제 공급자가 매도를 친게 아니라, 마켓타이밍 전략으로 접근한 선물 트레이더들의 배팅으로 인해 마이너스까지 간 것이라 아침이 밝아오며 양수전환을 했고 실제 마감은 9달러에 마감을 하였다. 다만 9달러 역시 정말 말도 안되는, 역사에 남을 가격인점은 분명하다. [32]
[1]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지칭할 때는 보통 oil crisis라고 한다. Oil shock를 재플리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용어 자체는 뉴욕 타임즈에서도 사용했기 때문에 재플리시는 아니다. Oil shock는 1970년대 뉴욕 타임즈에서 처음 사용한 표현으로 현재도 석유에 의한 공급충격을 나타내는 말로 널리 쓰이고 있다.[2] 한국 경제 성장에 대해 얘기할 때 나오는 중동 붐이 바로 이 시기로 한국에서 중동권으로 가서 일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시기이기도 했다.[3]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도네시아도 오일 쇼크로 나름대로 쏠쏠하게 이득을 본 나라다. 오일 쇼크가 터지기 전에 1인당 GDP가 100달러에도 못 미쳤을 정도였는데 오일 쇼크를 거치면서 1981년에 600달러 선을 찍는다. 그렇지만 그전에 인도네시아가 위낙 가난한 국가였던 데다가 인구가 많았기 때문에(소련도 인구는 세계 3위권이었지만 적어도 중간 이상은 갔다) 예나 지금이나 엄청난 돈지랄을 자랑하는 걸프만의 부유국들이나 이 시기에 위스키도 국가보조금으로 수입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중산층들은 여름 때마다 미국으로 휴양을 갔다는 베네수엘라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 사실 이 점은 나이지리아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다.[4] 주로 중서부 지역이 이에 해당했다. 앨버타서스캐처원 2개주.[5] 인터넷상에 보이는 혹자의 논지에 따르면 1차 오일 쇼크로 인해 선진국의 산업구조 개편(탈중화학공업)이 추진되었으며 이를 위해 선진국과 IMF의 주도로 개발도상국의 중화학공업이 계획적으로 육성되었고 당시 박정희 정권은 그 프로그램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중화학공업 육성책도 그에 대한 연장선상에 나온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나 '''1차 오일 쇼크는 1973년 10월에 터진 것이고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이 공식 발표된 것은 1973년 1월'''이다. 실제 검토 시기까지 따지면 훨씬 이른 시기부터 준비되었을 것이다. 또한 1973년 초만하더라도 당시에는 유가가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중동변수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시간의 선후를 완전히 바꾸어 버린 주장.[6] 물론 비공식적으로 1980년 하순 중에 풀리기는 했지만 고등학교 교육 방송 1시간 30분을 편성하는 정도라 본격적인 아침방송 재개라고 보기에는 좀 뭐했다.[7] 석유 파동을 주제로 한 MBC 드라마에서는 제한 송전을 하는 장면, 가족이 죽었는데 휘발유가 없어 리어카에 시신을 싣고 공덕동 언덕길을 걸어 가는 주인공을 보여 주기도 했다. 석유 트라우마는 꽤 오래 가서, 박정희 시절에는 포항 석유 발견 사건으로 전 국민이 흥분한 적도 있고, 전두환 시절 들어서도 청소년 드라마로 산유국 해프닝을 그리기도 했다. 87년에 동해 가스전을 시추하며 탐사선에서 불을 붙였을 때 모든 매체가 대서특필했다. 동해 가스전은 산출량이 많지는 않지만 지금까지도 영남 해안지역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 외환위기 직후인 김대중정부 시기에도 한국이 산유국이 될 뻔한 가상의 해프닝을 주제로 한 드라마가 방영된 적 있다.[8] 여기는 세 층마다 복도식이 있고 중간의 두 층은 계단식이다. 계단식 층을 가려면 복도식 층의 높은 곳에서 내려서 내려가야 하는 형태.[9] 또한 소련은 중앙아시아에 수많은 무슬림 연방 공화국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수출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10] 당시 폴 볼커 FRB 의장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선 고금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정치권의 압력에도 꿋꿋히 20% 금리를 밀고 나갔다. 그 대신에 고금리의 여파로 극심한 불경기가 닥쳤고, 지미 카터 대통령이 1980년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한테 참패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11] 대표적으로 멕시코는 산유국이라 1980년대 초반에 1인당 GDP 3000달러선을 찍기도 했다. 그러나 1986년 유가 폭락으로 수출이 별로 늘어나지 않으면서 빚을 도저히 갚지 못하게 되자 자연히 경제가 파탄났고,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상태가 되었다. 물론 그 대가가 어마어마해서 노동자들의 임금은 크게 깎이고 복지 제도도 무력화되었으며 빈부격차가 어마어마하게 커졌고, 투자자유화에 따라서 외부의 충격에 취약해지면서 경제위기도 주기적으로 터져 나왔으며 현재까지도 빈부 격차 문제나 저임금 노동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12] 일례로 오일 쇼크 이후 스포츠계에서 중동의 발언권이 비약적으로 커지면서 이스라엘은 아시아올림픽평의회, 아시아 축구 연맹에서 추방당한다. 이스라엘은 한동안 방황하다가 유럽올림픽위원회, 유럽 축구 연맹에 가입해서 지역예선을 유럽 국가들과 치루고 있다.[13] 더 정확히 말하면 고유가+초고금리. 미국 연준은 오일 쇼크 충격으로 경기가 흔들리는 와중에서도 꿋꿋이 고금리를 유지했다. 재정 정책에 의존하던 많은 나라들에게 순식간에 심각한 무리가 생기고 경제에 대한 막연한 낙관이 희석되었다. 미국과 유럽의 진보 정치권은 큰 타격을 입었고 특히 중남미의 많은 좌파 정권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14] 물가 상승과 실업률의 연관 관계를 설명하는 그래프. 분수함수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두 변수 모두가 값이 커지는 경우는 발생할 수 없다.[15] 미국도 오일 쇼크로 큰 피해를 봤다. 미국은 알래스카텍사스처럼 석유로 먹고 사는 지역이 꽤 있다. 거기에 이 동네는 공화당의 지지 기반이며 전통적으로 석유 자본은 공화당의 돈줄이었다.[16] 1980년대 후반의 3저 호황도 플라자 합의와 함께 이때의 석유값 하락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벌어진 일이다. 다만 중남미나 동유럽의 경제를 살리는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미 외채 액수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17] 물론 증산이 아닌 세계 금융 위기로 인한 수요 감소에 의해서인 것도 있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는 고유가는 투기 자본 때문이라면서 증산을 거부하였다. 2009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갈 곳을 잃은 투기 세력들이 석유와 곡물 등 원자재 시장에서 한탕을 노리고 있다는 주장이었다.[18] 채굴기당 일일 생산량이 2010년에는 70배럴이었으나, 2015년 기준으로 794배럴에 달했다고 한다.[19] 사우디의 풀파워 생산량은 일 1200만 배럴 이상으로 세계 최대다.[20] 이 수치도 어마어마한 수치다. 크루드오일 1계약의 증거금이 당시 300만원선이었는데, 계약당 천만원이 넘는 손실이 단 하루만에 발생 된 것이다. [21] 증권사가 요구하는 증거금의 20%미만이 되거나, 오버나잇의 경우 유지증거금을 채우지 못하면 강제청산이 나가는데 이를 '마진콜' 이라 한다. 캐시콜은 사용자가 갖고 있는 증거금을 넘어서게 되면 돈을 물어내야 하는걸 캐시콜이라고 한다. 보통 주말을 끼고 오버나잇을 할 때 발생하며 선물은 증거금의 10~50배에 달하는 '레버리지'를 쓰기 때문에 이런일이 생긴다. 다만 캐시콜은 정말 극히 드문 케이스이긴 하다.[22] 셰일가스는 기술의 발전으로 내리고 내린게 36달러선이지만, 기존 원유채굴은 10달러가 채 안된다.[23] 대표적 산유국인 러시아의 예산 재정기준은 배럴당 42달러, 중동은 무려 90달러대다. 대부분 산유국들 역시 석유 의존도가 대단히 높아서 별반 다르지 않는 상황이었다.[24] 사실 트럼프도 노력을 하지 않은건 아니였는데, 미국 오일협회에 감산의향을 떠보았지만 미국 원유기업들은 오히려 이를 셰일가스 업체 인수합병 기회로 보고 감산의지가 전혀 없음을 내비쳤다.[25] 전세계 모든 유조선, 정유사 창고가 아주 꽉꽉 가득찬 상태였다.[26] 링크된 기사 댓글만 봐도 마이너스를 예상하자 오히려 기관이 개미들 등쳐먹으려는 수작질 쯤으로 치부하는 여론뿐이다.[27] 이때 삼성증권에서 발행한 원유레버리지ETF는 실제가격차이와 30%가 넘는 괴리율을 보여 거래정지까지 당했다. 즉 개미가 엄청나게 진입했다는 말.[28] 이게 얼마나 엄청난것이냐면, 감산실패로 인한 사우디의 최대증산 선포로 -10달러가 떨어졌을때도 개미들의 캐시콜이 속출하며 레전드라고 불렸는데, 그 4배에 달하는 손실이 발생된것이다. 액수로 따지자면 0달러에 매수를 했어도 계약당 2500만원이며, 대게 그 위에서 매수를 했기 때문에 계약당 평균 3천만원이 넘는 손실이 발생했다. 참고로 해당상품의 증거금은 300만원선이였고 계약당 100~200만원 벌어도 잘먹었다는 소리가 나온다.[29] 이런 원자재 상품 선물은 만기까지 들고가면 현물로 인수하게 된다. 본래 선물시장의 목적.[30] 이후 대부분의 증권사에서는 마이너스 호가를 대비하지 않은 과실이 명백하다보니 강제청산이 나가는 기준인 총예탁금의 80%손실 혹은 매도버튼을 누른 로그가 있는 회원의 경우 해당 가격대에서 체결이 가능했던 호가로 인정해주는 선에서 합의하였다.[31] 이런 현상을 가리켜 콘탱고(contango)라고 한다.[32] 1배럴은 158.9리터다. 즉 1달러당 17.5L정도인 셈. 생수도 12L에 3천원대인걸 감안하면 석유가 물보다 싼 값에 팔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