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모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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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옛 삼성그룹(三星) 계열 패션, 의류, 섬유, 신소재 업체. 현 삼성물산 패션부문 및 롯데첨단소재의 뿌리이다. 약칭은 '일모'이다. 존속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cii.samsung.co.kr'이었다.
2. 역사
창립 전 한국인들은 마카오에서 양복지를 사들여 양복을 해 입었는데, 문제는 수입 양복 값이 비쌌다. 이에 착안한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은 중역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54년 9월 15일 제일모직공업을 세웠다. 1955년 소모방공장 준공 후 1956년 국산 양복지 '골덴텍스'를 만들었고, 이후 방적/직포/방모공장 등을 잇따라 세워 기틀을 다진 뒤, 1961년 창사 최초로 복지를 수출한 후 1968년 경북 경산공장을 세워 이듬해 학생복지 '에리트' 생산도 개시했으나, 1972년 7월 경산공장을 분리해 제일합섬(주)를 설립했다. 한때 제일제당, 제일합섬과 더불어 '제일' 삼총사 중 하나였다.[1]
1975년 기업공개 후 제일복장으로부터 '장미라사' 사업권을 이어받았고, 1976년 제일모직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같은 해 칠곡새마을공장을 필두로 1977년 안양디자인센터를 세우고 여성 기성복 '라보떼'를 출시했다. 1978년 부설여자중학교 및 실업고등학교[2] 를 열었고, 구미공장도 세운 뒤 탁구단도 창단했다. 1979년 기술연구소, 1981년 오스트레일리아 합작법인을 각각 냈고, 1982년 현지합작 양모공장을 세웠다. 1983년 안양 남성복생산공장 준공 후 1985년 신사복을 영국에 수출하며 1986년 카펫 생산을 개시했다. 1988년 의류사업본부(하티스트) 및 인테리어사업부를 신설하고 화성연구소를 열었다.
1991년 여천 C-SAN 공장을 세운 후 세계에서 3번째로 순모 120수 복지를 개발했고, 1992년 미국 현지법인 및 여천 EPS공장을 세우는 한편, 세계 최초로 초고밀도 113만 본 순모 카펫을 개발했다. 1993년 삼성물산과 공동으로 삼성패션연구소를 세운 후 1995년 '아이비클럽' 브랜드로 학생복사업에 재진출했고, 1997년 충남 예산공장을 세우고 미국 의류업체 '파멜라데니스'를 인수했고, 세계 최초로 인조대리석을 만들었다. 1999년 삼성물산으로부터 '에스에스패션' 브랜드를 넘겨받고 하이크리에이션을 합병했다.
2000년에 삼성물산으로부터 해외의류사업을 넘겨받고 2001년 학생복사업부를 아이비클럽으로 분사시켜 (주)대원에 넘겼으며, 2002년 구미 IT단지에 전자재료 공장을 세우고 2003년 F&F로부터 'KUHO[3] ' 브랜드를 인수한 뒤 2004년 OPC사업을 삼성전자에 넘겼다. 2007년 개미플러스유통을 인수하고 2011년 에이스디지텍을 합병했다. 2012년 YG엔터테인먼트와 합작해 '네추럴나인'을 세웠다. 2013년에 패션부문을 삼성에버랜드에 넘겼고, 이듬해에는 삼성SDI로 합병됐다.
3. 기업정신
3.1. 사훈
1993년 이후 쓰이지 않는다.
'''신용, 정직, 성실, 근면'''
3.2. 사가
작사는 이은상과 조병화, 작곡은 김동진이 맡았다.
4. 역대 임원
- 대표이사 회장
- 이병철 (1962 ~ 1971)
- 조우동 (1971 ~ 1973)
- 대표이사 사장
- 대표이사 부사장
- 이대원 (1987 ~ 1989)
- 채오병 (1991 ~ 1993)
- 유현식 (1993 ~ 1997)
- 원대연 (1997 ~ 2001)
- 안복현 (1999 ~ 2001)
- 대표이사 전무
- 김헌성 (1973 ~ 1976)
- 대표이사 상무
- 김헌성 (1970 ~ 1973)
5. 특징
주요 사업장으로는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구룡리, 경상북도 구미시 공단동, 전라남도 여수시 평여동에 있다. 1954년 이래로 1996년까지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2가에도 사업장이 있었으나, 1996년 구미공장으로 통합 이전했다.[4]
주주로는 국민연금공단이 7.84%, 삼성카드가 7.62%, 한국투자신탁운용이 5.05%, 미래에셋자산운용이 4.50%의 지분을 보유했으며, 본사는 삼성엔지니어링의 13.1%, 삼성정밀화학의 3.2%, 삼성에버랜드의 4%, 삼성석유화학의 21.4%, 삼성 라이온즈의 15%, 아이마켓코리아의 2.8%, 한국경제신문의 6.66% 등을 가졌다.
직물 퀄리티는 국내 최고이며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다. 양복을 맞출 때 이탈리아 원단 바로 아래가 제일모직의 원단이다. 특히 회사 이름에 박혀있는 모직의 경우 기술력이 지금보다 낮았던 8090 당시에도 영국산 모직 원단에 버금가는 고급 원단으로 이름높았다. 이제는 일본은 라이벌 내지 한수 아래로 접고 세계구급으로 놀아주는 퀄리티다.[5]
삼성그룹 계열사답게 연봉도 빡세고 일거리도 빡세다! 야근을 밥먹듯이 했었다. 물론 정규직 기준이었다.
[1] 이후 제일제당은 계열 분리되어 CJ그룹이 되었고 제일합섬은 새한그룹으로 분리되었다가 외환위기 후 2000년에 해체되고, 웅진그룹에 인수되어 웅진케미칼이 되었다. 그리고 웅진그룹이 어려워지자 일본의 도레이가 인수하여 도레이케미칼이 되었다가 2019년 도레이첨단소재에 합병됐다.[2] 1982년 이후 성일여자중학교 및 성일여자실업고등학교로 변경됨.[3] 디자이너 이름이 정구호다. 전 제일모직 전무.[4] 그 부지의 일부는 대구 오페라하우스로 삼성그룹에서 대구광역시에 기부채납했다. 대구 삼성 창조 캠퍼스(창조경제혁신센터)로 탈바꿈 되었다. 현재 오페라하우스 앞 도로명이 "호암로"다.[5] 사실 이것은 일본 경제 전체가 알아서 자멸해주고 있는 탓도 있지만 그렇다고 제일모직의 기술력을 폄하할 일이 아니다. 일본 웹에서는 이 사실을 인정못하고 무슨 한국 기업이 중국 보듯 폄하하는 게 일상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