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현(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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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을 쥐고 손을 드는 노무현대한민국 대통령 오른쪽의 인물이 김상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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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相賢
1935년 12월 6일 ~ 2018년 4월 18일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선거이력
5. 소속 정당
6. 둘러보기


1. 개요


대한민국정치인이다. 본관김해(金海)#, 호는 후농(後農)이다.[1] 종교가톨릭으로 세례명은 대건 안드레아이다.

2. 생애


1935년 12월 6일, 지금의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상오리 호산마을#에서 태어났다. 장성진원국민학교, 서울 한영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56년 김대중이 정치인 지망생이던 시절 운영하던 웅변학원에 등록한 학원생으로 김대중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2] 곧 사이가 가까워져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으며, 김대중을 따라 민주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1959년 6월 재보궐선거 당시 강원도 인제군 선거구에 출마한 김대중의 선거운동원으로 가두 연설을 담당했고, 이후 김대중이 민주당 선전부장이 되자 바로 밑의 직책인 선전부 차장이 된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반대하는 김재광국회의원직 사퇴 때문에 치러지는 재보궐선거에서 민중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3]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이철승 등이 40대 기수론의 기치를 내걸고 나서자 김상현이 김대중에게 대선 출마를 요청했다. 경선에서 김대중이 승리하면서 대통령 후보자 비서실장으로 활동하였다. 1971년 치러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참고로 해당 총선에서 그와 맞붙은 민주공화당 후보는 임택근 아나운서.
1972년 10월 유신 선포 후 조윤형, 최형우, 김한수, 김녹영, 이종남, 김경인, 나석호, 강근호, 이세규, 류갑종, 박종률 등처럼 모 군부대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그리고 징역을 살았다. 출소한 이후 재야에서 활동하였다.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박종태, 양순직, 함석헌 등과 같이 국군보안사령부(현 국군기무사령부)에 끌려가 고문당하였다. 1980년 신군부가 꾸민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역시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4]
1984년 당시 미국에 망명중이던 김대중을 대리하여[5]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창립하고 공동의장권한대행을 맡았다. 1985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자 야권의 '선명야당' 창당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신한민주당 창당에 앞장섰다.[6]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측이 김대중에게 통일민주당 입당 및 경선을 요구했고, 김상현 역시 이를 수용하자는 입장을 보였으나, 김대중은 이를 거부한다.[7] 이에 실망한 김상현은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으로 따라가지 않고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였다.[8]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김대중의 저격공천(평화민주당 김학민 후보)으로 야권 표가 분산되어 민주정의당 강성모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할 때 따라가지 않고 김정길, 노무현, 이기택과 같이 꼬마민주당에 잔류하였다. 1991년 꼬마민주당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의 후신 신민주연합당에 입당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무려 20년만에 원내복귀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이에 따라갔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7년 한보그룹 부도 직후 정태수와 연루되었으나 1999년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민주국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전국구 국회의원 당선에 실패하였다. 2001년 새천년민주당에 복당하였다. 2002년 재보궐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광주광역시 북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16대 대통령 선거 때는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으나, 이후 새천년민주당 분당열린우리당으로 옮기지 않고 잔류했으며,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에서는 탄핵소추에 찬성하였다. 이로 인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탄핵 역풍에 휘말려 열린우리당 강기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으며, 이후 정계를 은퇴했고, 그 이후로는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직을 맡았다.
아내 정희원 여사와의 사이에서 슬하에 3남 1녀를 뒀으며, 이중 삼남김영호 의원인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때 과거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 서대문구 갑에 출마했다가 역시 탄핵 역풍으로 인해 낙선했다.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서울 서대문구 갑 지역구 현역인 우상호 의원과 같은 당이 되자 조정하여 서대문구 을로 옮겼으나 현역인 정두언 의원에게 졌고, 19대도 그에게 졌으나,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때 2전 3기만에 드디어 정두언 의원을 꺾고 당선되었고,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역시 당신되면서 재선 의원이 되었다.
2018년 4월 18일, 노환으로 작고하였다. 향년 82세.

3. 기타


당시 군사정권과 대립각을 강하게 내세운 정치인이었지만, 초선의원 시절 비슷한 연배였던 차지철과 매우 친했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김형욱과도 교분이 있었다고 한다.
김영삼과도 친분이 상당했으며, 김대중이 13대 대선을 앞두고 동교동계를 가지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자, 이에 반발해서 김영삼을 지지하면서 통일민주당에 잔류했다. 그러나 김영삼이 노태우, 김종필과 손잡고 3당합당을 단행하자 군사정권 잔당들과는 같이 못한다면서 참여를 거부하였다. 이후 이기택, 노무현, 김정길 등과 함께 꼬마민주당을 만들었다가, 야당통합을 주장하면서 신민주연합당에 입당하면서 다시 김대중과 한배를 타게 되었다.
특유의 친화력과 인맥관리로 여야를 가리지 않고 친분이 두터워서, 오랜 세월 정치권의 마당발로 통했다.
정치경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김대중의 비서로 시작해서 오랜세월 김대중과 호형호제하는 최측근으로, 원조 동교동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실제 김대중이 1971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을때, 당내에서 김대중을 지지하는 유일한 현역 국회의원이었다고 한다.[9] 하지만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의 평민당 창당과 독자출마를 명분이 없다고 반대한 것때문에 김대중과 멀어지게 된다. 그뒤에 돌고돌아서 다시 한배를 타게 되지만 이후 김대중과 김상현의 관계는 그야말로 애증의 관계였다.[10]
정치인 중에서도 애주가로 유명했다. 제5공화국에서도 이 점을 반영했는지,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받다가 전두환이 갑자기 불러내어 환담이나 하자며 을 따라 주자 "아무리 나를 때려죽이려고 했다지만 술자리 예의는 예의지. 한 잔 받으시오."라며 대작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2014년 8월 12일 김상현의 최측근이자 호형호제했던 범동교동계 박성수 전 동작구의회 부의장의 사망소식을 듣자 김상현의원은 당시 박성수 전 부의장의 빈소가 마련된 여의도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4.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65
1965년 재보궐선거 (6대 국회 서울 9지역구)[11][12]
민중당
11,402 (36.5%)
당선 (1위)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17번)
신민당
-
당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2지역구)[13]
신민당
63,575 (62.4%)
당선 (1위)
1971. 10. 17 자격박탈
(10월 유신)[14]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대문 갑)
통일민주당
30,598 (31.4%)
낙선 (2위)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대문 갑)
민주당
42,591 (45.5%)
당선 (1위)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입당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대문 갑)
새정치국민회의
29,979 (40.1%)
당선 (1위)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2번)
민주국민당
-
낙선

2002
2002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16대 국회 광주 북 갑)[15]
새천년민주당
18,618 (55.8%)
당선 (1위)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광주 북 갑)
새천년민주당
29,023 (33.9%)
낙선 (2위)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56 - 1960
정계 입문

1960 - 1963
탈당

1963 - 1965
창당

1965 - 1967
합당[16]

1967 - 1969
합당[17]

1969
자진 정당 해산

1969 - 1972
정당 재등록

1972 - 1985
탈당

1985 - 1987
창당

1987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987 - 1990
창당

1990
3당 합당에 대한 반발로 탈당

1990 - 1991
창당

1991 - 1995
합당[18]

1995
새정치국민회의 합류를 위한 탈당

1995 - 2000
입당

2000
합당[19]

2000
총선 공천 탈락 불복으로 인한 탈당

2000 - 2001
입당

2001
탈당

2001 - 2005
복당

2005 - 2007
당명 변경
정계 은퇴

2007
합당[20]

2007 - 2008
당명 변경

2008
합당[21]

2008 - 2011
당명 변경

2011 - 2013
합당[22]

2013 - 2014
당명 변경

2014 - 2015
합당[23]

2015 - 2018
당명 변경
작고

6. 둘러보기





[1] 고은 시인이 지어준 것이다.[2] 당시 김상현은 대한웅변협회 학생회장이었다.[3] 여담으로 이 때 당시 김상현이 내세운 이력 중 하나가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한 환영 국민위원장(...)이라는 아스트랄한 직책이었다. 인터뷰 기사[4] 본래는 신군부에서 그를 포섭하려고 했다 전해진다.[5] 단, 김대중은 김영삼과 함께 하는 민주화추진협의회 참여를 반대했다.[6] 당시 민주헌정연구회 등 재야에서는 총선 보이콧론을 주장하는 등, 새로운 야당 창당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고, 김대중의 의중도 비슷했다.[7] 경선을 치르면 해 볼 만하지 않겠느냐 싶겠지만, 당내 기반이 없는 김대중에게는 불리했다.[8] 김대중의 정치 커리어 초반부터 함께한 동지였으나, 이 때를 기점으로 사실상 둘의 관계는 단절된다. 이후 1991년 꼬마민주당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의 후신 신민주연합당에 합류하기도 하나 합류 후에도 동교동계의 견제를 받는 등 순탄하지 않았다. 심지어 1997년에 자신은 국민회의 총재 선거에 출마하고, 대선 후보로 정대철을 밀기도 했다. 물론 둘 다 김대중에게 박살났지만.[9] 보통 동교동계의 실력자로 꼽히는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한광옥 등은 모두 김상현보다 훨씬 뒤에야 의원뱃지를 달았고 이 시기에는 전부 김대중의 개인비서에 불과했다. 박지원은 1980년대 중반에야 합류한 인물이다.[10] 어느 정도였냐면 김대중이 1994년 정계복귀를 고민할때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한광옥 등 동교동계 핵심중진들에 심지어 아직 국회의원도 아니었던 김근태, 정동영까지 만나서 의견을 들으면서도 정작 30년간 자신의 최측근으로 형제처럼 지내왔던 김상현은 단 한번도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11] 전임자 김재광 한일기본조약 반대로 의원직 사퇴[12] 서울 9지역구는 현재의 서대문구 갑 선거구 지역이다.[13] 현재의 서대문구 을 지역이다.[14] 이와 동시에 중앙정보부로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다.[15] 전임자 박광태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광주광역시장 출마로 사퇴[16] 민정당과 신설 합당[17] 신한당과 신설 합당[18] 신민주연합당과 신설 합당[19]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20] 중도개혁통합신당과 신설 합당[21] 대통합민주신당과 신설 합당[22]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23]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