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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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원 (경기 고양시 일산구 갑)'''
제16대
정범구

'''제17대
한명숙'''

제18대
백성운



'''대한민국 제37대 국무총리
한명숙
韓明淑 | Han Myeong-sook[1]
'''
'''출생'''
1944년 3월 24일 (80세)
평안남도 평양부 (現 평양직할시)
'''본관'''
청주 한씨
'''재임기간'''
제37대 국무총리
2006년 4월 20일 ~ 2007년 3월 7일
'''서명'''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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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박성준
'''자녀'''
아들 박현길
'''학력'''
정신여자중학교 (졸업)
정신여자고등학교 (졸업 / 50회)
이화여자대학교 (불문학 / 학사)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 / 석사)
'''종교'''
개신교(한국기독교장로회)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6''', '''17''', '''19'''
'''경력'''
제37대 국무총리
참여연대 공동대표
제16대 국회의원(비례대표)
제17대 국회의원(고양 일산갑)
제19대 국회의원(비례대표)
초대 여성부 장관
제8대 환경부장관
당혁신위원회 위원장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민주통합당 대표최고위원

1. 개요
2. 생애
2.1. 여성운동
2.2. 정계활동
4. 출소 후
5. 여담
6. 선거 이력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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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前 정치인.
여권 신장을 위해 노력한 여성운동 1세대의 대표적 인물로 환경부, 여성부 장관국회의원을 거쳐 '''한국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가 됐다. 하지만 2015년 국회의원 재직 중 과거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기소돼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이 최종 확정됨으로써, 전직 국무총리 중 최초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2. 생애


1944년 4월 16일(음력 3월 24일) 평안남도 평양시에서 출생했다. 6.25 전쟁 때 부모를 따라 월남해 서울에서 자랐다. 정신여자중학교, 정신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했다.
1967년 박성준과 결혼했지만, 남편은 소위 통혁당 사건 때문에 바로 감옥으로 끌려갔다. 10여 년 동안 옥바라지를 하며, 1977년 한신대학교에서 신학 석사를 받은 뒤 한신대 강사가 되었다. 민주화 및 재야 여성 운동가로도 활동하다 1979년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으로 광주교도소에 투옥됐다가 2년 6개월여 만에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같은 해 남편도 크리스마스 특사로 출소했고, 두 사람 사이에서 1985년 아들이 태어났다.[2]
엄마가 된 한명숙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여성학 석사학위도 받는 등, 가사와 학업을 병행했다. 이후 남편은 일본 릿쿄대학에서, 한명숙은 오차노미즈여자대학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다 중단하고, 부부가 함께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한명숙은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객원연구원 자격을 받았다.

2.1. 여성운동


호주제 폐지, 군가산점 폐지, 여성쿼터제 도입, 출산-육아 휴가제, 성매매특별법 제정, 부모 성 함께 쓰기, 여성부 창설 등에 참여했다. 1989년부터 5년간 한국여성민우회 회장이었다. 2000년 전국여성대회에도 참석하는 등 여성부 신설에 힘을 보탰고 2011년 당개혁특별위원회 때 유승희 전국여성위원장을 통해 당시 여성 공천 15% 의무화 실시에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관측되며, 2015년 12월 당적을 스스로 던질 때까지도 새정치민주연합 내 전국여성위원회를 통해 간접적으로 당내 여성 운동을 주도했다.
이미경 의원, 유승희 의원, 서영교 의원 등과 조현옥 전 청와대 인사수석이 그녀의 인맥이다. 또한 국회의원 시절부터 보좌관으로 국무총리 때도 의전비서관을 역임한 조한기(현재 충남개발공사 감사)도 한명숙 계로 분류된다.[3]

2.2. 정계활동


1999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다. 이듬해 새천년민주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직을 시작으로, 이듬해 신설된 초대 여성부 장관을 역임했다. DJ정부의 주요 업적 중 하나인 호주제 폐지 및 여성쿼터제 역시 한명숙의 주도로 이뤄진 것이며, 모성보호법 차원으로 생긴 출산휴가, 최대 5년간 여성들이 사용할 수 있는 육아휴직 등이 이때 생겨난 것이다.
2003년 노무현 정부 당시 환경부 장관이 됐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땐 지역구 도전에 나서 고양시 일산구 갑으로 국회에 재입성했다. 경륜은 물론 여성으로서 갖는 상징성 덕분에 국무총리 물망에 오르내렸고, 이해찬에 이어 총리가 되면서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 여성 국무총리라는 기록을 세웠다.[4]
국무총리 재직시절 온화한 성품과 합리적인 조정능력으로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다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KTX 승무원 집단해고 문제와 대추리 강제진압 등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도 있다. 1년간의 총리직을 마치고 퇴임 후, 암울했던 당에 복귀해 2007년 말 대선주자 레이스에 뛰어들었다. 고건 전 총리의 불출마 선언 이후 혼돈에 빠진 경선 레이스에서 이해찬과 후보 단일화를 선언하고 양보했지만, 이해찬은 경선 3위로 떨어졌고 본선 후보로 나선 정동영이명박에게 대패했다.
설상가상으로 2차례의 정치자금수수 혐의로 2009년 기소되면서 수년간 곤혹을 치렀고 이명박 정부 내내 언론과 여당의 정치 공세를 견뎌야 했다. 지리한 법정 공방 끝에 대한통운 건은 무죄를 받았으나, 한신건영 건은 유죄 판결이 확정돼 실형이 선고됐다. 자세한 과정은 후술된 내용 참고.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대통합민주신당은 대선 과정의 당내 잡음 및 패배 후유증으로 친노와 비노로 갈라졌고, 이해찬유시민이 한명숙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탈당하기에 이르렀다. 당에 남은 한명숙은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지역구를 공천받았으나 낙선했다. 초반 여론 조사로는 무명에 가까운 한나라당 백성운 후보[5]에 10% 가량 앞서며 분위기가 좋았다. 그러나 불과 투표 사흘 전 캠프 소속 선거운동원이 지역 대표들에게 밥을 산 것이 드러나 불구속 입건됐고 결과는 3.3%차의 패배.
2010년 대한통운 정치자금수수 혐의에서 벗어난 뒤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민주당 경선(100% 여론조사 방식)에서 이계안 후보를 누르고 서울특별시장 후보에 선출됐다. 그렇지만 한나라당 오세훈 후보의 압승이 될 것으로 예측됐고 더구나 3월 천안함 피격사건이 터져 언론 보도와 여론은 야당인 민주당에게 불리했다. 선거 2주 전 여론 조사로도 적게는 11.9%포인트(조선일보), 많게는 22.8%포인트(중앙일보) 오세훈의 리드였다. 그렇지만 서울만은 광우병 논란, 용산 참사 등으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감이 있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동정 및 향수가 있어 한명숙이 해볼 여지가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투표 당일이 되자 자체 조사상 한명숙의 근소한 역전이 점쳐졌다. 서울시청 앞에서 지지자들과 승리 예감을 만끽할 정도였다. 그러나 막판 강남 3구의 오세훈 지지표에 덜미를 잡혀 다시금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불과 0.6%p 차의 석패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명숙은 민주통합당 대표최고위원[6]으로서 선거를 지휘했고 본인 역시 비례대표로 출마했다. 그러나 야권단일화, 여성 15% 할당 공천 강행 과정에서의 당내 갈등, 비례대표 공천문제, 김용민 후보 막말 파문 등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으며, 이명박 정부에 불리한 여론 결과가 이어졌음에도 민주통합당이 새누리당에게 단독 과반을 내주고 완패하자 모든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정치자금법 위반죄로 실형을 산 것에는 판결이 과하다 정당하다를 놓고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많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때 당시 총선의 대 참패는 모두가 무능하다고 까고 있다.[7] 오죽하면 실형판결을 받은 것보다 총선때 보인 무능함이 더 용서가 안 된다할 정도이다.

3. 불법정치자금 수수 사건



2015년 8월 20일 최종 확정 판결로 21대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8월 24일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12월 11일,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에게서 당적 정리를 요구받았고, 본인도 이것을 받아들여 탈당해 무소속 신분이 되었다.

4. 출소 후


2017년 8월 23일, 한명숙은 징역 2년을 마치고 만기출소했다.
출소 후에는 이희호 여사 장례식#,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 추도식#, 노무현시민센터 기공식# 등의 추도식 등의 행사를 제외하곤 별다른 정치적인 행보라던지, 정당 입당 등의 활동은 보여지지 않는 모습이다.
2020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11주기 추도식에서는 자신은 결백하다며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
추징금 8억 8천만원이 선고되었는데 7억 정도를 여전히 미납하고 있다. 법무부에서는 추징금 미납자를 사면에서 제외하고 있어 사면 대상에 포함될 수 없다는 법조계의 지적이 있다. #

5. 여담


과거 넷상에서는 "한명숙과 접촉하는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때가 잦다"면서 한명숙의 별명으로 한명숙청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했다. 한명숙이 현재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터라 지금은 크게 쓰이진 않는다. 또 실상을 파고 보면, 이름값 높은 정치인으로서 이런저런 사람과 접촉하고 사진 찍히는 일이 잦았을 텐데 이렇게 만난 사람들이 훗날 몰락하는 때가 생기면 예전에 한명숙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재발굴되어 한명숙청 어쩌고 몰아갔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이게 반대 진영인 박근혜까지 이 숙청 목록에 거론되었을 정도로 억지였는데 그런 식이면 접점이 안 닿을 사람이 없다.

6.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6,780,625 (35.9%)'''
'''당선 (5번)'''
[8]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고양 일산 갑)

'''48,286 (49.0%)'''
'''당선 (1위)'''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고양 일산동)

37,902 (43.8%)
낙선 (2위)

2010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2,059,715 (46.8%)
낙선 (2위)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7,777,123 (36.5%)'''
'''당선 (15번)'''
[9]

7. 둘러보기





[1] 한때는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을 할 때는 성을 어머니의 성과 아버지의 성을 같이 사용했다. 그리고 성을 부모님 성을 사용했을 때는 이름이 한이명숙이었다. 그러나 친한 지인들과 있을 때를 빼면 공적인 자리에서는 한이명숙이라는 이름을 거의 쓰지 않았다.[2] 결혼 후 18년만에 얻은 아들이다. 때문에 부모와의 나이차도 40세 이상으로 큰 편이다.[3] 조한기는 고향이 충남 태안군 안면도안희정 충남지사와도 친분이 깊고 안희정 충남지사 후보 선대위 대변인 경력도 있긴 하다. 현재는 안희정 계라고 해도 좋을 듯?[4] 김대중 정부 시절이던 2002년 장상이 서리직을 맡은 적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임명된 최초의 여성 총리는 한명숙이다. 장상은 한명숙보다 5살 위인 1939년생으로,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나 1947년 월남, 이대 수학과를 졸업했다.[5] 이명박 대통령당선자 인수위 행정실장 출신[6] 현재의 당대표와 비슷한 지위. 당시에는 최고위원 경선과 당대표 경선을 따로 하지 않은 집단지도체제였다. 박영선, 김부겸 등이 최고위원이였다.[7] 가장 혹독하게 비판하는 측에서는 한명숙이 박근혜 정권 탄생의 1등공신이라 말할 정도다.[8] 2001.1.29 사퇴 (초대 여성부 장관 입각)[9] 2015.8.20 자격상실 (뇌물수수로 인한 정치자금법 위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