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탈것)

 

1. 개요
2. 역사
3. 모양
4. 종류
5. 풍습
6. 외국
7. 다른 탈것


1. 개요


2명 이상의 사람이 손으로 들고, 혹은 멜빵에 메고 운반하는 탈것.

2. 역사


신라의 기와에 가마와 같은 모습의 무늬가 새겨져 있고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가마에 앉은 부인의 모습이 있어서 삼국시대 이전부터 가마가 존재했으리라 짐작하고 있다. 조선 이전에는 마차도 널리 사용했다. 높으신 분들이 많이 이용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가마는 그것을 타는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됨으로써 신분에 따라 가마의 종류와 이름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물론 어떤 가마든 상관없이 신분이 매우 높은 사람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이동수단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현대에는 사실상 사라진 교통수단이다. 근대에 들어와서 바퀴가 달리는 등의 형태로 개량한 인력거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현대에는 인도와 같은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사라졌다. 전 세계에 자동차오토바이가 보급되어있다보니 굳이 인력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 다만 이따금씩 전통 결혼식과 같은 전통문화 재현 행사에서 등장하긴 한다.

3. 모양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가마의 형태는 조그마한 집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다. 사극에서 보이는 사각형의 상자 모양에 지붕을 얹어 덮고 정면에 문을 달아 그것을 들고 내리며 사람이 출입하는 형태가 바로 그것이다. 아무래도 아녀자들이 얼굴을 내보이기 꺼리던 사회니만큼 여자들의 가마에 한해서 완전히 밀폐된 것으로 보인다.
남성의 경우 일반적으로 벽과 지붕이 없이 개방되어 있는 교자(轎子)를 주로 사용했다. 현대에 비유하자면 나름 오픈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왕이 타던 어가(御駕) 역시 지붕은 있어도 은 없다.
가마의 육면체 아래쪽에는 가마라고 하는 두 개의 긴 막대를 나란히 덧대어 가마의 앞뒤에서 두 사람 또는 네 사람이 손으로 들거나 으로 매어 가마를 운반하도록 되어 있다.

4. 종류


타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종류가 나뉘어 있는데, 임금이 타던 연(輦)과 가교(駕轎), 왕녀가 타던 덩(한자를 빌려 덕응(德應)이라고도 했다.), 일품 관리와 기로(예순 이상의 노인)가 타던 평교자(平轎子), 정2품 판서급 관리와 재상이 타던 사인교(四人轎), 정3품 참의와 승지가 타는 (사극에 등장하는 의자 모양의 위가 트인 가마) 남여(籃輿), 종 1품 이상의 관리와 정승, 60대 이상의 원로대신들이 타는 평교자, 종2품 이상 관리가 타던 보교(步轎)와 초헌(종 3품의 관리가 타는 외바퀴 달린 가마), 종2품 참판 이상 관리가 타던 사인남여(四人籃輿), 하급 관리가 타던 장보교(帳步轎), 물건을 나를 때 사용하는 채여, 갸자 등이 있다. 혼인날에 신부가 타고 친정에서 결혼식장으로 갈 때 타는 가마 역시 평교자이다.
가마가 그것을 타는 사람의 위세를 대변하는 것이라 했는데, 이는 하급관리로 계층이 내려갈수록 자신보다 낮은 하층민에게 더욱 위세를 과시하는 경향이 나타나서, 장보교는 가마의 네 모서리에 각각 기둥을 세우고 네 면에 휘장을 둘러 자유롭게 꾸미거나 뜯어낼 수 있도록 화려하게 변해갔다.
보통 앉아있을 공간만 안에 갖추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나 침대나 웬만한 가구들까지 갖추어진, 작은 집 수준의 초대형 가마들도 존재한다. 이 경우 16~64명 수준의 대규모 인원이 운반하며 이용자는 대부분 제국의 황제 수준의 거물들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프란시스코 피사로잉카 제국 정복 과정에서 마주쳤던 아타우알파의 가마. 주성치 주연의 영화 녹정기에서 황제가 타는 가마의 크기와 운송수단으로 이용되는 대규모의 인력이 잘 묘사되어 나온다.

5. 풍습


상가마는 신분이 높은 자들이 이용하는 만큼, 가마를 타고 지날 때 그 위세를 더하기 위해 하인들을 시켜 목청을 가늘고 길게 뽑아내며 소리내어 외치게도 했다. "물렀거라, ~~~ 나리 행차하신다."와 같은 식의 외침이 주를 이루었다.[1]이렇듯 위세를 떠는 양상 때문에 맞은편에서 오는 다른 행렬의 가마를 만나게 되면, 서로 길을 비키지 않으려고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2] 이 보이지 않은 기싸움이 물리적인 실력행사로 변할 경우 서로의 가마를 맞대고 밀어젖히기도 했는데, 기세에 밀려 뒤로 물러나거나 싸움에서 져서 가마가 땅에 닿거나 가마 자체가 땅으로 떨어질 경우에는 진 사람은 자신의 운수가 사납고 불길하다고 여기기도 했다.
이러한 관습이 발달하여 한국의 민속놀이 중 하나인 가마싸움이 만들어졌는데, 추석에 수십 명의 청년이 두 팀으로 나누어 서로의 깃발을 앞세우고 상대편의 가마와 맞부딪쳐 먼저 많이 부순 팀이 이기는 놀이가 되었다.
가마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사회적 사고방식인 체면과 품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습성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마는 전통적인 한국 사회의 모습이 다분히 반영되어 있다. 한국인들은 체면과 품위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는데 그것을 유지하며 고고한 자세로 생활했던 그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가마에 녹아 있다.[3]
고고한 이미지지만 흔들림이 상당히 심했다고 한다. 시집 갈 때 가마를 처음 타보고 멀미로 드러눕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고.
게다가 가마를 지고 가는 가마꾼들은 체력이 상당히 좋은 사람만 할 수 있다. 당장 가마는 사람이 타는 물건이다. 아무리 가벼운 성인이라고 하더라도 최소 50kg는 된다. 특히 두 사람이 50kg를 들고 이동을 하려면 상당한 체력이 필요하다.

6. 외국


유럽에도 고대 로마에서 렉티카(lectica)라는 가마가 있었다. 비스듬히 누워서 타는 것인데, 이 쪽들도 높으신 분들 전용이었다.
교황이 타는 가마도 있는데 세디아 제스타토리아라고 한다. 원래는 다른 가마처럼 사람이 직접 들고 운반했으나 현대에는 바퀴가 달린 수레의 형태로 간소화되었다.
오늘날 자동차의 형태 중 하나를 뜻하는 세단도 원래는 가마를 뜻했다.
일본에서도 귀족과 무사들이 가마를 많이 사용했다. 특이한 것은 가마를 메는 손잡이가 가마 지붕 위에 달려있다는 점이다. 일본 축제(마츠리)에서는 신사에 신령의 가마, 오미코시(お神輿)를 들어 옮기는 행사가 많이 이루어진다.
남아메리카 잉카 제국에도 왕이 타고 다니는 가마가 있었고, 잉카 왕은 땅을 밟아서는 안 됐기에 항상 가마를 타고 이동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쳐들어 왔을 때에도 스페인 병사들이 왕의 가마꾼들을 도륙한 바람에 당대 왕 아타우알파가 도망치지 못했다고 한다.

7. 다른 탈것


가마에 바퀴를 달고 여전히 손으로 끌면 인력거가 된다. 동아시아에서 특히 인력거가 널리 보급된 데에는 가마의 영향이 없지 않았으리라는 추측이 있다. 가마에 바퀴를 달고 말을 연결하면 마차, 소를 연결하면 우차가 된다.
[1] 위세있는 양반을 따라다니는 건장한 하인들을 구종별배, 길을 비키라고 외치는 소리를 벽제라고 한다. 임금도 벽제를 하는데, 이때 전문용어가 있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주상전하 납시오 운운하지만, 실제로는 선전색 빛나리라고 했다. 여기서 선전색은 왕 앞에 앞장서 구령하는 내시를 뜻한다.[2] 유럽에서도 좁은 길에서 귀족들 마차가 마주 치면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3] 국립국어원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