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거
[clearfix]
1. 개요
'''인력거'''('''人力車''')는 사람의 힘(人力)으로 끄는 수레(車)를 말한다. 오늘날의 택시와 유사하게 운용되었다.
영어로는 'rickshaw'라고 한다. 이는 일본어 '力車'(리키샤)에서 유래했다.
2. 역사
인력거를 최초로 고안한 사람은 다름 아닌 미국인이다. 19세기 중반에 일본에 선교사로 파견된 감리회 소속의 조나단 스코비 목사는 병약한 아내의 교통수단으로 인력거를 고안했다. 유럽에서도 비슷한 물건이 17~18세기에 있었다. 주로 마차가 가기 힘든 좁은 골목이나 재래시장통에서 운용되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상업화된 인력거가 등장한 것은 일본에서였다. 1869년 요코하마에서 최초로 상업화된 인력거가 등장했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 박영효가 일본에서 유행하던걸 보고 최초로 도입했으나, 갑신정변이 일어나면서 묻혀버렸고, 1894년 하나야마란 일본인이 사업용으로 10대를 도입해 운영한 것이 본격적으로 자리잡게된 계기였다.
마차라는 동물을 이용하는 수송 수단이 이미 자리잡고 있던 서양에서는 보편화되지 못했지만 일본, 한국, 중국 등에서는 굉장히 빠르게 보편화되었는데 이는 가마라는 인력을 이용하는 수송수단이 이 지역에 이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 인력거가 요즘에야 느리지만 처음 나올 당시에만 해도 가마보다 훨씬 빠르고 힘도 덜 들었다. 더구나 가마는 웬만하면 4명 아무리 적어도 2명이 필요했는데 비해 인력거는 혼자서도 가능하니 순식간에 가마를 대체해 버렸다. 이용자들도 심하게 흔들리는 가마보다[2] 인력거가 승차감이 훨씬 좋았는데 이런 부분도 빠른 대체의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급속한 도시화는 진행되지만 적절한 교통수단이나 도로기반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등장한다는 점에서 근대화의 산물이기도 하다.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을 정도의 후진국에서는 수요가 없어서 인력거가 생기지 않는다. 도시에서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것보다 '''인건비가 월등히 낮을 때''' 등장하는 직업이다. 인건비가 높아지고 경제 사정이 나아지면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이용해 승객을 끄는 뚝뚝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그러다 영운기 택시가 등장하고 나중에 선진국이 되면 승용차를 이용한 택시가 된다.
한국에서 인력거의 주 이용층 중 하나가 기생이었다. 기생을 술자리에 부르려면 당시로서는 지나치게 비싼 택시는 못 보내도 최소한 인력거 정도는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는 기생은 고객, 인력거꾼은 서비스 제공자였는데도 불구하고 인력거꾼은 이용자인 기생에게 하대를 하고 기생은 인력거꾼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존대했다고 한다. 이는 실제로 인력거꾼 중에 기생들의 아버지가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3]
3. 오늘날
현대에 들어서는 순수 인력으로만 끄는 인력거는 많지 않다. 주로 손잡이 부분에 자전거를 달아서 초반에 속도를 낼 때는 인력으로 끌다가, 어느 정도 속도가 나면 자전거에 올라타서 운전한다. 자전거로 끌기 때문에 제법 빠르다. 여름에 타도 바람 덕분에 추워질 정도. 그래서 대부분의 인력거에 담요가 준비되어 있다. 그래도 끄는 쪽에서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탈 때 자기 체중과 짐을 어느 정도 고려하고 타도록.(…)
오늘날의 일본에서도 인력거를 탈 수 있다. 교토나 도쿄의 아사쿠사와 같은 관광지에서 관광목적으로 운행하며, 요금은 2인 기준 10분에 3,000엔이며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에도 일부 관광지에 이러한 형태의 인력거들이 있다.
저성장 개발도상국에서는 아직도 관광상품이 아니라 실제 상용으로 사람이 끄는 인력거가 남아있다. 뭔가 한번 타보고 싶어서, 또는 못사는 외국사람 한번 도와줄 겸 타보려는 관광객들이 있지만, 마음이 심약한 경우 후회할 수도 있다. 자기는 앉아서 가는데 온몸을 땀으로 적셔가며 수레를 끄는 사람의 등을 보고 있노라면 괜시리 미안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인도나 중국에도 낙후지역에 한해서 2000년대 넘어서까지 남아있다. 특히 인도는 '릭샤왈라'라고 불리는 인력거꾼의 숫자가 매우 많았다. 그래도 90년대에 이미 자전거 릭샤가 80%를 차지했고, 2010년대 들어서는 사람이 직접 끄는 인력거는 보기 힘들어졌다. 요즘 릭샤는 대부분 자전거(사이클 릭샤)나 엔진(오토 릭샤)으로 움직인다. 지금은 동력으로 움직이는 오토릭샤가 70%를 넘긴다고 한다. 뚝뚝 문서 참조.
인도 캘커타에선 이 인력거(릭샤)가 상당히 문제가 되고 있는데, 주로 가난한 노동자들의 밥벌이 수단으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현재 이 도시에서 이들을 대체할 만한 수단이 없어 심지어 정치인들도 인력거를 타고 출근하며 등교용 인력거 인부(릭샤왈라)를 따로 두고 있는 실정인데, 문제는 이 정치인들이 도시의 이미지를 위해 인력거 폐지를 운운한다는 것. 하지만 릭샤왈라들의 결사적 반대 및 인권단체로부터 그럼 그들이 벌어먹을 일자리를 구해달라는 비난에 직면했고, 릭샤왈라들의 표 때문에 단기간에 바뀔 전망은 없어 보인다.
[image]
의외로 서양에서도 위와 같이 자전거에 끄는 형식의 인력거가 흔하게 쓰인다. 보통 부모가 아이를 끄는 용도라 인력거 형식의 유모차라고 봐야 할 듯. 'bike trailer'라고 부른다.
4. 운동 효과
최영의도 젊은 시절에 여비를 벌기 위해 인력거를 끌었던 적이 있다고 하며, 무술가 캐릭터인 진진이나 귀각칠도 작중 인력거꾼으로 나온다.
인력거는 달린다는 그 자체로도 다리 힘을 크게 길러주는 데다가 위쪽이 아닌 뒤쪽으로 무게를 끌고 달리기 때문에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햄스트링을 단련하는데 효과가 아주 그만이다. 게다가 손잡이를 잡은 상태로 상체로 버티며 끌기 때문에 대흉근과 팔근육 및 허리, 복부 등 코어근육을 단련하는데도 굉장한 효과를 발휘한다. 굉장히 힘든 일이지만 그걸 버텨낼 수만 있다면 좋은 단련법인 셈. 프로 운동선수나 대회 출장급으로 단련하는 아마추어들 역시 이런 식으로 뒤에 무게를 끌고 달리는 단련을 거의 필수적으로 거친다.
5. 인력거꾼
rickshaw driver
일본어: 車引き(くるまひき, 쿠루마히키)
인력거를 끄는 사람을 인력거꾼이라고 한다. 별다른 자본 없이 힘만 쓰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기 때문에 힘 좋고 할 일 없고 가난한 남자들이 주로 했는데, 그런 것에 비해 벌이는 괜찮은 편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밑천이 없으면 인력거를 돈 주고 빌려야했기 때문에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었으며, 무척 고된 일이었다.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인력거꾼이 많았다.
당시 주요섭이 쓴 동명의 소설 《인력거꾼》에는 매일같이 지나친 뜀박질을 하는 탓에 인력거꾼은 9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버린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당시 주요섭은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아 카프계열의 작품을 많이 썼고, 소설 《인력거꾼》도 카프쪽 작품의 대다수가 그렇듯이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를 충격적으로 묘사해서 독자의 마음을 뒤흔드려는 경향이 보인다. 따라서 작품 내 인력거꾼의 힘든 생활도 다소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작가들이 이를 쓸 만큼 대중적으로 공감이 될 만한 하층 직업으로 보던 점도 있다.
인력거꾼은 도시에서 제일 흔하게 볼 수 있는데다 사람이 사람을 끌고 다니고 있으니 작가들에게는 사회 밑바닥층의 대표로 인식하고 소재로 삼기 좋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의외일지 모르지만 일 자체는 그렇게 고되지 않았다고 한다. 인력거 자체가 상당히 인체공학적으로 만들어져서 언덕만 없으면 큰 힘이 들지 않는데 인력거가 주로 다닌 길은 한중일 가릴 것 없이 대부분 대도시의 평평한 도로였다. 중국에서 나온 공산화 이전 인력거꾼을 했던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면 고된 농사일이나 막노동에는 아예 비교할 바가 아니었고 수입 또한 5인 가족이 도시 빈민가에서 간신히 생활을 꾸릴 수준은 되었기 때문에 도시 빈민층 중에서는 오히려 괜찮은 직업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인력거꾼은 대개 4교대제로 일했기 때문에 이틀에 한 번 일하면 되었고 결원이 나기를 기다리는 지원자들로 항상 북적거렸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을 끄는 것이 굴욕적이라는 점은 동시대인들에게 각인되어 있었을 것이다. 일본이 만주국이나 중국 동부에 일본인들을 대거 이주시킨 뒤, 그 곳에서 살아온 일본인 2세들이 일본으로 귀환하거나 방문했을 때, 일본인이 인력거를 끄는 것에 큰 충격을 받는다는 점이 그거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수필이나 미라이 공업 창업주 야마다 아키오가 쓴 책[4] 에서 그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의외로 중국에는 여성 인력거꾼이 많다. 남성이 가사일을 맡고 여성이 돈을 벌어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5.1. 이 직업을 가진 캐릭터
- 각시탈: 이강토 - 소년시절에 인력거꾼으로 일하며 당시 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던 기무라 슌지를 학교에 데려다 주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 운수 좋은 날: 김첨지 - 대부분의 위키러라면 이 캐릭터를 통해 인력거꾼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 시티 오브 조이: 하자리 팔
- 마이웨이: 김준식
- 대지: 왕룽 - 대기근으로 도시에 피난가서 이 일을 했다.
- 산과 식욕과 나: 타키모토 겐지로 - 등산이 삶의 낙이라서 평소에도 늘 체력과 근력을 단련하기 위해 이 직업을 택했다고 한다.
- 인력거꾼(소설): 아찡, 뚱뚱보
- 루어투어 시앙쯔: 시앙쯔 - 낙타(루어투어)라는 별명을 가진 만주족 출신 인력거꾼 시앙쯔(祥子)의 인생을 그린 소설이다.
6. 여담
한 하드웨어 관련 커뮤니티에서 인텔 저가형 CPU를 사용하는 사람을 인력거라고 비하하여 부르는 갤러들이 있다.
직업이 인력거꾼으로 나무위키에서 문서가 만들어진 실존 인물은 '''박원문'''이 유일하다. 1909년 '''이완용'''을 인력거에 태우다가 이완용을 암살하려던 이재명에게 피습당해 사망한 것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비슷한 운송수단으로 철도를 손으로 밀어서 움직이는 인차철도가 있다.
[1] 사진에서 인력거에 탄 여성이 입은 옷은 시로무쿠라는 일본 전통 결혼식에서 신부가 입는 옷이다.[2] 가마는 심하게 흔들리기 때문에 익숙한 사람은 몰라도 처음 탈 때는 멀미가 장난 아니었다고 한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 아닐 경우 대개 시집 갈 때 처음 가마를 타게 되는데 이때 가마 멀미 때문에 시부모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드러누워 버리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았다고 한다.[3] 김이석의 단편소설 <실비명>이 기생을 주로 태우고 다니던 인력거꾼 홀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아버지는 총명한 딸에게 큰 기대를 걸고 딸을 의사로 키우고 싶어했으나, 딸은 소리꾼이 되고 싶어하여 기생들과 어울리면서 아버지와 마찰을 빚었다. 결국 딸이 백기를 들고 아버지의 강권으로 간호학교에 입학하지만 적성도 맞지 않고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까지 겹쳐 초췌해지자, 아버지는 잘못을 느껴 딸을 인력거에 태우고 귀가하는데,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아버지는 사망하고 딸은 살아남았다. 이후 딸은 결국 기생이 되고, 그 뒤로도 인력거를 볼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서 절대로 인력거를 타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4] 국내에도 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