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키타니 요이치로
1. 개요
일본의 축구선수. 한때 세레소 오사카의 에이스이자 세레소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번호인 8번[1] 의 상징이었던 선수로 평가받았지만 지금은 세레소 팬들한테 비난을 듣는 선수.[2]
2. 클럽 경력
16살에 세레소 오사카와 프로 계약을 맺으며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2006년 입단 당시 계약금이 유스 선수로는 구단 역대 최고였을 정도로 기대를 많이 받았던 선수였으나, 입단 첫 해 세레소가 그대로 J2리그로 강등당했다. J2리그에서 가키타니는 2009년까지 총 51경기를 나서며 나름대로 많은 기회를 받았으나, 득점력은 여전히 저조했다. 결국 2009년 시즌 도중 같은 J2리그의 도쿠시마 보르티스로 임대되었고, 여기서 27경기 4골로 조금은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이후 가키타니는 2011년까지 도쿠시마에 임대되어 뛰었고, 2010년 34경기 4골, 2011년 36경기 6골로 괜찮은 활약을 했다. 게다가 이 시즌 원 소속팀 세레소가 승격하면서 가키타니도 자연스럽게 다시 J1리그를 밟게 되었다.
그리고 돌아온 이후부터는 세레소의 주포로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하여, 승격 첫 해 리그 11골을 포함해 총 17골을 넣으며 맹활약했고, 2013년에는 리그 21골을 기록하며 J리그 내에서도 주목받는 공격수가 된다. 2014년 8월 스위스 명문 바젤에서 가키타니의 영입을 문의했고, 이를 받아들여 바젤에 입단하게 된다. 그러나 바젤에서의 경쟁은 녹록치 못했고[3] , 결국 2시즌 동안 겨우 26경기에 출전하는 데에 그쳤다.[4] 바젤에서의 성적은 첫 시즌 17경기 7골, 다음 시즌 9경기 1골.
결국 2016년 1월 겨울 이적 시장에서 당시 강등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던 친정팀 세레소로 돌아갔고, 친정 복귀 후 21경기 6골로 맹활약하며 팀 승격에 힘을 보탰다. 이후로도 꾸준히 세레소의 주포로 뛰고 있다.
주포로 뛰었지만 윤정환 감독이 부임한 후부터는 자주 출전하지 못했고, 출전해도 활약상이 썩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5] 그로 인해 윤정환 감독과 불화설이 많이 떠돌았고[6] 중간에는 더비 라이벌인 감바 오사카 이적설로 언론과 구단한테 언플까지 했다. 그로 인해 팬들은 물론 선수들도 윤정환을 지지하는 쪽[7] 과 가키타니 쪽을 지지하는 두 파로 나뉘었다. 세레소 오사카 보드진은 윤정환을 해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결국 2018 시즌 후 재계약을 맺지 않았다. 명목상의 이유는 성적 부진으로 인한 사실상의 경질이었지만, 사실 지난 시즌과 비교하면 선수들이 서로 파가 나뉘어 불화가 심각하니 성적이 잘 나올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윤정환 감독이 사실상 경질된 원인은 이 선수인 셈이다.
이로 인해 윤정환 감독을 지지하던 세레소 팬들은 "8번의 장벽을 스스로 높혀놓고서는..." 이라는 말도 나왔고, 일부는 "(김)진현이 8번을 할 수 없을까..." 라는 말도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김진현이 골키퍼라 등번호가 안되자, 팬들은 "공격수로 포지션 변경시키면 안되나..." 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사실상 현재 세레소 오사카의 8번이 과하게 신격화된건 이 선수가 가장 큰 원인이다. 팬들은 이제 에이스도 아니고, 답답한 모습만 보여주는 가키타니에게 불만이 점점 쌓이고 있다. 게다가 2014 시즌에만 실질적으로 에이스 역할을 해줬지, 이제는 에이스도 뭣도 아니다. 그래서 당장 8번을 내려놓기를 바라는 팬들도 많다. 심지어, 나고야 전에서는 자기팀이 졌는데, 경기 종료 이후 예전에 같은 팀 동료인 다마다 게이지를 만나서 기쁜건 알지만, 웃는 모습도 포착되었다.
현재 이 선수에 대한 민심은 엄청나게 떨어졌다. 많은 세레소 팬들이 등을 돌리거나, 대게 냉정하게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8번을 내려놓기를 바라는 팬들이 더 더욱 많아졌다. 앞으로도 이런 고집으로 인해, 팬들 내에서의 지지는 엄청 떨어질 예정이다. 팬들은 오히려 현재 미래의 세레소 오사카 8번을 짊어질 유망주로 떠오르고있는 니시카와 쥰 선수한테 기대감이 커졌다.[8]
2020 시즌 종료 후 12월 24일, 오랫동안 있었던 세레소를 떠나 나고야 그램퍼스로 떠나게 되었다.###
3. 국가대표
[image]
성인 대표로는 2013 한국에서 열린 EAFF 동아시안컵 중국전이 첫 데뷔였다. 이 데뷔 경기에서 골을 넣었고, 이후 한국과의 최종전에선 혼자 2골을 몰아치며 팀의 2대1 승리를 이끈다. 이 활약으로 알베르토 자케로니 감독의 눈도장을 받아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명단에도 포함되었고, 월드컵 전에 열린 벨기에와 코스타리카와의 친선전에서도 골을 터트리며 맹활약했다. 하지만 정작 본선에선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팀의 무기력한 탈락을 바라봐야만 했다.
4. 플레이 스타일
주 포지션은 공격수이나 공격형 미드필더도 볼 수 있으며, 주력이 빠르고 공간 침투가 좋은 선수다. 결정력도 괜찮은 편. 다만 몸싸움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고, 수비 가담 능력도 썩 좋지는 않다. 좋은 공간 침투 능력과 빠른 주력 덕분에 역습에서의 빠른 전개만 가능하다면 활약의 여지가 많지만 일본인 선수의 전형적인 단점을 그대로 물려받은 선수. 대표팀 후배인 아사노 타쿠마와도 비슷한데, 아사노는 가키타니보다 스피드가 더 빠른데다가 중심이 낮아 넘어지지 않으면서 전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가키타니가 하위 호환이다.
5. 여담
- 공부를 잘 하는 선수로, 2008년 와세다대학 E-스쿨에 입학했다. 또한 유스 시절부터 뛰어난 잠재력과 더불어 자유분방한 기질로 인해 성실한 모범생 이미지였던 동년배 카가와 신지와 많이 비교되었던 인물이며, J리그 복귀 후 기묘한 힐킥으로 골을 넣는 등 쇼맨십 기질 또한 많은 선수이기도 하다.
- 2016년 12/8일 동년배 연예인 마루타카 마나미(丸高愛実)와 결혼했다.
- 2018 시즌을 앞두고 라이벌 감바 오사카로의 이적설이 떴지만 잔류했다. 본인도 크게 고민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시즌이 개막한 뒤 감바는 내내 강등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9] 세레소는 차기 AFC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노릴 정도로 승승장구하는 등 현저한 순위 차이를 보이면서 결과적으로는 세레소에 잔류한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 되었다.
[1] 모리시마의 선수 시절 등번호[2] 8번을 언론 플레이로 완전히 신격화시켜 버리고, 자기 외에는 아무도 8번을 못달게 만들었다. 잘하기라도 하면 모르겠는데, 경기력이 그다지 좋지않아 팬들 내에서는 8번을 내려 놓으라는 비난이 커지고 있지만 끝까지 고집으로 버티고 있다. 또 후술하겠지만 윤정환 감독을 완전히 해임시키게 만든 주범으로 지목당하고 있다.[3] 당시 바젤 감독은 '실력은 뛰어난것 같은데 우리팀의 색깔과는 맞지 않는 선수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가키타니는 이후 세레소로 복귀한 뒤 발 뒤꿈치로 골을 넣는 등의 기행을 보여주는 등, 확실히 별난 유형의 선수임에는 틀림없다.[4] 팀 색깔에 맞게끔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을 바꾸는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많았고 부상 기간도 꽤 길었다.[5] 주전 공격수인 스기모토 켄유와의 호흡이 잘 맞지 않았던 게 큰 원인이었던 듯 하다. 때문에 윤정환 감독은 가키타니를 측면으로 돌려보기도 하고, 그럼에도 공격에서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자 수비형 미드필더인 야마무라 카즈야를 스기모토의 파트너로 넣는 시도까지 감행했다. 근데 이게 의도치 않게 대박이 나는 바람에 가키타니만 안습.[6] 실제로 교체 아웃될 때 윤정환 감독과 악수도 없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7] 스기모토 켄유, 야마무라 카즈야, 그리고 주장인 야마구치 호타루. 공교롭게도 이들은 윤정환이 떠나자 짜기라도 한 듯 모두 세레소를 떠났다. 심지어 야마구치는 지역 라이벌인 비셀 고베로 이적했다.[8] 미래의 세레소 8번이라고 불리고있는 니시카와 쥰이 8번을 맡고 가키타니 요이치로는 이제 8번을 포기하라는 팬들까지 생기면서 앞으로 지지는 더 폭락할 예정이다. 참고로 현재 니시카와 쥰은 U-20 일본 대표팀 명단에 포함되어있으며, 미래의 세레소 오사카 8번으로 불리고 있다.[9] 심지어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에 차출된 팀의 주포 황의조가 대표팀 합류 직전까지 혼자서만 14골을 벌어놓고 갔는데도 승률이 처참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