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환

 

'''윤정환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color=#373a3c>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지바'''
'''ジェフユナイテッド市原・千葉'''
''' 이름 '''
'''윤정환'''
'''尹晶煥 YOON JUNG HWAN'''
''' 출생 '''
1973년 2월 16일 (51세) /
대한민국 광주광역시
''' 국적 '''
대한민국
''' 신체 '''
172cm | 체중 63kg
''' 직업 '''
축구선수(미드필더[1]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부천 SK(1995~1999)[2]
세레소 오사카(2000~2002)
성남 일화 천마(2003)
전북 현대 모터스(2004~2005)
사간 도스(2006~2007)
''' 감독 '''
사간 도스 유스(2008 / 코치)
사간 도스(2009~2011 / 코치)
사간 도스(2011~2014)
울산 현대(2015~2016)
세레소 오사카(2017~2018)
무앙통 유나이티드 FC(2019)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지바(2020~)
''' 국가대표 '''
38경기 3골 (대한민국 / 1994~2002)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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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력 '''
금호고등학교(1988~1990 / 졸업)
동아대학교(1991~1994 / 학사)


1. 개요
2. 선수 시절
2.1. 플레이 스타일
3. 지도자
3.1. 사간 도스
3.2.1. 2015시즌
3.2.2. 2016시즌
3.3.1. 2017년
3.3.2. 2018년
3.3.3. 세레소 오사카와의 계약 만료 원인과 결론
3.4.1. 2019년
3.5.1. 2020년
4. 논란
4.1. 국민건강보험료 체납
5. 여담
6.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축구선수 출신 감독.
일본 J2리그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지바의 감독을 맡고 있다.

2. 선수 시절


동아대학교를 졸업하고 유공 코끼리에 입단하였다. 그리고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의 1996 애틀랜타 올림픽 국가대표로 뽑혀 대표팀의 플레이 메이커로 큰 역할을 했다. 이후 조직력을 중시하던 당시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 밑에서 헝가리 출신의 쇼모지 요제프, 그리고 당시 무명이었던 김기동, 이을용, 윤정춘 등 미드필더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외에 1997년~1998년에 유공 코끼리/부천 SK에서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의 지도를 받았던 제자들로는 남기일, 조성환 등이 있다.
이 시기 유공 코끼리는 니폼니시와 윤정환으로 대표되는 팀이었다. 비인기 팀이었으나, 니폼니시와 윤정환 때문에 팬클럽이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서포터 탄생의 큰 역할을 한 것이 고종수였듯이, 유공 코끼리(부천 SK)의 서포터 탄생에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윤정환이다.
당시 '유공-부천 경기는 표값이 아깝지 않다'는 찬사를 받을 정도였으니, 이쯤 되면 윤정환이 팀에서 갖는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여담으로, 당시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은 윤정환에게 별다른 전술적인 지시를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워낙에 잘 하니까 알아서 잘 한다는 이유였다.
이렇게 부천 SK에서 1999 시즌까지 활약한 후, 당시 불어닥쳤던 J리그 진출 열풍에 합세해 이적료 150만 달러에 2000년 J리그세레소 오사카로 이적하였다. 세레소 오사카에서도 주전 미드필더로 활약하였으나 당시 세레소의 주축이었던 일본 국가대표 출신의 모리시마 히로아키[3]노정윤이 중원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포지션이 수비 쪽으로 밀리면서 대한민국에서와 같이 인상적인 활약은 못했다. 게다가 대한민국에서는 윤정환이 보기 드문 유형의 선수이지만, 일본에서는 흔한 유형의 선수인 것도 한몫했다.
그러다 2003년 다시 성남 일화 천마로 이적하였으나, 감독과의 불화에다가 세레소 시절과 마찬가지로 중앙에는 터줏대감 신태용이 버티고 있던 탓에 활약은 미미하였다. 그 후 2004년에 전북 현대 모터스로 이적하였고, 2006년에 당시 2부 리그 팀이었던 사간 도스로 이적한 뒤 2008년 3월에 은퇴했다.

2.1. 플레이 스타일


장점도, 단점도 고전적 10번의 전형이라 할 만한 선수였다. 엄청난 시야와 패스 속도+정확도를 자랑하면서 화려하고 창의적인 스루패스를 쫙쫙 뿌려 주었다. 볼간수도 잘해서 빠른 드리블로 제끼기보다는 정확한 드리블로 지키는 드리블도 수준급이었다. 소위 말하는 테크니션. 또한 셋피스에도 뛰어나서 프리킥으로도 골을 기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위의 하이라이트에서 볼 수 있듯 중거리 슛에도 능한 킥에 관해서는 만능, 마스터였다
그러나 느린 발에 몸싸움이 안되는 약한 피지컬과 172cm의 단신으로 제공권에 문제가 있으며 특히 적은 활동량과 빈약한 수비력[4]이라는 양날의 검과 같은 선수였다. 김기동(1998년부터 이을용이 추가)이 어마어마한 활동량으로 뒷공간 다 커버해주지 않으면 부천은 공수 불균형으로 알아서 무너졌다. J리그에서는 잠시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긴 했지만 전형적인 공격몰빵 공격형 미드필더이다. 그래서 윤정환을 중심으로 팀을 짤 수 있는 클럽팀에서는 몰라도, 당시 강한 피지컬과 빠른 발을 중심으로 하던 한국 국대에서 윤정환이 한 자리를 차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다만, 현역 시절 "체력이 약하다"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한국축구계가 스테미너와 힘, 몸빵 등을 모두 '체력'이라고 지칭하면서 졸지에 스테미너가 약한 선수 취급을 받았는데 윤정환은 몸싸움이 약하고 활동량이 적은 선수지 스테미너가 약한 선수는 아니었다. 오히려 활동량이 적은 덕분에(...) 체력온존형이라 풀타임을 뛰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당시 한국 축구계는 닥치고 피지컬이었던 시절이라, 윤정환같은 소위 테크니션이라는 선수들이 종종 체력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반쪽짜리 선수 취급을 받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윤정환이고 이전에는 최문식, 이후에는 고종수, 심지어 안정환까지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 한국축구계는 체력에서 스테미너와 힘을 한일 월드컵 준비 과정에서야 비로소 구분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장점과 단점이 확실한 선수다.
PC통신의 마지막 전성기였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엔 윤정환 기용 문제가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애틀란타 올림픽 대표팀과 유공 코끼리에서 보여준 화려한 패스 플레이에 매료된 수많은 팬들이 윤정환 위주로 대표팀을 운영할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비쇼베츠호(올림픽대표)에서 함께 핵심 멤버로 활약했던 영혼의 단짝 최용수와 상반되게 차범근호(국가대표)에서 중용되지 못했다. 이는 당시 전술 자체가 중원은 원톱일땐 김도근 - 유상철, 투톱일땐 김도근 없이 유상철 혼자 중앙 전체를 커버하다시피하고 양사이드에 윙을 4명(좌 고종수-하석주, 우 이상윤-서정원) 세워놓고 김도훈,최용수등 아시아 탑클래스였던 타겟맨 머리에 무한 크로스 올리던 전술이라 유상철 자리에 윤정환을 넣는다는 것은 중원을 버린다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차범근 감독이 투박하지만 실리주의였던 독일식 축구를 배웠던 데다, 이미 딥라잉 플레이메이커였던 '''홍명보의 존재'''때문에, K리그에서 아무리 뛰어난 플레이메이커라도 홍명보와의 공존은 불가능했고, 홍명보의 방패역할을 할 피지컬 좋고 터프한 선수를 중용하면 중용했지 신태용, 윤정환 같은 선수는 설 자리가 애초에 없었다. 홍명보가 없는 상태에서 아시아권을 상대로라면 모를까 유럽이나 남미같은 강팀을 상대로는 수비가 바탕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이후 허정무 감독이 이끌던 대표팀에서도 확실한 주력 멤버로는 도약하지 못하였다. 그나마 허정무는 윙백-윙포 4명을 쓰던 한국식 3-5-2에서 윤정환을 사용하기 위해 유상철-박지성의 더블 볼란치(수비형 미드필더)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결국 포기했다. 특히 최용수와 다시 만나 주전급으로 출전해서 금메달을 노렸던 방콕아시안게임에서[5] 8강전에서 태국에 불의의 일격을 당해 준결승 진출이 좌절되면서, 더욱 "윤정환은 국대와는 안맞는다"라는 인식이 굳어진 면도 있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 대표선수로 선발되었으나, 소속팀에서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던 윤정환의 플레이는 거스 히딩크 감독의 팀전술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 실력에도 단 1경기에 출전하지 못하지 못했다. 그나마 윤정환의 존재감을 알렸던 건 한일월드컵 직전에 열렸던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 안정환과의 콤비플레이로 (일명 투정환 전술) 추가 골을 넣었던 그 때 딱 한 번이었다.
압박전술에 걸맞는 강인한 피지컬, 많은 활동량과는 거리가 먼 선수였고, 특히 포지션 교체에 능한 올라운더를 원했던 히딩크 감독에겐 지극히 계륵같은 존재였다. 결국 김병지, 최은성, 최성용, 현영민과 함께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단 1분도 뛰지 못한 멤버가 되었다.[6] 결국 이름값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했다.[7]
정리를 하자면, '''대한민국이 배출한 최고의 패싱 마스터지만, 시대를 잘못 탄 불운의 아이콘'''이었던 선수였다. 10년 정도 일찍 태어나서, 예컨대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면, 종종 롤모델로 거론되던 콜롬비아카를로스 발데라마처럼 활용되어 선수 본인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양쪽에 윈윈이 되었겠지만 말이다.
윤정환으로 시작된 테크니션의 잔혹사는 이관우 등으로 이어졌고, 이후 기성용이란 테크니션이 대표팀에 자리를 잡아서야 종결되었다.

3. 지도자



3.1. 사간 도스


2008년 사간 도스와 재계약하지 못하고 은퇴한 그는 구단의 요청으로 프런트에 합류하였고, 2009년 1군 코치로 승격하였다. 2011년 사간 도스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디비전 2의 1위로 팀을 끌어올렸고, 사간 도스는 팀 역사상 처음으로 디비전 1로 승격하였다.
사간 도스의 지휘봉을 잡은 후 강력한 몸싸움을 기반으로 한 축구를 시도했는데, J리그의 섬세한 축구에 완벽한 해법으로 등극했다.[8]
승격 후에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2014년에도 J리그에서 1위를 달리던 중, 8월 8일 사간 도스의 감독에서 갑작스럽게 물러났다. 이에 대해 일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도 여러 억측이 나오고 있으나, 자세한 사항은 밝혀지지 않았다.
사간 도스의 전력강화부장인 나가이 타카유키와의 마찰이라는 설도 있다. 나가이 타카유키는 사간 도스의 전신인 도스 퓨쳐스부터 시작하여 구단이 휘청거리던 시절에는 무급으로 일을 맡을 정도로 구단에 대한 애정이 넘치던 인물인데, 문제는 그 애정이 패싱 축구를 추구하는 개인의 취향과 만나면서 삐뚤어진 방향으로 발현했다는 것.
당장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사간 도스였지만 자신이 그리도 좋아하는 패싱 축구를 장기적으로 자리잡게 만들기 위해 윤정환이 체력과 몸빵, 압박을 내세우는 지금의 스타일로 뭔가 성과를 얻기 전에 내친 것이다. 실제로 윤정환의 해임 원인에 대해서는 '전력강화부의 부정적 견해'가 제일 크다는 보도가 있었고, 해임 관련 기자회견에 구단 대표로 나온 것도 저 나가이 타카유키였다. 결국 우승 레이스에 끼어들었던 사간 도스는 5위까지 밀려났고, ACL 진출에도 실패했다.[9]
그러나 단장과의 마찰 하나 때문에 1위하는 감독을 시즌 중에 자른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운 관계로 한국인 감독이 J리그와는 다른 압박을 중시하는 일본식 축구보다 한국식 축구에 가까운 스타일로 한국인 감독이 J리그를 우승할까봐 J리그 연맹에서 사간 도스 구단에게 압력을 넣은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이 일본에서도 제기되었는데 한국에서도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음모론일 뿐이니, 걸러 듣도록 하자. 해임 사태가 터지기 전 사간 도스는 윤정환 감독과 '''재계약''' 협상 중이었다. 또한 2013년에 심각한 적자가 발생했고, 2014년엔 적자 폭이 더 커지리란 비관적인 전망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간 도스의 처사는 프로 스포츠 구단답지 않은 행동이며, 전혀 변호가 안 되는 행동이다.''' 무리뉴는 첼시 초기 로만 아브라모비치와 심각한 감정싸움을 벌였고 파산한 클럽 첼시를 돈질로 유럽 탑 클럽으로 올려놓은 로만에게 자신에게 좀 더 많은 권한을 달라고 땡깡을 부렸으나,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무리뉴가 성적을 내고 있었기 때문에 참으면서 감독으로 계속 기용했다. 그러다가 선수단과도 불화를 겪고 UCL에서도 졸전의 성적을 내지 못했을 때 무리뉴가 결국 잘린 것이다.
레알 마드리드 CF같은 클럽도 '''성적을 내기 위해서''' 클럽의 철학과 반대로 진행하는 주제 무리뉴 감독을 데려갔는데, 가진 것도 없는 일개 시민구단인 사간 도스 주제에 '''단장과의 마찰'''을 일으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리그 1위를 달리는 감독을 '''시즌 중에''' 잘랐다는 것은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처사다.
'''당연히, 사간 도스의 팬들은 "구단이 아무래도 미친 것 같다!"라면서 반발했었다. 실제로, 윤정환의 경질 이후 사간 도스는 완전히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심지어 2020년 현재까지도 J리그에서 다시 1위는커녕 4위권 안에 들어가지 못했으며, 강등권까지 떨어진 적도 있다.'''
쥐뿔도 없는 시민구단 주제에, 오직 윤정환 한 명의 힘으로 리그 1위까지 달리고 있는데 시즌 종료 이후도 아니고 시즌 도중에 자른다는 행동은 프로 스포츠 클럽이 모범적으로 해야 될 행동도 아니다. '''그렇담 누가 차기 감독 자리를 맡으려고 하겠는가?'''
그러나 보통 이런 경우에는 구단 프런트 혹은 선수단과의 마찰의 영향이 크다. 로베르토 만치니 감독이 맨시티에서 경질되었을 당시에도 가장 큰 이유가 선수단과의 불화임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역으로 마누엘 페예그리니 감독은 만치니 감독 경질 시즌보다 더 못한 성적을 내고도 선수단과의 관계가 좋다는 이유로 살아남았다. 때문에 해당 클럽만 단정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윤정환 감독의 사간 도스를 지휘하던 행적을 폄훼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이다.'''

3.2. 울산 현대



3.2.1. 2015시즌


[image]
시즌초 울산 팬들이 바랐던 모습.
김신욱과 윤정환이 말하는 철퇴왕 2세
2014년 11월 20일, K리그 클래식울산 현대에서 조민국 감독의 후임 감독으로 와 달라면서 영입 제의를 받았다. 이에 윤정환 감독은 여러 언론에다 '''"울산의 영입 제의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고 밝혔으며, J리그의 여러 구단에서도 영입 제의를 받았기 때문에 울산 현대의 제의를 수락할지 고민했다. # 이 무렵 울산 현대에서는 단장을 교체하였다.
이후 보도로는 울산 현대의 구단주 정몽준의 의사가 컸다고 한다.
[image]
결국, 2014년 12월 1일부터 공식적으로 울산 현대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015년 3월 8일 공교롭게도 올림픽대표팀 시절 '영혼의 단짝'이었던 최용수 감독이 이끄는 FC 서울과 K리그 클래식 개막전을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혹시나가 역시나, 실용주의 기질은 어디 가지 않아서 2년전 '''김호곤의 철퇴 축구'''를 그대로 다시 들고 나와서 2:0으로 서울을 누르며 화려한 신고식을 올렸다. 조예스가 될성부른 패싱 축구를 천명하며 불과 1년만에 팀의 근간을 많이 바꿔놓았는데, 다행히 철퇴 축구의 핵심 멤버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팀을 맡은지 '''4개월'''이란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원상복구할 수 있었다. 또한 김호곤 감독이 매년 영입을 통해 전력을 업그레드했던 것처럼 현역 아시아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세르베르 제파로프 영입을 구단에 강력히 요청, 철퇴에 날개를 달았다.[10]
3월 15일 첫 원정 경기 상대는 하필 포항 스틸러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영남 더비를 치렀다. 시작 전부터 언론을 통해 선배 황선홍 감독과 언중유골 설전을 펼치며 주목을 받았다. 전반전 포항은 강력한 허리싸움을 걸며 제파로프를 기점으로 한 철퇴축구의 시발점을 적시에 차단하며 울산을 몰아붙이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전반 추가시간 단 한번 찬스를 그대로 제파로프가 득점으로 성공시켰고, 후반 시작 2분만에 포항이 무섭게 몰아쳐서 동점골을 얻어내며 경기 양상은 한골 싸움에서 차차 난타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윤정환 감독은 김신욱을 투입해 양동현과 장신 타겟 투톱을 세우는 승부수를 던졌고, 이것이 적중해 포항은 제공권을 지키기 위해 수미를 내려 중앙을 두텁게 세웠다가 마스다의 중거리 슛을 허용하면서 포항은 팀의 공수 밸런스가 무너졌고 결국 울산은 4:2로 대승을 거뒀다.
3월 21일 전남과 0:0 무승부를 기록했다. 23일 전북도 인천과 득점 없이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울산은 득실차에 앞서서 리그 단독 선두를 차지했다. 이후 4월 5일 초반돌풍의 주역 광주마저 2:0으로 때려잡고 아직 리그 초반이지만 K리그 클래식 팀들 가운데 울산과 전북이 가장 탄탄한 전력을 바탕으로 순항할 듯 보이고 전북의 대항마로 불리던 수원, 포항을 제치고 다크호스로 부상하나 '''했으나...'''
4월 11일 리그 최하위 대전을 상대로 1:1 무승부를 캐더니, 이후 수원, 인천을 상대로 차례로 1:1 무승부. 심지어 대전과 같은 하위권인 부산에게는 '''졸전끝에''' 1:1 무를 캐고 제주에게는 1:2 역전패, 이후 전북, 성남에게도 덜미를 잡히며 순식간에 리그 7위로 추락했다. 7경기 무승. 6월 3일 부산과의 경기에서도 패해(0-1) 10경기 연속 무승.
경기력에서도 비판을 받는 것이 1골만 넣으면 무조건 수비라인을 내려서 잠가버린다. 이 때문에 팬들에게는 재미없는 축구라고 욕먹으면서 그나마 적절한 카운터로 승점은 신나게 따던 김호곤과는 달리 '''그냥 잠그기만''' 일삼다가 막판에 골을 먹고 비기거나, 아니면 역전골을 처맞거나 하면서 전임 감독 조예스와 버금갈 정도로 팀이 망가지고 있다. 더욱이 초반의 찬양일색과 달리 과거 사간도스 시절의 비화[11]까지 밝혀지면서 여러 모로 궁지에 몰린 상황.
6얼 17일 전북과의 경기에서도 선제골 넣고 잠그기 시도하다 전북에게 역전패 당했다. 후보 골키퍼 이희성이 부상으로 실려나가[12] 전날 동남아 원정경기 뛰고온 김승규를 출전시키는 혹사를 단행했는데 더 웃긴 건 잠그기도 제대로 안 돼서 김승규가 없었으면 영락없이 대패각이었다. 다만 이날 경기는 김승규 본인이 전북전에서 뛰고 싶다고 얘기했고 윤정환이 선수 명단에는 넣었지만 선발 출전이 아니라 벤치에 넣었는데(관련기사) 선발출전한 이희성 골키퍼가 불의의 부상을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그리고 현재 7월 26일 조예스보다 심한 리그 10위를 안착했다. 타팀은 승점자판기로 판단하고 울산팬들은 무슨축구를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의견이 대다수다. 본인말로는 3위까지는 노릴 수 있다고 하는데 3위 전남과는 승점 13점차다 혹시나 강등이라도 된다면 2012 아챔우승 2013 2위팀이 2년만에 강등, 더불어서 승강제 도입 이후 시민구단도 아닌 기업구단이 강등당한 최초의 사례 발생이라는 최악의 형태가 된다.
8월 12일 후반기 첫 시합 최용수감독의 FC 서울과의 매치에서 드디어 패했다. 아직 조영철 등 새로 영입한 멤버 등이 안나왔다해도 쓰라린 패배였고 부산과의 대결에서는 무승부를 기록했다. 그리고 22일 수원과의 경기에서도 패했다. 다행히도 울산의 순위는 여전히 리그 10위. 11위인 부산이 최근 주요 경기들에서 승점을 쌓는데 지속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하위 세 팀과 나머지 팀들의 승점이 급격하게 멀어질 수 있는 상황으로, 울산의 순위 반등도 점점 어려운 지경에 처하고 있다.
선술한 수원과의 22일 경기 직후 물어 뜯기 좋아하는 기자들마저 침묵할 정도로 좋지 못 한 표정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고 한다. "오늘따라 질문이 없네요?"라고 처량하게 되묻는 윤정환 감독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진 기자까지 있다는 후문. 긴 한숨을 복도에서 계속 토해냈다는 표현을 통해 봤을 때 지도자 역할을 계속 수행하는 것에 대한 큰 고민을 이어 오고 있음이 분명하다. #
29일 광주와의 시합에서 오랜만에 승리를 기록했다.[13] 이날 부산이 전남과 비기면서 승점차를 7점차로 벌려놓는데 성공했다. 9위 광주와의 승점차이도 2점인지라 울산의 활약도와 광주, 제주, 전남, 인천 등의 승점 변화에 따라서 7~8위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9월 13일 제주와의 경기에서 2:2 무승부를 기록하고[14] 광주도 부산과 0:0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광주를 추월하지 못하고 광주는 9위, 울산은 10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9월 인터뷰에서 윤정환 감독은 한국프로축구를 너무 몰랐다며 반성했다. 자신이 선수 생활 때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수준이 향상되어 있었고, 경기장 안에서 벌어지는 스피드와 힘의 다툼은 밖에서 눈으로 보는 것 이상이었다는 것.
그리고 희망을 걸었던 FA컵은 영혼의 반쪽 최용수에게 4강에서 2-1로 패해 날아갔다. 그나마 부산이 심하게 부진해서 강등걱정은 안해도 된다는 게 다행이긴 하다. 구단에서는 후반에 좋은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내년에도 맡기겠다고 공언했다.
단, 윤정환을 변호할 요소, 아니 재평가를 해야 할 정도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2015년 울산 선수단은 막장에 막장을 달렸다. 부상으로 인해 후반기에야 제 활약을 한 김신욱(?)[15], 경기를 거부해 최종전에 처음으로 교체로 10분 뛰신 고창현, 자기가 이브라히모비치라도 된 것마냥 입만 털면서 실제로는 경기장 구석구석 똥만 싼 하성민, 경기가 뛰기 싫어 퇴장당한 구본상, 그냥 존재가 문제인 정도의 김근환, 베테랑의 나이라 치매걸린 경기력을 보인 송유걸, 군 면제 이후 축구를 면제한 임창우 등등, 예전 우승팀급 명가 대우는 받고 싶은데 실력과 인간성이 쓰레기인 놈들이 한가득이다. 거기다 예전 김호곤 시절 지른 적자가 터지며 모기업 불황과 겹쳐 재정이 울산을 짓누를 잠재적 불안요소에서 현실적 문제로까지 떠올랐다. 윤정환이 아니라 누가 와도 안 될 팀이었다. 울산의 밝은 미래는 감독이 아니라 선수를 갈아야 보인다. 이대로라면 감독을 갈아봐야 같은 문제가 터질 뿐이다
전술에 대한 부분도 얘기가 나오는 부분이다. J리그에서 성공한 전술을 거의 그대로 옮겨왔는데, J리그에서 쓰던 전술은 몸싸움을 기반으로 하는 전술이다. J리그의 섬세한 축구에는 강점을 보이지만, K리그는 아시아 축구 리그 중에서도 거의 최고로 거친 리그이다. J리그에서 통하던 피지컬을 이용한 전술이 K리그에 와서는 장점을 보이지 못하고 상쇄된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그나마 막판에 힘을 내서(10경기 연속 무패) 하위 스플릿 중 1위(전체 7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3.2.2. 2016시즌


양동현이 포항으로 떠나는 바람에 김신욱 파트너, 운용 문제를 놓고 또 고민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일단 부산에서 이정협을 임대했고, 포항에서 박성호를 데려왔다.
핵심 자원인 골키퍼 김승규가 J리그로 떠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서울에서 밀린 김용대를 영입했다. 다만 김용대는 나이도 있는데다가, 저번 시즌도 유상훈과 함께 번갈아 출장하면서 경기 감각이 많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실제로 김용대는 경력이 믿기지 않는 어마어마한 잔실수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3월13일, 2016 K리그 1R 상주상무와의 대결에서 0-2으로 패배했다. 진 것도 진 거지만 신입들이 모두 꽝이었다.
홈 첫 경기인 울산vs전북의 현대가 더비는 무득점 무승부 경기가 나왔다. 2만 명 이상의 관중이 입장할 시 윤정환 감독이 머리를 파랗게 염색하기로 했지만, 17000여 명으로 염색은 실패했다. 이번 경기 역시 기대하는 축구는 나오지 않았다...
현재까지 6라운드가 진행됐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보이며 여러모로 많이 까이고 있다. 제주와의 경기는 홈에서 진행되었지만, 수비 축구를 하면서 경기를 풀어나갔고, 그마저도 선취골을 먹히며 1:0으로 패하며 온갖 욕을 다먹고 있다. 전술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는게 정론.
어린이날 펼쳐진 9R 성남과의 홈경기에서 0:3으로 지며 또다시 욕을 먹고 있다. 특히 김승규를 대체하려 영입한 김용대가 최악의 폼을 보이며 3골 중 2골 실점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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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과의 첫번째, 두번째 실점 장면. 하다못해 김용대가 아닌 김병지를 영입했으면 저런 실점은 없었을거라고 욕하고 있다.
조덕제의 수원 FC나 남기일의 광주 FC가 얇은 선수층과 자금력 한계로 팀 전력은 약하지만 감독의 확고한 주관 아래 좋은 축구를 선보인다면 윤정환의 울산은 화려한 선수층에 풍부한 자금력을 등에 업고도 축구를 못한다. 애초에 임대 선수 두명에 나이 지긋한 어르신 두명 데려와놓고 리빌딩이라 자처하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팬들의 반응. 냉정히 보면 4명 다 계약을 연장하지 않는 이상 끽해야 1년 쓰고 말게 될 선수들이다. 즉 임대 선수들이 원래 소속팀으로 돌아가고 노장들이 현역 연장 의사를 밝히지 않는 이상 전혀 의미가 없는 리빌딩이 되는 것이다. 여름 이적 시장에서 이 난국을 타개하는데 도움을 줄 새로운 선수들을 영입하지 않는 한, 뚜렷한 해결책은 당분간 나오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5월 21일 11라운드에서 수원을 4:2로 대파한 뒤, 12라운드에서 제주에 2:1 승, 13라운드에서 상주에 1:0 승리를 거두며 3연승을 달렸다. 그러나 언론과 팬들의 반응은 대략 좋지 않다. 이유는 근래 K리그에서 찾아볼 수 없던 노골적인 수비축구 때문. 비록 울산이 김정남 김호곤 두 감독을 거치며 팀 컬러가 수비축구로 굳긴 했지만, 김정남 감독 시절 울산은 '''아시아의 깡패'''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으로 통했고, 김호곤 감독 역시 '''철퇴축구'''로 명성을 드날렸다. 그런데 윤정환 감독은 스스로 '''실리축구'''라 강변하지만, 라이트팬은 물론이고 매니아들조차 '''이건 축구도 아니다'''며 울산의 형편없는 경기력을 성토할 지경이다. 백미는 13라운드 상주전. 전반 17분 일찌감치 선제골을 넣자 나머지 70여분동안 하프 라인을 넘을 생각조차 안했다. 심지어 6월 19일 열린 수원 FC와의 경기에서는 전반 3분에 김태환이 득점하자 장장 '''87분'''동안 우주 디펜스를 시전했다. 그리고 6월 29일에 있었던 '''동해안 더비'''에서는 주전들의 체력 안배를 위한다는 이유로 (!!) 비주전들을 경기에 대거 투입시켰고, 결국 '''0대4'''으로 처참히 개발살났다. 울산 입장에서는 최대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포항 스틸러스와의 동해안 더비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생각하면[16]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보.
하지만 그 다음 라운드이자 멘디의 데뷔전이였던 수원 홈경기 역전승을 시작으로 노잼 축구가 진짜 실리 축구로 변모하기 시작했고, 경기 스타일 또한 노잼이기만 했던 축구에서 재미 또한 놓치지 않는 스타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6~7월달 들어서는 멘디의 불을 뿜는 득점력과 함께 다득점 경기가 자주 나오며 노잼 축구라는 불명예를 씻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이 기간동안 승점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덕에 7월 16일 열린 광주 홈경기 (3:2 승)에서 이김으로써 현재 2위를 달리는 중이며 점점 윤할이라는 이름표 또한 떼어내고 있으며, 부정적이였던 팬들의 반응 또한 긍정적인 쪽으로 변화하고 있는 추세이다. 특히 광주전의 경우, 코바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개인 플레이가 잦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이 경기에서 코바가 근육 부상으로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다득점 승리를 거둔 것은 분명히 긍정적인 평가를 해야 할 점일 듯하다.
하지만 광주전 승리 이후 인천과의 홈경기에서 1-3으로 완패했다. 이어지는 전북 원정에서는 김인성이 선제골을 기록했음에도 김신욱에게 역전골을 내주며 치명적인 1-2 역전패를 당했다. 전남과의 홈경기에서는 0-2 완패를 당했다. 3경기에서 7실점을 기록하며 수비가 완전히 무너졌다.
여기에는 이재성의 부상과 정승현의 올림픽대 표 차출 공백을 메워야 했던 김치곤, 강민수의 끔찍한 수비력이 크게 작용했다. 전남전에는 이정협과 멘디를 투톱으로 세워놓고 의미없는 크로스만 날리는 눈이 썩는 공격력을 선보였다. 김용대의 부상으로 인해 정산과 장대희에게 기회가 돌아갔는데, 둘 모두 괜찮은 선방을 보여주나 싶으면 어이없는 실책을 범하기 일쑤이다. 그야말로 팀이 총체적 난국에 빠진 상황. 3연패를 당하며 순식간에 5위로 내려앉았다. 승점이 같으면 다득점으로 순위가 갈리는데 득점이 매우 적어서 순위 경쟁에 불리하다.
8월 3일 전북과의 원정경기에서 1-1로 비겼다. 여름에 새로 영입한 수비수 셀리오가 이재성과 호흡을 맞추며 견고한 수비력을 보였다. 이정협-멘디 투톱은 여전히 효과가 안 좋다. 후반 45분 골키퍼 정산이 전북선수에게 킥을 갖다 바친데 이어 이동국의 발리슛을 어이없이 빠뜨려 선제골을 내줘 4연패를 목전에 뒀지만 몇 분 뒤 멘디가 극적으로 동점골을 넣었다.
한편, J2리그 세레소 오사카에서 윤정환을 영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
10월 27일, 울산이 윤정환 감독과 재계약을 포기하고 후임 감독을 찾는다는 기사가 나왔다. 관련 기사
상위 스플릿에선 부진을 거듭해 결국 제주에 밀려 4위에 그쳤고, FA컵에선 한 수 아래 전력인 수원에게 [17] 4강에서 탈락하면서 ACL 진출에 실패했다. 물론 아직 출전 가능성은 남아 있긴 하다. FC 서울이 FA컵에서 우승하거나, AFC가 전북 현대의 2017 ACL 진출권을 박탈하거나. 이 날 경기가 끝난 후 청문회가 열리면서 울산 팬들의 행동이 네티즌의 도마 위에 올랐으며, 윤정환에 대한 동정표가 늘었다. 이런 팀에 남아 있지 말고 빨리 세레소 오사카로 가서 잘 되라는 분위기.
11월 11일 일본행 항공기에서 목격됐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행선지가 도쿄라 세레소 오사카와는 별 상관이 없을줄 알았으나, 도쿄 아지노모토 스타디움에서 벌어지는 도쿄 베르디와 세레소 오사카의 경기를 보러 간 것이었다. 이걸로 세레소 오사카행이 거의 확정난 분위기.
11월 14일, 울산은 공식적으로 윤정환 감독과 계약을 연장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관련 기사
그리고 같은 해 12월 5일 세레소 오사카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이 확정되었다. 한편, 전날 FA컵 결승에서 수원이 우승하면서 울산의 ACL 출전도 무산되었다. 하지만 전북이 ACL 출전권을 박탈당하고 CAS에 제소 후에도 결국 패하면서 울산의 ACL 진출이 확정되었다.

3.3. 세레소 오사카



3.3.1. 2017년


2016 시즌 J2리그에서 승격해 올라온 세레소의 지휘봉을 맡았다. 한때 1위로 올라서기도 했으나 연패로 5위까지 내려가고, 11월 현재는 3위에 위치해 있어 ACL이 가시권에 놓인 상태다. 갓 승격한 팀을 이끌고 거둔 결과로는 상당한 성적.
2017년 11월 4일, 사이타마에서 열린 르방컵 결승전에서 가와사키 프론탈레를 2:0으로 누르고 우승, 리그컵이긴 하지만 승격 한 해만에 트로피를 얻는 성과를 거두었다. 세레소와 일본 매체에서의 평가도 상당히 좋은 편.
사간 도스 시절의 도요다 요헤이처럼 왼쪽 공격수인 스기모토 켄유가 항명하는 사건도 있을 정도로 훈련과 전술에 있어 엄격함이 상당했지만, 특유의 리더십으로 다스렸다고 한다. 결국 윤정환 감독 아래에서 다시 시작한 스기모토는 도요다 요헤이의 전례와 같이 국가대표에도 선발되며 본인에게도 있어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18]
윤정환 감독이 한국에서와 달리 일본에서는 엄청난 호성적을 거두며 명장으로 추앙되는 것을 보며 축구팬들은 한국에서 스타일이 맞지 않으나 일본에서는 잘 맞는다 혹은 단지 한국 축구가 그를 받아들일 그릇이 되지 못한다 등 긍정과 부정이 섞인 여러 의견을 내놓고 있는데, 그가 일본 축구와 잘 어울린다는 것에는 대개가 동의하고 있다.
특히나 선수와 1:1 대담을 진행할 정도로 소통을 중시하며 감독 본인의 일본어 실력 또한 뛰어남을 생각해보면 그가 일본 문화 그리고 일본의 축구에 얼마나 잘 익숙해져 있는지 알 수 있다.
결국 정규 시즌을 3위로 마무리하며 세레소의 ACL 진출을 확정지었으며, 2018년 1월 1일 천황배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며 더블을 완성했다. [19] 감독 자신에게도 2017년 J리그 감독상을 수상하며 매우 좋은 시즌을 보냈다.

3.3.2. 2018년


울산에서 1시즌 동안 같이 있었던 양동현을 팀에 영입했다. 이로써 세레소는 최전방과 최후방을 한국인 선수가 맡게 되었다. ACL 조별리그에서 제주와 같은 조에 속했고, 첫 경기인 제주전에서 종료직전 인저리타임에서 극장골로 1:0으로 승리했다.
2018 시즌 초반에는 아주 괜찮은 출발을 했다. 하지만 시즌이 막판으로 흘러 갈수록 ACL 진출권에서 멀어지는 중위권으로 팀 순위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결국, 10월 초에 구단 수뇌부들이 윤정환 감독의 시즌 도중 경질에 대해 긴급회의를 가졌다는 내용의 일본 언론 보도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관련 기사 회의 결과 도중 경질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시즌 끝나고 재계약 없이 결별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힌듯 하다.
결국 11월 19일, 세레소 오사카는 구단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윤정환 감독의 계약 만료 및 결별을 공식 발표했다.#

3.3.3. 세레소 오사카와의 계약 만료 원인과 결론


세레소와의 계약 만료 원인은 간단하다. 이번 시즌 세레소는 영입부터가 잘못되었다고 볼수 있다. 애초에 양동현, 오스마르 선수를 영입하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평소 잘먹히던 442 라인업과 전술이 잘 안통하기 시작하기시작했고 시즌 초중반부터 부진을 겪는둥, 이래저래 수난에 빠졌다. 안그래도 수난에 빠져서 난감한 상황인데 가키타니 요이치로가 난데없이 자신을 출전 시키지 않는 감독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았다. 이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가키타니의 팬들은 윤정환이 그만두길 바란다 라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감바 오사카로 이적한다고 언론에서 각종 플레이를 내세우는데 윤정환은 더 수난에 빠졌다. 세레소 오사카 프런트는 가키타니 요이치로의 언론플레이에 겁을 먹어, 해임하겠다고 언론에 내보냈다.
하지만 이뿐만이 아니였다. 세레소 오사카는 당초 이번시즌 목표가 '''4관왕''' 이라는 소리가 있다. 말 그대로 프런트가 너무 높게 목표를 잡은것도 문제지만, 세레소 오사카에 당초 맞지않았던 선수를 영입했던게 원인이 크다.
양동현은 시즌 초에 나오기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골을 넣지 못했다. 1골 밖에 넣지 못하고, 부진이 심각해져서, 나중에는 세레소 오사카 팬들한테 비난을 얻기 시작했다. 양동현 때문에 실점했다니 뭐라니 하면서...
그리고 오스마르는 시즌초에 U23 경기에 종종 나타났던 선수 였다. 그러나, 윤정환의 경기에 2~3경기 나오기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는 442 와 맞지않았다. 후반기에 세레소가 3421 로 라인업을 바꾸면서, 21~28라운드까지 붙박이 출전했으나 다시 전술을 4-4-2 바꾸면서 밀려났다.
아무튼 윤정환을 내보내고 팀을 재정비는 세레소는 2019시즌을 아쉬운 5위로 마무리했다.

3.4. 무앙통 유나이티드 FC



3.4.1. 2019년


세레소 오사카에서 떠난 이후 어디로 부임하게 될지 의견이 분분했었는데 태국 명문 팀인 무앙통 유나이티드 FC로 향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세레소 오사카에서 안 좋았던 것도 아니라서 좀 기다리면 K리그, J리그 팀에서 오퍼가 올 수도 있는데 동남아로 간다는 것에 상당히 의외라는 반응이 대다수. 하지만 부임 두 달 만인 6월 12일, 8경기 2승 2무 4패를 기록한 뒤 해임되었다.# 후임 감독은 이전에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기도 했던 알렉산더 가마.

3.5.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지바


다음 행선지는 J2리그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지바가 되었다.
제프는 과거 최용수가 맹활약했던 팀으로 J리그 오리지널 10팀[20]중 하나의 팀으로 나름 역사가 있는 팀이지만, 리그우승은 1회도 없으며 컵대회 2회 우승이 다다.
만약 제프 부임이 확정된다면, 앞선 두 번의 일본 생활과 비교해서 압박감이 훨씬 커질 것으로 보인다. 부임 당시 승격이라고는 꿈도 꾸지 않던 사간 도스와 갓 승격한 팀이었던 세레소 오사카는 감독에게 많은 것을 요구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프는 2008년 이후로 계속 2부리그에 박혀있는 상태인지라, 부임한다면 곧바로 승격의 염원을 이뤄달라는 압박을 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사간 도스와 세레소 오사카에서 보여줬던 성과 때문에, 팬들의 기대치 내지 조급증도 꽤 클 것이다.

3.5.1. 2020년


제프 감독으로 부임한 후, 첫 공식 인터뷰에서 이전 팀에서도 악명높았던 3세트 훈련을 지시하고 선수들의 휴대폰 사용을 제한하고 있다고 한다. 선수들 입장에선 죽을 맛이겠지만, 제프 팬들은 쟤네들은 저렇게 해야 승격한다면서 반기는 분위기다.
2019년 12월 18일 한양대에서 재학중이던 장민규를 영입했다.
J2 3라운드를 치르고 2승 1패를 기록했다. 경기력이 이전보다 좋아졌고 1패의 상대도 J2의 강팀 오미야였기에 제프 팬들은 만족하는 분위기.[21]
그러나 9월 말 리그 절반이 지난 시점에서 승격권인 2위와의 승점차가 꽤 크고 경기력이 나아질 기미도 안 보이기에 첫 시즌 승격은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다. 세레소 오사카 2번째 시즌과 태국 시절에 이어서 계속된 하락세를 보이는중. 결국 최종성적 14승 8무 19패, 15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구단은 계약연장을 발표하면서, 2021년 시즌에도 제프 감독직을 계속 이어가게 되었다.

4. 논란



4.1. 국민건강보험료 체납


국민건강보험료를 체납해 소유 부동산을 압류당한 사실이 밝혀졌다.

5. 여담


  • 박지성이 가장 존경하는 국내 축구선수이다.[22]
  • 지금도 회자되는 해프닝 하나. 1997년 4월 26일 부천 SK 대 울산 현대의 경기에서 부상으로 쓰러진 선수를 위해 상대팀 울산 현대 선수들이 의도적으로 공을 밖으로 내보냈다. 이후 경기가 재개되자 윤정환은 상대 골키퍼 김병지에게 공을 보내려 했는데, 너무 세게 차서 골이 되어버렸다. 그는 세레모니 대신 죄송합니다 하는 제스처를 취했고, 니폼니시 당시 감독은 골을 먹혀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외국인 선수들이 열심히 막아 골을 넣는게 지연되었다. 이 건은 흔히 외국인 선수들이 지시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랬다라고 알려져있으나 이찬행 감독(당시 부천 SK 수비수)의 증언에 따르면 상대가 골 넣는건 좋은데 키퍼 가랑이 사이로 넣으려고 해서 화가 나서 열심히 막았다고 한다.
  • 1998년 말 무렵 리그 1 의 중위권팀 FC 메스로부터 영입제의가 왔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때 프랑스로 전지훈련을 떠났을때 FC 메스와 평가전이 있었는데 그때 윤정환을 팀 관계자들이 지켜봤다고 한다. 하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선수들이 그랬듯이 공식적인 협상을 제대로 못하고 2000년 J리그 세레소 오사카에 입단. 만약 FC 메스로 갔었더라면 국가대표팀에서 윤정환에게 더 많은 기회가 있었을수도.

6. 관련 문서




[1] 중앙 미드필더[2] 입단 때 구단명은 '유공 코끼리'이다.[3] 한일 월드컵에도 출전했다.[4] 수비력도 수비력이지만 애초에 수비가담 자체를 잘 하지 않았다. 당대 플레이메이커 성향의 선수들은 대다수가 이러했고, 윤정환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았다.[5] 당시는 아시안 게임에 나이 제한이 없어서 국대 A급 선수들 몇명을 포함해서 선수단을 꾸렸다.[6] 하지만 윤정환 본인은 히딩크에 대해 전혀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하다. 아니, 월드컵 때 1경기도 뛰지 못했을 땐 섭섭한 감정이 있었지만, 이후 감독이 되어보니 피지컬을 중시하던 히딩크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선수 지도 등에 관한 부분을 모두 히딩크가 지휘하던 모습을 보고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하면서 지도자로서 현재는 매우 존경한다고 밝힌 바가 있다. 현역 시절에는 볼 예쁘게 차는 테크니션이었으나, 지도자로서 윤정환은 체력훈련을 입에서 단내나게 시키는 걸로 일본에서 유명했다.[7] 1994, 1998 월드컵엔 명단에도 들지 못했다.[8] 이 몸싸움 기반의 축구를 위해 클럽하우스 근처에 있었던 산인 아사히산의 계단을 왕복으로 뛰어서 오르내리는 훈련을 비시즌에 실시했다고 한다. 12바퀴씩 두 번을 했다고 하는데, 그 결과 선수들의 체력이 몰라보게 좋아졌다고 한다. # 참고로 이 아사히산의 계단은 편도가 '''290개'''라고 한다. 즉 한 번의 훈련에서 6,960계단을 뛰어다녔다는 것.[9] 그런데 이건 2015년 ACL에 출전하는 K리그 4팀에 있어서는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다. 만약 윤정환이 사간 도스를 2015년 ACL에 진출시키는데 성공하고 2015년에도 계속 사간 도스 감독을 맡았다면 K리그 4팀 중 한 팀은 윤정환이 이끄는 사간 도스와 ACL 조별 리그에서 만났을 것이다. [10] 제파로프는 윤정환과 마찬가지로 10번 위치(공격형 미드필더)에서 플레이메이커 롤을 수행하는 선수다. 나이로 인해 피지컬, 체력이 떨어지긴 했지만 플레이메이킹 자체는 K리그에서도 최상위권에 들어가며 아시아 내로 따져도 꽤 상위권에 들어가는 선수다. 그렇기에 윤정환이 제파로프를 조련하는 방법을 매우 잘 알고 있을 것이며, 실제로도 성공적이었다. 단, 위험 요소였던 제파로프의 나이로 인한 체력 저하, 부상 문제가 실제로 터지면서 이후로 울산은 9월에 유스가 터지기 전까지는 되지도 않는 트윈 타워를 굴려야 했다.[11] 네이버 축구 칼럼니스트 서호정 기자가 일본취재에서 밝히길 국내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사간 도스 내부에서도 팀 성적과 별개로 훈련, 전술 스타일에 대해서는 윤정환 감독을 따르는 일부 몇몇 선수를 빼면 대부분의 선수, 프런트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12] 갑작스러운 부상이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발상황이었다.[13] 그러나 이날 경기도 광주에게 선제골을 내줘서 1:0으로 끌려가다가 2:1로 힘겹게 역전승하였기 때문에 울산에게 어느정도 운이 따라준 측면이 있다. 광주 FC/2015년 문서 참조.[14] 김신욱의 페널티킥 실축과 김승규의 킥미스로 인한 실점 등으로 끌려다니다가 제파로프의 극적인 동점골로 겨우 무승부를 기록했다.[15] 그래도 김신욱은 원체 바른 멘탈의 소유자라 멘탈 문제는 없었다. 결국 후반기에 주장을 달기 시작했고 18골로 득점왕에 올랐다 물론 김신욱같은 경우 경쟁중에 하위스플릿에서 득점왕을 확정지었고 플레이 특성상 득점수에 비해 팀 기여도가 떨어진다는 문제점이 있긴 했다.[16] 간단히 말해 수도권에 '''슈퍼매치'''가 있다면 비수도권에는 '''동해안 더비'''가 있다. 그만큼 양 팀의 신경전은 상당히 치열하고, 경기가 시작되면 '''"다른 팀은 몰라도 쟤네만큼은 조진다"''' 라는 분위기가 형성될 정도로, 대단히 중요한 경기다. 그런 경기에서 저런 스쿼드를 선보였으니 울산 팬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솟을 노릇. 그리고 경기가 끝나고 급기야 울산 팬들이 구단 버스를 막아서는 사태가 발생했고, 결국에는 윤정환이 버스에서 내려 해명을 하고 난 뒤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17] 근데 수원이 FA컵 우승을 하게 된다는게 함정.[18] 이후 윤정환이 해임될 때 팀의 내분이 지적되었을 때도 스기모토 켄유가키타니 요이치로의 대척점에 서서 윤정환 감독을 지지했다.[19] J1리그 3위는 ACL 플레이오프행이지만, 천황배 우승으로 직행 티켓을 따냈다.[20] 리그가 창설된 1993년에 참가했던 10개의 팀[21] 리그가 진행되면서 치바는 물론 오미야 역시 강팀이 아닌게 증명됐다..[22] 국외는 둥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