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씨)

 



1. 甘 ( 감)
1.1. 회산 감씨
1.1.1. 항렬표(行列表)
2. 실존 인물
2.1. 역사적 인물
2.2. 중국
2.3. 한국
3. 가상 인물
4. 여담


1. 甘 ( 감)


중국과 한국의 성씨. 단, 한국의 감씨는 회산, 창원, 합포가 있으나 모두 창원을 뜻하는 말로 같은 뿌리이다.
감(甘)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5,998명으로 조사되었다.

1.1. 회산 감씨


시조는 중국 원나라 때의 감둥리로, 자는 양원(養元), 호는 연강(延岡)이다. 문제는 이 후손들 조차도 본인의 시조인 감둥리의 고려 귀부 이후의 이름인 감규는 알면서 시조의 원래 이름은 감둥리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게 함정. 호인 감연강에서 자신들이 잘못알고 붙인 호인 영강을 붙여 감둥리라는 이름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감영강이 시조의 이름으로 와전되어 언급되는 안습함을 찾아볼 수 있다.[1][2]
감둥리는 수나라 출신의 조상을 둔 원나라 사람[3] 으로 1351년 노국대장공주를 따라 한림학사로서 고려에 들어와 공민왕에게서 규(揆) 이름을 하사받아 이후에는 감규로 알려져 있다.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으나 각종 부정부패로, 후에는 천민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공민왕이 하사한 규(揆) 이름을 풀어보면 임금 왕(王)+ 북방 계(癸)가 합쳐진 것으로 북쪽의 왕으로 해석되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공민왕이 일개 학사에게 왕을 칭하는 규(揆)라는 이름을 하사하는 등 호의를 베풀어 그의 환심을 산 후 반원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부정부패가 드러나자 재산몰수 후 천민으로 강등되었다. 이를 보면 일개 한림학사 감둥리에게 규(揆) 라는 왕을 뜻하는 이름을 하사한 것은 공민왕의 계책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4] 이 과정에 감규는 규(揆) 이름을 도로 몰수당하고 본명 감둥리로 돌아갔다.
15세손 감수화(甘受和) 때까지 본관을 연릉으로 삼아오다가, 16세손 감철(甘喆)이 북벌을 중지시킨 공으로 금자광록대부에 오르고 회산군(檜山君)에 봉함받은 뒤로 본관을 회산으로 한다.[5]
회산 감씨의 주요 인물로 조선 인조 때의 무신 여일 감경인(汝一 甘景仁)이 있다.[6][7]
2000년 기준 국내에는 총 5,998명 정도 있는 희성이다. 발음, 표기에 따라서 강, 김씨와 헷갈릴 수도 있으니 주의.
다만 15세손 감수화(甘受和) 때까지 본관을 연릉으로 삼아오다가, 16세손 감철(甘喆)이 북벌을 중지시킨 공으로 금자광록대부에 오르고 회산군(檜山君)에 봉함받은 뒤로 본관을 회산으로 한다는 것은 조선왕조실록 및 다른 사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회산 감씨 문중의 족보의 내용을 바탕으로 위처럼 주장하는 것들로 족보 자체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역사적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 회산 감씨 문중에서는 시조 감규가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고 하지만 감규나 감둥리라는 인물이 연릉군에 봉해졌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연릉군(延陵君)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회산 감씨가 아닌 연안 이씨 문중의 이만원(李萬元)이다.[8] 조선시대 논공행상 법칙에 의하면 공을 세운 신하를 지역 +군(君)에 봉할수는 있지만 이미 내려졌다면 줄수없는데 이만원을 연릉군을 봉한 시기는 조선 숙종때이므로 시기가 맞지 않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어찌 해석하여 감둥리를 연릉군에 봉했다고 해도 감둥리는 공민왕이 부정부패로 벼슬을 박탈하고 천민으로 신분을 강등시켰으므로 본관을 연릉으로 삼는것은 어찌 가능할지 몰라도 천민으로 강등당하면서 연릉군이라는 작위가 당연히 박탈당했을텐데 감둥리를 연릉군이라고 칭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 16세손 감철(甘喆)이 북벌을 중지시킨 공으로 금자광록대부에 올랐다고 하는데 감둥리(감규)의 16세손이면 조선시대 이후나 가능한데 금자광록대부는 고려시대 벼슬로 고려시대 공민왕 생전에 이미 폐지되었다.[9] 애초에 감철이란 인물이 감둥리의 16세손이라면 조선 시대에 태어난 사람일텐데 북벌을 중지시켰다는 기록이나 그 부친인 15세손 감수화의 기록 자체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국가의 실록에 존재하지 않는 공신의 인명이나 그 당시는 폐지하여 존재하지 않았던 벼슬을 받는것은 불가능하다.
  • 16세손 감철(甘喆)이 북벌을 중지시킨 공으로 금자광록대부에 오르고 회산군(檜山君)에 봉함받은 뒤로 본관을 회산으로 한다고 하였는데 금자광록대부도 오르는게 불가능하지만 회산군(檜山君)에 봉함받는 것은 역모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이미 조선시대에 회산군이 존재하는데 왜 역모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면 바로 회산군은 성종의 다섯째 아들인 이염(李恬)이기 때문이다.[10]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회산군(檜山君)에 대한 기록이 있고 봉해졌다는 기록은 있으나 감철(甘喆)이 북벌을 중지시킨 공으로 금자광록대부에 오르고 회산군(檜山君)에 봉함받았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애초에 조선시대에 회산 감씨 문중에서 우리 집안 사람이 회산군에 봉해졌다고 했다면 역모죄로 일족이 멸족되었을 것이다. 실제 감철이 아닌 성종의 다섯째 아들이 회산군이라는 기록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 회산군 감철의 묘소는 충청도 공모산에 있었고 어제(御題)한 신도비가 무덕곡에 있었다고 하나 없어져 후손들이 세거지인 창원시 내리동에 제단과 신도비를 설치하고 매년 음력 4월15일 향사 한다고 하는데 정작 본인들이 금자광록대부에 오르고 회산군에 봉해졌다는 조상이 임금에게서 직접 하사받은 제문이 있는 신도비가 없어졌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에서 회산 감씨가 과연 온전한 회산 감씨인지 알길이 없다.[11] 더군다나 충청도에는 공모산이 존재하지 않으며 한국의 산 중에 공모산은 존재하지 않으며 무덕곡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지명이다. 즉 감철의 묘소가 있다고 주장하는 지명들이 존재하지 않는 지명들로 조선왕조실록 등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오로지 회산 감씨 문중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감씨들이 전하는 최근의 족보뿐이다. 사실상 족보의 날조로 보는게 타당할 것이다.
  • 감씨는 여러 본이 있으나 모두가 동원분파로 회산 감씨의 세거지명에 불과하다는 것이 통념이다. 회산군 감철의 묘소는 충청도 공모산에 있었고 어제(御題)한 신도비가 무덕곡에 있었다고 하나 없어져 후손들이 세거지인 창원시 내리동에 제단과 신도비를 설치하고 매년 음력 4월15일 향사 한다. 없어진 이유도 직계 후손들이 명맥이 끊기고 분파들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다시 제단과 신도비를 설치하고 향사하는 이유도 한국인 특유의 자신의 집안이 양반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족보에 대한 집착 때문 및 정통성 문제로 봐야한다.[12][13]

1.1.1. 항렬표(行列表)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43세
44세
45세
현(鉉)
태(泰)
口영(泳)
口식(植)
口주(柱)
상(相)
경(炅)
병(炳)
口병(炳)
口규(圭)
口은(垠)
동(東)
口희(熙)
채(埰)
口석(錫)
호(浩)
口근(根)
형(炯)

2. 실존 인물



2.1. 역사적 인물


  • 감철(甘喆)
  • 감경인(甘景仁)
  • 감영생(甘泳生) - 의열단 소속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 감익룡 - 독립운동가

2.2. 중국



2.3. 한국


  • 감강인 - 前 피겨 스케이팅 아이스 댄스 선수.
  • 감강찬 - 前 피겨 스케이팅 페어 선수.
  • 감사용 - 前 야구선수
  • 감상두 - 독립운동가
  • 감우성 - 배우
  • 감익룡 - 독립운동가
  • 감한솔[14] - 축구 선수

3. 가상 인물



4. 여담


이름을 가나다순으로 나열하면 가씨가 없다면 강씨를 제치고 '''높은 확률로 제일 앞자리에 오게 되는 성씨다.'''


[1] 다만 까페에는 시조의 이름이라며 감규라는 이름은 언급되고 있으나 시조의 본래 이름인 감둥리는 전혀 모르고 있는 듯 하다.[2] 그나마 감규는 말년에 천민으로 강등되면서 받았던 이름인 규(揆)도 도로 빼앗겼다.[3] 다만 중국 한족은 아니며 이민족으로 추정된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오나라의 유명 무장인 감녕이 원래 오 지역민이 아닌 이주민 출신의 해적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수나라의 전신이 북위의 선비족이 근간된 이민족 국가였다. 수나라 멸망 후 그 조상들이 북방으로 이주해 그 후손인 감둥리가 원나라의 벼슬을 한것으로 보인다.[4] 이것역시 해당 감영강 후손까페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데 시조의 치욕적인 기록이기 때문으로 보인다.[5] 감씨는 회산군에 봉해진 감철을 주요 중시조로 보고있다.[6] 임진왜란 이후 포로교환 등에 적극적 참여 등으로 그 공을 인정받아 사후 충훈부로부터 삼렬(三烈)이라는 사호(祠號)를 받고, 삼렬사에 봉안되었다[7] 다만 감경인 이후로 직계 후손의 맥은 끊겼고 회산 감씨에서 이후 과거시험 급제자를 배출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아 조선 중기 이후로 회산 감씨는 사실상 양반으로서는 몰락했다. 갑오개혁 후 회산 감씨 족보를 실제 회산 감씨가 아닌 사람들이 꾸몄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며 비단 회산 감씨뿐만 아닌 대부분의 중국계 성씨가 그런 의혹을 받고 있다.[8] 이만원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백춘(伯春), 호는 이우당(二憂堂). 이현(李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성징(李星徵)이고, 아버지는 이형(李泂)이며, 어머니는 최대년(崔大年)의 딸으로 이만원은 1700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고, 이어서 공조참판·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연릉군(延陵君)에 봉하여졌다. 1796년(정조 20) 청백리(淸白吏)에 뽑혔으며 공주의 부용당(芙蓉堂) 영당(影堂)에 제향되었다.[9] 광록대부는 고려시대의 정 2품 문산계로서 이후 1356년(공민왕 5년) 금자광록대부로 바뀌면서 종1품 상계가 되었으며, 1362년에 폐지되었다. 공민왕이 1375년도에 사망했고 노국대장공주와는 1949년도에 혼인을 했는데 감둥리는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고려에 왔는데 그렇다면 고려에 오고나서 1362년도에 폐지된 금자광록대부를 16세손 감철이 얻는게 과연 가능한가?[10] 본관은 전주(全州), 본명은 이염(李恬),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성종(成宗)의 다섯 째 아들로, 어머니는 숙의 홍씨(淑儀洪氏)이다. 중종 때 대신 김안로(金安老)가 임금에게 간언하는 것을 면전에서 꾸짖어 물리쳤다. 슬하에 아들이 없어 중종의 명에 의해 아우인 견성군(甄城君)의 둘째 아들 계산군(桂山君) 이수계(李壽誡)를 양자로 들였다. 묘는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11] 실제로 갑오개혁 후 많은 천민,상민,중인들이 앞다투어 양반 성씨 족보를 꾸몄다고 하는데 이미 조선 말기에 회산 감씨의 인구는 성씨의 특성상 극히 적었고 조선 후기에는 몰락한 양반이었다. 실제로 족보를 위작하는 이들 태반이 몰락한 양반 내지는 아예 대가 끊어진 성씨를 쓰는것이 허다했기에 현재 대한민국에서 족보를 따지는 가문을 비판적으로 봐야한다는 사학계의 논점이 있다.[12] 다만 회산 감씨 본관의 명맥은 끊어진지 기백년이기 때문에 세거지명의 분파들이 족보를 만든다고 하여도 제대로 된 족보로 인정받기는 힘들 것이다.[13] 본관이 사라져서 종친회가 남아 있을 수 없는데 종친회를 결성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사기인 셈으로 모임을 한다면 분파원끼리의 소규모 모임밖에 할 수 없다.[14] 중계 및 기사 등지에서 자주, 아니 거의 '김'한솔로 잘못 불리우며 전반 내내 김한솔로 부르던 중계진이 후반 중계 시작 전에 이를 정정하며 사과한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