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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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의 자화상으로 알려진 그림(좌)과 이명기가 그린 강세황 초상(우)
'''성명'''
강세황(姜世晃)
'''본관'''
진주 강씨[1]
'''호'''
표암(豹菴)
'''출생'''
1713년 7월 13일
조선 한성부 남산 남소동[2]
'''사망'''
1791년 2월 25일
조선 한성부 남산
1. 개요
2. 생애
3. 화가와 평론가로서의 삶
4. 그림


1. 개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화가.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광지(光之), 호는 표암(豹菴)이다.
아버지는 문안공 강현이다. 3남 6녀 중 막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김홍도의 스승이자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뛰어난 화가로만 알지만, 예조판서까지 지낸 문인이기도 하다.

2. 생애


1776년에 기로정시에서 갑과 1등(장원) 급제하고, 기로사에 뽑힌 뒤에는 예조판서까지 올랐다. 정조 때에는 천추부사로 북경으로 갔을 때, 많은 청나라 사람들이 강세황의 그림을 구하려 할 정도로 중국에까지 소문이 났다 한다.
강세황은 정선의 화풍을 이었고, 다른 많은 화가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표암집이 있다.

3. 화가와 평론가로서의 삶


문인 출신이지만 글씨와 서화에 능해 한국화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주로 그림을 그리거나 다른 사람의 그림을 평가하는 역할을 했다. 진경산수화, 풍속화 모두 강세황이 유행시켰고, 조선에 서양식 화법을 들여오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김홍도와 신위의 스승이기도 하였으니 조선의 그림을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그림


주로 문인화, 인물화, 글씨 중에서도 전서예서, 산수화사군자 등을 위주로 그렸는데, 장르 상관없이 그냥 전체적으로 다 잘 그렸다.
  • 송도기행첩 중 영통동구도(일명 영통골 입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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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지금까지의 동양화와 다르게 서양화 기법인 명암법이 사용된 그림이다.
  • 강세황의 자화상
문서 상단 좌측에 있는 그림인데, 이 그림 사실 김홍도가 그린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동천 중국 랴오닝성 박물관 특빙연구원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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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은 이 그림의 소나무 부분만 그렸다.

[1] 진주 강씨 은열공파로 금자흥록대부 병부상서 겸 태자태사 강민첨의 후손이다.[2]서울특별시 중구 쌍림동·장충동 1가·장충동 2가·광희동 1가·광희동 2가·을지로 6가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