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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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난국죽
1. 개요
2. 시초
3. 목록
4. 사군자의 상징성


1. 개요



유교문화권에서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네 가지의 식물을 일컫는 개념.
각 한자를 따서 '''매난국죽(梅蘭菊竹)'''이라고도 부른다.
많은 꽃과 여러 식물들중에 이들을 선택해서 학식과 인품, 덕이 높은 사람에 비유하여 그 사람을 '군자'라 불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 네가지 식물들의 아름다움을 높이 산 까닭도 있지만, 각각 높은 기상과 품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지조와 절개를 군자의 가장 큰 덕목으로 여기었던 유교사회에서는 어떠한 고난과 악조건 속에서도 꿋꿋이 꽃을 피우는 사군자가 선비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즉 사군자를 통해 변함없는 신념과 굽히지 않는 마음을 나타내고자 하였으며, 고아하고 탈속한 경지를 추구하고자 했기에, 많은 시조와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중 하나 이기도 하다.
대만의 지폐 권종당 하나씩 들어가 있다. 100위안 지폐에 매화, 200위안에 난초, 500위안에 대나무, 1000위안에 국화가 들어가 있다.

2. 시초


사군자의 발생과 전개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사군자’는 중국의 회화에서 성립된 화목(佛畫)이다. 최초에는 회화에 쓰이는 이 식물들을 가르키는것이 아닌 중국전국시대 인물들을 높이 받들고 기리기 위해 사군자라는 호칭으로 불렀던 것(전국사군자)이 '사군자'라는 개념의 성립의 시초 정도이고 지금은 일반적으로 문인 묵화의 소재로 알려져 있는것이 정설. 최초로 대나무가 「시경」에 나타난 것을 비롯하여 그림의 소재로도 제일 먼저 기록되고 있으며, 대나무와 함께 매, 난, 국은 화조화의 일부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북송(960-1126년) 때에 와서 여러 가지 고사나 시문을 통해 이들 네 식물이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어, 차츰 문인화의 소재로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상징성에서뿐만 아니라 서예의 기법을 그대로 적용시켜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사대부 화가들에게 매력적인 화목으로 등장하였다.

남송(1127-1279년) 말기부터 원대(1279-1368년) 초기[1]에는 몽고족의 지배하에서 나라를 잃고 은둔생활을 하는 한족 문인들 사이에,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충성심과 불굴의 정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크게 유행되어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정사초의 난초로, 흙이 없는 난초 포기만을 그려 몽고족에게 국토를 빼앗긴 설움을 표현하였다.

그 뒤 명대(1368-1644년)에 들어와서 이들 매, 난, 국, 죽 특유의 장점을 유교적 덕목과 관련시켜 칭송하는 문화적 전통이 수립되어서 사군자라는 총칭이 생겨난 것이다.우리나라에서도 사군자의 품격이 높이 평가되어 고려시대부터 시문과 회화, 공예품 등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특히 회화에서는 고려시대에 송나라와 원나라 회화의 영향으로 왕공사대부 사이에 묵죽, 묵란, 묵매가 널리 그려졌다. 조선초기에도 사군자가 문인들 사이에 계속 사랑을 받아 왔고 조선 중기부터 독자적인 양상을 수립, 후기에 와서는 질과 양적인 면에서 모두 괄목한 만한 업적을 남기고 있다.

비록 사군자라는 개념이 회화, 그 중에서도 문인화의 화목으로 중국에서 유입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범주를 넘어서서 우리 민족의 기질과심성에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받아들여지는 동양 사상의 일맥으로서 파악되어진 것이다.
따라서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는 우리의 선조들에 의해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사랑을 받아 왔으며, 여러 예술 분야에서 주된 소재로 등장하고있다. 위에서도 설명하였지만 이는 꽃, 식물 자체가 지닌 순수한 아름다움보다는 그것이 지닌 상징적 의미, 즉 지조와 절개, 고아함과 품격을 높이 산 것이 맞다.

3. 목록



3.1. 매화


'''이른 봄 눈이 채 녹기도 전에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식물'''

매화나무('''梅'''). 서리와 눈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 땅 위에 고운 꽃을 피워 맑은 향기를 뿜어내는 꽃으로써 이 매화는 백화가 미처 피기 전에 제일 먼저 피어나므로 ‘화형’ 또는 ‘화괴’라는 별칭으로 불려져 왔다. 또한 봄을 가장 먼저 전해 준다고 하여 일지춘색, 철간선춘, 한향철간이라 하였고, 춘한 속에서 홀로 핀 매화의 고고한 자태는 선비의 곧은 지조와 절개로 즐겨 비유되고 있다.
이처럼 맑은 향기와 아울러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 매화의 특징이다. 선비들은 매화의 곧고 맑은 성품을 노래한 글을 지어 일편단심으로 사무하는 임에게 자신의 간절한 심정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이 때 임은 나라 또는 임금일 수도 있고 자신의 굳은 뜻일 수도 있다. 특히 청초한 자태와 향기로 인해 매화는 '''아름다운 여인'''에 즐겨 비유되었다. 옛 기생들의 이름에 유독 매화 ‘매’자가 많이 사용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매화가 아름다움과 함께 정절을 상징하였으므로, 여인들은 매화와 대나무를 함께 시문한 비녀인 '매죽잠'을 즐겨 착용하였다.
이와 같은 매화의 상징성으로 인해 눈이 덮인 매화나무 가지에 처음 피는 꽃을 찾아 나서는 심매가 문인과 풍류객들의 연중행사로 정착되기도 하였다. 범석호는 「매보」에서 천하에 으뜸가는 꽃이라 칭송하였고, 소동파는 얼음 같은 맑은 혼과 구슬처럼 깨끗한 골격이라 평하였다. 강희안은 「양화소록」의 화목9등품론에서 국화, 대나무, 연꽃과 함께 1등으로 분류하면서 높고 뛰어난 운치를 취할만하다고 하였으며, 같은 책의 화품평론에서 강산의 정신이 깃들고 태고의 모습이 드러난 꽃이라 표현하였다.

우리나라의 고시조에 나타나고 있는 꽃 중에서 매화는 도화[2]와 함께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로 알려져 있다. 시조에서 나타나고 있는매화는 우리 선인들의 드높은 기개와 굽힐 줄 모르는 지조의 상징으로 애창되어 왔고, 다 썩은 고목에서도 봄기운이 돌면 어김없이 맑은 꽃을 피우는 신의의 벗으로 노래되어 왔다.

백설이 자자진 곳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물어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 백설이 잦아진 골에 / 이색

이색의 이 시에서는 추이하는 계절과 더불어 걷잡지 못할 애상에 잠긴 마음으로 매화를 찾는 지사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매화는 과 함께 자주 등장하고 있다. 고고한 달빛 아래 청초한 자태와 맑은 향기를 내뿜는 매화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자연적인 조화와 운치를 한껏 느낄 수 있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일생을 독신으로 매화와 더불어 은거생활을 한 송나라 시인 임포 이후로 매화와 달의 짝으로 더욱 애호되고 있다. 실로 달과 매화는 예로부터 은일처사들의 아낌을 받아 온 고아함의 화신이요, 정절의 상징인 자연이었다.
달을 벗한 매화는 그림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윤리문자도에는 '수양매월 이제청절(首陽梅月 夷濟淸節)'이라는 은나라의 은일처사 백이숙제가 수양산에서 달과 매화를 벗삼아 은둔의 일생을 보냈다는 고사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한편 우리나라의 매화 그림, 묵매화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은 매화의 꽃송이가 중국의 그림처럼 '''많지 않다는 것'''이다. 문화재 전문위원 허영환 선생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아마 우리나라 사람이 성긴 것, 어리숙한 것, 완벽하지 않은 것, 기교를 부리지 않은 것 등을 좋아한 성격 탓’인것 같기도 하고, ‘한국미술의 바탕을 흐르는 자연주의의 발로’인 것 같기도 하다고 보았다. 이에 반하여 중국의 민족성은 빽빽한 것, 완전무결한것, 아주 예쁜 것, 되도록 큰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의 묵매화가들이 어지럽게 줄기와 가지를 그리고 수십, 수백 꽃송이를 화면 가득히 그리면서 웅장, 완벽, 섬세를 추구할 때, 우리나라의 묵매화가들은 그러한 화법과 화풍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럽고 자연스럽게, 무기교의 기교라는 한국미술의 기조를 지키면서 여백의 미와 단순의 미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는 비록 묵매화가 사군자의 하나로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민족성에 맞게 완전히 소화, 재창조되어 한 단계 높은 미적 수준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3.2. 난초


'''깊은 산중에서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트리는 식물'''

난초('''蘭'''). 서양란이면 모를까 동양란은 상당히 은은한 향기가 난다. 그 은은한 향으로 상대를 교화시키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난은 비록 한 송이가 피기는 하나 그 향기는 실내에 가득 차서 사람을 감싸고 열흘이 되어도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옛날 부유한 집안의 사람들은 난을 향조로 삼았다고 한다. 공자는 난의 향기를 왕자의 향이라 하였으며 특히 동양란은 서양란처럼 색채가 화려하지 않고 꽃도 작으나 담백한 색과 은근한 향기가 그 생명이다. 따라서 난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하는 것은 향이며 고귀함이다. 깊은 산중에 홀로 피어 고아한 자태로 은은한 향을 내뿜는 난은 지조 높은 선비와 절개 있는 여인에 비유되고 있다.

예로부터 '유인풍치정여란(幽人風致貞如蘭)', '난화사미인(蘭花似美人)', '유란여정녀(幽蘭如貞女)'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난은 유인, 미인, 정녀 등으로 비유되어 왕비의 침실을 난전, 미인의 침실을 난방이라 하였으며 또한 난의 독특한 향기를 취하여 유곡가인, 미인향, 군자향, 공곡유향, 군자가패, 왕자지향 등으로 일컫기도 하였으며, 난유유자풍운, 난령인수계라 하면서 난의 고아함을 칭송하였다. 난의 향과 고귀함에 관한 찬미는 기원전 공자시대에서부터 기록이 나타나고 있지만, 충성심과 절개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 굴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의 자서전적인 장편 서사시 「이소」에서 그가 난을 즐겨 넓은 지역에 가득 심었다고 함으로써 그의 인품과 연관시킨 난초의 상징성이 확립되었다고 한다.
이제현은 「역옹패설」에서 난을 표현하기를

일찍이 여항에 객으로 머물러 있었을 때, 어떤 사람이 난을 분에 심어서 선물로 주었다.

이것을 서안 위에 놓아두었는데, 한참 손님을 접대하고 일을 처리하는 동안에는

그 난이 향기로운 줄 몰랐다가 밤이 깊어 고요히 않았노라니 달은 창 앞에 휘영청 밝고

그 향기가 코를 찌르는 듯하여 맑고 그윽한 향기를 사랑할 만하고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음을 느꼈다. - 역옹패설 / 이제현

고려말기에 이거인은 난을 재배한 것으로 유명하고, 조선초의 강희안은 우리나라 자생란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사람으로 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난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말기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묵란화로는 조선 초기에 강세황의 「필란도」가 있고, 김정희를 비롯하여 이하응, 김응원, 민영익 등은 묵란화의 대가들이다. 난에 관한 시를 남긴 이로는 김부식, 김극기, 이규보, 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숭인, 최경찬, 신위 등이 있다. 의외로 난을 그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한다. 사군자를 계절 순서로 말하면 매, 난, 국, 죽이지만 '''사군자화를 배울 때는 난, 국, 매, 죽의 순으로 한다.''' 그것은 난의 생김새가 한자의 서체와 닮은 점이 많아 서화동원의 사상과 걸맞기 때문인 듯하다. 묵죽화가 직선미를, 묵매화가 굴곡미를 보여준다면 묵란화는 곡선미를 보여주는 수묵화이다.
난초그림의 대명사라 불릴 수 있는 완당 김정희의 난화론은 독특하다. 그는 글씨의 정신과 그림의 정신을 구별하지 않는다. “난초 그리는 법은예사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의 향기와 서권의 기미가 있은 연후에 얻게 된다. 또 난초그림의 법은 화법이라는 것을 가장 꺼리니 만일에화법이 있으면 한 붓도 그리지 않는 것이 가하다”라고 하였다. 이는 심의를 존중하고 품격을 높이 보는 문인화의 묘미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라 할수 있다. 또한 청나라의 왕지원은, “난의 성격은 천연고결하여 마치 대가의 주부나 명문의 열녀 같아서 감히 범접할 수 없다. 만약 속필로 그려 그청고아치를 떨어뜨린다면 차마 볼 수 없을 것이다”라 하였다.
한편, 정몽주의 초명이 몽란이었는데, 이는 어머니가 난분을 깨뜨린 태몽을 꾸고 낳았기 때문이라는 기록이 있다. 난은 또한 자손의 번창과 관련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 경기도 지방에서는 난초꽃이 번창하면 그 집에 식구가 는다는 속신이 전하여지고, 충청북도 지방에서는 꿈에 난초가 대나무 위에 나면 자손이 번창하고 난초꽃이 피면 미인을 낳는다는 속신이 전하여진다.

3.3. 국화


'''늦가을에 첫 추위와 서리를 이겨내며 꽃을 피우는 식물'''

국화('''菊'''). 국화는 뭇 꽃들이 다투어 피는 봄, 여름을 지나 늦가을에 서리를 맞으며 홀로 피어난다. 이러한 모습에서 국화는 절개를 지키며 속세를 떠나 고고하게 살아가는 은자에 즐겨 비유되었다. 「종회부(鍾會賦)」에서는 국화를 다음과 같이 말하여 그 소중히 여김을 알 수 있게 한다.
국화에는 다섯 가지 미(美)가 있으니, 동그란 꽃송이가 높다랗게 달려 있음은 천극을 모양한 것이요, 섞임이 없이 순수한 황색은 땅의 빛깔이요, 일찍 심어 늦게 핌은 군자의 덕이요, 서리를 이겨 뚫고 꽃을 피움은 경직한 기상이요, 술잔에 동동 떠 있음은 신선의 음식이라.
예로부터 국화는 오상고절이라 일컬어졌으며 송나라의 주돈이는 “국화는 은일이요, 모란은 부귀요, 연꽃은 군자”라 하였다. 이처럼 국화는 군자가운데서도 은둔하는 선비의 이미지에 가장 잘 부합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범석호는 「국보」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산림에 묻혀 사는 사람들이 국화를 군자에다 비유하여 말하기를, 가을이 되면 모든 초목이 시들고 죽는데 국화만은 홀로 싱싱하게 꽃을 피워 풍상앞에 거만스럽게 버티고 서 있다. 그 품격은 마치 산인과 일사가 고결한 지조를 품고 비록 적막하고 황량한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오직 도를 즐기어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국화가 이와 같은 은일지사의 상징으로 위치를 굳힌 것은 진나라의 도연명에 의해서였다. 도연명은 한때 관직에 있었으나 관리란 직책이 생리에맞지 않아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왔다. 이 때 지은 「귀거래사」에서 집에 와보니 폐허가 된 골목에 아직도 소나무와 국화가 그대로 있음을 반기고 있다. 그 외에도 국화심기를 좋아하고 국화를 읊은 많은 시를 남겨, 중국 역사상 가장 전형적인 은사 도연명과 국화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의 시 「음주」는 전원생활을 주제로 하여 탈속한 설비의 풍류세계를 나타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 중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를 꺾어 들고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라는 대목의 시정은 그의 도가적 모습을 나타내는 데 즐겨 인용되며, 회화에서도 이 부분을 화의로 취택하게 되었다.음주시 20편
특히 조선시대의 시가문학은 당나라와 송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당과 송의 문학은 도연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자연스럽게 도연명의 시취에 빠져들어 이와 연관된 그림을 많이 남겼다. 정선의 「동리채국도」와 「유연견남산도」에는 한 선비가 국화를 꺾어 옆에 놓거나 들고 먼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반면, 이한복은 상황의 설명이나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국화 화분을 그린 정물화 형식의 그림을 남기고 있는데, 화제를 「동리가경」으로 한 것을 볼 때 국화와 관련된 도연명의 시취를 인용하여 그린 것임을 알게 해준다. 국화는 ‘국유걸사지풍’이라 하여 호걸의 풍모를 가졌다고 표현되며, 일명 절화, 여절, 여화, 여경, 갱생, 음성 등이라고 한다. 「양화소록」에서도 높고 뛰어난 운치를 취하여 단연 1등, 1품으로 꼽고 있다. 국화의 색깔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예로부터 국유황화(菊有黃華)라 하여 '''황국'''을 으뜸으로 치고 있다. 이처럼 국화의 높은 기개를 사랑하여 회화에서는 필묵으로, 문학에서는 글로써 그 불굴의 기상을 표현하였다.
국화는 특히 고려자기이조백자, 나전칠기 등 도예품과 공예품에 문양으로써 많이 나타나고 있다. 고려자기 등에 나타나는 국화문이 비록 회화적인 면보다는 도안화된 양상을 띠고 있지만, 한국의 정취를 물씬 나타내고 있는 야국의 그림은 고려청자의 푸른 바탕에 신비스러운 조화를 이루어 그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 주고 있다. 한편, 국화는 노장사상에 의하여 신선의 초화라 일컬어졌다. 더욱이 「포박자」의 내편에 기록하기를, “감곡수에는 국화의 물이 떨어져 자액이 되어 있어 이 물을 마시면 장수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국화가 불로불사의 영초라는 사상이 고려시대에도 충만하고 있었으므로 청자, 술잔, 술병, 거울 등에 국화문이 많이 쓰여졌다.

이처럼 오랜 옛날부터 국화에 대한 신비한 효능이 전래되었고, 「신농서」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국화는 성품을 기르는 가장 좋은 약으로 능히 장수하고 몸을 가볍게 한다.
남양사람들은 국화의 담수를 마시고 다 백세를 살았다고 한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는 음력 9월 9일의 중양절국화주를 가지고 등고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국화주는 예로부터 궁중의 축하주로 애용되었고, 민간에서는 9월 9일에 국화주를 먹으면 무병하고 장수한다 하여 즐겨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국화는 선조들이 남긴 시조에서 도화, 매화와 함께 자주 제재로 등장하고 있다. 아래의 시는 가장 널리 회자되고 있는 이정보송순의 작품이다.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춘풍 다 지내고(국화야 너는 어찌하여 따뜻한 봄철이 다 지나간 후에야)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나니(이렇게 추운 계절에 너 홀로 피어 있느냐?)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아마도 오상고절[3]

은 너 뿐인가 하노라.)

- 국화야 너는 어이 / 이정보

풍상이 섯거친 날에 갓 피온 황국화를(서리와 바람이 섞어 친 날에 막 피워 온 노란 국화를)

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좋은 화분에 가득 담아 (내가 일하고 있는)옥당(홍문관)에 보내주시니)

도리야 꽃인냥 마라 님의 뜻을 알괘라.(복숭아꽃과 오얏꽃아 너희들은 꽃이라고 마라 임(임금)께서 이꽃을 보내주신 뜻을 알겠구나.)

- 풍상이 섯거친 날에 / 송순

고려가요 「동동」 9월령에는
9월 9일애 아으 약이라 먹논 황화고지 안해 드니
새셔가만 흐얘라 아으 동동다리
(아아, 약이라고 먹는 노란 국화꽃이
집 안에 피니 초가집이 고요하구나. 아으 동동다리 )
라고 하였으니, 고려 때 이미 중양절에 국화주를 담가 먹었고, 그것을 약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양지방의 「각설이타령」에도 “9월이라 9일날에 국화주가 좋을씨고”라는 구절이 있고, 경상북도 성주지방의 민요에도 “뒷동산 쳐다보니/국화꽃이 피었고나/아금자금 꺽어내여/술을 하여 돌아보니/친구하나 썩 나서네”라는 구절이 있다.

3.4. 대나무


''' 모든 식물이 잎을 떨어뜨린 추운 겨울에도 푸르고 싱싱한 잎을 간직하는 식물 '''

대나무('''竹'''). 사군자 중 제일 먼저 시와 그림에 나타난 대나무는 사시사철 푸르고 곧게 자라는 성질로 인하여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왔다. 강희안은 꽃의 품계를 정하면서 높고 뛰어난 운치를 취하여 매화, 국화, 연꽃과 함께 대나무를 1등으로 삼았다.
대나무의 높은 품격과 강인한 아름다움, 실용성은 일찍부터 예술과 생활 양면에서 선조들의 많은 아낌을 받아 왔다. 대는 소나무와 함께 난세에서 자신의 뜻과 절개를 굽히지 않고 지조를 지키는 지사, 군자의 기상에 가장 많이 비유되는 상징물로 나타내고 있다. ‘대쪽같은 사람’이라는 말은대를 쪼갠 듯이 곧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곧 불의나 부정과는 일체 타협하지 않는 지조 있는 사람을 말한다.
윤선도는 오우가(五友歌) 에서 다음과 같이 대나무를 노래하였다.

'''나모도 아닌거시 플도 아닌거시'''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것이,''')

'''곳기는 뉘시기며 속은 어이 뷔연난다''' ('''곧게 자라기는 누가 시켰으며 또 속은 어찌하여 비어 있는가?''')

'''뎌러코 사철예프르니 그를 됴하하노라''' ('''저렇고도 사철 늘 푸르니 그것을 좋아하노라.''') - 오우가(五友歌) 중 / 윤선도

이는 대나무의 성격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시경」의 위풍에서 위나라 무공의 높은 덕과 학문, 인품을 대나무의 고아한 모습에 비유하여 칭송한 시가 있는데, 이것이 대나무가 군자로 지칭된 '''최초의 기록'''이다.

기수 저 너머를 보라.

푸른 대나무가 청초하고 무성하니

고아한 군자가 바로 거기 있도다.

깎고 갈아낸 듯

쪼고 다듬은 듯

정중하고 위엄 있는 모습이여,

빛나고 뛰어난 모습이여.

고아한 군자가 바로 저기 있도다.

결코 잊지 못할 모습이여. - 시경

선비들의 풍류로 유명한 육조시대는 대나무와 군자의 사이가 더욱 밀착되는 시대이다. 죽림칠현이 대나무 숲을 은거지로 삼은 것이든지 왕휘지가 대나무를 가리켜 “차군없이 어찌 하루라도 지낼 수 있느냐”고 한 일화들이 이를 입증하여 준다. 특히 죽림칠현의 고사에서 유래하여, 그 이후로 대밭은 문학작품 등에서 은거지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삼국사기」등에 나타나고 있는 여러 설화와, 전설 등에서도 대나무는 신비한 영물로 등장하여, 우리 민족이 오랜 옛날부터 대나무의 가치를 높이 산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때 이미 삼죽, 향삼죽 등 대로 만든 악기가 있었던 것 같다. 「삼국사기」중 미추왕과 죽엽군의 내용을 보면, 신라 제14대 유리왕 때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해 왔는데 신라군이 당해내지 못하였다. 이 때 귀에 댓잎을 꽂은 이상한 군사들이 나타나 신라군을 도와서 적을 물리쳤는데, 적이 물러가자 그 군사들은 간 곳이 없고 미추왕의 능 앞에 댓잎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에 미추왕이 도운 것인 줄 알고 그 능호를 죽현릉이라고 하였다 한다.

「만파식적」은 신기한 피리에 대한 설화이다. 신라 신문왕 때 동해에 작은 산이 하나 떠내려 왔는데, 그 산에는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쳐지는 신기한 대나무가 있었다. 신문왕은 용의 계시에 따라 그 대를 베어 피리를 만들었는데, 나라에 근심이 생길 때마다 그 피리를 불면 평온해졌다. 이 피리를 만 가지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라 해서 만파식적이라 하였다.구전설화로는 엄동설한에 부모가 죽순을 먹고 싶다고 하므로 대나무 밭으로 달려가 울면서 애원하니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죽순이 솟아올라 그것을 잘라서 부모를 공양한 효자의 이야기가 전라북도 완주군과 경기도 강화군 등에 등재되었다.

대나무는 주기적으로 꽃을 피우는데 그 간격은 종류에 따라 5년에서 60년 주기까지 다양하다. 대개 꽃이 피면 모족은 말라죽게 되고, 대밭은 망한다. 이는 개화로 인하여 땅속 줄기의 양분이 소모되어 다음해에 발육되어야 할 죽아의 '''약 90%가 썩어 버리기 때문이다.''' 나머지 10%만이 회복죽이 되므로 개화 후에는 죽림을 갱신하여야 한다. 이에 따라 대밭이 망하면 전쟁이 일어날 징조라 하여 불길하게 생각하는 속신이 있으며, 꿈에죽순을 보면 자식이 많아진다는 속신은 죽순이 한꺼번에 많이 나고 쑥쑥 잘 자라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회화에서는 대나무가 독립된 화목으로 등장하기 이전에 송죽도, 죽석도 등의 배합, 또는 화조화의 일부로 나타났으며, 그 뒤 대의 상징성과기법의 특수성 등으로 인해 문인 수묵화의 소재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때로 달방에 창호지에 비친 대나무 그림자를 그대로 베껴서 묵죽을 그린낭만적인 화법을 쓰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도화서의 화원을 뽑는 시험에 관한 「경국대전」의 기록을 보면, 시험과목 중 대나무 그림이 제일 점수를 많이 받을 수 있는 과목으로되어 있어 산수화나 인물화보다 더 중요시된 것을 알 수 있다.또한 고려 상감창자에 새겨진 문양에는 국화문과 함께 죽문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도자기의 대나무 그림은 대개 주악선인 등의 인물과 연꽃, 국화, 매화, 학, 새 등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자연의 경관을 이루고 있고, 때로 흑상감한대나무와 백상감한 군학을 같이 구성하여 매우 평화로운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18세기경의 주병류에서는 대체로 대나무 그림만을 주제로 시문하여, 당시 유행한 사군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라 짐작된다.

이처럼 대나무는 그 상징성과 고아함, 실용성 등으로 인해 예술분야뿐만 아니라 일상생활과 설화 등에서도 교훈적, 길상적 의미를 간직한 주된소재로 아낌을 받아 왔다.

4. 사군자의 상징성


이들 네 식물은 각자 높은 품격과 지조를 가진 뚜렷한 자연물로 인식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개별꽃이 갖는 특성과 아름다움보다는 하나의 커다란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다. 즉 꽃잎, 잎사귀, 줄기, 뿌리 등으로 이루어진 각 식물의 구체적이고 독립적인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이들이 공통된특성으로 갖는 의미를 취하여 사군자라는 이미지가 형성된 것이다.

옛사람들이 이들을 사군자라 하여 사랑하게 된 것은 어렵고 험난한 환경 속에서 뜻을 굽히지 않고 더욱 꿋꿋하고 아름답게 서 있는 그 성품을 높이 산 것이다. 선비들이 이들을 보며 스스로의 인격을 함양하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였다. 따라서 시와 그림으로 그리고 실제로 꽃을 가꾸며 늘 곁에 두고 그 뜻을 새기고자 하였다. 은일지사들은 사람과 교류하지 않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러한 뜻있는 자연물로서 벗을 삼았으며, 이름 높은 지사들이 이들을 시와 그림으로 노래한 작품과 일화들은 후대의 선비들에게 영향을 미쳐 더욱 사군자를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사군자들은 각각 매화의 운치, 난초의 향기, 국화의 윤택한 기운, 대나무의 청아함이 없으면 역시 군자라 할 수 없다. 매화는 선비의 아취를 지니고, 난초는 제왕같고, 국화는 호걸과 같은 풍치를 지니고, 대나무는 대장부의 기백을 지녔다. 또한 사군자를 벗에 비유하여 봄에 피는 매화를 고우(古友)[4], 섣달에 피는 매화를 기우(奇友)[5]라 하였으며, 난을 방우(芳友)[6], 국화를 일우(溢友)[7] 또는 가우(佳友)[8], 대나무를 청우(淸友)[9]라 하여 차군이라 불렀다. 그리고 맑음과 고아함을 취하여 매, 죽을 쌍청 또는 2아, 추위를 견디는 인내를 취하여 매, 죽, 송을 세한삼우라 하였다. 매죽, 난죽, 매국, 국죽, 세한삼우 등이 배합을 이루어 그림, 문양, 시 등에서 즐겨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연년세세 영구불변하는 우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외에도 사군자끼리의 배합뿐만 아니라 상징성이 유사한 소나무, , 연꽃, , , 등과 함께 어우러지기도 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고시조에 자주 등장하는 정다운 짝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사군자를 중심으로 살펴볼 때 국화에는 술과 벗이 짝하고, 매화에는 달이 가장 즐겨 짝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주된 소재에 가장 어울리는 짝을 더함으로써 시적 운치를 높이고 주제를 더 깊게 해주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한편 사군자의 그림은 시, 서와 함께 전인격을 투영하고 있다고 믿어, 문인 사대부들 사이에 더욱 환영받는 소재가 되었다. 그림의 형태나 기법이 간단할수록 그 소재 자체에 부여하는 상징적 의미가 더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이는 사군자화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그 꽃과 식물의 정신을 나타내야 하므로 그리는 이의 인품과 정신이 중요하다고 본 것과 맥이 통하는 것이다.


[1] 한국사로 비유하면 고려 중기~말기 사이[2] 복숭아꽃[3] 매서운 서리를 이겨내는 꿋꿋하고 높은 절개[4] 오랜 벗[5] 진기한 벗[6] 꽃다운 벗[7] 뛰어난 벗[8] 아름다운 벗[9] 맑은 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