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원(야구선수)

 

'''이름'''
강태원
'''생년월일'''
1971년 5월 15일 (53세)
'''출신지'''
전라남도 순천시
'''학력'''
해남옥동초-화순중-순천상고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 입단'''
1989년 고졸 연고 자유계약
'''소속 팀'''
'''해태-KIA 타이거즈 (1989~2001)'''
'''프런트'''
KIA 타이거즈 스카우트 (2002~2009)
삼성 라이온즈 스카우트 (2010~2016)
kt wiz 스카우트 (2017)
'''지도자'''
전주고등학교 코치 (2017)
광주동성중학교 코치 (2018)
세한대학교 코치 (2019)
덕수고등학교 코치 (2020~)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1'''
'''1993'''
<color=#373a3c> '''1996'''
<color=#373a3c> '''1997'''
1. 개요
2. 프로 시절
3. 투구 패턴
4. 여담


1. 개요


해태 타이거즈의 좌완투수.
해태 타이거즈에서 희귀한 왼손잡이로 주로 마당쇠로 전천후 등판하며 활약을 했다. 별명은 쌀봉이.[1]

2. 프로 시절


순천상고를 졸업한 뒤[2] 1989년에 입단한 후 2군에서 꾸준히 실력을 키워 오다,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1군 무대에서 활약했다. 최고 구속이 135km/h로 야구 선수로서는 다소 불리했으나, 타자와의 수싸움에[3] 진가를 발휘하며 자리를 잡아갔던 것. 1995년부터는 선수 달력에서도 제법 크게 사진이 실리는 등 비중이 부쩍부쩍 늘어났다. 2001년 은퇴할 때까지 '왕조'의 전성기와 쇠퇴기를 함께한 선수.
통산 성적은 16승 24패 6세이브 6홀드 평균자책점 4.39. 커리어하이는 1995년. 십년을 넘게 뛰었음에도 차명석이나 방수원처럼 홀드가 늦게 집계되어 성적에서 꽤 손해를 본 케이스. 여담으로 김응용 감독 참외 사건의 원인 제공자이기도 하다.

3. 투구 패턴


인터벌이 역시 느린 공 투수였던 당시 삼성의 성준과 맞먹는 '공포의 투수'이기도 하다. 한동안 농담소재로 곧잘 쓰였던 '''박한이 vs. 성준'''은 성준이 1999년에 은퇴한 후 박한이가 입단하면서 상상으로 남았지만, '''강태원 vs. 성준''' 두 '라이벌' 간의 대결은 이미 수 차례 펼쳐진 바 있다.
구종이 별로 많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LG 트윈스에서 이적해 온 이병훈[4] "구종도 많지 않으면서 왜 그리 포수 사인을 자주 거부하느냐?"고 묻자, "그렇게 하면 '''상대가 내 구종을 쉽게 짐작못할 것'''"이라 답했다고 한다.[5]

4. 여담


  • 표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던데다, 얼굴까지 +5살 ~ +10살의 노안이었기 때문에, 이따금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사우나에서 김성한 전 감독이 "나이도 젊은 놈이 그라운드에서 땀을 빼야지 왜 여기서 땀을 빼냐?"고 꾸짖자, 그걸 들은 나이 지긋한 분이 "왜 나이든 사람한테 함부로 말하냐"고 오히려 김성한 감독을 나무랐다고.[6]
  • 1999년 7월 25일 이승엽의 시즌 42호 홈런을 헌납한 적이 있다. 뉴스기사 전년도 타이론 우즈가 수립했던 시즌 최다 홈런의 타이 기록이었으며, 이후 이승엽은 홈런을 12개 더 치면서 시즌 최다 홈런을 경신한다. 여담으로 장외 홈런이었다고. 그리고 그 시즌 이승엽의 54호 홈런도 헌납했다.
[1] 밥을 많이 먹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2] 당시 동기생이 조웅천이었고, 둘 다 팀의 간판 미들맨이었던지라 현대와 해태가 맞붙은 1996년 한국시리즈홀드 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된 2000년에 조웅천과 강태원을 라이벌로 엮은 기사가 종종 나오곤 했다.[3] 상단의 사진에서 보듯 표정 변화가 별로 없다. 1류 도박사처럼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타자들과 머리 싸움을 할 수 있는 선수였다는 것.[4] 이 무렵이 김응용 감독이 "타자로 대성할 선수"라며 이 선수에게 '''애정어린 갈굼'''을 시전하던 시기. 나중의 갈등과는 별개로 "대성할 수 있었는데, 술이 그를 망치고 말았다."며 인터뷰에서 안타까움을 표시한 바 있다.[5] 이병훈이 해설가로 활동할 무렵 이 일화를 얘기하며, "우리 마누라도 강태원 구종이 OO개인거 다 알아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6] 강태원이 1971년 5월생이고 김성한 감독이 2001년에 취임했으니, 이제 갓 서른 넘겼을 때 생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