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코 후지모리
Keiko Sofía Fujimori Higuchi, 1975.5.25 ~
1. 개요
페루의 정치인으로 현재 민중의 힘의 대표를 지내고 있다.
2. 생애
1975년 5월 25일 리마에서 태어났다. 알려졌듯이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딸로, 혈통은 당연히 일본계이다. 이를 감안해 이 문서도 일본어 발음으로 만들었는데, 원래 스페인어 발음은 "케이코 푸히모리"이다
당초에는 그냥 특별할 이유가 없는, 일개의 동양인의 딸 정도에 그칠 뿐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면서 영애가 되면서 단숨에 인지도가 높아졌고, 거기다가 부친이 독재자로 타락하면서 왕국의 공주에 가까운 이미지로 굳어졌다. 1994년 부친이 이혼하면서 어머니를 대신해 영부인이 되었고, 2000년까지 그 직을 지냈다. 이 사이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유학 중이던 2004년 마크 빌라넬라라는 현지인을 만났고, 둘은 교제하다가 결혼하기에 이르른다. 이 때는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에서 수학 중이었지만, 이듬해 졸업도 하지 않은 상태로 귀국한다.
3. 정치 활동
2005년 일본으로 도주한 부친이 대선을 1년 앞두고 귀국 후 대통령직 복귀를 시도하면서 잠시 또 주목을 받았지만, 상황이 곤란했던 나머지 칠레로 우회입국하다가 잡히는 바람에, 대권은커녕 코렁탕 신세가 되었다. 이 때 분노한 후지모리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미래동맹을 창당했는데, 게이코는 이 당에 입당해 본격적인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비록 당의 대선 후보였던 마르타 차베스가 낙선하면서 여당이 되지는 못했으나, 게이코 본인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덕분에 후지모리의 향수가 남아 있는 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우상으로 급부상했다.
이를 바탕으로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차기 초강력 대권주자로 급부상했고, 2010년 미래동맹이 해산된 이후 게이코는 힘 2011을 창당했다. 참고로 지금의 민중의 힘과는 100% 똑같은 정당으로,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처럼 당명만 바꾼 것이다. 공교롭게도 새누리당과 당명을 교체한 시기가 똑같다. 심지어 미래통합당-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당 이름도 거의 똑같아졌다.
4. 대선 도전
일단 2번을 도전했지만... '''둘 다 떨어졌다'''.
4.1. 첫 번째 도전 (2011년)
힘 2011의 창당과 함께 돌풍을 일으킨 게이코는, 곧바로 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각계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면서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시되었다. 이 무렵부터는 후지모리 시대의 향수가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점은 게이코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당시에는 나이가 '''36세'''로 다른 주자들보다 젊었다는 점이 강점이었다.[1]'''Seguridad y oportunidades para todos'''
'''모두에게 안전과 기회를'''
그러나 과거사 청산 문제 등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던 상태였고, 이것이 역으로 악재로 적용했으며, 이념적으로도 젊은 대통령이라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강성 우파인지라, 좌파와 온건층의 어그로를 끌었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기에 곧바로 부친 시대에 있었던 인권 침해 전적에 대해 사과했으나, 당장 피해자들은 진심어린 보상을 원했지 말뿐인 사과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초반에도 리마의 시장을 지낸 루이스 카스타녜다와의 접전 속에서 2위를 기록한 경우가 많았고, 도중에 알레한드로 톨레도 전 대통령이 도로 급부상하면서 2위 신세를 피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뭐 톨레도의 지지율이 급격히 빠지기 시작했으나, 대신에 알란 가르시아 당시 대통령의 바로 지난 경쟁자였던 오얀타 우말라가 지지율을 불려나가기 시작했고, 이 앞에서는 격차가 벌어지면서 눈앞이 깜깜해졌다.
어쨌거나 2위를 유지한 덕택에 1차 투표에서 23.56%를 얻어 우말라와 함께 결선에 진출하게 되었으나, 결선에 가서도 별다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채, 48.55%를 얻어 돌풍을 일으켰음에도 끝내 떨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시에 치러진 총선 또한 37석밖에 못 얻어, 47석을 얻은 페루 승리 연대[2] 에 밀려 원내 2당으로 그쳤다. 뭐 그래도 이 때만 해도 "처음이니까 그럴 수 있다", "다음에는 꼭 된다"는 분위기가 강했지만, 그게 생각보다 어려울 줄은...
4.2. 두 번째 도전 (2016년)
비록 대선에서 낙선했지만, 원내 2당의 대표로서 우말라 정권을 견제할 힘을 얻기 시작했고, 2012년 민중의 힘으로 당명까지 교체한 뒤 대대적인 쇄신 작업을 거쳤다. 그리고 전직 대통령들이 으레 그랬듯이 우말라 또한 지지율이 떨어지고 레임덕에 접어들면서, 이번에는 차기 대통령으로 거의 확정되다시피 한 상태였다.'''La fuerza se siente'''
'''힘을 느껴 보자'''
2016년 대선의 해가 접어들면서 게이코는 어김없이 당의 대선 후보로 다시 선출되었다. 5년 전만 해도 다른 후보들과 접전을 벌이면서도 주로 2위를 기록했던 게이코였지만, 이번에는 30% 이상의 지지율로 다른 주자들을 큰 표차로 따돌리면서 여유롭게 나아갔다. 참고로 여당인 국민당이 사실상 대선 도전에 실패하면서,[3][4] 범여권 후보로는 광역전선[5] 의 베로니카 멘도사와 변화를 위한 페루인들의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6] 2명으로 압축되었는데, 그래봤자 멘도사의 지지율은 10%도 될까 말까 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야말로 답이 없었고 게이코의 실질적인 상대는 쿠친스키였지만 지지율이 20%에도 달하지 못하는 지라... 덕분에 30% 이상의 압도적인 지지율을 기록한 게이코에게는 당연히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예상했던대로 1차에서 39.87%를 기록해 21.05%를 득표한 쿠친스키를 약 20% 차이로 크게 따돌리고 1위를 기록했으며, 결선에서도 처음에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기록하면서 무난히 정권을 잡으리라는 분위기가 확고해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악재를 피하지 못했다. 바로 과거사 청산 문제였다. 비록 지난 대선 때 사죄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피해자들과 그의 유족들은 그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고, 전국적으로 게이코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무엇보다도 조금의 보상 따위 하나도 없었는데, 그냥 말뿐인 사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할까? 아닐 것이다. 더욱 더 황당한 것은, 1차 때는 크게 이슈화되지 않았다가 2차에 가서야 이슈가 되면서, 본인으로서도 도저히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1차 선거운동 당시 군소 후보에 가까웠던 멘도사가 좌파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데 성공하면서 지지율을 급격하게 불렸고, 당초 3위로 기록되었던 인민행동의 알프레도 바르네체아를 누르고 3위 자리를 탈환하는데 성공하면서, 2차의 캐스팅 보트 자리를 쥐게 되었다. 그런데 멘도사가 후지모리 집권 저지를 명분으로 쿠친스키 지지 선언을 하는 바람에 그간 알 수 없었던 좌파 표심이 쿠친스키로 이동하는 원인이 되었고, 비록 쿠친스키가 '''78세'''로 '''41세'''의 게이코와는 정반대의 고령 of 고령이었다지만 역으로 젊은층의 표심이 쿠친스키로 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악재에도 게이코는 각종 여론 조사에서 1위 자리를 꾸준히 차지하면서 차기 대통령으로서 확실하다는 분위기 자체에는 변함이 없었고, 여당의 실책이 컸던 탓에 "미워도 한번" 보다는 "정권 교체" 쪽에 힘이 실리면서 제아무리 범여권/좌파 지지자들이 죄다 쿠친스키로 결집해도 뒤집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선거를 단 며칠 앞두고 쿠친스키가 아슬아슬하게 추월하면서 제대로 먹구름이 끼고야 말았다.
결국 2차 투표에서 49.88%를 얻어, 50.12%를 득표한 쿠친스키에 밀려 떨어졌다. 매우 초접전이었는데 소수점 첫 번째 자리 수로 반올림하면 50.1%대 49.9%로 단 '''0.2%''' 차이였다. 그리고 아예 정수로 반올림하면 50:50이라는 점에서 더욱 더 충격적인 결과. 게다가 이것도 출구조사보다 더 접전이었는데, 출구조사에서는 50.4%대 49.6%였다.
이로서 두 번째 도전 또한 실패로 끝났다. 그나마 위안거리라면 민중의 힘이 총선에서 '''단독 과반'''을 차지한 원내 1당이 되었고, 그간 여론조사에서는 줄곧 1위를 해서 비교적 탄탄한 기반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여하튼 선거 결과에 승복했다.
5. 현재 상황
대선에서 무려 2번이나 떨어졌지만, 원내 과반 의석을 차지한 1당의 대표로서 현재는 쿠친스키 정권의 국정 운영에 각종 발목을 잡고 있다. 게다가 쿠친스키가 일개의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게이코는 탄핵을 주도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정국이 발칵 뒤집힐 줄 알았으나...
'''아슬아슬하게 모면했다'''. 그런데 원인이 민중의 힘 소속 의원들 일부가 반대해서라고. 하필 그 주동자가 게이코의 동생인 겐지 후지모리다.
결국 게이코는 동생을 당에서 '''출당'''시켰다. 동생에게 동조한 의원들도 덩달아 출당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과반 의석의 원내 1당인지라 앞으로 쿠친스키 정권에 발목을 잡는 것은 여전할 것으로 보인다.
2017년 12월, 쿠친스키가 부친 알베르토를 석방했다.
그러다가 부패혐의로 감옥에 갇히다가 석방하였다.#
6. 차기 대권 도전?
비록 2번이나 낙선했지만, 여전히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고 있으며, 쿠친스키도 결국 전임자들의 전철을 밟기 시작하면서 차기 대통령으로서의 입지가 더욱 더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만약에 진짜로 도전한다면 3수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쿠친스키의 레임덕에도 불구하고 게이코의 상황은 마냥 좋지 않은데, 한 여론조사에서 4위를 기록하는 등 비록 시작일지언정 상황이 마냥 좋지가 않으며, 무엇보다도 출당된 겐지가 쿠친스키를 위해 일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여론조사 1위를 기록하면서 당장부터 앞에 먹구름이 가득 낀 상황. 설상 쿠친스키가 아주 폭망해서 게이코에게 철저히 유리한 구도가 형성되더라도, 부친 시절의 인권 침해 문제 등이 재조명되면 이것이 또 악재로 적용하게 될 가능성은 크다. 실제로 이 문제가 게이코에게 제대로 역린이 되었다.
게다가 최근 페루 정계의 징크스를 보면, 게이코의 강력한 경쟁자는 2016년 3위로 탈락한 베로니카 멘도사다. 2021년 대선에서는 멘도사가 승리할지도 모르는 상황.
결국은 의회해산 된 2020년 총선에서 그가 이끄는 당이 역대급으로 떨어짐에 따라 당분간 대선 출마조차 장담하지 못한다.#
7. 여담
대한민국의 18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근혜와 공통점이 많은데, 국내에서도 종종 비교된다. 일단 둘 다 부친이 재임하던 시절 영부인이었던 모친이 궐위가 발생해 그 자리를 대행했다는 점,[7] 부친의 후광에 힘업어 정계에 입문하고 탄탄한 콘크리트 기반을 형성해 당 대표에서 차기 초강력 대권주자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제1야당의 대표로서 여당의 국정 운영에 발목만 잡는 사람이라는 점에다가 동생들(박근혜-박근령, 게이코 후지모리-켄지 후지모리 등)과 심각한 마찰까지 빚은 걸 보면...
또는 필리핀의 14대 대통령인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의 딸로 14대 대통령을 역임한 글로리아 아로요와 비슷한 면이 많다.
다만 박근혜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유례 없는 최악의 비리 스캔들에 연루된 사람인데다가 단순 무능의 정도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 와서 둘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이 무리가 되었다.사실 필리핀의 아로요도 실패한 대통령으로 취급되니 말이다.
그런데 대선 행보만은 이회창과 비슷하다. 두 번을 도전하고도 떨어지고, 페루 현지에서는 게이코를 끝내 대통령이 되지 못할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1] 36세라면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 최소 40세여야 하기 때문.[2] 우말라가 소속된 정당연합으로, 우말라는 정확히 이 중에서 국민당 소속이다.[3] 페루에서 집권당이 차기 대권 창출에 실패하는 것은 고질적인 질병 중 하나이다.[4] 당초 국민당에서는 다니엘 우레스티를 후보로 선출했는데, 최종 등록에는 실패했다.[5] 과거 페루 승리 소속 의원들 일부가 여기로 이탈했다.[6] 2011년 당시 게이코의 뒤를 이어 3위했다.[7] 다만 차이점은 박근혜는 어머니가 아버지 재임 중 사망했다는 것이고 게이코는 부모가 이혼했다는 게 차이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