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사팔대

 

1. 개요
2. 논쟁
2.1. 부정론
2.2. 긍정론


1. 개요


欠史(けっし八代(はちだい
일본서기에 기록된 초대 진무 덴노부터 33대 스이코 덴노까지 천황 33명의 기록들 중, 아무 치적도 기록되지 않은 천황 8명을 통칭하는 용어. 아직도 일본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질리도록 물고 늘어지는 떡밥이다.
결사팔대로 묶이는 천황은 다음과 같다. 2대 스이제이 덴노ㆍ3대 안네이 덴노ㆍ4대 이토쿠 덴노ㆍ5대 고쇼 덴노ㆍ6대 고안 덴노ㆍ7대 코레이 덴노ㆍ8대 고겐 덴노ㆍ9대 카이카 덴노. 진무 덴노의 경우는 신화 속 인물이라는 설이 주류지만, 결사팔대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 입장이 엇갈린다.
이들 중 5대 고쇼 덴노부터 9대 카이카 덴노까지 5명은 재위기간이 비정상적으로 길다.[1] 가장 짧은 카이카 덴노가 50년을 재위했고, 6대 쿄안 덴노는 재위시기만 100년이 넘는다. 이들의 재위시기를 종합하면 377년간 단 5명만 재위했다는 이야기 된다. 그것도 기원전에(!). 게다가 이들은 전부 친아들로 계승했다고 써 놨으니 본인 재위기간 외에 아버지 재위 시절 황태자였던 기간까지 수명에 더해야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 나라에 두 명의 황제는 있을 수 없으므로, 100년 통치한 천황의 아들은 재위기간에 포함되지 않는 황태자 시절과 자신의 통치기간을 합쳐서 수백 년을 살았다는 이야기인데 당연히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한국사단군신화삼국사기를 비롯해 그 외 대다수 문명에서도 기록이 부실한 역사 초창기 왕들의 경우 수명이 비정상적으로 길게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만큼 장수를 누릴 정도로 하늘에게서 정통성을 부여받았다는 프로파간다의 일종이다.
결사팔대를 처음으로 주장한 츠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는 무려 태평양 전쟁 때에 천황숭배가 절정에 달했을 때에 천황의 계보를 의심하는 이 이론을 펴서 1942년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패전 이후 천황숭배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의 이론이 주류가 되어서, 한때는 위의 8명 뿐 아니라 오진 덴노이전의 천황들까지 모두 실존이 의심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의 연구를 통해 10대 스진 덴노 이후의 천황들은 기년조정이나 세부적 비판은 있지만 어떤 형태로든 역사 속에 실존했다고 보고 있다.

2. 논쟁



2.1. 부정론


원래 결사팔대 8천황은 중국의 혁명사상에 따라, 또는 천황 가문의 뿌리가 매우 오래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탄생되었다는 것이 부정론의 기초가 된다.
1978년 사이타마현 이라니 고분에서 출토된 금착명철검(金錯銘鐵劍)에는 8대 코겐 덴노의 큰아들인 오호히코노미코토로 시작되는 족보 8대 새겨졌다. 오호히코노미코토는 사도장군(四道将軍)으로서의 직책만 있을 뿐, 코겐 덴노의 큰아들이니 뭐니 하는 글은 전혀 새겨져 있지 않았다. 금착명철검이 만들어졌던 당대에는 그런 천황의 존재가 아주 없었다는 증거다. 또 스이제이 덴노로부터 카이카 덴노에 이르기까지 역대 천황들의 치세는 거의 기록된 게 없고 대관식 정도만이 간략하게 기록된 이유는 이들이 역사적으로 실존하지 않은 천황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2. 긍정론


역시 1978년 출토된 금착명철검을 예시로 든다. 오호히코노미코토가 '당연히' 코겐 덴노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따로 그런 내용이 새겨지지 않은 것이고 오호히코노미코토의 후세들이 8대에 걸쳐 기록된 만큼, 결사팔대는 실존했다는 증거가 이 금착명철검이라는 것이다. 또 치세의 기록이 완전히 결여된 것은 시진 덴노 이후의 천황들의 기록에서도 사례가 있으므로, "없다" 설의 증거로 사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02~09대 천황의 기록이 사라졌다고 보는 설도 있다.
또 시호의 경우에도 2대ㆍ3대ㆍ5대 천황은 분명히 실명을 시호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한다. 일본식 시호 작법이 눈에 뜨이지 않음이 더더욱 그들의 실제성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1] 1대, 10~15대 천황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