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후 호이파나라씨
1. 개요
만주 양람기 사람인 좌령 나이포의 딸로, 건륭제의 2번째 황후. 건륭 30년에 총애를 잃고 북방으로 보내져 쓸쓸히 죽고 시호도 없이 장례도 황귀비의 예로 치뤄진 것으로 유명한 그 황후이다. 계황후의 계도 칭호가 아닌 계후라는 뜻의 계이다. 공식적으로 폐출만 안된 것이지 사실상 폐후 취급을 받았다고 보면 된다.
사서에는 그저 나라씨라고 나온다. 어느 나라씨라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근에 호이파나라씨(한국어식 독음으로는 휘발나랍씨)로 밝혀졌다.
2. 생애
아버지는 정4품 좌령이었다. 옹정12년(1734년) 11월 8일, 16세의 휘발나랍씨가 보친왕 아이신기오로 훙리과 결혼하였다. 휘발나랍씨가 보친왕 훙리의 측복진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비록 아버지의 관직은 낮았으나 만주족이었고, 팔기 중 양람기에 속했기 때문이다.
옹정제는 며느리들을 뽑을 때 팔기가 고르게 분포되도록 신경을 썼다. 그래서 효성헌황후의 추천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휘발나랍씨는 보친왕부에 늦게 들어왔으나 유일하게 측복진으로 들어온 첩실이었다. 혜현황귀비 고가씨의 경우는 처음에 격격으로 들어왔다가 측복진으로 진급된 케이스다.
왕부에 들어온 지 9개월 후 옹정제가 승하하고 보친왕이 제위를 이어받았고, 옹정 13년(1735년) 9월 24일 측복진이었던 휘발나랍씨는 비(妃)에 봉해졌고 봉호는 한(娴)이라고 내무부에서 정했다. 한(娴)은 <홍칭통용(鸿称通用)>에서 만주어로 “elehun”, "평안하고 고요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건륭 10년(1748년) 정월 23일, 한귀비로 진봉되었고 11월 17일에 한귀비 책봉례를 올렸다. 건륭 13년(1748년) 3월 11일, 건륭의 정실황후 효현순황후 부찰씨가 병사하고 중궁황후의 자리가 공석이 되어 7월 초하루에 한귀비를 황귀비로 진봉하여 육궁을 통솔케 했으며, 같은 달에 일족을 양람기에서 정황기로 대기하였다. 건륭 14년(1749년) 4월 5일 휘발나랍씨를 정식으로 황귀비로 책봉하였다.[4]
건륭 15년(1750년) 7월 초10일 교지가 내려져 휘발나랍씨가 황후로 봉해졌다. 8월 초2일에 황후 책봉례가 거행되었고 16일에는 아버지 좌령 나이포가 1등 승은공으로 추서되었고 조카 눌소궁(讷苏肯)이 1등후로 책봉되었다. 휘발나랍씨는 중궁에 오른 뒤 강남순행, 조상에 대한 참배, 목란사냥 등등 빠지지 않고 모두 건륭과 함께했다. 황후에 오른 지 1년 반 만에 건륭 17년(1752년) 황12자 영기(永璂)를 낳았고 이듬해에 황5녀를 낳았으며 건륭20년(1755년)에 황13자 영경을 낳았다.
계황후는 이렇듯 건륭제가 미친듯이 총애했다고는 볼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해서 총애를 받지 못한 후궁은 아니었다. 적어도, 최소한의 존중과 총애는 있었다는 것이다. 계황후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효현순황후가 서거한 후 유일한 만주족 출신 비빈으로써 품계가 높았던 것과 태후가 적극적으로 밀었던 게 가장 크긴 하였다. 건륭제는 계황후가 황후가 되기전, 황후로 책봉하겠다고 말하면서 나에게 황후는 효현황후뿐인데 황태후가 황후가 없어서 상심이 크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세운다며 칙서에서 밝혔다.
짐은 밤낮으로 가리지 않고 국사를 바쁘게 보내고 있으며 후궁의 내정은 이제껏 효현황후가 맡아왔다. 황후는 성모 황태후를 극진히 모시면서 언제나 기쁘게 해드렸는데 효성이 지극하고 정성껏 일을 처리하는등 경중을 잘 가늠했다. 그리하여 빈부터 궁인에 이르기까지 법도를 지키고 은혜를 고맙게 여겼으며 마음속으로 그를 잘 따랐다. 10여년 동안 짐이 국사에 전념하고 궁중의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황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황태후의 명을 받들어 천하의 어머니로 군림하게 되었으니 이는 천지가 융합되고 일월이 빛나는것과 같다. 짐은 아직 나이가 젊어 궁내를 다스림에 후궁을 다스릴 황후가 필요하다. 한귀비 나라씨는 선친께서 정해주신 측실로, 단정하고 성품이 어질다. 응당 조상들의 규례대로 한귀비 나라씨를 황후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짐은 효현황후에 대한 마음의 짐이 남아있어 황후가 별세하지 27개월이 지나는 날에 길례를 올리고자한다. 이렇게 해야만 짐의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아서 이에 어명을 내리는 바이다. 짐은 황후와 20여년을 부부로 살아오면서 깊은 은정을 맺었다. 그래서 새 황후를 책봉하려니 미안한 생각이 앞선다. 사실 27개월도 짐에게는 너무 이른것 같다. 그러나 이는 성모 황태후께서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짐이 자주 비빈과 손군들을 거느리고 문안을 올리지만 황태후께서는 중궁이 비어있는 터라 언제나 서글퍼 하신다. 이에 성모의 분부를 받들어 그 분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고자한다. 그리고 후궁에 할 일이 태산같아 확실히 이를 관리할 수장이 필요하다.
3. 계후라는 자리
지금까지 청나라 황제들 중에서 옹정제를 제외하고 모두 조강지처가 죽은 후 계후를 세웠다. 계후가 죽으면 두 번째 계후를 세우기도 하였다. 순치제, 강희제가 모두 그랬다. 보통 조강지처들은 황후라는 자리의 압박감과 외척세력 때문에 황제로부터 존중은 받았어도 큰 사랑은 받지 못했다. 그런데 건륭제의 효현순황후는 이례적으로 남편의 사랑을 지극하게 받았고 황후로서의 입지가 탄탄했기 때문에 계후의 자리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효현순황후가 육궁을 통솔할 때에는 효현순황후보다 잘난 가문의 후궁이 없었고, 사랑받는 적자를 두 명이나 낳았으며, 후궁들의 품계가 막 귀비로 올라간 상황이라서 적수가 없었다. 그러니 계황후가 황후로서 살아가는 것은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건륭제가 존중은 해줬지만, 조강지처를 그리워하면서, 계황후가 황후가 되고 다음해, 건륭제는 효현순황후에게 바치는 시에 "어찌 새 금이 끝내 미치지 못하는가. 옛 검을 구해 서로 오래도록 맞네(岂必新琴终不及,究输旧剑久相投)"[5] 라며 효현순황후를 추켜올리고 계황후를 까내리는 표현을 썼다. 겉으로 표현할 순 없었지만 조강지처인 효현순황후와 비교되는것은 어쩔 수 없는 서러움이었다.
3.1. 건륭30년 남순에서의 일
건륭 30년 정월에 휘발나랍씨 황후는 건륭과 함께 네 번째 남순을 떠났다. 남순 초기만 해도 부부생활에 문제는 없는 듯 보였다. 여행 도중에 건륭이 나랍황후의 48세 천추를 축하해줬다. 윤2월 18일 항저우에 와서 아침식사 때 건륭이 귀한 음식을 하사하였으나 저녁 식사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황후의 얼굴은 볼 수 없었고, 건륭은 영귀비 위씨와 용비 화탁씨, 경비 육씨와 함께 지냈다. 나중에 알고보니 윤2월 18일에 화석화가공주와 부마 복륭안을 시켜 황후를 수로를 통해 경성으로 보냈던 것이다. 청나라의 '상유당(上谕档)'에는 "윤이월 18일 건륭이 복륭안에게 휘발나랍씨를 모시고 수로를 통해 경성으로 보내라"고 기록되어있다. 남순을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온 건륭은 황후의 책보 네 부(황후, 황귀비, 귀비, 비)를 거둬들였고 친정가문을 정황기에서 옛 소속인 양람기로 강등시켰다.[6] 휘발나랍씨를 모시는 궁녀를 2명을 두었는데, 이는 후궁신분 중에서 가장 낮은 답응에 준한 것이었다. 계황후는 폐후되진 않았으나 유폐되었고 건륭 31년 7월 14일에 사망했다.
3.2. 왜 유폐되었나
위위 전언은 건륭 31년 7월 5일 목란사냥 중이던 건륭이 나랍황후의 사망 소식을 듣고서 한 말이다. 여기서 건륭제는 황후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미친 짓을 하였고 자신과 태후에게 불경하게 대했다고 욕하고 있다. 그러나 완전히 폐출당한 것은 아니었기에 황귀비의 예로 장례를 치르라고 명했다. 하지만 실제 계황후의 장례는 겉모습만 황귀비의 예였지 실상은 빈의 대우로 장례를 치뤄지게 되었다. 이러한 안습한 계황후의 사정에 대해서, 건륭제는 명확하게 얘기해준 것이 없었다. 황실의 얘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었던 탓에 제대로 된 사관기록이 없으며, 황실 사람들 간의 비밀로 붙여진 듯하다.留京辦事王大臣의 奏文를 보니 황후가 본 월 14일 未時에 薨逝하였다고 아뢰었다. 황후는 책립된 이래 지금까지 덕을 잃은 적이 없었다. 지난 봄 짐이 황태후를 모시고 江蘇, 浙江 지역을 巡幸하여 황태후를 모시고 즐거움을 나눌 때 황후의 성격이 갑자기 평소와 달라지더니 황태후 앞에서 삼가 효도를 다할 수 없었다. 杭州에 이르러서는 거동이 더욱 정상에서 어긋나고 행적이 마치 미친 사람처럼 되어 먼저 북경으로 돌아가 궁에서 조섭하게 하였다. 이제 일 년여가 지나 병세가 날로 극심하여지더니 마침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는 실로 황후의 복이 천박하여 聖母(성모)의 자애로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짐의 은혜를 기리 받을 수 없던 것이다. 황후가 저지른 일의 어그러짐을 논한다면 바로 내가 폐출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짐은 황후의 名號를 보존하게 하여 이미 격외의 용서를 하였다. 다만 장례의 의전이 孝賢皇后(효현황후)와 동등하게 따르는 것이 편치 않으니 喪禮는 皇貴妃의 예에 준하여 실행할 것을 내무부 대신과 협의하여 받들도록 하고, 이 유시를 적어 中外에 알리도록 하라
이에 관해서 떠도는 이야기 중 하나가 건륭제의 여자문제 때문에 크게 싸워 계황후가 홧김에 머리카락을 잘랐다는 것이다. 건륭제가 남순 도중에 비구니와 동침했고 그걸 계황후가 발견하고 분노했다는 내용. 그러나 이런 여자문제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우선 건륭제의 여성편력 이야기는 후대 한족들에 의해서 나온 이야기가 많다. 문화대혁명 시기를 거치면서 중국의 한족들은 한족의 우수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땅덩어리를 차지하던 건륭제를 까내리기 위한 야사를 많이 만들어냈다. 대만에서도 이러한 얘기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렇게해서 만들어진 후대의 얘기 중 하나가 건륭제가 전씨라는 한인 여성의 소생이라는 것이다. 역시 이 얘기도 야사에 불과한 이야기이며 사실이 아니다.
또 하나는 어느 황제든지 여성편력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인데, 건륭제는 할아버지 강희제에 비하면 여성편력은 심하지 않았다. 수녀선발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후궁들이 들어오니 후궁은 당연히 많을 수밖에 없었다. 건륭제는 89세를 살면서 자식을 26명 두었는데, 이 중에서 자식을 여러 명 낳은 후궁은 보친왕부에서부터 함께한 비빈들이 대다수였다. 효현순황후, 숙가황귀비, 순혜황귀비, 철민황귀비, 유비가 있다. 왕부시절부터 함께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아들을 낳은 사람은 서비 엽혁나랍씨와 효의순황후뿐이며, 공주까지 넓힌다해도 흔귀비와 돈비가 추가될 뿐이다. 건륭제의 총애는 특정 사람에게 몰빵되었다는 걸 보면 여성편력의 이야기의 신빙성이 의심된다.
계황후의 유폐는 단순히 여자문제 때문에 건륭제가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순치제가 동악비에 미쳤을 때 도르곤이 정해준 황후를 폐하려고 온갖 갖은 수를 썼지만 실패했을 정도.[7] 따라서 단순히 여자문제 이유로 건륭제가 독단적으로 황후를 유폐시킬 순 없다.
3.2.1. 추측1. 조선의 기록
조선 측의 기록에서 홍대용과 박지원이 전하는 소문에서 계황후와 건륭제가 총애하는 후궁(향비 혹은 용비)의 모함으로 쫓겨났다고 되어있다. 계황후가 귀한 구슬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잃어버렸다고 한다. 이 구슬은 황후의 시위관의 집에서 나타났다. 시위관의 몸에서 황후의 필체와 같은 편지가 발견되고, 시위관은 죽었다. 건륭제가 계황후를 의심하며 유폐했고, 음식을 잘 지 않았다. 이에 화난 계황후가 건륭제의 앞에서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되어있다. 출처아직 자세한 사정은 듣지 못하나, 대강 황제가 특별히 총애하는 귀비 하나가 있으니, 황후와 싸움하는 연고로 황제에게 죄를 얻어 장차 폐할 擧措(거조)가 있을 것이로되, 아직 결단치 아니 하였는지라, 방물 중에 황후에게 바칠 것이 있으니, 중국에서는 13성에 詔書(조서)하여 황후의 방물을 바치지 말라 하였으되, 외국은 미리 알게 함이 좋지 않다 하여, 예부에서 의논을 결단치 못하였는 고로 바칠 기약이 없다 하더라
3.2.2. 추측2. 영귀비의 황귀비 책봉, 태자문제
중국에서는 계황후 문제에 대해서 태자문제와 관련되었을 수 있다고 여긴다. 조선의 기록에서 시위와의 불륜은 신빙성이 조금 떨어지긴한다. 만약 황후가 바람을 폈다면 정말 폐출되어 죽었을 수도 있다. 사람들간에 전해지다가 이렇게 와전된 듯 싶다. 홍대용과 박지원의 기록에서 한쪽은 귀비, 한쪽은 용비를 지목한 것으로 보아 후궁간의 암투 문제일 수도 있다. 당시 후궁의 쟁패는 훗날 효의순황후로 추존되는 영귀비 위씨였다. 영귀비는 후궁이 된 이후로 연달아 4남 2녀를 낳을 정도로 엄청난 총애를 받았다.[8] 중국 측의 의견 중에서는 건륭 30년에 건륭제가 당시 영귀비였던 위씨를 황귀비로 올려주고 싶은 의도가 있었다고한다. 이는 건륭제 시절을 다룬 드라마 연희공략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청나라는 아픈 귀비를 위로해주는 목적으로 황귀비로 올리거나 황후가 공석일 때 황귀비를 올렸다. 사실상 황후가 멀쩡히 살아있을 때에 비빈을 황귀비로 올린 사례는 없다시피 했었다.[9]
당시 영귀비 소생의 15황자 영염(훗날의 가경제)은 6세에 불과했고, 건륭제의 나이는 이미 50을 훌쩍 넘어 60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역대 청나라 황제들의 나이를 보면 건륭제가 죽을 때가 다가왔다는 거다. 차기 황제를 누구로 고르냐가 당시 최대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계황후는 가만히 있으면 태후가 되는 것이지만, 자신에게 적자가 있었으므로 태자자리에 연연해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15황자 영염이 6세에 불과했으나 효현순황후를 뺨칠 정도로 총애받는 영귀비였기 때문에 걱정은 있었을것이다. 이미 건륭제는 즉위하자마자 만 2세밖에 되지 않은 효현순황후의 아들 단혜황태자 영련을 밀지를 통해 태자로 책봉한 바 있었다. 영련이 죽은 후, 효현순황후가 또 회임하여 7황자 영종을 낳자 종사를 뜻하는 "종"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기쁜 감정을 미친듯이 표출하여 사실상 "차기 황태자"로 여기기도 하였다. 건륭제는 계황후가 12황자를 낳았을 때에도 축하해주고 시도 지어주었으나 효현순황후가 낳은 아들의 대우보다는 못했다.
아무리 효현순황후를 뛰어넘는 총애도, 지위도 누릴 수 없다해도 사람이라면 같은 황후의 자식인데 대우의 차이가 있으니 내면에 서러움과 야속함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영귀비가 총애받을 때 이미 나이가 어린 황자를 밀지로 황태자로 책봉한 사례가 있었으므로 경계를 안 할 수 없었을것이다. 또한 당시에 황위 계승에 유력한 사람이 1명 더 있었는데 유비 소생의 5황자 영기이다. 당시 건륭제의 1황자와 3황자는 효현순황후의 국상 중 슬퍼함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건륭제에게 후계자에서 배제 당했고, 4황자와 6황자는 다른 집안의 양자로 갔으며, 효현순황후 소생의 2, 7황자는 이미 오래 전에 요절했다. 이 상황에서 영기는 사실상 황제의 큰아들이었으며 문무에도 뛰어나서 부황인 건륭제에게 총애를 받았다. 이후 영기는 형제들 중 최초로 화석친왕에 임명되었지만 공교롭게도 오래 앓아오던 부골저병때문에 계황후가 유폐되어 죽은 해에 같이 죽었다. 그래서 계황후가 남순 때, 황태자 책봉 문제와 엮여서 유폐당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청황실은 이미 오래전 강희제의 아들들이 황위를 두고 당파까지 나누며 피터지게 싸운 전례가 있고, 건륭제의 아버지이자 선대인 옹정제도 자신과 대립한 형제들을 평생 유폐시키고 괴롭힐 정도로 극혐하는 등, 후계자 문제로 많은 갈등을 앓아왔다. 이로인해 청나라의 황제들은 조정이든 후궁이든 황제 외에 제 3자가 황태자 문제에 간섭하는 걸 극도로 싫어했으며, 건륭제도 아버지를 위해서 숙부들을 풀어주긴 했으나 정사에는 개입하지 못하게 하는 등,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렇듯 건륭제가 후궁과 친족간에 권력투쟁을 극도로 견제한 상황에서 계황후가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대신을 만나서 모의를 했거나, 다른 황자들을 배제하려다가 들켰거나, 항주에서 무슨 일을 도모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 측의 기록이나 중국의 얘기나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정확한 것은 그 시대로 타임슬립을 해봐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
4. 자녀들
- 황12자: 애신각라 영기(건륭 17년 4월 25일 출생 ~ 건륭41년 정월 28일)
자식이 혼인해서 나가면 무릇 친왕이든 군왕이든 패륵이든 지위를 올려주기 마련인데, 12황자는 죽은 후에도 건륭제가 시호도 주지않고 추봉도 해주지 않았다. 아버지 건륭제가 죽은 후 가경제가 다라패륵으로 추봉해주었다.
- 황5녀: 건륭 18년 6월 23일 출생 ~ 건륭 24년 4월 22일 - 요절
- 황13자: 애신각라 영경(건륭 20년 12월 31일 출생 ~ 건륭 22년 7월 4일 - 요절
5. 미디어 믹스
- 황제의 딸 - 황후
- 화광여인 - 황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