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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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제74대 총리'''
2. 생애
2.1. 초기
1951년 2월 20일에 스코틀랜드 이스트랜프루셔 주 기프넉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교회(장로회)의 목사였고, 본인의 종교도 장로회다. 토니 블레어처럼 스코틀랜드 출신인데 부모도 스코틀랜드 사람이다. 다만, 블레어는 부모는 잉글랜드 사람이고 그냥 스코틀랜드에서 나고 자랐던 정도. 에든버러대학교에 진학했고, 1976년부터 1980년에는 글래스고기술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가르쳤다. 오픈 유니버시티[4] 에서 강의를 맡기도 했다.
2.2. 정계 진출
1983년에 노동당으로 하원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85년에는 그림자 내각의 대변인을 맡았다. 1987년부터 89년까지는 그림자 내각의 재무장관, 89년부터 93년까지는 산업통상장관을 맡는 등 전반적으로 재무통이나 경제통 자리를 밟아왔다. 97년에 노동당이 보수당의 18년 집권을 끝내자 토니 블레어 내각에서 재무장관(Chancellor of the Exchequer)을 맡았다.[5]
2.3. 총리 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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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당시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가 "3선 임기가 끝나면 더 이상 총리직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함에 따라, 브라운이 블레어의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블레어의 후임자를 결정지었던 2007년 노동당 전당 대회에서, 브라운은 '교육을 통한 사회 불평등 해소', '국민의 신뢰 회복', '테러와의 전쟁 승리' 등을 아젠다로 내걸고 당 내 경쟁세력을 어렵지 않게 누르면서 총리직에 취임하게 된다.
총리직에 오른 이후 브라운은 각종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인재 등용 기준을 마련해 공직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려는 한편으로, 헌법을 약간 개정하여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시대에 걸맞게 수정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었다. 특히나 브라운 내각이 관심을 기울였던 분야는 노동 개혁으로, 브라운 본인은 '영국 내의 직장은 우선 영국인에게 돌아가야 한다.'라는 주장을 2007년 총선 기간 때부터 공공연히 표출했었고 총리직에 오른 뒤에도 실제로 행동에 옮기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미 이 당시 영국 경제/사회에서 외국인, 특히나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만만찮았던 데다가 외국인에 배타적인 노동정책은 유럽 연합을 위시로 한 기타 유럽 국가들의 강력한 제재를 초래할 것이 자명하였기 때문에 끝끝내 실행에 옮기는 데는 실패한다. 한편 외교 정책은 국내 정책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블레어 내각의 노선을 충실히 계승하였는데, 티베트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의 무력 진압에 항의하는 의미로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불참하는 한편,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계속해서 수행해나갔다.
지리한 중동에서의 전쟁과 더불어 야심차게 시도한 정책들이 흐지부지되는 것에 대하여 고든 내각에 대한 국민들의 의구심은 커져갔고, 이런 상황에서 2008년에는 세계금융위기라는 초대형 악재까지 발생한다. 당연히 민심은 빠르게 노동당을 이탈해갔고, 2008년 봄에 있었던 지방 자치단체장 선거에서 노동당은 최악의 패배를 경험하고 만다.[6] 급기야 노동당 내부에서조차 브라운의 지도력에 대한 의구심이 커져갔고, 결국 2010년 4월 브라운은 의회 해산을 요청하고 총선을 실시한다.
그런데 이 양반이 총선과정에서도 또 한 번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다. 英 총리 말실수에 곤욕‥"입조심할 걸" 선거 유세 중에 어떤 할머니가 "외국인 노동자가 너무 많이 유입된다"며[7] 영국의 일자리를 영국인들에게만 배분할 것을 요구했었는데, 유세가 끝나고 차에 올라서 보좌관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그 할머니를 '끔찍한 할망구 같으니 누가 데려온 거야?'라는 식으로 뒷담을 깠던 것. 그런데 마이크가 아직 켜있는 것을 확인하지 않았고, 이 뒷담화가 그대로 전국으로 전파를 타고 만다(...). 뒤늦게 브라운이 부랴부랴 사과를 하기는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5월 10일에 있었던 총선에서 결국 브라운과 노동당은 데이비드 캐머런이 이끄는 보수당에게 원내1당 자리를 내주고 만다. 그렇지만 보수당 역시 원내 과반을 차지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노동당이 자민당과 연정을 맺고 정권을 재창출하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었고, 실제로 노동당과 자민당 사이의 연정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도 진행되면서 보수당이 닭 쫓던 개 꼴 되는거 아닌가 했지만 협상은 결렬되고 만다. 결국 브라운은 총리직에서 사임할 수 밖에 없었고 총리 사임과 동시에 노동당 당수에서도 사임하고 만다.
2.4. 근황
총리직에서 사임한 후에도 의원 자리는 유지하면서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를 부결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며 다시 주목받기도 했지만, 노동당이 총선, 특히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참패한 2015년을 끝으로 의원 자리에서도 스스로 내려온다. 이후로는 주로 대학에서 강의를 하거나 명예 대사 활동을 하는 중.
반기문 사무총장에 의하여 UN 국제교육 부문 특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전임자이자 같이 노동당의 우경화를 주도한 토니 블레어와 달리, 노동당 당수 제레미 코빈의 정통 좌파적 행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3. 선거 이력
4. 여담
- 전임자였던 토니 블레어가 잘생긴데다가 언변도 있고 카리스마를 갖추었던 반면에 상대적으로 샌님 스타일이라서 손해를 봤던 케이스. 총리 재임 기간 내내 우유부단하다며 안팎으로 미친 듯이 까였다. 본인은 무척이나 억울해하는 대목. 반면 그런면이 블레어 내각 시절에는 블레어와 상호보완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 토니 블레어와 오랜 정치적 동지관계였는데, 한 번[8] 은 둘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안을 놓고[9] 격렬히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었다고 한다. 말다툼 직후 브라운이 화장실에 갔는데 화장실 문이 고장나서 볼일을 본 후에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됐(...)고, 브라운은 블레어에게 황급히 전화를 걸어서 꺼내달라고 SOS를 쳤다. 그 때 블레어의 대답이 일품. '내가 주장하는 노선을 따르지 않을 거면 그냥 거기에 쭉 쳐박혀 있어.'(...) [10]
- 토트넘 핫스퍼의 팬이다.
- 에든버러 대학교 재학 시절 럭비하다가 왼쪽 눈을 다쳐서 왼쪽 눈이 실명됐다.
- 2020년 현재까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즉위하기 이전에 태어난 마지막 총리이다.
- 찰스 왕세자와 사이가 상당히 안 좋은 총리 중 한 명이라고 한다.
- 토니 블레어가 총리로 재임할 당시 고든 브라운은 재무장관이었는데 그 당시 블레어가 방송에 나와서 브라운과 상의도 하지 않고 복지 예산을 늘리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로 인해 브라운은 격노를 하여 총리실로 뛰쳐들어가 "너가 내 빌어먹을 예산을 훔쳤어!"[11] 라고 말했다고 한다.
[1] 총리 본인에 대한 경칭[2] 옥스브리지를 나오지 않은 총리이다.[3] 고든 브라운은 원래 던펌린 이스트를 지역구로 뒀으나 2005년 자신의 지역구와 커콜디가 통폐합된다.[4] 한국으로 치면 방송통신대학교.[5] 브라운이 재무장관이었을 때, 금리를 정하는 권력을 잉글랜드 은행의 금융정책위원회(Monetary Policy Committee, MPC)에 넘겼다.[6] 아닌 게 아니라, 자민당한테까지 밀려서 제3당으로 전락해 버렸으니 '최악'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7] 동유럽인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상 폴란드인을 까는 거라고 보면 된다.[8] 1994년, 아직 블레어가 총리직에 오르기 전의 일.[9] 전 노동당 대표였던 존 스미스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누가 당수를 맡아 당을 이끌어 갈지 중대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10] 이렇게 해서 둘은 런던의 Granita라는 레스토랑에서 블레어에게 당 대표를 넘기는 약속을 하게 되고 브라운은 대신 재무장관이 되었다.[11] You've stolen my effing budg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