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립 피살 사건
1. 개요
김구 최대의 '''흑역사'''.[1] 옥관빈 피살사건과 함께 김구가 한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 사건이다. 무고한 독립운동가를 권한 없이 마구 죽인 백색테러일 뿐만 아니라 죽은 뒤에도 '공금 횡령자'로 낙인 찍어 독립유공자로서 인정받지 못하게 했다. 사건의 진상은 모스크바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상하이파 공산당에 지급한 독립운동 자금을 상하이 임시정부가 탐내다 일으킨 백색테러였다.
2. 사건
1922년 2월 8일 수요일 상하이 북쪽 외곽의 중국인 밀집 지구인 자베이 구역 바오퉁루에서 김립이 피살된 사건. 김립이 다른 동료들과 길을 걷는데 잠복해 있던 네 명이 튀어나왔다. 둘은 앞을 가로막고 다른 둘은 퇴로를 차단하려고 뒤를 가로 막았고 앞을 가로막은 사람들이 김립을 쏘았다. 김립의 시신에선 무려 12발의 총상이 발견됐다.
일본 육군 헌병대에 ‘배일흥한(排日興韓)을 기도하는 유력자’라고 평가됐을 정도의 거물 독립운동가가 이렇게 맥없이 죽고 말았다. 중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일간지 선바오는 사건 직후 한국인 '양춘산'의 피살을 보도했는데 양춘산은 김립이 중국인으로 위장하려고 만든 가명이다. 이후 김구는 김립을 공금 횡령범이라고 주장했고 그 내용을 《백범일지》에도 기재했다. 그 후 김립은 최근까지도 독립운동 자금을 사적으로 사용했다는 누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3. 밝혀진 진실
김립이 살해당한 현장에는 동료 세 명이 있었는데 김철수, 유진희, 김하구다. 여기서 김철수는 '모스크바 자금이 임시정부 공금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김철수는 모스크바 자금을 직접 관리했었다.
그리고 소련이 해체하고 나서 그 사건과 관련된 문서가 구 코민테른 문서 보관소에서 발굴되었다. 국제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비서 오토 빌레 쿠시넨이 1922년 5월 11일자로 작성한 문서다. 이 문서에는 문제의 400,000 루블과 200,000 루블이 모두 '''상하이파 공산당에 지급'''된 것이라 한다. 결산 보고 의무도 상하이 임시정부가 아닌 상하이파 공산당에 부과되어 있다. 즉, 이게 사실이라면 김립은 애초에 '''공산당 자금'''으로 쓰라고 소련이 준 돈을 임시정부에 안 바쳤다는 이유 하나로 횡령죄를 뒤집어쓰고 죽은 거다.[2]
또 다른 문서가 있다. 국제공산당은 모스크바 자금의 정산 실무를 극동 공화국 외무장관 얀손에게 위임했다. 안손이 주도한 자금결산규명위원회가 결과 보고서를 제출한 시점은 1922년 8월 18일인데 이 보고서에도 모스크바 자금의 수령자가 상하이파 공산당이라고 나왔다. 결국 모스크바 자금의 처분권자가 한인사회당과 그 후계인 상하이파 공산당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 이 사건은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에서 좌파 성향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단체인 상하이파 공산당에게 지급한 400,000 루블의 자금을 우파 성향의 상하이 임시정부가 가로채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인 것이다.
4. 현재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심의 과정에서 임시정부 공금 횡령자라는 낙인 때문인지 김립의 서훈 상신이 기각된 바 있다. 죽은 것도 억울한데 김구에게 잘못 찍혀 죽은 뒤에도 공금횡렴범으로 부당하게 취급당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
5. 평가
독립운동의 거두로 추앙받는 김구가 저지른 잘못을 증명하는 사건 중 하나.[3] 우파 민족주의와 좌파 공산주의로 분열된 독립운동가 세력의 대립 속에 한 독립운동가가 잔혹하게 암살당한 안타까운 사건이다. 동시에 자금 관리나 미주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대도 하찮게 보는 측면도 포함된 심각한 요소가 들어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한국민들의 인지도는 매우 적으며, 정확한 사실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문 편이다. 애초에 김립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인 실정.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에서는 김립을 두고 이렇게 적는다.
혼자서 상해 본부를 지키다가 1922년 2월 6일 상해 자베이(閘北)에서 '''테러분자에게 살해되었다.'''
6. 참고문헌
- 임경석, [선택! 역사를 갈랐다] (35)독립운동가 ‘김립’ vs 그를 비난한 ‘김구’
- 반병률, 金立과 항일민족운동
7. 둘러보기
[1] 독립운동 행적으로 인해 성역화된 측면이 있어 과오가 잘 부각되지 않았지만, 치하포 사건이나 해방 이후 백색테러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는 등 김구는 민족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흑역사를 제법 많이 남겼다. 현재 대중에게 남아있는 선한 독립운동가 김구의 이미지는 춘원 이광수가 윤문한 《백범일지》를 거쳐 윤색된 감이 없잖아 있는 편이다.[2] 다만 ''1920년 6월, 블라디미르 레닌은 코민테른 제2차 대표대회에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제시하여 "코민테른은 식민지 및 낙후한 나라들의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와임시적 동맹을 맺되 그것과 융합해서는 안되며 가장 맹아적인 형태에 있어서까지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독자성을 무조건적으로 보전해야 한다."라는 원칙을 제시하여 통일전선을 통한 동아시아에서의 혁명을 추진한다''고 하였고, ''1921년 6~7월, 코민테른의 제3차 당대회는 후퇴기 전술을 제시하여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통일전선 방침을 채택''하였으며,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은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 1차 국공합작이라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러한 것에서 생각해보면 코민테른에서 고려공산당측에 지원을 한 것은 맞겠지만, 이 자금이 단순한 공산주의 확산을 위한 자금이라기보다는 한국의 독립을 위한 자금으로 지원되었을 측면이 있다. 이를 임시정부의 한 부분이 자신들이 수령인이라는 것 하나로 '''자의'''로 자신들 유리한 측면으로만 사용된다면 문제가 있을 수 있다. [3] 애초에 이걸 부정하면, 같은 독립운동가인 김립도 부정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