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황후 박씨

 





高皇后 薄氏
? ~ 기원전 156년
1. 소개
2. 생애
3. 신탁의 여주인공


1. 소개


전한의 1대 황제 고제의 후궁이자, 5대 황제 문제의 생모. 이름은 전하지 않는데, 흔히 박희(薄姬)나 박태후(薄太后), 효문태후(孝文太后)라 부른다.
사후에 여후를 밀어내고 고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2. 생애


박씨의 어머니인 위씨(魏氏)는 전국시대 위나라의 왕족이었지만, 위가 멸망한 후 혼란한 정국에서 오나라 사람인 박모(薄某)와 관계를 가져서 박씨를 낳았다.[1]
이후 박씨는 성장하여 당시 위나라를 재건하고 서위왕(西魏王)에 오른 위표의 후궁으로 들어갔는데, 남편인 위표라는 인물이 처음에는 항우쪽의 사람이었다가, 항우를 배신하고 유방에게 붙었다가, 또 다시 유방을 배신하고 항우에게 붙었다가, 유방에게 패하고 사로잡혀 다시 유방쪽으로 붙었다가, 결국엔 그 상태로 형양 수비를 하던 중 항우가 쳐들어오자 도저히 저런 위표를 믿을 수 없었던 유방측 인사들에게 살해당한다. 덕분에 위표는 초한쟁패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배신자'''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2]
아무튼 위에서 말한 위표가 유방을 배신하고 항우 쪽으로 붙었다가 유방에게 패하여 사로잡혔을 때, 포로가 된 박희는 직조실에서 베를 짜는 처지가 된다. 후에 유방이 직조실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박희를 만나 후궁으로 들이긴 했으나 한 해가 지나도록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그때는 전황이 워낙 정신이 없었던 탓도 있었을 듯.
그녀는 함께 후궁이 된 관부인, 조자아 등에게 "누가 총애를 받게 되건 서로를 잊지 말자."고 맹약하였는데, 어느날 유방이 성고에서 후궁들을 끼고 다닐 때 관부인과 조자아는 불려갔으나 박희만이 유독 따돌림을 당했다. 문득 박희가 한 말이 떠올라 관부인과 조자아가 웃자 이상하게 여긴 유방이 이유를 물어보아 이 일을 알게 되었는데, 그 말을 듣고 유방은 박씨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그녀를 불러들여 잠자리를 가졌고, 기원전 202년에 황자 유항을 낳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반짝하는 총애였을뿐, 전체적으로 보면 박씨가 유방의 총애를 받는 기간은 아주 짧았다.[3]
그런데 이 일이 의외의 전화위복이 되는데, 유방이 황제가 되고 한신이 주살당한 기원전 196년에 당시 8세이던 박씨의 아들 유항이 대왕(代王)으로 봉해졌고, 박씨 자신도 대왕태후(代王太后)로서 동생 박소(薄昭)를 대국의 승상(丞相)으로 삼아 곧장 봉국으로 부임하였다. 결국 박씨가 그다지 유방의 총애를 받지못한 탓에 권력에 중심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었고, 이 덕분에 고조 사후에 고황후 여씨가 실권을 장악하고서 고조의 총애를 받은 후궁들과 그 자녀들을 숙청할 때에 박해를 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거기다 이렇게 박씨 모자가 몸을 피하고 있던 기원전 180년, 권력을 잡고 있던 여씨 일족이 주발, 진평, 유장 등에 의해 모두 주살되고, 살아남은 유방의 자식들 중 박씨의 아들인 대왕 유항이 황제로 영립되자 박씨 역시 황태후가 되어 장안으로 당당하게 입성한다.
그리고 이로서 여후로 인한 황통은 완전히 끊어지고,[4] 문제 이후 전한과 후한의 황제들, 심지어 촉한의 황제[5]들까지 모두가 박씨의 후손으로서 혈통을 이어가게 된다. 결국 유방의 총애도 못 받고 베나 짜며 비웃음 당하던 박씨야말로 유방의 여인들 중 '''최후의, 진정한 승리자'''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
또한 박씨는 황태후가 된 이후에도 여씨처럼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고, 평화를 중시하며 현명하게 처신해 주위의 존경을 받았다.
일례로 기원전 176년 지방으로 부임하게 된 주발에게 모반의 조짐이 있다는 말이 전해지자, 문제는 주발을 압송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를 들은 박태후는 곧장 아들인 문제를 불러서는 두건을 집어던지며 "주발 장군은 여씨를 타도할 때에 황제의 새수를 보관하고, 북군을 통솔했음에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어찌 작은 현에 있는 지금에서야 모반을 일으키겠는가?"라고 질타하였고, 결국 주발은 옥에서 나와 복직될 수 있었다. 여후의 경우 자신이 나서서 공신들을 잡아 족치며 토사구팽을 해댔던 것과 비교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외척 세력에 관해서도 여후는 자신의 일족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나라를 통째로 삼키려고 했지만, 박씨는 동생인 박소가 칙사를 살해하는 일을 저지르자 그를 자결시키기도 하는 등, 자신의 일족인 외척의 준동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아 아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정치적 감각도 보여주었다. 여러모로 여후의 안티테제격인 포지션.
이런 언행 덕분인지 박씨가 죽고 시간이 흘러 후한이 건국된 뒤, 광무제는 여씨에게서 고황후의 지위를 박탈하고 박태후를 그 자리로 추존하였다.[6] 하지만 고제의 장릉(長陵)에는 합장되지 못했다.

3. 신탁의 여주인공


박씨가 이렇듯 유방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척부인이나, 권력을 휘어잡았던 여후를 누르고 '''최후의 승리자'''가 된 것에는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있다.
박씨가 아직 위표의 아내이고, 위표가 아직 위왕이던 시절, 당시 유명한 관상쟁이 허부(許負)가 박씨의 관상을 보고는 그녀에게 '''"천자를 낳을 상이다."'''라고 말을 해버린 것. 그리고 이 말을 들은 위표는 아내인 박씨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아들이 천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김칫국을 거하게 들이키고, 호기롭게도 유방과 항우의 줄다리기에 자신의 몸을 던진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위표의 비정상적인 배신 릴레이에는 이런 황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더 재미있는 것은 저 말을 들은 위표가 폭주해서 날뛰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박씨가 유방의 후궁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대로 베 짜는 종이 되었다가, 유방의 아이를 낳아 그 아이가 정말로 천자가 되어버린 것.
결국 저 예언이 완벽하게 들어맞은 것은 물론이고, 애초에 저 예언이 없었다면 위표가 간이 배밖에 나와 박쥐행각을 하지도 않았을 테니 박씨가 천자를 낳을 일도 없었을 거라는 소리다.
거기다 기이하게도 유방은 위표의 아내인 박희를 빼앗아 후궁에 넣은 후에도 전남편인 위표를 죽이지 않고 계속 막하에 부하로 두었고, 이 때문에 위표는 원래는 자신의 아내이자 장차 천자를 낳는다고 했던 박씨가 유방의 후궁에 들어가는 과정을 옆에서 전부 지켜봐야만 했다. 과연 이때 위표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자신이 놓친 박씨의 아이가 태어나 황제에 오르는 것까지는 보지 못하고 죽었으니 이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훗날 촉한의 황후가 된 한소열제[7]의 황후 목황후 오씨에게도 비슷한 일화가 전한다. 해당문서 참고.
[1] 정식 결혼이 아닌 사통이었다고 전해지며, 아버지 박모는 회계군 산음현에서 죽었다고 한다.[2] 물론 항우와 유방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것이 위표뿐만은 아니겠지만, 위표는 저 와중에 멀쩡한 부모까지 팔아서 핑계를 댔기 때문에 유교사회이던 당시로서도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 그 다혈질인 항우조차도 이런 유교적인 비난이 무서워 유방의 아버지를 삶아죽이지 못했다는 걸 기억하자.[3] 단 한 번 잠자리를 함께 했다고도 한다.[4] 혜제 이후의 황제들이 혜제의 친자식인지는 논란이 있지만, 여후가 자신의 일족의 아이를 데려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므로 어쨌든 여씨 일족의 핏줄로 황통이 이어지는 것이 단절된 것은 확실하다.[5] 촉한의 황제들은 문제의 손자이자 경제의 아들인 중산정왕 유승의 후예들이다.[6] 당연하지만 광무제 역시 여후가 아니라 박태후의 후손이다.[7] 상술했지만 역시 박 태후의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