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황후 여씨

 

'''역임한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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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초대 황후'''
'''呂雉 | 여치'''

<colbgcolor=#a11> '''시호'''
[1]
'''출생'''
기원전 241년 진(秦)
'''사망'''
기원전 180년 8월 18일
전한 장안 장락궁(長樂宮)
'''능묘'''
[2]
'''재위'''
'''전한 황후'''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95년(7년)
'''전한 황태후'''
기원전 195년 ~ 기원전 188년 (7년)
'''전한 태황태후 (섭정)'''
기원전 188년 ~ 기원전 180년 (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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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11> ''''''
여(呂)
''''''
치(雉)
''''''
아후(娥姁)
'''부모'''
부친 여선왕 여공
'''형제'''
큰오빠 여도무왕 여택
둘째 오빠 조소왕 여석지
언니 여장후
여동생 임광후 여수#s-5
'''부군'''
전한 태조 고황제
'''자녀'''
전한 효혜황제, 노원공주

1. 개요
2. 생애
2.1. 건달 마누라에서 황후
2.2. 여씨(呂氏) 천하
2.3. 죽음과 여씨 천하의 몰락
2.4. 대외 관계
3. 평가와 비판
3.1. 옹호론
3.2. 비판론
4. 대중 매체에서
4.1. 초한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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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한 고조(고제)인 유방(劉邦)의 아내이자 황후. 시호는 남편인 유방의 시호 고황제(高皇帝)에서 따와 고황후(高皇后)[3]. 그리고 기록에 남은 '''중국 최초의 황후'''[4]이자 '''최초의 황태후, 최초의 태황태후'''의 이력을 가진 여인이다.

2. 생애



2.1. 건달 마누라에서 황후


이름은 여치(呂雉). 한자로는 ' 치(雉)' 자를 쓴다. 때문에 한나라 당대에는 피휘하여 꿩을 가리킬 때 雉(치) 대신 野鷄(야계, 들이라는 의미)라는 표현을 썼다. 흔히 사기의 본기 제목으로 쓰인 여태후나, 여후 같은 '성+지위'로 된 명칭으로 불린다.
부유한 집안의 여식으로 태어났으나, 아버지인 여공(呂公)[5]이 할 일 없이 패현에서 배때기나 벅벅 긁고 굴러다니는 유방을 보고 그의 몸에 서린 왕기를 간파, 억지로 주겠다 주겠다 애원해서 시집보냈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그녀가 뒤에서 숨어서 이야기를 듣다가 유방이 계속 거절하니 직접 면담해서 혼인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대담한 기질에 내면에 무서울 정도의 야심을 지니고 있는 여성이었다. 심지어 포로가 되어서 항우 앞에 포박당해 있을 때도 '네놈이 뭘 어떻게 할 거냐. 죽일 테면 죽여봐라. 너 따위는 내 남편의 상대가 안 된다.'라는 태도를 유지해서, 같이 포로가 된 유방의 부모 유태공항우를 모두 벙찌게 만들었을 정도로 담력이 출중했다.
유방과는 달리 가족을 무척 아꼈다. 다만 종친들에 비해서 자식에겐 유방과 마찬가지로 이중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팽성대전 와중에 어찌된 일인지 혜제와 노원공주가 둘이서만 길에 버려져 있었던 것과, [6] 유여의 사건 이후 혜제에 대한 행동이 그것.[7]
유방이 건달 시절에 사고를 쳐서 도망다닐 때마다 대신 형벌을 받고 옥살이를 했고[8] 유방이 거병해 곳곳에서 전투를 치를때에도 그냥 담담히 자기 할 일을 하며 확실히 집안 내조를 했으며, 결국 아버지가 바란대로 귀인의 자리에 이르렀지만… 그때부터가 진짜 잔인무도함의 시작.
토사구팽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유방한신, 팽월, 경포 등 무위가 있는 개국공신 출신 이성제후왕들을 모조리 숙청한 후 거기에 유씨 황족들로 갈아치우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지만, 사실 유방도 내심 마음이 편치 않았던지 대놓고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라면 목숨만은 부지해주려 하였다. 팽월도, 한신도 직위를 빼앗기는 선에서 끝나려는 것을 최종적으로 여후가 나서서 처단했다.[9] 또 다른 모반한 이성제후왕인, 옛 유방의 친구 노관은 '유방이 병들었고 여후는 왕들을 숙청하니...'라 하면서 여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모반을 철회하지 못했고, 유방이 쾌차하면 죄를 빌 생각이었으나 결국 유방이 죽자 흉노에 투항해버렸다.
그런데 이렇게 점점 정치에 개입하는 여후의 행동이 눈 밖에 난 것인지는 불명하나 한고조는 뜬금없이 태자인 유영을 유약하다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가장 총애하는 측실 척부인(戚夫人) 소생인 유여의를 자기와 가장 닮았다고 치켜세우며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척부인도 유여의를 태자로 만들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면서 여후와 대립각을 세웠다. 그러나 무위지치 체제가 시대의 흐름인 것에 모두가 동의하는 상황에서 전쟁을 벌일 것도 아닌데 유영의 성격이 문제가 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더군다나 고작 몇 년 전에 후계구도를 뒤집으며 억지로 황제에 오른 뒤 아예 나라를 말아먹은 호해의 전례까지 있다보니 곧바로 주창(周昌), 숙손통 등 모든 대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서 뜻대로 되지 않았다.[10]
그럼에도 계속 고집을 부리는 유방으로 인해 여후가 근심하자, 어떤 사람이 '폐하는 유후께서 하는 말만큼은 꼭 들어주시니 유후를 한편으로 만들라'고 간한다. 장량을 찾은 여후는 '당대의 은사(隱士)인 상산(商山)의 사호(四皓)[11]를 데려다가 황제의 눈에 띄게 하라' 라는 조언을 들어 그대로 실행하였고, 자기가 불러도 오지 않던 명사들이 태자를 따르는 것을 본 유방은, 결국 태자를 폐위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대신 유여의를 조왕에 봉하여 그의 모친인 척부인과 함께 가도록 했으며, 여후가 자기가 죽은 후 유여의 모자를 핍박할 것을 우려, 태자 폐위에 반대해 여후에게 도움을 준 주창을 조나라의 재상에 임명했다.
유방이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 여후가 고명을 청하며, 재상인 소하가 연로하였으니 후임 재상을 누구로 할 지 묻는다. 유방은 소하의 후임으로 조참을 지목한다. 여후가 조참 사후에는 누구를 재상으로 삼을까 물으니, 왕릉이 좋겠는데 내정은 진평이, 군사는 주발이 보좌하게 하라고 말한다. 여후가 다시금 두 사람의 후임을 물으니, 유방은 짜증이 났는지 다음과 같이 쏘아붙이고 대화를 접어버린다.

'''그 뒤는 당신이 알 바 아니오.'''

다만 이 부분은 오늘날 와서는 공신 세력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프로파간다로 창작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여후가 유방의 유지를 지킬 만큼 그에게 각별한 감정이 있었을리도 없을 뿐더러 죽기 직전의 유방은 치료조차 거부할 정도로 살 기력을 잃은 상태였다. 실제로 해당 유지가 얼마나 지켜졌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애시당초 조참은 혜제의 의지가 반영된 인사이고, 왕릉은 여후에게 반발했다는 이유로 좌천된 것에 분노해 죽을 때까지 조정에 나오지 않았으며 진평과 주발은 고후기 말년에 가서는 여산에게 대부분의 권한을 빼앗겨서 거의 실각된 수준으로 파워를 잃었다고 한다. 그렇다보니 여씨의 난 당시 주발은 군사 지휘권이 하나도 없어서 황명을 날조해야 했다.

2.2. 여씨(呂氏) 천하


유방이 임종하는 자리를 지킨 여후는 잠시 욕심이 솟아서, 유방의 죽음을 숨기고 황명을 사칭해 공신들을 대거 숙청하고 자신이 공식적으로 정권을 장악해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우연히 정황을 포착한 역상이 "번쾌진평같은 공신들이 거의 대부분의 군사를 데리고 바깥에 나가있는데 사람들이 반란하면 어쩔 셈이냐"며 넌지시 압박하자 계획을 포기한다. 이에 유방의 장례를 치르고, 공신들을 자극할 생각도 거두었다.
하지만 아들인 혜제의 자리를 위협한 척부인과 유여의에 대한 원한만은 접지 않았는데, 유방이 사망하고 아들인 혜제가 즉위하자, 여후는 우선 척부인에게 머리카락을 자르는 곤형을 가하고 목과 발목에 쇠고랑을 채워서 궁녀를 가두는 감옥인 영항(永巷)에 감금하고 하루 종일 을 찧는 형벌을 내렸다. 그 다음에 조왕 유여의를 장안으로 소환한 후 제거하고자 했다. 조나라 재상이 된 주창은 여치의 의도를 파악하고 3번에 걸친 소환 명령을 조왕의 병환을 핑계로 모두 거절했다. 이에 여후는 방패막이인 주창을 소환해 유여의를 지킬 사람을 치워버렸고 결국 조왕 유여의는 소환됐다. 유여의는 명을 어길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장안으로 출발했고, 궁궐에 입궐한다.
모친과 달리 인자한 성격이었던 혜제는 이런 어머니의 속셈을 간파하고는, 미리 이복 동생을 마중나가 바로 자신이 기거하던 건물로 데려와 침식을 같이 하며 자신의 옆에 끼고 보호했다. 그러나 혜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의는 혜제가 아침 일찍 사냥을 나가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에 독살당했다.
조왕 유여의의 사망으로 모든 기반이 사라진 척부인 또한 산 채로 수족을 자르고, 눈을 뽑고, 음약(瘖藥)을 먹여 벙어리로 만든 다음 귀에 유황을 부어 귀머거리로 만들어서 돼지우리(뒷간을 겸하는)에 던져졌다. 이를 가리켜 사람돼지란 뜻인 '인체(人彘)'라고 불렸다. 참고로 여기 쓰인 돼지 체(彘) 자는 거의 쓰이지 않는 벽자인데, '''바로 이 사건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 글에는 종종 보이는 글자지만, 이 일 때문에 사람들이 끔찍하게 여겨 사용을 꺼리면서 한나라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사장된 것이라고.
야사에는 고제와 몸을 섞었다고 하여 음부를 짓이겼다고도 하고, 남자 죄수들에게 던져주어 능욕당하게 했다고도 한다. 또 그녀의 아들 조왕의 시체를 가져와 보여주며 농락했다고 한다. 이 사람돼지 일화는 여후의 잔학함을 잘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일화다. 사실 여후는 유방의 다른 첩들도 궁에 유폐하고 나오지 못하게 하는 등의 대접은 했으나, 이토록 처참하게 능욕한 것은 척부인이 유일하다.
여후의 입장에서 척부인은 날백수 시절의 유방에게 시집와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한 자신의 내조를 가로채려한 괘씸한 존재였다. 이는 척부인의 아들을 태자로 삼으려던 유방의 처사 탓이기도 하나 여후 때문에 감싸려 했던 한신이 살해당하고 노관과 절교하게 된 것 등 여후의 책임이 없지 않았다. 유방은 누가 자신과 함께 싸운 사람을 험담하자 코를 잘라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물론 군주제 사회, 그것도 아직 국가로써의 기반이 다 잡히지 않은 황조 초기에 태자 자리에서 쫓겨난 적자와 그 친모가 숙청당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다. 척부인 또한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삼으려 온갖 수를 쓴 야심 있는 인물이니만큼, 여의가 황제가 됐다면 척부인 모자나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여후와 혜제의 신변을 위협했을 가능성은 적지 않다.[12] 하지만 여후는 단지 숙청에 그치지 않고 당대의 기준에서도 과하게 끔찍한 능욕과 난행을 저질렀으므로 정치적인 의도의 비중을 높게 치기 곤란하다.
뿐만 아니라 여후는 어째서인지 모르겠으나, 그 광경을 자기 아들인 혜제에게도 보여주었다. 충격을 받은 나머지 드러누웠던 혜제는 눈을 뜬 뒤 "사람이 되어서 이럴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의 아들인 저 또한 무슨 염치로 천하를 다스리겠습니까.'''"라고 말한 후 정치에서 손을 뗀 채 술독에 빠져버렸고, 엄청난 트라우마로 인해 폐인과 다름없이 지내다가 23살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고 만다. 그런데 미쳐서 틀어박혔다는 혜제가 이후로도 여기저기서 나타나곤 하며, 말년에는 여성 한정 독신세를 추진하기도 하여 정치에서 손을 놓은 이유는 미쳐서가 아니라 당시 재상 조참의 의견을 따랐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아무튼 그 후 척부인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기록이 없지만, 저런 꼴을 당했으니 오래 살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사람돼지'가 된 시점에 사망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들 혜제가 죽은 이후, 혜제의 양자인 소제 유공이 즉위하지만 나이가 어렸기에 섭정으로서 국가 권력을 좌지우지 하게 된다. 이때 곡을 하면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는데 진평은 이것이 신변에 불안감을 느껴서 그런 것이라는 조언을 듣고 군권을 큰오빠 여택의 두 아들 여태·여산과 작은오빠 여석지의 아들 여록 등 친족들에게 맡기는 걸 찬성했고 이것이 여씨천하의 기반이 되었다. 또한 측근인 심이기가 직위는 좌승상인데도 은근슬쩍 낭중령까지 겸임하면서 위병을 전부 통제 하에 놓고 왕명의 출납을 둘이서만 맡으면서 궁궐의 모든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이렇다보니 심이기는 여후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돌아서 혜제에게 죽을 뻔했다. 대신들도 다들 심이기를 싫어했기에 나몰라라했다고. 여후 사후에는 공신들의 주적이 되어서 여후가 죽자마자 탄핵되었고, 여씨 몰살 후 잠시 복직되었지만 문제 3년 때 회남왕 유장에게 살해당했다.
이 과정에서 남편 유방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연왕의 자리를 큰오빠 여택의 손자인 '''여'''통에게 주었고, 이를 위해 전 연왕인 유방의 서자 유건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이러던 중 유공이 자신의 친모가 여후에게 살해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이만 들면 여후를 가만두지 않겠다며 이를 갈고 있다는 것이 여후의 귀에 들어간다. 여후는 황제가 성장하면 자신에게 보복할 것을 우려하여 유공의 정신에 문제가 있다는 구실로 폐위시키고 유홍을 즉위시켰다. 이때는 명목상 새 황제가 즉위했는데도 연호조차 바꾸지 않았다.
주무기(?)는 짐주(鴆酒)라는 이름의 술을 가장한 독. 독사를 먹고 사는 새인 짐새의 깃털로 담근 술이라고 한다. 유여의도 이것으로 죽였고, 혜제가 권했다고 하나 황제보다 상석에 앉으려고[13] 했던 제왕 유비를 보고 위험시해 연회중 혜제와 건배할 때 짐주로 바꿔치기 해서 먹이려다 되려 '''자기 아들내미가 그 잔을 잡고 마시려고''' 하자 무시무시한 속도로 잔을 엎어버렸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유비는 여후의 친딸인 노원공주에게 봉지의 상당부분을 헌납하는 것으로 여후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이때가 딱 인간돼지 사건으로 시름시름 앓던 혜제가 모처럼 일어났던 때였다. 형제와 그 어미가 살해당한 충격으로 1년을 내리 앓던 아들에게 이번엔 그 눈 앞에서 보란듯이 다른 형제를 독살하려고 한 것.
그나마 제왕 유비는 운이 좋은 편. 조왕 유여의는 짐주를 먹고 사망했고 또 다른 유방의 서자 조유왕 유우는 조나라에서 말 한번 잘못 했다가 여태후에게 잡혀서 굶어죽는 비참한 신세가 됐다. 여태후는 조유왕을 죽이고 또 다른 유방의 서자 유회를 양나라에서 조나라로 옮겨 조공왕으로 삼고 또 여씨의 사위로 삼았는데, 조공왕이 딴 여자를 사랑하자 이 여씨 왕후가 그 여자를 죽였다. 조공왕은 상심이 커서 자결했고 여태후는 조공왕이 여자 때문에 목숨을 버렸다며 조나라를 조공왕에게서 뺏어 자기 조카 여록에게 주었다.
결국 유방의 아들 중 여후의 친아들 혜제에다 유비, 유여의, 유회, 유우, 유건의 6명이 여후 때문에 여러모로 불행해진 셈. 그나마 문제와 회남왕 유장만이 멀쩡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어머니 박씨가 유방에게 총애받지 못했기에 피해갔고[14], 두 동생 조유왕과 조공왕이 횡사한 후 여태후가 조나라 왕위를 제안하자 겸손하게 거절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회남왕 유장은 어머니 조씨는 여태후와 무관한 건으로 죽었는데 그 후 여태후가 키워줘 그나마 정이 있었던 듯. 근데 이 유장마저 어머니가 일찍 죽어 불쌍히 여긴 문제는 유장을 오냐오냐했고 이에 유장이 점점 비뚤어져, 불행한 결말을 맞는다.

2.3. 죽음과 여씨 천하의 몰락


죽음의 계기도 심상치가 않았는데, 《사기》 〈여태후 본기〉에 따르면 갑자기 나타난 푸른 개처럼 생긴 괴물이 겨드랑이를 툭 치고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태후가 지나는 길에 쥐새끼라도 지나갔으면 눈에 안 띌 리가 없을 텐데, 주변 사람들은 되려 '그런 게 있었느냐'는 반응이길래 점을 쳐봤더니 '''죽은 조왕 유여의가 태후에게 보복을 하고 있다'''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여후는 황제를 제멋대로 세우고 교체했으며, 유씨 번왕들의 땅을 찢어서 여씨들에게 주고 왕으로 세우는 등의 폭거를 저질렀기에 공신들은 여후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던 여후는 장안으로 복귀하자 조왕 여록을 상장군으로 임명하여 북군을 장악하게 하고, 양왕 여산을 상국으로 삼아 남군을 지휘하게 한 뒤 '내가 곧 죽을 텐데 그러면 대신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니 내 장례를 미루고 군사들을 동원해 황제를 사수하라'는 유지를 남겼다.[15]
과연 여후가 죽자 장안에 있던 유장은 아내인 여록의 딸을 정보원 삼아 여씨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이참에 자기 형인 제왕 유양(劉襄)을 황제로 세울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16] 유양에게 "이러다가 나 죽겠다. 빨리 군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오라. 안에서 내응할 테니 여씨를 다 족치자"는 밀서를 보낸다. 유양이 제나라 군사를 이끌고 진군하자 상국이던 여산은 관영에게 토벌군을 맡겼다. 그러나 관영은 조금 가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주저앉더니 은밀히 제후들에게 "여씨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까지 기다려라. 그때 같이 때려야 반란 혐의를 안 뒤집어쓴다. 조금만 기다려보자"라고 귓속말을 보낸다. 근데 이를 몰랐던 여씨들은 "설마 관영이 배신하진 않겠지? 관영이 제나라 군사들과 격돌할 때 거병해야겠다(…)"고 정하는 바람에 서로 생각이 엇갈렸고 그대로 대치가 이어진다.
장안의 분위기에 불안감을 느낀 태위 주발은 승상 진평과 상의하는데, 역상의 아들 역기가 여록과 친하다는 걸 떠올리고 역상을 인질로 삼아 역기를 협박한다. 결국 역기는 부친을 살리기 위해 '병권을 태위에게 인도하고 영지에서 제나라를 막는 게 낫겠다'고 여록을 속이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여후의 여동생 여수#s-5는 '상장군이 군사를 버리고 어딜 가느냐! 우린 다 죽었구나!' 라며 화를 내고 방의 재물을 모조리 마당에 뿌려버리는 통에 계획이 물거품이 될 뻔하지만, 역기가 '황제도 북군의 지휘를 태위에게 맡겼다'고 추가타를 날리자 결국 낚인 여록은 인수를 대뜸 내주고 만다. 주발은 인수를 확보하자 "여씨를 계속 따를 자는 우단(右袒, 오른쪽 어깨를 내놓는다)하고, 유씨를 따를 자는 좌단하라"고 명령했는데,[17] '''모든 장병들이 갑옷의 왼쪽 어깨 부분을 풀었다'''! 여후의 악명이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18]
하지만 남군은 아직 여산의 수중에 있었다.[19] 여산과 맞다이를 뜰 자신이 없던 주발은 유장에게 '일단 입궁해서 황제부터 지키라'며 병사 천 명을 지원해주었다. 유장이 일단 궁성에서 상황 좀 볼까 하며 서성이고 있었는데, 궁문에서 입구컷을 당해 멍때리던 여산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정적이 흐르는 사이 상황 파악을 조금 빨리 마친 유장이 다짜고짜 여산을 기습했다. 난데없는 상황에 여산의 부하들은 싸움다운 싸움도 못한 채 패퇴했고, 도망쳐서 화장실에 숨은 여산이었지만 유장에게 발각당해서 참살되었다. 칼과 몽둥이로 시작된 초-한 시대의 결말에 걸맞는 장면이라 할 만하다. 궁성을 완전히 정리하자 여씨 일족을 모조리 잡아다 베어버렸는데 여록이 제일 먼저 참수당하고 번쾌의 아내인 여수도 죽고 말았다.[20]
후일 전한이 멸망한 후 혼란기에 적미군이 장안에 들어와 역대 한나라 황릉을 대거 도굴할 때 유방과 여후가 묻힌 장릉도 도굴당했는데, 이때 시신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생전의 전횡에 대한 업보 때문인지, 후한의 초대황제 광무제에게 고황후 자리를 박탈당하고, 그 자리는 위표의 첩에서 한고제의 후궁이 된 고황후 박씨에게 돌아갔다. 고황후 박씨한문제의 어머니로, 전소제와 후소제가 혜제의 아들이 맞다는 전제 하에 여후의 후손은 후소제까지가 끝이지만, '''한문제를 시작으로 전한후한, 촉한의 황제들은 전부 이 고황후 박씨의 후손이다.''' 박씨는 한고제의 총애를 잠깐 받고 끝나 여후의 숙청을 피할 수 있었고, 현명하게 처신한 덕분에 유방의 여인들 중 최후의 승리자가 된 셈이다.

2.4. 대외 관계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다 간 여걸이었으나, 당시 한나라의 대외적인 국력은 바닥을 기고 있었으며 변방에서는 흉노족 같은 이민족들이 득세하며 계속 세력을 불려나갔다. 매일같이 식량을 빼앗기고 백성들이 납치당했으나, 약해질 대로 약해진 한나라 군대는 흉노족 같은 이민족들을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일단 초한대전의 타격이 너무나 심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장수가 타고다닐 이 없어서 로 대신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거기다 백등산 포위전에서 아예 한고조 유방이 흉노에게 비참할 정도로 쳐발린 이후로는 매년 굴욕적이지만 한나라에서 흉노에게 무명, 비단, , 곡식 등을 보내주는 등 한나라측에서 처절할 정도로 흉노 측에 먼저 숙이고 들어가는 굴욕적인 상황이 지속되었는데 이는 유방이 죽은 뒤 여후, 문제, 경제가 집권한 시기에도 그 구도가 지속될 정도였다.

“나는 외로운 군주로서 습한 소택지에서 태어나 이 가득한 들판에서 자라났소. 여러 차례 변경에 가보았는데 중국에 가서 놀고 싶은 희망이 있었소. 이제 그대홀로 되어 외롭게 지내고 있으니, 우리 두 사람이 모두 즐겁지 않고 무엇인가 '''즐길 것'''이 없는 듯하오. 그러니 각자 '''갖고 있는 것으로 서로의 없는 것메워 봄이 어떻겠소?'''”

ㅡ 흉노의 선우 묵특이 여후에게 보낸 편지

심지어는 흉노선우 묵특으로부터 위와 같은 "우리 둘 다 짝이 없고, '''즐길 것'''도 없는데 '''서로 부족한 것채우면 어떨까'''"와 같은 편지를 받기도 했다.[21] 그렇지 않아도 성질이 괴팍하기로 소문난 여후는 이 성희롱적인 편지를 받고 모욕감과 수치심으로 펄펄 뛰면서 즉각 전쟁을 하려고 했고 이때 번쾌가 노망이 났는지 아니면 처형이(즉 자기 가족이) 성희롱당했다는 모욕감에 눈이 돌아갔는지 자신에게 10만의 군대만 주면 흉노를 쓸어버리겠다며 조정을 선동했는데 다른 신하들도 여후의 눈치를 살피느라 맞장구를 쳤지만 오직 계포만이 혼자 나서서 "'''번쾌를 참하십시오.''' 선황제조차 40만이 넘는 병력과 명장들을 이끌고 원정했지만 다 죽다가 겨우 살아왔는데, 번쾌 따위가 혼자서 뭘 할 수 있습니까? 지금 번쾌는 고작 태후께 아첨하기 위해 면전에서 태후를 기만하고 천하를 흔들려 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진나라진승에게 반란의 빌미를 준 것이 흉노에게 국력을 낭비했기 때문이며 여전히 그 상처가 낫지 않았는데도 저런 소리를 하니 '''목을 베어야 합니다.'''"라는 발언으로 기를 죽여버렸다. 모두들 여태후의 총애를 받던 번쾌에게 일갈을 한 계포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여태후도 내심 지금 흉노를 상대로는 절대 이길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잘 말려줬다고 판단한 것인지 계포에게는 별 일이 없었다.[22]
사실 이건 둘째 문제고 애시당초 흉노를 토벌할 만한 군사를 모으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유방 생전에도 백등산 포위전을 마지막으로 중앙 단독으로 10만 단위의 군사를 동원한 적은 없으며, 반란이 나도 언제나 수만 규모의 형벌부대만 꾸린 뒤 현장에서 군사를 지원받아 체급을 불리는 식으로 해결했다. 문제는 유씨 제후왕들과 죄 원수를 진 여후에겐 이런 수법도 불가능했다는 것이며, 후일 남월과의 분쟁 때 빈약한 수준의 원정군만 보내며 눈 뜨고 당하기만 하는 추태를 보이며 이런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결과로 이어졌다.[23]
하는 수 없이 부드러운 내용으로 묵특을 달래는 답장을 써서 보내기로 했으며 계포의 발언에 대해선 불문에 부쳤다. 여후 본인의 성향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나중에 조타와 시비가 붙었을 때는 한사코 원정군을 고집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냥 혜제가 반대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여태후본기에서 혜제가 유여의 일로 미쳐서 칩거했다고 하는 얘기는 다른 일화들과 교차할수록 신빙성이 의심되는데다, 심이기 에피소드를 보면 혜제가 정말 열받으면 여후도 답이 없었기 때문.

폐하께서 저희 조그만 고장을 잊지 않고 글을 내려주시니 '''저희는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물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저는 이제 늙어서 기력이 쇠하고 머리카락과 이도 다 빠졌으며 걸음걸이도 주체가 안됩니다. 폐하께서 누군가의 말을 잘못 들으신 듯한데, 저와 같이 지내봐야 공연히 힘드시기만 할 것입니다. '''저희 고장이 지은 죄가 없으니 널리 용서해 주십시오.''' 황제의 전용수레 2대에 말을 같이 붙여 보내드릴 테니 항상 타고 다니는 데 쓰옵소서.”

ㅡ 여후가 흉노 선우 묵특에게 보낸 답신

결국 흉노를 상대로 이길 수 없다는 현실 탓에 꾹꾹 눌러 참으며 위와 같이 "이 몸은 늙어서 모실 수가 없습니다."라고 치욕적인 회신을 보내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 시켰다. 이후에도 여후는 다시는 흉노 정벌을 입에 담지 않고 그전과 같이 계속 흉노의 비위를 맞춰주는 굴욕적인 외교정책을 지속하게 된다.[24]
한편, 기존에는 한나라의 제후왕국 위치에 있던 남월을 철기 교역 금지로 자극해, 남월이 황제를 자칭하고 한나라의 남쪽 변경을 맡은 장사국이 공격을 받는 단초를 제공했다. 일단 여후도 남월에 반격을 하긴 했지만 되려 습기와 전염병에 피해를 보고 물러나서 조타만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결국 2년 후에 한문제가 즉위하고 육가가 파견된 후에야 화해했다.

3. 평가와 비판


세간의 평가는 서태후, 가남풍과 함께 (가끔 측천무후와 함께) 중국 3대 악녀. 광무제는 건국 이후 여후의 시호를 박탈하고 한고조의 묘에서 축출하였으며, 한문제의 어머니 박태후에게 원래 여후의 시호였던 '고황후'를 올리고 유방과 함께 배향하였다.
한국사에서 여후에 대한 비판이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하는 기록은, 다름아닌 김부식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왕(선덕여왕)편에서 여후와 측천무후가 국정을 장악한 일을 빗대며 선덕여왕을 사정없이 비판한다.[25]

3.1. 옹호론


사마천은 여후의 치세에 천하가 평안했다고 평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로 전쟁에 시달리던 전국시대 ~ 초한전의 난세보다는 집안싸움하는 것이 더 나았고, 둘째로 한나라 초기는 진나라의 억압 통치에 대한 반동으로 되는대로 놔두는 도가식 정치, 즉 '무위지치'를 추구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직무를 방기한다는 뜻이 아니라, 백성들을 피로하게 하는 정책을 세우지 않는다는 황로(黃老)[26] 사상에 기반을 둔 정책이다. 게다가 사마천은 여태후를 제왕들의 행적을 다룬 본기에 편입하는 파격적인 행동까지 보여주었다. 참고로 한서에서도 혜제기가 별도로 빠져있을 뿐, 소제시대는 한서에서마저 고후기(高后紀)라 해서 여후를 본기로 삼았다.
사마천은 "여태후 시절에는 형벌을 시행하는 일이 드물었고, 죄인도 드물어서 치안이 좋았으며, 백성들이 농사일에만 힘쓰니, 입고 먹는 것이 갈수록 넉넉해지는 태평성대"라고 여태후의 공로를 칭송했다. 게다가 "권력층 내부에서는 피터지는 권력싸움의 연속이었지만, 여태후가 통치를 잘한 덕분인지 백성들의 삶은 평안했다"는 것이다. 여기엔 사마천 개인의 경험도 어느 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이 살던 시대가 다름아닌 계속된 전쟁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피폐해진 한무제의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 사마천 본인이 흉노와의 전쟁에 열을 올리던 한무제 때문에 성불구자가 되었으니, 여후의 국정 운영과 한무제의 국정 운영이 대비되어 보일 수밖에 없다.
즉, 사마천이 내린 결론은 '조정과 황실은 비록 피비린내 나는 암투에 휩싸였지만, 백성들에 대한 통치는 훌륭했다'이다.

3.2. 비판론


여후의 치세가 태평성세였다고는 하지만 이는 여후가 잘났다기보단 유방과 그 공신들의 영향이 큰 덕이다.
첫째로 전쟁이 없었던 것은 이미 항우가 패망하고 한신 팽월 같은 잠재적인 반역자들이 와해됐기 때문인데 이는 생전 유방의 업적이다.[27][28] 다만 한신이 회음후로 강등된 뒤 최종적으로 숙청한 것은 여후의 짓이며, 영포 토벌엔 유여의 태자책봉 실패후 완전히 의기소침해진 유방은 혜제를 보낼 생각이었지만 여후의 설득으로 본인이 출진하게 된다. 한신이나 장오의 처우를 보면 알듯이 직접적으로 반기를 들지 않으면 어느정도 봐주는 경향이 있는 반면, 여후는 위험요소가 있는것 자체를 용납 못하는 타입이다.[29]
둘째로 무위지치를 추구한 건 여후가 아니라 소하조참의 공이 크다. 소하가 법을 제정하고 조참이 이를 따르니 이 또한 그 둘을 재상으로 중용하라 유언한 유방의 혜안이 빛을 발했다고 봐야 한다.
더불어 정치에 능하고 통치를 잘했다지만 여씨들을 우대하기 위해서라면 숱하게 규칙을 어지럽히고 전횡을 저질렀다. 여후 치세 8년간 태평성대였다면 남월왕 조타에게 일방적으로 농락당하고 혜제 때만 해도 아무것도 아니었던 제나라가 두려워서 친족이 살해당해도 따지지도 못하는 비굴한 모습은 이상하다.[30]
숙청은 혜제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해석되기도 하지만, 유비 살해 미수를 보면 이것 또한 의문이 있다. 황제가 마련한 자리에서 대놓고 그 손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혜제를 무시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유여의의 일까지는 참았던 혜제도 이 이후로는 여후에게 학을 떼버렸다.[31]
유방에 비해 사적 제재도 빈번해서 진평이 고작 여수의 모함에 떨며 지내는 등 혜제 때까지만 해도 직언에 자유로웠던 한 조정의 분위기는 여후의 대에선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32][33] 그 번쾌가 여후에게 아첨하기 위해 흉노를 토벌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선동에 앞장서고, 계포가 나설 때까지 모두 눈치를 보느라 호응하기 바빴을 정도. 여후때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했는지, 분명히 성격이 좋아서 선택됐을 한문제를 상대로도 공신들이 지레 겁을 먹어서 말썽이 일어나기도 한다.[34] 유씨와 중신들과 의견을 일치하고 손을 잡고 부국강병에 힘쓰지는 못하고 마음에 안들면 무조건 숙청만 해대는 잔혹함으로 유방 생전에는 포로 생활을 했던 여후를 동정하고 보호했던 공신들이 합심해서 여씨를 몰살시키고, 혹여 외척이 또 기승을 부릴까봐 1등공신이었던 유장 형제와의 밀약까지 뒤집으며 한문제를 옹립할 만큼 그들의 마음을 떠나게 만들었다. 여후의 집권은 엄연히 공신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인데,[35] 여후는 그들의 권위가 불쾌하다고 해서 그들이 자신에게 준 도움에 대해 보상해야할 부분에서까지 시치미를 뚝 떼었으니 공신들이 배신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36][37] 섭정 통치를 악용할 경우 합법적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보여준 선구자였으니 어떻게 보면 후대에도 민폐를 끼친 셈이기도 하다.
그렇게 가차없이 이성왕들을 잡아 죽였으면서 사위 장오가 유방 암살사건에 연루됐을 땐 오히려 장오를 당장 처형하겠다고 벼르는 유방을 밤낮으로 울면서 뜯어말리기도 했다니 영 종잡을 수 없는 인물. 하지만 이는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닌 게, 장오는 여후의 사위였다. 사위인 장오가 걱정된 것. 실제로 제왕 유비도 여후의 딸인 노원공주에게 봉지를 넘기자 숙청의 칼날을 피하기도 했고. 그냥 자기 자식은 귀하고 유방이 다른 여자와 낳은 자식은 없애버린 것이다.
잔혹한 형벌, 보복정치, 종친 편애 등 원래 그랬던 건지, 보고 지내다가 영향이라도 받은 것인지 여후를 포로로 잡았던 항우와 단점이 매우 비슷하다. 그나마 항우는 견제할 사람이 없어서 미친 짓을 연달아 저질렀고 여후는 그래도 계포 등 그럴 인물이 없는건 아니며 본인도 항우보다는 다른 사람들 말을 들어준 편이라서 나라까지 말아먹을 개삽질을 벌이진 않았다.[38]

4. 대중 매체에서


고우영 화백의 십팔사략에서 악녀 자체로 나오는데, 실질적인 정권을 잡을 땐 아주 지옥같이 나라를 다스렸으며 여씨 성을 가진 무사들이 길거리에 있어서 태후에 대한 불만을 표하면 그 자리에서 누구라도 가차없이 베어 죽였다고 그리고 있다. 특히 만신창이가 된 척부인을 혜제한테 보여주며 아무렇지 않게 웃는 장면은 소름이 돋을 정도. 같은 작가가 그린 초한지에서도 대체로 괄괄하고 기가 센 성격으로 토사구팽에서 끝나기 때문에 이후의 악랄함은 그다지 묘사되진 않는다.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에서는 정적에게 악랄해도 정치적으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선황 치세를 이어받았고, 백성들을 배려한 편이다. 그저 정치적으로 저랬으니 유씨가 다시 권력을 잡으며 여씨를 숙청했기에 더더욱 악랄하게 있는 말 없는 말지어가며 그녀를 악랄하게 묘사했으리라 분석한다.
시바 료타로항우와 유방에선 직접적으로 묘사되진 않지만, 결코 좋게만은 볼 수 없는 차갑고 표독스러운 인물로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가령, 하후영의 아내 간간은 여치를 기분 나쁜 여자라고 생각할 정도.
영화 <서초패왕>에선 공리가 연기했다.[39] 범증이 천하의 둘도 없는 여우라고 비난하는데 후반부에 항우범증을 멀리 내보낼 때, 그 자리에 여후가 있다는 걸로 창작했다. 여기서도 범증이 분하듯이 "넌, 천하도 둘도 없는 계집이지, 넌… 넌!" 이라고 이를 가는데 여후는 가소롭다는 듯이 "그래, 난 악독한 여우라는 거겠죠?" 라고 말하는데 범증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아니! 넌, 머지않아 태후가 될 거야! 세상을 주무르겠지!"''' 라는 말을 하며 나간다.
뭐 어차피 창작 영화인지라 여후와 항우 플래그가 서는 장면을 넣는 것 등과 같이 여러 모로 창작했다. 여기서도 엄청 악랄한 점이 강조되었다. 초반부에 진나라군이 약탈을 벌일 때 쫓기는데, 같이 달아나던 시어머니가 뒤쳐지자[40]가차없이 시어머니를 넘어뜨려 뒤쫓아온 진나라군에게 끔살당하게 하곤 피신한다. 이웃들이 '그래도 시어머니잖아?'라며 경악하고 여후를 마귀 같다고 피하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영화에서는 항우와 묘한 플래그가 서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항우를 차지하기 위해 우미인을 죽이려고 하는 묘사가 있다. 항우도 어느 정도 끌리는 바람에 억류 상태에서도 죽이지는 않고 넘어가며, 항우가 죽은 후의 그의 시체를 안고 통곡하는 장면이 영화의 마지막. 오묘하게도 이 장면을 본 장량한신에게 "천하를 얻었으니 지금 물러나지 않으면 토사구팽 당할 것"이라는 대사를 한다. 그리고 자막으로, 여치는 다음 황제가 되었다고 마무리.
요코야마 미츠테루항우와 유방에서는 등장 분량이 적어서 악녀같지 않지만, 같은 작가의 사기에서는 그야말로 천하의 개쌍년으로 등장. 심지어 항우와 유방에서는 미녀였지만, 사기에서는 비만녀다.
그리고 SBS 드라마 샐러리맨 초한지의 등장인물인 백여치 캐릭터가 여태후를 모티브로 따와서 등장 중. 16화 이전까지는 그냥 개싸가지에 성격만 비슷한 재벌녀였는데, 가상의 가족관계로 나온 외조부인 진시황이 사망한 14화와 모가비(=조고)한테 당해서 쫓겨난 15화 이후에는 여태후로 각성중이다. 알코올 의존증인 척하면서 회사기밀 다 빼내고, 모가지 회장한테 복수하려고 뒷조사까지 하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여태후. 게다가 할아버지 사망원인까지 알아서, 드라마 최후반부에는 아예 여태후가 될 듯하다. 그리고 실제 여태후와 한고제의 관계와, 드라마 속 여치와 유방의 관계가 다른 것도 눈여겨 볼 만하다. [41]
중국 드라마 <초한쟁웅>에서는 권모술수를 갖춘 여장부로 묘사. 유방을 알아보고 아버지를 졸라 남편으로 맞이하였으며, 적절하게 유방에게 충고를 해주거나 직ㆍ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등 장량이나 소하도 감탄할 정도의 수완을 보인다.
역시 중국 드라마인 미인심계에서는 배경이 유방 사후인 만큼 막강한 권력을 기반으로 온갖 음모와 독한 술수도 주저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뜻에 따라 황제의 자리 만큼은 여씨가 아닌 유씨로 유지하려는 카리스마가 ㅎㄷㄷ한 인물로 그려진다. 심지어는 여록이 압박하여 여씨 집안의 갓난아기를 황위에 올리려 하자 즉위식에서 잠깐 안은 사이 아기의 코와 입을 막아 죽여버린다.
레드 드래곤이라는 일본 만화에서는 로리 캐릭터로 나온다. 아버지는 안 나오고 이미 그녀가 집안을 이끄는 주인. 유방이 연회에 찾아와 돈 1만전을 가져온 것처럼 사기를 치며 대놓고 진나라를 멸망시키겠다고 포부를 밝히며 자신을 지원해달라고 하자 흥미로워하며 그 제안을 받아들이더니 일방적으로 유방의 아내를 자처한다. 다만, 유방은 그녀가 빈유라서 거리를 둔다. 좀 더 진지한 이유는 너무 이성적이라서지만.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초한지에서는 이명호[42] 가 연기한다. 드라마 내 캐릭터 묘사를 보면 첫만남부터 유방의 거병 때까지 사기의 기록을 주로 따라가며, 그 이후부터는 오리지널 묘사가 늘어간다. 팽성대전에서 항우에게 인질로 잡힌 뒤 강단 있는 모습을 보이면서 남편을 원망하며 분을 삭히는 감정을 드러낸다. 광무 대치 시점에서는 시부모들을 통제하는 반면 협정이 맺어지기 전까지 야망을 완전히 드러내 오리지널 캐릭터인 간수를 부려먹는 모습을 보인다. 해하 전투 이후, 흔히 알려진 여태후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토사구팽 이후의 사건은 척부인을 구박한 것을 제외하고는 생략되고 유방의 간호를 돕는 모습이 마지막이다. 혜제 즉위 이후의 악행과 여씨 일족의 전횡이 생략되어 라디오드라마화의 수혜자라 볼 수 있다. 황후가 된 후 유방에게 말한 게 무시당하거나 척부인 건으로 위협할 때의 주요 대사는 "나 여칩니다..!!, ~ " 이다. 유방 사후의 행적은 후속작 19화에서 동태후하태후의 고부갈등 부분에서 간략히 서술된다.

4.1. 초한전기


[image]
황후가 된 뒤[43]
한편 중국 드라마 초한전기에서도 등장. 배우는 친란(진람). 한국 더빙판 성우 최정현. 초반부터 등장한다. 여문이 이사온 날 잔치에 허풍치며 들어온 유방과 투닥거리며 인연을 맺게 된다. 사실 여문네가 이사온 것은 여치 때문으로, 결혼 날짜까지 잡아놓고 난데없이 신랑감이 맘에 안 든다고 파혼한 것. 그리하여 이사하게 되었고 신랑집 사람들이 와서 소란을 피우나 유방과 패거리들이 이 소란을 막아준다. 아무래도 이때 유방에게 플래그가 선 듯하다.
아주 당차고 활달한 여성으로 묘사된다. 가난을 충분히 각오하며 고된 일도 묵묵히 견뎌낸다. 게다가 틈틈이 남편을 잘 챙기고 시아버지에게 예를 다하는 양처. 그럼에도 남편에 지지 않고 할말 다하는 당당한 마눌님이다. 다소 조용조용한 우미인 커플에 비해, 남편과 애정표현도 자주있는 끈끈한 커플이다. 기존 매체가 유방&여치 부부는 그다지 각별히 그리지 않는 데 반해, 여기선 우미인 쪽에 뒤지지 않는 한쌍이다. 게다가 배우 진람의 미모도 결코 우미인 역의 리이샤오에게 밀리지 않는다! 한나라의 히로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드라마유방항우의 싸움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유방 사후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잔인무도한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초반에 자기 남편인 유방을 욕하는 형님(유방의 형수)의 뺨을 때리는 등 범상치 않은 모습은 보여주는 편. 유방과 그의 거친 동생들과 살다보니 성질이 좀 거칠어 졌다. 노관과 혼인 예정이던 여동생이 번쾌가 NTR하자 유방이 화가 나서 처제를 때렸는데, 그대로 언니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일렀더니 뭘 잘했냐면서 몽둥이로 때려서 내쫓는다.[44] 그리고 노관에게는 "저런 지조 없는 애랑 결혼하지 말라, 좋은 낭자를 구해주겠다"고 한다. 이런 여장부 같은 성질 때문에 유방의 패거리들도 잘따른다. 유방이 거병해 패현을 떠난 사이에는, 무능력한 아주버니들과 무식한 형님의 등쌀에 시달리며 홀로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있다. 눈물나게 고생하는 챙겨주는 사람은 시아버지 유태공 하나뿐.
그 와중에 유방은 척부인을 들여서 희희낙락하고 있다. 유방이 한왕이 되자, 가족을 파촉 지방으로 불러 같이 살게 된다. 그러면서 이미 유방과 같이 살고 있던 척부인과의 갈등도 다루고 있다. 번쾌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 들이는 등 약간의 경계는 하고 있었지만 딱히 공격을 한다거나 그런 행동은 하지 않고 있었는데, 척부인 측에서 먼저 공격한 걸로 묘사하고 있다.[45] 덕분에 서로 간 갈등의 골의 깊어지는 도중, 척부인이 아들을 낳자 소하의 조언을 들어 유방을 떠난다.
그 이후엔 초나라 군에 잡혀 몸고생, 마음고생을 다 하다가 풀려나와 다시 유방을 만난다.[46] 전쟁이 끝난 뒤 천하통일이 된 마지막 회에도 잠깐 나오며, 한신을 잡아와 "넌 너무 건방졌다. 어디 여인들에게 죽어 보거라"는 말과 함께 모반죄를 벌한다며 "죽여라"라고 명한 뒤 여시종들에게 죽는 한신을 뒤로 한 채 퇴장한다.

[1] 광무제 삭탈.[2] 고제와 합장되었다. 추후 광무제가 삭탈함.[3] 한나라 황후들은 시호가 대부분 이렇게 정해졌다. 그래서인지 시호보다는 이름이나, 지위에 성을 붙인 경우가 통칭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4]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이나 이세황제 호해도 여러 자식이 있어서 부인은 많았겠지만, 이들이 황후를 책봉하였다는 기록이나 고고학적 자료가 전혀 남아있지 않다.[5]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인용한 상경(相經)의 기록에는 이름은 여문(呂文). 자는 숙평(叔平)이라는 기록이 있다.[6] 여후와 태공은 초나라 군사에게 쫓겨다니다가 붙잡힌 게 아니라 미리 도망쳤지만 유방을 찾아다니다가 하필 초나라 군사와 딱 마주쳐서 포로가 된 것이라 자식을 둘이나 잃어버릴 만큼 정신없는 상황은 아니었다.[7] 유여의의 일로 1년을 드러누운 혜제 앞에서 보란듯이 똑같은 짐주로 제왕 유비를 독살하려 했고, 5년 후 혜제가 죽었을때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8] 이때 여치가 갇힌 감옥을 관리하던 옥리들이 여치에게 매일 가혹행위를 하기도 했는데, '임오'라는 옥리의 도움으로 가혹행위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임오는 유방의 거병 이후 함양 공략에 나선 유방 대신 본거지인 풍읍을 수비하는 등 한의 건국에 기여한다.[9] 다만 팽월, 한신은 군재가 뛰어나고, 거기에 팽월은 유방의 신하라기보단 자체적인 군사력을 지닌 동맹에 가까운 상대였다. 고로 살려두면 나중에 반란을 저지를지 모르고, 특히 한신 같은 경우엔 제나라 왕 자리를 두고 유방을 협박한 전적도 있는데다 회음후로 강등된 이후에도 왕 대접을 해준 번쾌를 모욕했다. 왜 이것이 문제냐 하면 번쾌는 여후의 여동생과 결혼한 사람으로 여후일파의 핵심인물이다. 거기에 한신은 다다익선의 고사를 보면 알듯이 황제인 유방도 깔아보는 매우 교만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런 인물이 중화역사상 손꼽히는 명장이니까지 하니 여후로썬 숙청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10] 유방 치세 말기에 가면 원래는 가장 유들유들했던 숙손통이 유방의 말꼬리를 붙잡으며 몰아세우는 등 신하들도 유방의 태도에 익숙해진 듯 조목조목 설득하기보다는 유방의 경박한 태도 쪽이 거슬리게 느껴졌는지 언행에 날이 선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런 만큼 부호의 딸인 여후가 지닌 교양에 끌렸던 것이었을 수도 있다.[11] 각각의 이름은 동원공(東園公)·기리계(綺里季)·하황공(夏黃公)·녹리선생(甪里先生)이다.[12] 다만 위에서 나온 바와 같이 여후의 여동생은 한제국 공신 중 열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번쾌에게 시집갔고, 여후의 오빠인 여택과 여석지도 공신으로 제후에 봉해졌다. 척부인의 가문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여씨들의 세력은 고제 시절에도 탄탄했으며, 주요공신들과의 관계에서 여후의 위치와 척부인의 위치는 상대가 되는 것이 아니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설사 척부인이 여후를 제거하고자 하였어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13] 제왕이 고조의 서장남, 즉 혜제의 큰형님이었기 때문이다. 혜제는 배다른 형제들도 지극히 아꼈던 사람이라 자신의 신하임에도 불구하고 유비를 깍듯이 형님 취급했다.[14] 근데 후술하겠지만 이게 전화위복이 되었고, 한나라 전체 역사로 보면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심지어 사후에나마 여후의 직위였던 고황후 자리까지 갖게 된다.[15] 여후가 살아있을 때에는 그래도 태후라는 명분이 있어서 공신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여후 사후에는 유씨와 공신들이 여씨를 몰아내려 할 것은 명백했다. 이 사실은 여후도 잘 알고 있었지만 유씨와 공신들의 세력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여후는 유씨와 공신 세력들을 미처 다 처리하지 못했다... 라기 보다는 처리하는게 불가능했다. 당장 북쪽에서 흉노가 언제 처들어올지 모르는 판인데 공신들을 처리했다간 그 뒷감당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흉노의 선우로부터 모욕을 당했는데도 두려워서 받아치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여씨들 중에는 군사를 잘 부리는 이가 없었다.[16] 고제의 적자는 이미 죽었고 서장자의 장자가 유양이었다. 충분히 제위를 기대할 만한 인물이었다.[17] 사실 인상 깊은 일화긴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의 결의 표명으로 줄곧 써먹던 방식인지라 이게 오리지날은 아니다. 당장 그보다 수십년 앞선 진승 오광의 난에서도 동일한 일화가 존재할 정도.[18] 여후의 악명이 높다고는 하지만 사실 여후가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던가 한 건 아니므로 정확히는 유씨의 충성심과 인기가 여전히 높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실 과거 고제는 처음 거병할 때부터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했고 논공행상도 적절히 해서 군부의 지지만큼은 확고했고 반면 여씨들은 대부분 초한대전에 참전한 적도 없으면서 여후의 명령으로 군권을 장악한 것에 불과했으니 병사들의 본심이 어디에 있었을 지는 명약관화하다. [19] 한의 군사제도에서 북군은 수도의 방위를 담당하는 부대이고, 남군은 황궁의 경비를 담당하는 부대이다. 후한말의 제도에서도 한나라의 중앙군은 대장군이 관할하지만, 황궁의 경비는 황제의 직속병력으로 예외로 두고 있다. 태위인 주발의 명령빨이 정규군인 북군에게는 먹히지만, 근위대인 남군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는다.[20] 진평은 여수의 뒤끝이 두려워 번쾌를 안 죽이고 놔뒀는데 여수는 이걸로도 진평에게 원한을 가져서 6년에 걸쳐서 모함한 전적이 있었다.[21] 다만 이건 흉노의 문화중 하나인 형사취수로 볼 수 있다. 흉노가 보기엔 한나라의 족장이 죽고 그 처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모습으로 보였을수도 있다. 그런상황에서 흉노족은 죽은 형제의 처를 취함으로써 그 재산을 지킬수 있다고 봤다. 마침 그들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으니... 한나라의 예법과 맞지 않는 모습이라 엄청난 성희롱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적 의도가 있는 흉노쪽에서는 상식적인 글이었을수도 있다는 말. 다만 이 부분은 문제가 있는데 형사취수제는 '''동생이 형의 아내를 취하는 것'''으로써 백등산 전투 이후 맺은 화친에 따르면 흉노가 형이고 한나라가 동생이기에 '''형이 죽은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형사취수제와도 맞지 않는 모습이 된다. [22] 이때 한나라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군사 능력이 있는 한신 등 흉노에 맞설만한 군사능력이 있는 제후나 왕은 이미 유방이 숙청했고 유방 자신도 흉노에게 대패했다. 신하들중에 인물이 없지 않았으나 초한대전을 겪은 개국공신들은 일선에서 은퇴할 나이에 접어들 때였다.[23] 사실 백등산 전투에서도 묵특이 대단하긴 했지만 한나라도 흉노를 상대할 병사를 긁어 보내서 충분히 상대할 만하긴 했지만 결국 유방이 패하면서 다시 한번 흉노를 공격하는 건 힘들었는데 이미 초한대전으로 인해 백성들의 수가 워낙 많이 줄어서 국력 자체가 심히 저하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백기-항우로 이어지는 무차별 학살로 인해 중원의 인구 수가 심각하게 줄었다는게 문제. 인재 자체는 한신, 팽월, 영포가 죽었지만 워낙 유방의 인재폴 자체가 넓다보니 한가닥 하던 공신들도 다수 남아 있었고 유방의 후손들 중에서도 똘똘한 이들도 적지 않아서 인재가 없다고 보긴 힘들었다.[24] 이 여태후의 한을 풀어준 것은 한나라 7대 황제인 한무제 유철이다. 그러나 한무제는 과도하게 흉노와 이민족 토벌을 남발한 나머지 문경지치로 회복한 국력을 날려먹고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이 여파는 전한이 멸망하기 전까지 지속된다.[25] 실제로 선덕여왕 시기는 고황후가 집권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대외관계에 있어서 크게 약세를 보였으니 묶여서 비판받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26] 도가가 종교화되기 전, 오제시대의 황제도가노자를 숭상해서 무위 정치를 추구했던 사상. 다만 법가의 제왕학도 받아들여서 '신하가 깝치면 무위적으로 박살내라(!)'라는 치세이론도 이용한다.[27] 여후 시절에도 실질적으로 제국의 실무를 담당한 인재들은 대부분 유방의 공신이거나 유방이 발탁한 인물들 뿐이었다. 여후는 훗날 흉노와의 전쟁을 선포하려 했을 때 다행히 계포의 만류로 그만두게 되는데 이 계포 또한 본래 항우의 수하였다가 유방에게 용서를 받고 발탁된 인물이다.[28] 여후 때 친척인 여씨들을 대거 등용했지만 이들이 고제 시절 공을 세운 적도 없었고 여후 시절에도 유능함을 보인 인물들은 없었다.[29] 이는 고제와 여후의 기질과 능력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원래 고제는 자기가 몸으로 뛰어서 세운 제국이었기에 군사적 능력도 충분했고 군대와 공신의 지지도 얼마든지 끌어낼 수 있었던 데다가 정치적인 면에서도 한신따윈 가지고 놀 정도로 출중했지만 여후는 기본적으로 고제에 업혀서 권력을 휘두르는 형태였기 때문에 고제만한 권위가 없었고 또, 친정의 여씨도 정치 및 군사적 능력을 갖춘 인물은 전무했다.[30] 여후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상대는 전원 자체적인 군사력을 지닌 상대다. 당시 왕은 황제의 신하이긴 했지만 자체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는 등 반 독립적인 상태였다. 숙청 대상들을 잘 보면 알겠지만 초반에는 자체척인 군사력인 지닌 인물들이나 유여의처럼 그 자체로 제위에 위협이 되는 인물들이 주류 숙청대상이었으며, 대부분의 이성왕들이 정리된 이후에는 동성왕 쪽으로 숙청대상이 이동한 걸 알 수 있다. 반대로 군사력이 없는 공신들은 그다지 손대지 않는 등 어느 정도 숙청에 방침이 있었다.[31] 혜제는 조참과의 일화에서 '나를 어리다고 우습게 보는게 분명하다'라는 반응을 보인다. 혜제 또한 세간의 인식만큼 자신의 권위와 정치에 무관심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사실 조참의 행위는 황제의 권위조차 무시하는 행동이었다[32] 다만 이것은 생양아치인 유방과 대부호의 딸인 여후의 차이라고 보는편이 올바르다. 고조 본인도 욕설을 하거나 무례한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빈번히 행하던 인물이고 그 신하들도 대부분 거기서 거기였다. 직언이 자유로운 분위기가 아니라 평소하듯이 그냥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분위기로 해석하는게 올바르다. 반대로 여후에 의해 기강이 잡혔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실제로 한고제 치세 초기 궁중예법은 개판 그 자체라 숙손통이 나서서 손대기 전에는 공신들이 황제 앞에서 공적을 갖고 다투고 술퍼마시고 몸싸우고 심지어는 '''칼로 대궐 기둥을 찍는''' 일까지 저질러 한고제 그 자신조차 난감해했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자유롭다 못해 난장판이라고 해야 옳다.[33] 그렇지 않다. 물론 한 건국 초반에는 논공행상 등으로 인해 분위기가 흉흉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 기강을 잡은 것도 여후가 아니라 고제가 한 일이다. 고제가 당대의 유명한 학자인 숙손통을 시켜서 예절을 세우고 새롭게 절차를 만들어서 위엄을 세웠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당연하지만 한의 건국에서 고제 사망시까지 모든 일은 고제가 한 일이고 여후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34] 평원군은 심이기와의 친분을 문제가 트집잡자 "내가 빨리 죽어야 가족들이라도 무사할거다."라고 생각해 그자리에서 자살해버렸고, 용맹함으로 이름 자자했던 주발도 문제에게 찍혔다는 생각이 들자 한동안 정서불안 증세를 보였다. 다만 역으로 한문제가 여후 사후에 공신들을 두려워하며 벌벌 떠는등 어느 시점으로 보는냐에 따라서 상당히 이야기가 달라진다[35]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나라에서 황제의 사망을 4일이나 숨길 수 있었다는 것이 쉽게 가능할만한 상황이라고 보긴 어렵다. 역상에게 새어나갔던 것을 보면 알만한 사람들이 합심해서 묵인했다고 봐야할 것이다.[36] 유방은 토사구팽으로 악명이 높지만 한편으론 이런 지지층 관리에 신경을 쓴 측면도 있었다. 옹치의 일화도 그렇고, 애시당초 고향 출신 사람들 중에서 유방이 숙청한 인물은 거의 없다. 사실 그 웬수같은 소꿉친구 놈도 알고보면 유방보다는 여후가 무서워서 튄 거였다. 오히려 유방이 죽으니 이제 고향가기 글렀다며 좌절했다고 하니 말이다.[37] 당장 진평이 여수에게 무슨 꼴을 당했는지 보자. 진평은 번쾌를 살리기 위해 잔꾀를 내고 정권 안정을 위해 여씨에게 군권을 맡기라는 계략을 여후에게 제시할만큼 공신들중 첫손에 꼽히는 친 여후파였다.[38] 당장에 위에 묵돌이 성희롱에 가까운 편지를 보냈을 때 여후가 계포의 말도 안 듣고 무작정 전쟁부터 일으켰다면 그 꼴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39] 1996년 MBC 방영 당시에는 공리를 전문으로 맡은 송도영이 더빙 연기를 했다.[40] 여후가 단지 시어머니가 뒤쳐져서 패륜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시어머니가 적이 코앞에 왔는데도 집안에 남은 재물을 챙기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조금만 더 지체하면 가족 모두가 죽을 상황이었다. 여후는 몇번이나 시어머니에게 가자고 간청했지만 시어머니는 가족의 목숨은 관심없이 재물을 챙기기에 바빴고 여후는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결심을 한 것이다. 이는 물론 꾸며진 이야기다.[41] 드라마 초반에서 여후 포지션에 가까운 여캐는 차우희. 그리고 점점가면서 백여치가 되었고, 또 초한쟁패를 시작하는 것과 흡사해보이는 16-17화는 실제와는 거의 정반대다.[42] 유방과 그 부모를 제외한 나머지 구성원을 다 맡는다, 아들인 유영도 포함.[43] 이 모습은 마지막회에서 한신을 처형할 때, 딱 한 번만 나온다.[44] 이런 반응 보일 만은 한 게 유방과 여치가 적극적으로 여동생과 노관의 혼사를 추진하고 노관을 격려하고 있었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러니 번쾌와 여동생이 눈이 맞아버리자 노관 볼 낯이 없어진 것. 거기다 노관은 사실을 알고 정신줄을 놓아버린 채 꺼이꺼이 울고, 그걸 여치가 겨우 달래주는데 그 상황에서 철없는 여동생이 끼어들어서 "나 맞았다"고 하니 화가 날 만 했다.[45] 사실 척부인은 여치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는데, 옆에서 시중드는 척부인의 고모라는 사람이 "지금이야 괜찮지만, 나중에 한왕의 관심이 멀어지면 본처인 여치가 분명히 후처인 너를 가만히 안 둘 것"이라고 그러면서 여치에게 누명을 씌워 공격한다.[46] 석방되기 직전, 척부인은 유방이 항우의 화살에 맞고 한동안 위독했을 때 후계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다가 유방과 관료들의 신망을 잃고, 입지가 약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