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사정
斛斯政
? ~ 614년
1. 개요
수나라의 인물. 곡사춘의 손자. 성이 '곡사'인 복성이다.
2. 생애
곡사정은 그릇이 단단하고 총명해 수양제의 신임을 받아 군사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병조랑이 되었는데, 단문진은 곡사정이 험악하면서 경박함을 알고 중요한 기밀에 관한 중요한 일을 위임해서 안된다고 했지만 이를 듣지 않았다.
613년 병부시랑[1] 을 지내면서 고구려 원정에 참여했다가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와 왕래를 모의해 양현감 형제가 도망해서 돌아오자 그들을 몰래 보냈으며, 수양제가 양현감을 끝까지 처리하려고 하자 마음 속으로 불안해하다가 6월 26일에 고구려로 도망갔다. 곡사정의 투항은 양현감의 반란과 더불어 양제가 회군을 결심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수양제가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하고 614년에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면서 내호아가 비사성의 군사를 물리치고 평양으로 가려고 했는데, 수나라와 고구려의 군사가 모두 지친 상태였다. 고구려 영양왕이 항복을 요청하면서 곡사정을 보내겠다고 하고 곡사정이 수나라로 압송되자 수양제는 이를 받아들여 철수했다.
그리고 수양제는 고구려 원정이 실패한 것에 대한 분풀이를 곡사정 한 사람에게 쏟아냈는데 그 분풀이가 매우 잔혹하다. 먼저 우문술이 곡사정의 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니 마땅히 다른 죄인들과 달리 처벌해야 한다고 간하자 이를 옳다고 받아들여 곡사정을 금광문 밖으로 끌어내 결박한 다음 모든 관료들로 하여금 곡사정을 과녁 삼아 화살을 쏘게 했다. 곡사정은 화살을 연달아 맞아 죽게된다. 그렇게 사람을 과녁으로 다트 놀이를 즐긴 다음 양제는 죽은 곡사정의 시신에서 살을 떠내어 그 고기를 푹 삶아 수육으로 만들어 관료들에게 먹이고 남은 뼈는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재로 흩날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건 다른 책도 아니고 '''정사인 <수서>에 그대로 실려 있는 내용이다.''' 사실상 능지형에 가까운듯.
어찌보면 투항했던 고구려에게 배신당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불쌍한 인물이다. 허나 고구려 입장에선 곡사정을 돌려보냄으로써 양제에게 회군의 명분을 주고 전쟁을 빨리 마무리할 수 있었으니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3. 가족 관계
증조부 : 곡사족(斛斯足)[2]
조부 : 곡사춘(斛斯椿, 495년 ~ 537년)[3] 형제 : 곡사원수(斛斯元壽)[4]
부친 : 곡사회(斛斯恢)[5] 형제 : 곡사열(斛斯悅)[6] , 곡사징(斛斯徵)[7] , 곡사연(斛斯演)[8]
본인 : '''곡사정(斛斯政)'''
4. 대중매체에서
주로 다루어진 매체로는 수나라가 비중있게 등장해 '주말시트콤 수나라 사람들'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드라마 연개소문이 있다. 배우는 명성황후에서 위안스카이를 연기한 바 있는 박진성.
드라마 내에서는 청년 시절의 연개소문이 양현감과 이밀의 휘하에 있었다는 설정 탓에 이들과 가까운 사이였던 곡사정도 제법 비중있게 나왔다.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와 친했다는 이유로 내통자로 의심받기 시작하며, 결국 실제 역사대로 고구려에 투항했다가 휴전의 명분을 위해 다시 돌려보내져 비참하게 죽는다.
양광에게 죽임을 당하기 전, 모든 것을 체념했는지 그를 비웃으며 여유를 부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1] 병부의 수장인 병부상서의 바로 아래 벼슬로 병부의 2인자다. 오늘날로 치면 중국 국방부 부부장급에 해당한다.[2] 북위에서 거기 장군, 양주 자사를 지냄.[3] 자(字)는 법수(法壽). 북위 말의 군인, 서위에서 태보, 상서령, 상산군공(常山郡公)을 지냄.[4] 예주 자사, 상건현후(桑乾縣公)를 지냄.[5] 산기 상시, 신채군공(新蔡郡公)을 지냄.[6] 태중 태부를 지냄.[7] 북주에서 대장군, 지국공(岐國公)을 지냄.[8] 고환에게 살해당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