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남북조시대)

 


'''북제 추존 황제
高祖 神武帝 | 고조 신무제'''
'''묘호'''
태조(太祖) → '''고조(高祖)'''
'''시호'''
헌무황제(獻武皇帝) → 신무황제(神武皇帝)
'''생몰 기간'''
496년 ~ 547년 (51세)
'''능묘'''
의평릉(義平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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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高)
''''''
환(歡)
''''''
하륙혼(賀六渾)
'''부모'''
부황 무목제 고수생
모후 문목황후 한기희
'''황후'''
신무명황후 누씨

1. 개요
2. 생애
2.1. 뜻을 세우다
2.2. 이주영에게 의지하다
2.3. 이주조에 대항하다
2.4. 실권을 잡다
2.5. 효무제가 달아나다
2.6. 서위동위의 대결
2.7. 죽음
3. 사후 추존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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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위(北魏)의 권신이자 북제의 시조. 는 하륙혼(賀六渾)으로 원래 북위 발해군(渤海郡) 수현(蓨縣) 사람이지만 본인은 북위 6진 중의 하나인 회삭진(懷朔鎭)에서 태어났다. 고환의 집안은 한족(漢族)이었지만 할아버지 고밀(高謐)이 북위 정권에서 관료로 지내다 죄를 얻어 회삭진으로 이주했다. 이후 고환의 조상은 회삭진에서 살아 선비족의 풍습에 익숙했다. 고환의 아버지는 고수생(高樹生)[1]이었고 어머니는 한씨(韓氏)[2]였으며 그들의 장남이었다.
고환의 출신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한족이라는 게 통설이지만, 고구려계 인물이라는 설도 있다.[3]

2. 생애



2.1. 뜻을 세우다


어린 시절 고환은 아주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북위의 옛 수도인 평성(平城)에서 부잣집 머슴으로 살았다. 하지만 고환은 잘생겼고 능력도 있었기 때문에 선비족인 누내간(婁內干)의 눈에 띄어 그의 딸 누씨(婁氏)[4]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돈이 생겨 말을 하나 샀고, 그는 평성과 수도인 낙양 사이의 공문을 전달하는 일을 했다. 519년, 재상 장이(張彝)가 군인들에 대한 차별 정책을 펼쳐 낙양에서 군인들의 폭동이 일어났을 때 고환은 낙양에 있었다.
성난 군중은 장이의 집에 쳐들어가 장이를 죽여버렸는데 효명제섭정을 맡고 있던 영태후(靈太后) 호씨(胡氏)는 폭동을 일으킨 주동자 8명을 제외하고는 거국적으로 용서를 해주었다. 고환은 영태후의 행동을 보고 실망했고, 북위는 곧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상상태가 일어나면 재산이 무슨 소용이냐며 고환은 평성으로 돌아와서 재산을 팔아 그 돈으로 세력을 형성했다. 그럭저럭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의 매형인 위경(尉景)을 비롯하여 사마자여(司馬子如), 유귀(劉貴), 가현지(賈顯智), 손등(孫騰), 후경(侯景), 채준(蔡儁) 등이 모였다. 이들은 한 지방에 자리잡고 불법을 보면 직접 나서 손을 봐주곤 했다. 525년, 육진의 난이 일어나자 고환의 무리는 두낙주(杜洛周) 부대에 합류했다가 두낙주에게 실망한 고환은 곧 그 무리에서 탈주했다.

2.2. 이주영에게 의지하다


이후 갈영(葛榮)의 부대에 합류했지만 결국 북위의 장군 이주영(爾朱榮) 밑으로 들어갔다. 이때 유귀는 이미 이주영 밑에 있었기 때문에 이주영에게 고환을 칭찬했으나, 고환을 만나본 이주영은 별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환이 아주 훌륭한 야생마를 길들여 이주영에게 주자 이주영은 고환을 다시 보게 되었고 이후로 아주 가까워졌다. 528년 효명제는 영태후와 그녀의 연인 정엄(鄭儼), 그의 친구 서흘(徐紇) 등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 불만을 품고, 이주영에게 밀명을 내려 낙양으로 와서 영태후와 정엄 세력을 척결해달라고 했다. 이에 이주영은 낙양으로 진격하였고 고환은 선봉장을 맡았다. 이 소식을 들은 영태후는 효명제를 독살하고 조카 원조(元釗)를 황제로 삼았다. 하지만 이주영은 원조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효문제의 조카였던 창락왕 원자유(元子攸)를 황제로 삼은 다음 그대로 낙양으로 진격하니 그가 효장제(孝莊帝)이다.
이주영은 낙양을 점령하고, 영태후와 원조를 황하에 던져버렸으며[5] 조정 관료들은 그에게 복종하지 않으리라 생각해서 효장제의 형제들을 비롯해 관료들 2,000여 명을 황하에서 학살했다. 이것이 '''하음의 변'''이다. 이에 효장제는 질려버렸고, 이주영에게 황위를 내놓으려 했다. 고환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했지만 이주영은 주저했는데 하발악(賀拔岳)은 황위를 차지하는 것을 반대하고, 고환을 죽여 자신의 충성을 보이라고 했지만 이도 거부했다.
이주영은 이후 제국 내의 여러 반란들을 진압하고 통합하려 했다. 고환은 이에 갈영(葛榮)과 형고(邢杲), 양간(羊侃)의 반란 진압에 참여했다. 이주영은 여러 사령관들을 불러놓고 자기를 대신해 군대를 지휘할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많은 사령관들은 이주영의 조카인 이주조(爾朱兆)가 그러하다고 대답했으나, 이주영은 스스로 자기를 이을 사람은 고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주조에게 '너는 고환과 상대가 되지 않으니 언젠가는 너를 죽일 것이다.'라고 했다. 이후 이주영은 고환을 진주(晉州) 자사로 삼았는데 고환은 훗날을 위해 군자금이 될 부와 군대가 될 병력을 키웠다.

2.3. 이주조에 대항하다


530년, 효장제는 이주영이 장차 황위를 차지하리라 생각해 그를 궁으로 불러 죽여버렸다. 이에 이주씨 일족은 이주조와 이주영의 사촌 이주세륭(爾朱世隆)이 리더가 되어 낙양으로 쳐들어갔다. 이주조는 이주영 아내의 조카인 원엽(元曄)을 황제로 삼았다. 이때 이주조는 고환을 낙양으로 불러 자신을 도우라고 했지만 고환은 지방의 반란을 진압해야 한다는 이유로 가지 않았다. 이주조는 언짢았지만 이미 고환의 세력이 커져 만만치 않았다. 이주조는 결국 낙양을 함락시키고 효장제를 사로잡아 그를 자신의 본거지인 진양(晉陽)으로 보냈다. 이때 고환은 편지를 써서 황제를 죽이지 말라고 했지만 이주조는 답장을 보내지도 않고 효장제를 죽여 버렸다. 그럼에도 고환은 그대로 이주씨 일파에 속해 있었다.
531년, 흘두릉보번(紇豆陵步番)이 효장제의 복수를 외치며 반란을 일으키자 고환은 이주조를 도와 반란을 진압하고 그를 처형했다. 이 전투 후에 이주조는 고환을 신뢰해 의형제를 맺었으며, 고환에게 이전 갈영의 부대를 맡겼다. 또 고환이 새로운 부대를 형성하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동쪽 태행산으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 신도(信都)에서 이주씨에 대항해 반란을 이으킨 고건(高乾)에 맞섰는데 고건은 고환의 먼 친척뻘이었다. 고건과 이원충(李元忠)은 이주씨 일파는 너무 부패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싫어하고, 결국은 전복될 것이라고 고환을 설득했다. 이때 이주조는 고환의 부대를 자신의 부대로 옮기려 했는데 결국 고환은 반란을 선언했고, 이주조 부대로 옮긴 군인들도 고환을 도와주기로 했다. 한편 이주세륭은 원엽이 지금 황제에게서 너무 먼 친척이라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원공(元恭)을 황제로 세웠다. 이가 절민제(節閔帝)이다. 고환이 처음 반란을 일으켰을 때 절민제를 황제로 인정했으나, 손등의 건의대로 또 다른 황족인 원랑(元朗)을 황제로 세웠다.
고환 자신은 아주 유능하고 명성이 높은 사령관이었지만 그의 부대는 여전히 약했다. 그리하여 이주씨 일파는 고환의 반란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이주세륭만이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532년 이주세륭의 형제들인 이주중원(爾朱仲遠), 이주도율(爾朱度律), 이주조까지 모여서 고환을 치려 했다. 하지만 이전부터 이주세륭과 이주조간의 알력다툼이 있었는데 고환은 이를 이용해 이들을 더욱더 이간질시켰고, 결국 이주중원과 이주도율이 철수해 버렸다. 이후 고환이 이주조의 부대를 격파하자 이주조는 철수했으며, 고환은 업성을 점령하고 이를 본부로 삼았다.
마음이 급해진 이주씨 일파는 곧 화해했고, 이주조, 이주중원, 이주도율, 이주천광(尔朱天光)이 모두 업성에 모였다. 이주씨 일파의 병력이 훨씬 많았지만 고환은 이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주조는 진양으로 돌아갔고, 이주중원 역시 그의 근거지인 동군(東郡)으로 도망갔다. 이주천광과 이주도율은 낙양으로 가려고 했으나, 낙양에는 이미 곡사춘(斛斯椿)이 반란을 일으킨 상태였다. 곡사춘은 이주세륭과 동생 이주언백(爾朱彥伯)을 이미 죽였고, 이주천광과 이주도율은 사로잡아 고환에게 보냈다. 이주중원은 동군을 포기하고 양나라로 망명했으며, 이제 이주씨 일파 중에서는 이주조만이 남게 되었다. 고환은 원랑과 함게 곡사춘이 통제하고 있는 낙양으로 갔는데 고환은 원랑 역시 너무 먼 황가의 친척이었기 때문에 폐위하고 새로운 황제를 찾았다.

2.4. 실권을 잡다


처음에는 폐위된 절민제를 그대로 황제로 삼으려고 생각했으나, 위난근(魏蘭根)이 절민제는 너무 똑똑하기 때문에 그를 제어하기 힘들다고 하여 거부했다. 그 후에는 원열(元悅)을 황제로 세울려고 했으나, 그도 최종적으로 탈락되었다. 결국에는 532년, 효문제의 손자인 원수(元修)를 황제로 삼았다. 이가 북위의 마지막 황제인 효무제(孝武帝)이다. 고환은 대승상(大丞相)이 되어 실권자가 되었지만 곡사춘이 조정의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효무제도 왕사정(王思政)의 도움을 받았다. 효무제는 치세 초기 모든 일을 고환에게 맡겼다. 고환은 이주영의 본거지인 진양을 자기의 본거지로 사용했는데 효무제에게 자신의 장녀 고씨(高氏)[6]를 황후로 맞이하게 했고, 이에 고환이 발해왕에 봉해졌다. 하지만 효무제는 고환이 황위를 노린다고 의심하였고, 고환이 보기에도 효무제 스스로 제국 내 권한을 키우려고 하면서 둘 사이가 멀어졌다.
효무제는 반독립 상태로 있는 군벌 하발악(賀拔岳), 하발승(賀拔勝) 형제에게 희망을 걸었는데 하발악은 제국의 서부를, 하발승은 남부 지방을 통제하고 있었다. 고환은 외견상으로는 효무제에게 공손하게 대했지만 황제의 힘이 점점 커지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533년, 이주조가 끝에 몰려 결국 수용(秀容)으로 달아났다가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이어 고환은 효무제의 동맹들을 공격했는데 우선 적숭(翟嵩)을 하발악의 장교인 후막진열(侯莫陳悅)에게 보내 하발악을 배반하라고 설득했다. 534년 효무제와 접촉을 한 흘두릉의리(紇豆陵依利)를 공격해 그의 군대를 빼앗으려 했다. 얼마 후 후막진열은 하발악을 암살하긴 했지만 군대를 넘겨받지는 못했다. 이 군대는 이후에 하발악의 부하였던 장안우문태에게 넘어갔는데 우문태는 후막진열의 부대에게 승리하고 후막진열을 처형했다. 이에 효무제는 우문태와 동맹을 맺었고, 고환은 우문태와 교섭을 하려 사절을 보냈지만 우문태는 사절을 체포해 효무제에게 보냈다.

2.5. 효무제가 달아나다


534년 효무제는 고환을 치려고 계획했는데 기습을 하기로 하고, 거짓으로 고환에게 비밀리에 명령을 내려 우문태와 하발승을 공격할 작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고환은 효무제의 계획을 눈치채고, 바로 낙양으로 쳐들어갔다. 왕사정은 황제군으로 고환의 군대를 이기기는 힘들 것이라 판단하여 우문태의 영지인 장안으로 가자고 했다. 곡사춘은 낙양을 지키자고 했지만 하발승의 원군이 도착하지 못했고, 우문태의 군대도 오지 않아 결국 떠나기로 결정했다. 고환은 낙양에 들어왔고, 효무제는 서쪽으로 가서 우문태의 근거지인 장안에 들어갔다. 효무제는 장안에 도착한 다음 우문태를 재상으로 삼고 제국을 재정립했다. 그러는 동안 고환은 낙양을 점령했고, 하발승의 부대를 격파하면서 하발승은 양나라로 도망쳤다.
효무제가 달아난 것을 알게 된 고환은 그 후 효무제에게 편지를 써서 돌아오면 자기는 물러나겠다고 했지만 효무제는 묵묵부답이었다. 이에 고환은 효무제의 오촌 조카인 청하왕 원선견(元善見)을 황제로 삼으니 그가 효정제(孝靜帝)이다. 효정제를 세운 고환은 수도 낙양이 우문태의 세력과 가깝다는 이유로 자신의 근거지인 업성으로 옮겼다. 물론 낙양이 우문태의 세력과 가까운 점도 있지만 아예 황제를 자신의 세력 안에서 감시할려는 것이었다. 이로써 북위는 공식적으로 고환이 옹립한 효정제의 동위, 우문태가 옹립한 효무제의 서위 두 개로 나뉘었다. 물론 서위와 동위 둘 다 자기가 정통이라고 우겼다.

2.6. 서위동위의 대결


사실 동위의 생산력과 군사력이 서위에 비해 더 좋았기 때문에 고환은 서위를 공격해 제국을 통합하려 했다. 하지만 전투는 쉽게 결정이 나지 않았고, 그동안 서위는 점점 강해졌다. 이전에 고환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서위의 장군들이 동위로 전향했고, 동위는 이 기회에 서위 진영 깊숙히 쳐들어갔다. 하지만 서위는 고환을 황제를 내쫓은 배반자라고 매도했으며 지역의 백성들은 서위의 군대를 도와주었다. 고환은 선비족과 한족의 융합을 꾀해 선비족들에게는 한족의 농사와 육축을 배우게 했고, 한족들에게는 선비족의 군사적 기술을 배우게 했다. 무엇보다 효무제의 탈주는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이었기 때문에 효정제에 대해서 극진히 대우하며 정통성을 내세웠다. 535년 장안의 효무제는 여자 문제로 우문태와 사이가 벌어졌는데 효무제는 세 명의 사촌과 근친상간 관계였다. 하지만 우문태는 이 관계를 싫어했고 그중 한 명을 죽였다. 효무제는 화를 내며 인사를 받지 않는다든가, 궁에서 테이블을 쾅 치고 화살이 없는 빈 을 당기는 것으로 분노를 표시했다. 결국 우문태는 효무제를 독살했고, 그의 사촌 원보거(元寶炬)를 황제로 삼았다. 이가 문제(文帝)이다.
이 소식을 들은 고환은 서위의 황제 시해에 대해 효무제에 대한 공식적인 조문 기간을 두려고 했는데 효무제를 이용해 서위의 정당성을 무너뜨리려는 시체팔이였다. 하지만 논의를 한 끝에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얼마 후 고환의 후계자인 장남 고징(高澄)이 고환의 첩인 정씨(鄭氏)[7]와 바람이 났고 이것이 발각되었다. 화가 난 고환은 고징을 자택에 감금시키고, 어머니 누씨와 만나지도 못하게 했다. 그 후 고징을 강등시키고 첩 이주씨(爾朱氏)[8]가 낳은 5남 고유(高浟)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고환의 친구인 사마자여(司馬子如)가 누씨가 예전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생각해보라고 했기에 고징의 시종들을 엄하게 다스리기로 하고, 고징의 지위는 그대로 두었다. 이 후 고환의 동생 고침(高琛)[9]은 고환의 또다른 첩 이주씨(爾朱氏)[10]와 놀아나다가 처형되었다.
536년 북방의 몽골계 유목제국 유연과 동맹을 맺기 위해 동위의 공주 한 명을 유연의 욱구려아나괴에게 주었다. 하지만 욱구려아나괴는 서위의 공주도 첩으로 들였기 때문에 이 동맹은 별 효과가 없었다. 고환은 서위를 깊숙히 공격해서 하주(夏州)를 점령하고, 예전에 서위에 잡혔던 그의 동맹, 영주(靈州) 자사 조니(曹泥)를 구출했다. 게다가 서위의 서부에 자리잡고 있던 서위의 장군들인 만사보(万俟普), 그의 아들 만사수락간(万俟受洛干), 질간보악(叱干寶樂), 파육한상(破六韓常) 등이 고환에게 넘어왔다. 당시 고징이 나이 14세 밖에 되지 않았지만 동위의 재상 업무를 맡기기 위해 업성으로 불러 조정의 실무를 맡아 보게 했다. 537년 고환은 부대를 3개로 나누어 서위를 침공했는데 하나는 자기가 맡고, 나머지는 두태(竇泰), 고오조(高敖曹)가 나누어 맡았다. 고환의 생각은 자기가 우문태의 군대를 잡아두면 두태가 서위 깊숙히 들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문태는 장안을 버리고 지금의 간쑤성 동부로 철수할 준비를 하는 한편 두태의 부대를 급습했고 두태의 부대 대부분을 살육했다. 대패로 두태는 자살을 명령받았으며, 고환과 고오조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서위는 반격을 가해 동위의 영토 일부를 점령했다.
이후 고환은 관중 지방에 기근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서위 원정을 개시해 사원(沙苑)에서 우문태와 대결했다. 여기서 고환은 자기의 군사가 우문태의 군사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곡률강거(斛律羌舉)가 한 '우문태를 피해 장안으로 바로 쳐들어가자'는 건의를 무시하고 결전을 준비했다. 고환의 전략은 화전 전술이었으나, 우문태의 군대가 죽기 살기로 싸우는 바람에 고환의 부대는 다시 한 번 철수했다. 538년 낙양을 비롯해 남쪽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 서위 쪽에 붙자 고환은 후경(侯景)을 보내 남쪽 지방의 반란을 진압했다. 한편 서위의 문제가 유연의 칸인 욱구려아나괴의 딸을 황후로 맞이하자 유연은 동위와의 관계를 끊어 버렸다. 538년 고환은 후경, 고오조의 도움을 받아 낙양을 포위했는데 우문태는 독고신(獨孤信)을 보내 낙양을 지키게 했다.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고 고오조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고환도 거의 죽을 뻔했다. 하지만 결국 서위군은 낙양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때 사원 전투에서 사로잡혔던 동위의 장수 조청작(趙青雀)이 장안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장안에 남아있던 서위의 관료들은 황태자 원흠(元欽)을 데리고 장안을 떠났다. 그러나 고환은 이를 도와줄 형편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문태가 장안으로 들어가 이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서위는 남쪽 영토를 조금 회복했으나, 몇 년 동안 남쪽 국경에서는 작은 전투가 이어졌고 누구에게도 이렇다할 성과는 없었다.
539년 고환은 차녀 태원공주(太原公主)를 효정제에게 주어 황후로 삼게 했으며 541년 효정제 명의로 칙령을 내려 의복을 정비하고 불공정한 세금을 수정했다. 542년 고환은 다시 한번 서위와의 국경 도시 옥변(玉壁)을 공격해 봤지만 실패했다. 543년 사고를 한 번 더 쳐서 이를 계기로 동위와 서위가 전쟁까지 했다. 고오조의 동생 고중밀(高仲密)은 동위의 관료를 지내고 있었는데 고징의 시종 중 하나인 최섬이라는 자가 고중밀이 자기의 누이와 이혼한 것을 빌미로 고중밀의 약점을 캐려고 했다. 고중밀은 안그래도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고징이 고중밀의 둘째 아내인 이창의(李昌儀)를 겁탈하려 하자 분노가 터져 버렸다. 고중밀은 중요한 수비진인 호뢰(虎牢)를 가지고 서위에 귀순해 버렸고, 우문태는 고중밀의 도움을 받아 낙양으로 쳐들어갔다. 비록 우문태는 낙양 근처의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이 전투에서 우문태와 고환은 거의 죽을 뻔 했다. 이때 서위의 장군이 된 하발승이 고환을 거의 죽일뻔 했지만[11] 서위군은 물러났고 낙양과 근처의 영토는 다시 동위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544년 고환에게는 4명의 핵심 참모들이 있었는데 손등(孫騰), 사마자여(司馬子如), 고악(高岳), 그리고 의형제를 맺은 고융지(高隆之)였다. 그러나 고환은 이들이 너무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제 22살이 된 고징에게 더 많은 권한을 넘겨주었다. 고징은 점점 성장하며 곧 이 4명을 넘어서게 되었는데 손등이 고징을 방문할 때 별로 공손하게 대하지 않자 시종을 시켜 손등을 바닥에 내팽겨치고 구타하도록 했다. 그리고 고징은 자기의 시종 중 하나인 최섬의 삼촌 최계서를 효정제 옆에 두고 감시하게 했다. 또한 고징은 최섬과 송유도에게 많은 권한을 주어 조정내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감시하게 했다. 최섬과 송유도의 고발로 사마자여가 체포되었고, 공직을 잃었으며 원탄(元坦)도 탄핵되었고 영지를 잃었다. 고환도 이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허락은 해주었다.
545년 첩 이주씨[12]의 형제인 이주문창(爾朱文暢), 첩 정씨의 형제인 정중예(鄭仲禮)가 임주(任冑)와 함께 이주문창을 리더로 삼아 고환을 암살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음모는 들통났고, 공모자들의 가족을 모두 죽였다. 하지만 이주씨와 정씨는 고환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형제들은 용서를 받았다. 고환은 이전에 유연과 관계를 끊었지만 서위를 막기 위해서는 유연을 달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고징과 욱구려아나괴의 딸을 결혼시키려 했다. 하지만 욱구려아나괴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고징을 비롯한 신하들이 고환보고 직접 결혼하라고 했다.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결국 욱구려아나괴의 딸 욱구려씨(郁久閭氏)와 결혼했다.[13] 욱구려씨는 연연공주(蠕蠕公主)라 불렸으며[14] 이 결혼을 위해 누씨는 멀리 떨어져 살았으나, 물론 어디까지나 정략 결혼이었기에 조강지처인 누씨와 이혼한 것은 아니었다.

2.7. 죽음


546년, 고환은 다시 한번 대규모 서위 원정을 실시했는데 이번에는 아예 서위를 멸망시키려고 했다. 고환은 옥변을 포위하고 서위의 구원병이 오면 반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서위는 움직이지 않았고, 옥변을 지키는 서위의 장군 위효관(韋孝寬)은 고환의 모든 시도를 막아냈다. 동위는 이 전쟁에서 70,000명의 병사를 잃었으며, 고환 스스로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547년, 고환은 병이 들어 곧 철수했으며 위효관은 자기가 고환을 죽였다고 선언했다. 고환은 이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스스로 노래를 부르며 그의 군대 앞에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고환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슬피 울었으며 진양으로 돌아가는 중에 병이 더욱 깊어졌다. 그래서 고징을 진양으로 불러 마지막으로 여러가지 말을 해주었는데 고징은 낙양을 비롯해 황하 남부 지방을 지키고 있던 후경이 반란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두려워 그를 소환했지만 후경은 거절했다. 고환은 고징에게 믿을만한 관료 명단을 내어주었고 모용소종(慕容紹宗)에게 후경을 대적하라고 일러둔 다음 사망했다.

3. 사후 추존


사후 장남 고징이 뒤를 이었으며 그의 차남 고양북제를 건국하자 고환을 고조(高祖) 신무제(神武帝)로 추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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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제서에서는 고수(高樹)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묘지(墓誌)에서는 고수생이라고 나왔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훗날 손자 고양에 의해 문목제(文穆帝)로 추존되었다.[2] 이름은 한기희(韓期姬)로 훗날 손자 고양에 의해 문목황후(文穆皇后)로 추존되었다.[3] '발해 국호 연구' 참조.[4] 이름은 누소군(婁昭君)으로 훗날 아들 고양에 의해 무명황후(武明皇后)로 추존되었다.[5] 나중에 시신은 수습되었다고 한다.[6] 영희황후(永熙皇后)이다.[7] 이름은 정대차(鄭大車)로 훗날 풍익태비(馮翊太妃)로 추존되었다.[8] 이름은 이주영아(爾朱英娥)로 이주영의 딸이었다. 원래 효명제의 후궁이었다가 효명제가 독살당하자 비구니가 되었으며, 효장제의 황후가 되었다가 효장제마저 죽자 고환의 측실이 되었다. 효장제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이주조에게 죽었고 고환과의 사이에서 5남 고유(高浟)와 13남 고응(高凝) 두 아들을 낳았다. 팽성태비(彭城太妃)로 추존되었으나, 고환 사망 후 그 아들 고양의 수청을 거부하고 죽었다.[9] 조군왕(趙郡王)으로 추증[10] 이주조의 딸로 원래는 원엽의 아내였지만 고환의 첩이 되어 고환의 10남 고개(高湝)를 낳았다.[11] 전투 직후 동위에 남아있던 하발승의 일족은 모두 처형되었고, 하발승은 분노로 사망했다. 우문태는 오직 하발승만이 전투를 앞두고 평안했다며 슬퍼했다.[12] 이주영아[13] 고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으나, 고환 사후 고징의 첩이 되어 딸 하나를 낳는다.[14] 그의 자매가 서위 문제의 도황후(悼皇后) 욱구려씨인데 540년 출산 도중 문황후(文皇后) 을불씨(乙佛氏)의 혼령을 보고 놀라 난산 끝에 본인과 아이 모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