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개
郭開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의 인물로 간신 겸 매국노로 유명하다.
2. 생애
염파가 위나라로 망명했지만 크게 쓰이지 못하고 있었는데, 도양왕이 진(秦)나라의 침공으로 염파를 기용할 생각이라 염파가 지금도 기용할 만한지 살펴보게 했다. 이 때 곽개는 염파와 원수지간이라 염파를 확인하러 가는 사신에게 많은 돈을 주어 염파를 모함하도록 했다. 그 사신은 염파가 열 근 고기를 먹고 한 말 술을 마실 정도로 건강한 것을 보고도 도양왕에게 '염파가 많이 먹기는 하지만 자주 소변을 보러 가는 걸로 보아 건강이 좋지 않은 것 같다'고 거짓으로 보고해 결국 염파는 기용되지 못했다.
기원전 229년에 진나라가 왕전을 보내 조나라를 공격하면서 이목, 사마상 등을 시켜 막게 했는데, 곽개는 진나라로부터 돈을 받고는 이목과 사마상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했다. 이로 인해 이목이 체포되어 죽고 사마상은 해임되어 조총, 안취 등이 그들을 대신하는 등의 사태가 일어났으며, 3달 후에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열국지에서는 진나라의 울료와 왕오에게서 뇌물을 받고 조왕에게 이목이 진나라의 군대와 내통해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돈다며 모함한다. 조나라가 망하자 진시황의 신하가 돼서 함양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한단성을 떠날 때 모아둔 황금이 워낙 많아서 가져갈 수 없었기에 한단성에 있는 자기 집 마당에 황금을 묻어두고 함양으로 갔다. 나중에 진시황에게 청해 휴가를 얻어 옛 집에 묻었던 금을 여러 채의 수레에 나누어 싣고 함양으로 향하다가, 하필 산길에서 도적을 만나 금을 모두 빼앗기고 목숨도 잃었다고 한다. 야사에서는 이들이 도적이 아니라 실은 이목의 식객들이었다고도 하고 혹은 이용 가치가 없어진 곽개를 진시황이 토사구팽한 것이라고도 한다.
천자문에서 전국시대 용장으로 백기, 왕전, '''염파''', '''이목''' 네 사람을 꼽는데, 그중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조나라 소속이었음에도 곽개는 기어코 조나라를 망하게 만들었다. 앞의 두 사람이 소속된 진나라를 생각하면 '''춘추전국시대 중국 통일을 앞당기는데 어마어마한 공헌'''(...)을 했으며 진나라의 1등 공신이라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다.
3. 평가
여러모로 초의 비무기와 비슷하다. 단 망국력은 한 수 위인데, 조나라는 곽개 때문에 폭삭 망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무기는 남을 해코지하는 것을 즐기다가 본인도 똑같이 당했지만 곽개는 나라를 망칠 때까지 끝끝내 살아남았다.
4. 킹덤(만화)에서의 곽개
킹덤에서는 요가가 자신의 귀걸이를 보고 보통 보석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서 조나라에서는 본 적이 없다고 하자 요가에게 여불위에게 제공받은 것을 이야기하면서 진에서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369화)
503화에서 등장한다. 호주라는 대신이 이목의 전서구를 받고 도양왕에게 진군이 열미에 도착하기 전에 한단군을 움직여 열미를 방어할 것을 간언한다. 그런 호주의 목을 조르거나 구타를 한다.
639화에서는 업을 빼앗기고 투옥된 이목 앞에 등장해 참수형이 결정되었다고 전한다. 이목이 업은 아직 육지의 고도이며 진은 열미와 업을 이어야 되므로 이를 실행에 옮길 것이기 때문에 저지하기 위한 책략을 곽개에게 전하나 곽개는 무시해버리고 아무에게도 전하지 않는다.
643~644화에서는 이목을 구하려는 수하들을 처형 전날까지 성공적으로 차단한다. 그러나 도양왕이 독살을 당하며 왕위 승계 절차에 따라 태자 가가 왕위에 오를 정당성을 확보하며 큰 위기에 몰린다. 하지만 영 서기관과 강희에게 다음 왕을 천에게 넘겨준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위기를 넘긴 뒤, 이목과 태자 가를 지지하는 일파를 깔끔하게 숙청해버린다.
이후 647화에서는 지하 감옥에서 이목에게 들은 바대로 한단군을 호첩에게 지원해 진나라군을 막아세운다.
이후에는 양단화, 환기, 왕전과 위나라 방면에서 지원온 등군을 막아내는 괴력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몽념, 왕분, 이신도 이 전선에 참전중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대장군 급 장수 네명과, 대장군급 잠재력을 가진 세 명을 상대로 공세를 막아내는 엄청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4.1. 곽개 명장설
도양왕 명군설처럼 이목의 밑도 끝도 없는 추한 행태 때문에 이제 독자들 사이에서는 곽개 명장설까지 나오고 있다. 그런데 곽개 명장설의 문제는 버기 최강설과 같은 대놓고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킹덤의 꼬인 스토리와 이상한 연출 때문에 독자들에게 설득력이 높은 설이라는 것. 읽다보면 절로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이하는 곽개 명장설의 근거들.
- 곽개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대립할 뿐만 아니라 더 많은 병사를 줬는데도 진나라군에게 탈탈 털린,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이목의 조언을 귀담아 듣고 작전에 반영했다. 굉장한 오픈 마인드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무능한 이목이 업전에서 대다수의 장수를 잃고[1] , 그나마 남아있는 장수들은 곽개와 정치적으로 대립하거나[2] , 히든 카드인 사마상은 청가에서 올라오지 않는 상황에서[3] 곽개는 무려 왕전, 환기, 양단화를 상대로 6개월간 조나라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아 오기까지 했다! 심지어 업을 빼앗겨 수도권인 한단까지 고속도로가 개통된 상황에서! 킹덤에서 등장한 재상 중 이정도로 큰 활약을 한 인재는 없다.[4] 창평군도 곽개 앞에서는 한 수 접어줘야 할 지경.
- 설사 이목의 작전 때문에 곽개가 진나라군을 막을 수 있다 하더라도, 15일만에 업을 날려먹은 이목의 처참한 무능력을 보면[5] 이목이 계속 조나라군을 지휘했다면 한단을 지키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작가는 이목의 작전을 곽개가 날로 먹은 것처럼 묘사하고 싶은 모양인데, 이목이 무슨 상세한 작전 계획서를 내놓은 것도 아니고 말 몇 마디 전한 것뿐인데 그걸 갖고 반 년 동안이나 조나라 전군을 지휘한 것을 날로 먹은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어떻게 봐도 무리수다.
- 인성 면에서도 이목보다 한 수 위인 모습을 보여준다. 도양왕이 독살당한 이후 곽개는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정황상 왕위 계승에도 월권을 행사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 역사에서 곽개의 쓰레기 행보와는 달리 최소한 자신을 기용해준 도양왕에게는 충성하는 모습인데, 이는 수많은 실책에도 불구하고 몇번씩이나 자신을 삼대천으로 삼아주고 많은 지원을 해준 도양왕을 어둡다고 비난하며, 사병을 동원하여 쿠데타까지 기도하는 이목[6] 과는 차원이 다른 빛나는 인성이다.
[1] 독자들에겐 악평을 받으나 암울한 조나라 장수진에서 그나마 강력했던 방난이 죽고, 인상여의 직속 부하였던 요운, 조아룡을 시작해서 부하들에게 신임을 얻는 금모 같은 부장급 인재들도 여럿 죽었다.[2] 기혜와 호첩, 특히 호첩은 조왕이 아닌 이목 개인에게 충성하는 발언까지 했다.[3] 연나라를 막기 위하여 사마상이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긴 하다.[4] 사실 엄밀히 말하면 곽개는 재상이 아니다. 투옥되기 전까지는 이목이 삼대천 겸 재상이었으니...[5] 삼국지연의의 하후무조차 장안은 내주지 않았다.[6] 물론 이목이 사병을 직접 동원한 것은 아니지만, 쿠데타 기도급의 중죄를 말리지 못했다면 이목은 당연히 부하들의 행보에 책임을 지고 사형당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