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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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秦)나라의 무장으로 빈양 동향 사람이다. 당시에 남아있던 진나라의 주변국을 모두 멸망시켜 춘추전국시대를 종결시킨 명장이며, 그 과정에서 뛰어난 처신을 했던 것으로 이름이 높다.
전국시대 가장 뛰어난 무장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왕전과 그의 아들 왕분(王賁)이 멸망시킨 국가는 연나라, 조나라, 초나라, 위나라, 제나라를 비롯한 다섯 국가였으며, 이 과정에서 수백 성을 함락시켰다. 게다가 또 다른 진나라의 명장인 백기와 달리 학살자의 이미지는 없으며, 처세술도 능통하여 의심 많고 성격도 안 좋았던 진시황 휘하에서 진나라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대를 받았는데도 천수를 누렸다. 또한 초나라를 상대로 지구전에 들어갔을 때 왕전은 매일 병사를 쉬게 하고 목욕시키며 잘 먹이고 정성껏 어루만지며 친히 병사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병사들과의 관계도 좋은 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뛰어난 능력 덕에, 천자문에는 기전파목 용군최정(起翦頗牧 用軍最精)이라 하여 백기(白起), 왕전, 염파(廉頗), 이목(李牧)을 전국시대 가장 뛰어난 네 장수 중 하나로 꼽혔다.[1]
2. 생애
출생 연도는 확인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병법을 좋아했다고 한다.
2.1. 조나라의 멸망
기원전 236년에 장군이 되어, 조나라의 연여를 공격해 9개의 성을 빼앗았다.
기원전 229년에는 조나라와의 마지막 전쟁에 출전했는데, 이목의 수비를 1년 동안 뚫지 못했다고 한다. 진나라측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시황제 18년(BC 229년), 군사를 크게 내어 조나라를 공격했다. 왕전이 상지(上地)의 군사를 이끌고 정경(井陘)을 공격했고, 양단화가 하내의 군사를 거느렸다. 강외(羌瘣)가 조나라를 토벌하고 단화가 한단성을 포위했다.
시황제 19년(BC 228년), 왕전, 강외가 조나라 땅 동양(東陽)을 모조리 평정하여 취하고, 조나라 왕 천(遷)을 잡았다. 바로 군대를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중산에 주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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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진시황본기
이를 보면 왕전은 별 무리 없이 조나라를 멸망시킨 것으로 보이나, 조나라측의 기록을 보면 이목이 왕전을 훌륭히 막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시황제 18년(BC 229년), 왕전이 장수가 되어 조나라를 공격했다.
시황제 19년, 1년 만에 드디어 조나라를 점령하고 조왕의 항복을 받아 조나라 땅을 모두 평정하고 군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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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백기왕전열전
이러한 사기의 기록과 더불어, 전국책에 의하면 환의가 이목에게 패배한 이후에도 계속 진나라군에 남아 왕전의 부장으로 종군하다가 이 전쟁에서 이목과 다시 싸우다 전사했다.[2] 부장이 전사했을 정도라면 진나라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또한 여러 저서에 의하면 왕전은 이목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조천(趙遷) 7년(BC.229년), 진나라의 왕전(王翦)이 조나라를 공격해 조나라의 이목ㆍ사마상(司馬尚)이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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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염파인상여열전
당시의 진나라는 나머지 나라를 압도할 만한 강국이었고, 진나라군 또한 장평대전의 참패 이후 약소국으로 전락한 조나라군보다 훨씬 강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왕전은 이목을 제거하기 전까지 조나라군의 수비를 뚫지 못한 것을 보면, 전쟁의 승자는 왕전이지만 전투에서 이목을 이겼다고 보기는 힘들다. 다른 이유[* 예를 들자면 사기는 왕전과 이목이 수비적인 전략을 택했다고 서술한다. 왕전은 초나라를 상대로 1년 동안이나 대치하며 기회를 노렸고, 이목 또한 흉노족과 환의와의 전투 초기에는 수비적인 전략을 택했다. 사기에는 자세한 정황이 나오지 않아서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두 명장이 수비를 선호했다면 이들이 대처한 전황은 자연스레 교착에 빠졌을 것이다. (수성이 공성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하다고는 하지만 이목과 사마상의 능력을 무시할 수 없는부분이다.)
결국 진나라는 곽개를 매수하여 이목을 제거했고,[3] 이목이 사라지자 왕전은 석 달도 지나지 않아 기원전 228년에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한편, 조나라의 왕족 가(嘉)는 대(代)라는 지역으로 피신하여 대나라의 왕을 자칭하고 연나라와 연합해 세력을 키웠다.
2.2. 연나라의 멸망
조나라가 멸망하자 연나라는 진나라와의 전쟁을 막으려고 했다. 따라서 기원전 227년에 연나라는 형가를 보내 진왕(훗날의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했으나, 진왕 암살은 실패로 돌아갔다. 진나라는 연나라에 보복하기 위해 왕전과 신승(辛勝)이 지휘하는 군대를 출진시켰다. 왕전이 지휘하는 진군은 연군을 두 차례 크게 격파했고, 기원전 226년에는 연나라의 도성 계(薊)를 함락시켜 연나라를 멸망시켰다.
연나라의 왕 희는 요동으로 도망쳤으나, 연의 잔존 세력은 기원전 222년에 제나라 멸망을 앞두고 대나라와 함께 왕분에게 멸망당했다.
2.3. 초나라의 멸망
진왕은 사람을 잘 믿지 않는 성격을 지녔으며,[4] 신하에 대해 종종 가혹한 처벌을 했다.[5] 왕전은 뛰어난 전과를 올린 장군이었지만, 나이가 들자 진왕은 그를 점점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진왕은 초나라 정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왕전은 적어도 60만 병력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신은 20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진왕은 이신의 안을 택했고, 자신의 처지를 직감한 왕전은 퇴직하고 물러났다.[6] 이신과 부장 몽염의 20만 대군은 초반에는 승승장구했으나, 초의 명장 항연의 책략에 대패하고 말았다.[7]
다급해진 진왕은 왕전을 직접 찾아가 다시 복귀할 것을 청했다. 왕전은 재차 60만 대군을 요구했고, 진왕은 이를 승낙했다. 왕전은 60만 대군을 몰고 몽무를 부장으로 삼아[8] 초나라군을 격파하러 출정했다. 60만은 진나라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이어서 진왕은 내심 반란을 걱정했다. 이를 간파한 왕전은 출진하는 순간은 물론이고, 초나라군과 대치하는 동안에도 수차례 사자를 보내서 자손 대대로 먹고 살 수 있는 막대한 토지와 저택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부하 장수가 너무 지나친 게 아니냐고 왕전에게 묻자, 왕전은 반란을 걱정하는 진왕을 안심시키려고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자신은 나라를 집어 삼킬 반란분자가 아니라, 자손을 위한 승리 수당이나 보채는 늙은 장수라는 점을 계속 강조했던 것이다.
왕전의 보신책은 본인의 안위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전국시대가 막바지에 접어들며 변한 전쟁의 속성[9] 을 파악한 왕전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장기전을 계획했다. 그는 이전의 승리로 오른 초나라군의 사기를 약화시키고 쉴새없이 전쟁에 동원되어 지친 진나라군을 쉬게 하다가, 단번에 승기를 잡아 전세를 기울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장기전은 군주에게 의심을 받아 틀어질 위험이 매우 높았다는 점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전 세대에는 지휘자가 교체되는 바람에 허무하게 결판이 난 장평대전이라는 전례가 있었고, 왕전 본인도 방어로 일관하던 이목이 조나라 조정의 신뢰를 잃는 바람에 제거당하는 것을 똑똑히 본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왕전은 이미 진왕의 눈 밖에 난 전적이 있었다. 염파와 이목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왕전은 진왕을 안심시켜야 했다.
이러한 왕전의 보신책은 적중했다. 진왕은 왕전을 교체하지 않았고, 왕전은 초나라군을 상대로 1년 동안 장기전을 벌일 수 있었다. 대치하는 과정에서 진나라의 병사들은 투석, 멀리뛰기 시합을 할 정도로 체력이 쌓였고, 이를 들은 왕전은 이제야 싸울 수 있겠다고 판단하고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초군은 수차례 싸움을 걸어도 진군이 응하지 않자 결국 후퇴했고, 기회를 잡은 왕전은 단 한 번의 전투로 초군을 대대적으로 격파했다. 이후에는 최후의 저항을 하던 항연과 창평군을 몽무와 함께 출진하여 죽였고,[10] 수도까지 점령하여 초나라를 멸망시켰다. 왕전은 이 기세를 앞세워 장강을 건너 남진하여 백월(百越)까지 공략했다.
이 공을 인정받아 왕전은 무성후(武成侯)에 봉해졌고, 아들 왕분 또한 상술했듯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연나라의 잔당은 물론이고, 위나라와 제나라도 멸망시켰다. 부자가 여섯 나라 중 다섯을 멸망시킨 것이다. 덕분에 왕씨 가문은 몽오, 몽무, 몽염으로 이어지는 몽씨 가문과 함께 진나라 군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이 되었다.
3. 일족
아이러니하게도 손자 왕리는 진시황 사후 초한쟁패 혼란기 때, 항연의 손자인 항우에게 거록대전에서 패해 포로로 잡혔다.
4. 평가
사마천은 높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의 폭정을 막지 않고 일신의 안녕만을 추구하였다며 왕전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진나라, 나아가 중국의 전제군주제를 생각해 보면, 쿠데타라도 일으키지 않는 한 왕전이 진시황의 폭정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는 점에서 사마천의 비판은 조금 지나친 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왕전의 생애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기전파목으로 같이 엮이는 백기, 염파, 이목과 달리 굉장히 처신을 잘했고 정치력이 뛰어났다는 점이다. 전근대의 장군에게 왕과 밀고 당기며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정치력은 굉장히 중요했다. 한신을 비롯한 수많은 명장들은 처신을 잘못하여 숙청당하였고, 벨리사리우스 같은 명장들은 정치력이 부족하여 왕에게 받아야 할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큰 고생을 했다.
하지만 왕전은 진시황 밑에서도 수완을 발휘하여 받아 낼 수 있는 지원을 전부 받아내면서도 자신의 작전을 관철하여 결국은 초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를 보면 기전파목 중에서 정치력이 가장 뛰어났다고 볼 여지가 있다. 왕전보다 더 큰 공을 세운 백기는 장평대전 이후 입안한 작전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실각하여 유배당하는 수모를 겪다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염파는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정쟁에서 밀려나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 다니다 결국 쓸쓸히 죽었다.이목도 곽개의 모함으로 죽었다. 장수는 전투만이 아니라 윗선과의 소통도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
5. 대중매체에서
5.1. 삼국지 시리즈
코에이의 삼국지 11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하며 특기는 구축#s-2.1이나, 능력치는 통솔력 92를 제외하면 무력 71/지력 75/정치력 68/매력 79로 그야말로 평범함의 극을 달린다. 백기도 평가절하라는 평을 받지만 통솔력과, 적성, 특기(투신)는 최상급인데 왕전은 무력 관련 특기를 보유하고 있지만 무력이 71에 불과하고 적성도 궁병만 S로 훨씬 처참하다. 백전노장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노장 이미지가 있는 황충, 엄안, 황개가 친애무장이다.
삼국지12에서는 매력 삭제에 따라 다른 능력치가 상승됨으로써 제법 쓸 만한 무장이 되었는데, 통솔력 94/무력 72/지력 82(삼국지 11때보다 무려 +7)/정치력 68이고, 병과는 창병이며 전법은 손권과 같은 전군방호가 주어졌다. 다만, 일반적인 해금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고 꼼수가 필요하다.
삼국지 13에 경우 능력치는 삼국지 12 때보다 무력이 1 감소한 것 외에 변화는 없다. 중신특성은 궁술조련으로 궁 적성강화가 붙어 있고, 자신도 병과적성이 창병 B/기병 B/궁병 S라서 궁병대 운용말곤 다른 길이 없다. 통솔력이 90대라 군무중신 임명 시 명령을 2개 실행 가능하지만, 명성에 걸맞지 않게 특기가 부실해서 잡 무관에게도 탈탈 털리니 막싸움은 철저히 피해야 한다. 특기는 훈련 8/순찰 6/위풍 5/신속 6/공성 8/견수 8, 전법은 공수지휘.
5.2.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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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무장으로 등장. 병종은 도독계고 성우는 이민규이다. 대사가 전부 바둑 용어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이 특이한 점.
5.3. 킹덤(만화)
5.4. 묵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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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의 장수이자 악역으로 등장한다.
실제 역사상에서는 엄청난 전공을 쌓았던 장군이건만, 작중에서는 그야말로 삼류악역의 포스를 팍팍 풍긴다. 척봐도 변태아저씨 같이 볼품없는 외모에 성격도 영 찌질하게 묘사되는 편. 그나마 작중에서는 나름 명장으로 이름이 높다는 언급도 있지만, 그가 명장이란 말을 듣고 혁리의 동료 란주는 어이없어할 정도로 사람들이 못 미더워할 지경. 주인공 혁리와 치열하게 싸우다 죽은 초반의 주적 항엄중과 비교해보면 카리스마와 존재감 모두 후달린다.
첫등장 시의 모습부터가 경악스럽기 그지없다. 자신을 암살하려고 했던 여자 자객을 발가벗겨서 알몸으로 만들어버린 후, 사지를 말에 묶어서 찢어버리는 거열형으로 고통스럽게 죽이며 그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등 영락없는 저질이다.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게 혁리 일행에게 내내 고전하기만 하다가 막판에 끔살당한 언니의 복수를 노리던 낭에게 당해서 한칼에 이승 하직한다.
저 압박스러운 1:1 가르마는 나름대로 충실한 고증에 속한다. 실제로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병마용 중에서도 장군 계급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딱 저런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
다만 어디까지나 갑옷한정이지 그외는 상술된 왕전만 봐도 알듯이 진짜로 약 빨고 고증을 해놨기에 믿으면 정말로 곤란하다.
[1] 백기 당시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으로 국력은 키웠지만 영토 자체는 다른 육국에 비해 그렇게 크게 우월하진 않았는데, 백기가 무패 전설을 쓰며 주변 모든 나라를 다 쓸어버려서 단숨에 진나라를 전국칠웅 중 최강국으로 올려놓는다. 그리고 이렇게 확장된 기반을 가지고 왕전이 끝내 주변국을 다 멸망시키며 춘추전국시대를 종결시킨다. 그래서 군공으로만 따지면 백기와 왕전이 춘추전국시대에서 가장 뛰어난데, 그런 백기와 왕전을 막아낼 수 있었던 당대 유일한 장수가 각각 염파와 이목이었기에 이 둘도 백기와 왕전과 동급으로 올려놓은 것. 실제로 백기와 왕전은 모두 염파와 이목(백기는 염파와 실제로 맞붙었을지는 의문이며 왕전은 이목과 싸워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을 힘으로는 꺾지 못했고, 뒤로 손을 써서 첩자와 유언비어를 이용해 정치적으로 실각시켜 승리를 거뒀다.[2] 해당 기록, 혹은 전국책의 신뢰도가 낮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3] 사기에서는 진나라 조정이 뇌물을 먹였다고 하고, 전국책에서는 왕전이 직접 곽개를 매수했다고 한다.[4] 동생 성교의 난, 친어머니와 노애(嫪毐)가 일으킨 난, 여불위(呂不韋)의 처형 등으로 반란에 대한 의심이 많을 수밖에 없던 왕이었다.[5] 좋은 예로 진나라의 장군이었던 번오기(樊於期)가 있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일가친척이 몰살당하여 혼자 연나라로 망명했다.[6] 사기의 백기왕전열전에 의하면, 진왕이 왕전과 이신의 말을 동시에 듣고 왕전도 늙었다고 평하며 이신을 칭찬하고 그의 안을 택했다. 자세한 정황은 나오지 않았지만, 진왕이 왕전과 이신을 은밀히 만나지 않았다면 왕전은 제삼자가 많은 조정 한복판에서 왕에게 대놓고 늙었다며 구박을 받았다는 말이 된다. 설사 진왕이 왕전과 이신을 은밀히 만났다고 하더라도, 이신의 면전에서 왕전을 구박한 시점에서 왕전의 입지는 수직으로 하락한 것이나 다름없다. 어느 쪽이든 처세술의 달인이었던 왕전이 위기를 느낄 만했던 것이다.[7] 이신과 몽염의 패배에 대해서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이들의 패배는 왕전 열전에만 나오고, 초세가, 진시황 본기, 이장군 열전, 몽염 열전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기록이라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 기록이다.[8] 몽염 열전에 몽무는 왕전의 부장으로서 초나라와의 전쟁에 종군했다는 기록이 나온다.[9] 철기시대가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가던 때부터 시작했다고 보는 학자들은 전국시대부터 대량 생산되기 쉬운 철기가 보급되면서 본격적인 물량전이 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10] 몽염 열전, 초세가, 진시황 본기에 왕전과 몽무가 항연과 창평군을 죽이고 초나라를 멸망시켰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의 기록이 조금 엇갈린다. 몽염 열전에 의하면 몽무는 왕전이 60만 대군과 함께 출진했을 때부터 왕전의 부장으로서 종군하여 그와 함께 초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항연을 죽였고, 다음 해에 초나라를 다시 공격하여 초나라의 왕을 생포했다. 초세가에서 몽무는 왕전이 항연을 죽인 후에 등장한다. 몽염 열전과 초세가는 창평군을 언급하지 않는다. 반면에 진시황 본기에 의하면 항연은 왕전이 초나라의 대군을 격파한 후에야 창평군을 초나라 최후의 왕으로 옹립했고, 이후에 몽무가 등장하여 왕전과 함께 항연, 창평군을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