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료
1. 개요
尉繚,[1] 생몰년도 미상.
전국시대 진시황의 모사. 위나라 사람이라고 한다.
2. 상세
시황 10년(기원전 237년) 진시황을 알현하여 전국 통일에 대한 계책을 고하였다. 진시황이 이를 받아들이고 예를 갖춰 우대하였으나, 이후 진시황이 교만해질 것이라 판단하여 도주하려 하였다. 그러나 진시황이 간곡히 만류하여 진나라에 머물렀고 그가 고한 계책의 실행은 이사가 맡았다고 한다.
열국연의에서는 제자 왕오와 같이 각 국가의 각료들에게 뇌물을 보내서 전국의 6국을 이간질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전국이 통일된 이후에 진시황이 자만하는 것을 보고 진나라의 기운이 쇠하였다고 한탄하며 말없이 떠나는 것으로 나온다.
장의가 주장한 진나라를 중심으로 한 연횡론의 최후의 실행자. 의아한 것은 진시황으로부터 약 100여년 전인 위 혜왕시절에도 언급이 되고 있어[2] 가상인물이나 동명이인에 대한 설도 제기되고 있다.[3] 위에서 언급된 것은 사마천의 사기에 언급된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진시황의 용모를 묘사한 문장으로 후세에 진시황의 모습을 상상할 기록을 남긴 것으로도 나름 유명한데 그 묘사는 아래와 같다.
울료가 남긴 병법서가 무경칠서 가운데 하나인 울료자 24편인데, 내용적으로는 무경칠서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으나, 동시에 '''위서'''라는 주장도 끊이지 않고 있다. 명나라의 유명한 방효유부터 시작해서, 청나라 때에는 이미 위서라는 것이 통설이 될 지경이었으니 안습. 하지만 한나라 초기 무덤에서도 발견된 것을 봐서는 전국시대에서 진나라 시기 정도에는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이후에 가필은 있어도 완전한 위작은 아니라는 주장도 존재한다."진왕이란 위인은 그 상이 우뚝 선 콧날, 가로 길게 찢어진 눈, 맹금(猛禽) 같은 가슴, 시랑(豺狼) 같이 쉰 목소리, 은혜를 베푸는데 인색하고 호랑이와 이리 같은 흉악한 마음을 가슴에 감추고 있으면서 자기가 곤궁할 때는 밑의 사람일지라도 몸을 굽히나 일단 자기의 뜻을 얻게 되면 쉽게 그 사람을 잡아먹는다. 진왕이 지금은 나와 같이 평민의 복장을 하고 나를 대할 때는 항상 나에게 몸을 낮추고 있으나, 진왕이 장차 천하를 얻게 되면 천하는 모두 진왕의 노획물이 되어 그와는 결코 오랫동안 같이 지낼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제안한 계책 중에 유력한 것은 바로 각국 대신들의 매수였는데, 그 과정에서 조나라의 곽개와 제나라의 후승을 매수한 것으로 유명했다고 알려진다. 얼핏 보면 그냥 단순한 로비 정도가 아니냐고 여기겠지만, 언급한 두 간신이 매수된 이후에 저지른 짓을 보면 그 여파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후승 : 다른 5국이 망하는 순간까지 진나라와 우호를 유지함, 제나라 수도의 농성을 포기하고 항복 권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