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시/역사
옥길동(광명)의 편입이전 역사에 대해서는 인천광역시/역사, 부천시/역사도 참조할 것. 아래에는 옥길동을 제외한 광명시 지역 위주로 서술한다.
1.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삼국시대 때에는 '잉벌노'('늠내')이라는 지역의 일부였으며, 통일신라 때는 곡양현의 일부였다.
2. 고려
태조 때 곡양현이 금주(衿州)로 개편되자 이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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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후 1412년까지의 광명시 지역 모습
3. 조선
금주가 금천으로 이름이 바뀌고(1413년) 금천현 자체가 인근 과천시 지역의 과천현과 현재의 강서구/양천구 일대인 양천현과 합치고 찢어지길 반복하다(1414년) 결국 세조 이후 금천현의 경계가 확정(1416년). 그 뒤로는 이름만 금천현 → 시흥현 → 시흥군으로 변경되면서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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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인 1896년 당시 광명시 지역 모습
이 때의 광명시 지역은 시흥현의 서면[2] 과 남면[3] 지역으로, 현내면(현 시흥동과 안양시 석수동)과 함께 옛 시흥현의 핵심 지역 중 하나였다. 1895년에 시흥군으로 승격이후 23부제 대개편으로 인천부 시흥군이 되었다가, 1년 후 23부제를 13도제로 개편하면서 경기도 시흥군이 되었다. 이때 현내면이 군내면이 되면서 박달리가 군내면에 속했다.
4.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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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당시 광명시 지역 모습.
1911년에는 마을 이름이 통합되었다. 하안동('''하'''평리+'''안'''현리)이라는 명칭은 이때 생겼다.
1914년 과천군과 안산군을 병합하면서 시흥군의 면적은 넓어졌다. 이 때 이전의 시흥군 남면과 서면이 (통합)시흥군 서면으로 되고, 박달리를 다시 편입해왔다. 면사무소는 소하리에 있었지만 경찰 주재소는 노온사리에 있었다.
그러나 1936년에 영등포가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시흥군의 면적이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참고로 영등포가 경성부에 편입될 즈음에 일제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경인일체화' 차원에서 지금의 인천광역시 서구(검단 제외), 부평구, 계양구 , 부천시, 구로구, '''광명시 일부(광명동, 철산동, 하안동, 소하동 북부)''', 금천구, 관악구, 양천구, 강서구 일대의 경성부 추가 편입을 검토하기도 했었다.[4][5] 하지만 1940년 인천부 추가 확장이 단행됨에 따라 이 계획은 사실상 폐기되었다.
5.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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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에 지금의 구로동, 대림동, 신도림동, 신대방동이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시흥군의 땅이 더욱 줄어들기 시작했다. 구로동이 서울로 편입되어 '''광명은 서울과 접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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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에 대격변이 일어난 것은 1963년 서울시 대확장으로 시흥군의 안양천 동쪽부분인 현내면(동면)이 서울 영등포구에 편입된 것이 시작이다. 현내면은 조선시대 내내 시흥현의 중심지로, 시흥=현내면 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시흥의 상징과도 같은 지역이었다. 따라서 시흥군 입장에서 현내면이 사라진 것은 시흥이라는 지역의 정체성이 사라진 것이었다. 이후 시흥군의 각 면들은 현 경기도 서남부의 도시군으로 갈라지게 된다. 옛 시흥군의 자세한 변천 내력은 시흥군 항목과 한국어 위키백과의 시흥군 항목 참조. 이 때 서면 박달리가 안양읍으로 편입되었다.
1961년경 시흥군 문서에 나온 회의록에 따르면 도덕산 산맥을 기준으로 서면 서부(광명동, 학온동)을 소래면에 넘기고 서면 동부(철산동, 하안동, 소하동)를 동면에 통합시키자는 제안이 언급된다(...). 링크(97쪽)
5.1. 본격적인 광명시 변천 연혁
5.1.1. 1963년 서울특별시 도시계획 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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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당시 광명시 지역 모습. 주변 지역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다. 빨간 선은 서울시 도시계획구역 경계.
본격적인 광명시의 시작은 당시 시흥군 서면 지역인 광명리, 철산리, 하안리 지역이 [6] 1963년 9월 17일에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7][8] 에 편입(편입 면적 12.37㎢)되면서 시가지로 개발되면서부터다.[9] 서울시 도시계획에 의해 조성된 도시라고 하니까, 으레 서울 위성도시였으니 그랬으려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서울시 도시계획에 의해 조성된 위성도시는 과천과 광명 둘 뿐으로, 부천, 고양, 안양, 성남(분당 한정. 구성남은 애매하다) 등지는 서울시 도시계획과 무관하게 조성된 위성도시라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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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 변천 지도
참고로 시 승격 이전인 1973년에는 전국적인 연탄 품귀현상으로 정부가 서울시내 연탄의 외부반출을 통제하면서 예전부터 서울쪽 연탄공장으로부터 연탄을 공급받았던[10] 광명주민(당시 시흥군 서면주민들)이 이에 항의하여 집단농성에 들어갔던 흑역사가 있다. 결국에는 두손두발 든 서울시측의 타협으로 광명지역으로의 서울시내 연탄의 제한적인 반출이 이루어졌다. 광명주민으로서는 서울로 편입되지 못한 한이 커졌을지도(...).
당시 광명동 지역은 서울 개봉지역의 일부로서 주거지로 개발되었고, 철산동 지역은 서울 구로공단 배후 거주지로 개발되었다. 서울시 편입 예정지였던 시절에 건설되었거나 계획되었던 아파트 단지로는 광명동 구 광명아파트(현 한진아파트), 철산동 구 광복아파트(현 두산위브)[11] , 구 철산주공 2단지(현 하늘채/푸르지오), 3단지(현 래미안자이), 하안동 구 하안본주공 1단지(현 e편한세상), 2단지(현 두산위브)가 있다.
여담으로, 혹자는 광명시는 서울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이 모여서 형성된 도시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성남시 본도심처럼 아예 노골적으로 정부와 서울시가 합세하여 서울시내 빈민들을 몰아넣기 위해 만든 도시는 아니며, 구로공단 근로자들을 위한 주거지역 성격이 강하기 때문. 다만 철산4동 고지대, 하안동[12] , 소하동(특히 시흥대교 주변) 등지에 철거민들이 모여 불량주택지대가 형성된 것은 사실이다.
1971년 그린벨트 제도 시행에 따라 남부지역은 그린벨트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북부 지역인 광명동, 철산동, 하안동의 대부분의 지역은 서울시 도시계획에 따라 주거지 개발지역으로 계획이 잡혔거나 이미 주거지로 개발된 상태였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린벨트에 편입된 적이 없다.
1963년~1982년의 기간 동안에 지어진 광명시 광명동, 철산동, 하안동 지역의 학교, 관공서, 교량, 도로 등의 시설물은 서울특별시의 도시계획의 손길이 다 닿았다고 봐야 한다. 광명고등학교 설치에 관한 서울특별시 도시계획 공문서
광명동(+옥길동)과 철산동의 서울전화(지역번호 02) 편입은 1978년에(편입 시작은 1970년), 하안동, 노온사동, 가학동, 소하동, 일직동의 서울전화 편입은 1980년에 완료되었다. 1980년 소하읍 행정관할지역의 서울전화 편입으로 시흥군 서면 자체 통화권이 폐지되었다.
5.1.2. 광명출장소 승격 및 소하읍 승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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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이후 시 승격 직전까지의 당시 광명시 지역 모습. 1973년에 개봉동쪽 경계가 조정되었고 후에 광명출장소, 소하읍 승격.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이들 지역은 1970년에 시흥군 서면 산하의 광명출장소로 승격되었으며, 1974년에 광명출장소가 서면 산하에서 시흥군 직접 관할로 전환되었다. 한편 잔여 서면 지역은 1979년 소하읍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광명동 지역은 개봉동과 동일 생활권이라는 이유로, 철산동 지역은 구로공단과의 유기적인 도시계획의 일환[13] 으로 서울 편입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여담으로 지금의 광명시 남부는 1978년에 안양시 도시계획구역에 편입되었다.#
시 승격 혹은 서울 편입이 늦어지면서 소하읍은 역대 최다인구 읍이 되었다.
5.1.2.1. 만일 시 승격 대신에 서울 편입이 단행되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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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광명 북부 서울 편입 단행시 현재의 가상도 (혼동 방지를 위해 흑백 처리)
이 지도에서는 1995년 금천구 분구로 철산1동이 구로구 사성동으로 잔류한 것을 가정하였다. 철산동에서 구로구청이 금천구청보다 더 가까운 것을 고려하면 철산동 전역이 구로구에 편제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목감천과 안양천으로 분절된 상황을 고려하여 구로구가 금천구와 광명구(혹은 철산구)로 3등분 분구되었거나 지금의 구로구 동부와 금천구는 구로구로 잔류하고 지금의 광명시 북부와 구로구 서부는 '개명구' 등과 같은 명칭으로 분구되었을 수도 있었다.
만일 1981년 이전인 1970년대에 광명 북부의 서울 편입이 단행되었다면 광명 남부는 안양으로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소하동(일직동)과 박달동은 안양시의 도시계획에 따라 연담화 되었을지도 모른다. 1963년 서울 대확장때 광명동, 철산동, 하안동이 영등포구에 편입되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무튼 지금의 광명시와는 엄청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5.1.3. 광명시 승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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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시 승격 당시 광명시 모습
1970년대 당시 서울집중 현상이 뜨거운 문제로 부상하자[14] 서울집중 억제의 일환으로 광명은 '''서울 편입에서 배제'''되고[15][16] , 대신 남부의 시흥군 소하읍[17][18] 과 묶어서 1981년 7월에 광명시로 시 승격이 되었다. 서울 편입이 무산된 데는 서울 집중 문제 뿐만 아니라 시흥군의 군세가 축소되는 것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고 한다.# '''서울 편입 떡밥'''에 대해서는 관련 항목을 참조할 것. 광명시 북부와 같이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에 속했던 고양시 옛 신도면 지역과 남양주시 별내동 일부, 구리시 갈매동, 부천시 오정구 일부, 과천시 일대가 해당 지역이 시 승격이 되어서도 몇 년 동안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에 속했지만, 유독 광명시 북부만이 시 승격 1년 만에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에서 해제되었다는 사실은 광명시가 광명시 일대의 서울 편입을 배제하기 위해 만든 도시(행정구역으로서의 도시)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서울 도시계획 해제 직후에 당시 재정이 빈약했던 광명시 측에서 서울시 측에 도시개발자금을 달라고 징징거렸던 흑역사가 있다.기사
시 승격 계획안에 따르면 서울시로의 인구집중을 억제할 목적으로 광명시 승격이 추진되었다고 나와 있다.
광명시 승격 및 서울 편입 무산에 실망한 광명주민들이 서울 편입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철산리 시절부터 살아온 광명주민의 증언)
1983년에 시흥군 소래읍 관할이던 옥길 1, 3리가 광명에 편입되면서 현재 광명시의 모습이 갖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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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2월 28일 광명시 도시계획구역 신설로 서울시, 안양시 도시계획에서 해제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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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옥길동 편입 이후 광명시 모습
승격이 되고 난 뒤 1982년에 광명시 북부의 대부분이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에서 해제되어 광명시가 독자적으로 도시계획을 수립할 수 있게 됨으로써 1980년대 초중반 이후로 철산동, 하안동 일대에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었는데, 이때 건설된 아파트 단지들은 철산주공 4,7,8,9,11,12,13단지와 하안주공 전 단지(구 하안주공 본1,2단지 제외)와 독산주공14단지. 그리고 현재의 철산상업지구가 이때에 조성되었다. 즉, 서울시를 배후로 하는 주거기능 위주 의 위성도시로 개발된 것. 1993년에 광명실내체육관과 광명시립도서관(현 하안도서관)이 세워졌고, 1994년경에 안양천과 목감천의 광명지역 둔치가 공원과 자전거도로로 조성되었다. 시 관할구역은 광명 1-7, 철산 1-4, 하안 1-4, 소하 1-2, 학온동이다.
1986년에는 1983년에 광명시로 편입된 옥길동이 광명시 도시계획구역에 편입되었다.
1987년에는 안양시 박달동, 석수동과의 일부 경계조정이 이루어졌다. 석수동 중에서 서울전화를 쓰는 곳이 원래 광명이었던 동네. 반대로 현 광명역 부지는 원래 석수동이었다. 때문에 처음 남서울역 부지가 발표되었을 때는 안양시 석수동이라고 발표했다가 뒤늦게 정정보도를 내기도 했다.
1992년에는 하안동 일부(지금의 세이브존 부지)가 철산동에 편입되는 등 법정동, 행정동 경계조정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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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경계조정 이후 현재의 광명시 모습
현재의 행정동 구역이 설정된 것은 1995년. 그 해에 광명시와 서울시 간의 미세한 경계 조정이 이루어졌다.[19] 이때 당시 광명시의 가장 큰 실질월경지였던 철산3동 일부가 서울시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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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 도시계획구역이 실제 행정구역 경계에 맞게 재조정되었다. (지도 출처: 광명시청 자료)
2014년 8월에 시 휘장과 마스코트가 전격 변경되었다. 광명시 참조.
5.2. 관련 문서
[1] 참고로 1914년 개편 이후의 시흥군 남면은 지금의 군포시(구 과천군 남면).[2] 현 광명시 '동'부 (철산동, 하안동, 소하동, 일직동, )[3] 현 광명시 '서'부(광명동, 노온사동, 가학동)[4] 편입 검토대상 지역 - 부천군 서곶면/부내면/소사면/오정면, 시흥군 서면 일부/동면, 김포군 양서면/양동면[5] 어떤 기사는 부천군 문학면과 김포군 양촌면까지 포함되기도 했으나 편입 검토대상 지도에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여기서는 빼둔다.[6] 광명시 북쪽 월경지가 1949년부터 서울시와 접경했음에도 서울 편입 대상지에 포함 안된 것은, 안양천과 목감천이라는 자연장벽과 지금의 금천구, 관악구 일대가 원래는 서울시 편입 대상지역이 아니었다가 추가되어 서울 편입이 된 점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7] 1982년에 광명시 북부가 서울시 도시계획 구역에서 해제. 고양시 지축-신도 지구와 남양주 별내/구리 갈매 지구는 1995년경, 과천시 일대는 1990년경에 해제. 이것이 '''50년 넘도록''' 광명시에서의 서울시 편입 논란의 근원이 되고 말았다. 관련 항목 참조. '''만일 1963년 1월 1일 서울 대확장때 경기도 시흥군 서면 광명리, 철산리, 하안리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광명동, 철산동, 하안동으로 행정편입되었더라면 지금쯤 광명시 지역의 역사는 상당히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8] 참고로 서울시 도시계획에 편입되지 않은 소하리, 일직리, 노온사리, 가학리는 1978년부터 1982년까지는 안양시 도시계획구역에 속했다.[9] 한국민죽문화대백과사전 광명시 항목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다. #[10] 광명리, 철산리 주민들은 신도림쪽 연탄공장, 하안리, 소하리 주민들은 시흥동쪽 연탄공장으로부터 연탄을 공급받았다고 한다.[11] 참고로 광복절의 그 광복 맞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나 유족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데서 광복이라는 이름을 따온 것.[12] 지금은 고층아파트단지로 개발되어있지만 당시에는 판자촌, 논밭으로 어지럽게 혼재되었던 동네였다.[13] 서울시는 철산동, 하안동 일대에 구로공단 근로자를 위한 대규모 아파트단지 조성을 계획했었으나 서울 편입이 나가리되면서 축소된 것이 지금의 미혼여성근로자 임대아파트. 또한 지금은 민간아파트로 재건축된 구 하안주공 본1,2단지와 철산주공 2,3단지는 서울 구로공단 정비계획의 일환으로 계획되어 지어진 단지들이었다.[14] 당시 정부에서는 서울시 적정 인구의 마지노선을 800만으로 잡았는데 1970년대에 벌써 초과해버렸다...[15] 만일 당시 시흥군 광명출장소 인구를 합해도 서울 인구가 800만도 안되는 상황이었다면 최소한 광명동과 철산동이라도 서울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았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16] 정확히는 최규하때까지는 박정희 시절의 서울 추가 확장계획을 폐기하지 않아 시 승격 여부를 두고 갈팡질팡하다가 전두환의 5공 정부가 집권하면서 본격적으로 위성도시 육성 정책을 취하면서 이렇게 된 것이다.[17] 현재의 학온동, 하안동, 소하동, 일직동 일대[18] 법적으로는 광명출장소 지역도 소하읍이긴 했다. 즉, 행정구역상 주소명은 예를 들자면 경기도 시흥군 광명출장소 철산리가 아닌 경기도 시흥군 소하읍 철산리.[19] 엄밀히 말하면 목감천 쪽은 1:1 교환 형식의 경계조정이었고 안양천 쪽은 경계조정이라기 보다는 철산3동 월경지가 서울시에 편입된 것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