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시/역사
1. 개요
현재의 시흥시 지역은 원래 '''인천도호부'''(옛 소래읍)와 '''안산군'''(옛 수암면, 군자면)의 땅으로, '''원래의 시흥과는 단 한 치의 연관도 없다.''' 목감천 주변 시흥시-광명시 경계가 조정되었다면 좁쌀만한 오리지널 시흥땅을 차지했겠지만 그런 경계조정이 이루어진 적이 없어서 일제의 근대적 측량으로 설정된 행정구역 경계(옛 부천군 소래면 - 시흥군 서면)가 그대로 유지되어오고 있기 때문.[1] 그러나 설령 시흥시-광명시 간 경계조정이 이루어졌다 해도 단지 경계 직선화를 위한 미세조정에 그치는 터라 이러한 문제는 본질적으로는 여전했을 것이다.
시흥시 당국에서도 공식적으로 아예 대놓고 인천, 안산의 일부였다고 설명한다. "시흥시에는 '시흥'이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그 흔적으로 2000년 전국 시외전화 지역번호 개편 이전까지 현 시흥시 지역은 인천권이였던 소래 지역이 032, 안산권이었던 군자+수암 지역이 0345로 나뉘어 있었으며, 현재 천주교 교구 역시 소래 지역은 인천교구, 군자+수암 지역은 수원교구로 나뉘어 있다.
지금의 시흥시 지역을 이루는 소래/대야/신천 지구와 군자/정왕 지구에 대한 1914년(구 군자면, 수암면 지역)~1973년(구 소래읍 지역)까지의 역사에 대해서는 '''인천광역시/역사, 부천시/역사, 안산시/역사 문서를 참조'''할 것. 여담이라면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를 침공할 때 소래에서 상륙해서 '소정방이 왔다→소래'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다.
참고로 7차 교육과정 초기 시절의 국정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2006년 수정판[2] 부록에 실린 옛 지명 목록(특별시/광역시 산하 자치구를 제외한 기초자치단체별 옛 지명)에 시흥(지금의 시흥시를 가리킴) 옛 지명으로 잉벌노, 곡양 등이 실려있는 오류가 있다. 국사편찬위 관계자도 인정한 오류. 시흥(시)에는 잉벌노, 곡양이 아닌 미추홀, 장항구 등이 실렸어야 했다.
이하에서는 현재 시흥시 지역의 역사에 대해서만 서술한다. 시흥시 승격 이전까지 존재했던 시흥군의 역사와 왜 시흥시에 시흥이 없게 되었는지는 시흥군에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으니 참조바람.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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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쪽을 좀 더 보완한 주변 지역(지금의 시흥시 지역을 중심으로).
'''거듭 말하지만 지금의 시흥시 지역은 북부는 인천부, 남부는 안산군 관할로 원래의 시흥과 전혀 연관이 없는 곳이다.'''
2.1. 시흥시 북부(구 소래읍)
- 보통천(미산동, 포동) 주위로 뻥뚫린 간척평야가 있는데, 이를 '호조벌'이라고 한다. 1720년(숙종 26년)에 호조(재무부 격) 산하의 진휼청이 간척공사를 시작해 경종 원년에 완료되었다. 해당 사료에는 깨알 같이 인천과 안산이라는 두 고을의 경계 지역에[3] 둑을 쌓아 간벌했다는 내용이 나온다.[4] 보통천이라는 하천은 간척 이전에는 갯골이었고, 옛 인천과 옛 안산의 자연경계이기도 했다.
2.2. 시흥시 남부(구 수암면·군자면)
- 연성동에 강희맹이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관곡지가 있으며, 이 곳에서 연꽃을 길렀다고 한다. 그래서 옛 안산군의 별호(別號)가 '연성군(蓮城郡)'이었으며, '연성동'이란 행정동명 역시 여기에서 따온 것.
2.3. 1970년대 이후
1914년 부군면 통폐합으로 현재 시흥시의 남부지역이 안산군에서 시흥군으로, 현재 시흥시의 북부지역이 인천부에서 부천군으로 통폐합된 이후, 1970년대까지 별다른 행정구역 상 변화는 없었다. 그러던 중 1973년, 부천군의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되면서, 부천군이 공중분해(...)되어 부천군 남부에 있던 소래읍이 시흥군에 편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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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시흥군 행정지도(1982년).[6]
1980년에는 소래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에는 소래읍 옥길리가 광명시와 부천시에 분할 편입되었고, 계수리 일부가 부천시에 편입되었다.[7]
1986년에는 시흥군에 위치한 반월출장소[8] 가 안산시로 승격되면서, 군자면과 수암면의 일부 지역이 뜯겨 나갔다(...). 이로서 최종적으로는 시흥군에는 3읍(소래, 군포, 의왕)과 2면(군자, 수암)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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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의 시흥군.
결국 1989년 시흥군 서부지역인 소래읍, 군자면, 수암면이 시흥시로 승격[9] 되면서 시흥군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시흥군 해체 직전, 인천시는 소래읍의 인천 편입을 내무부에 요청했지만, 소래읍 주민들은 인천 편입이 아닌, 소래시 승격을 원했다고 한다. 또한 부천시에서도 역사성과 생활권을 들어 소래읍의 부천 편입을 요구하기도 했다. 다만 당시 경기도는 소래읍의 인천 편입에 반대했고, 내무부도 소래읍의 인천 편입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고 한다.
1995년에는 안산 생활권이었던 안산동(수암동, 장상동, 장하동)[11] 과 화정동 일부[12] 가 안산시에 편입된 이래[13] , 현재의 행정구역을 유지해 오고 있다. 1995년 내무부 주도의 인천 추가 확장 차원에서 시흥시도 인천 편입 대상으로 거론되었으나 시청과 시의회의 거센 반발로 인천 편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시의 김포군과 달리 주민투표 회부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변화를 지도로 보고 싶다면 이 블로그 참조.
1995년 11월 15일, 무지동을 무지내동으로 개칭하였다. 이유는 무지라는 이름이 無知, 즉 아는 게 없다는 의미가 연상된다고 해서다(...).
1997년에는 시흥시청이 대야동[14] 에서 현 위치인 장현동으로 이전했으며, 시 휘장도 현재의 것으로 바뀌었다.
1999년에는 정왕동이 정왕1동과 정왕2동으로, 2002년에는 정왕2동이 정왕2동, 정왕3동, 정왕4동으로 분동되었으며, 2004년에는 정왕1동이 정왕본동과 정왕1동으로 분동되었다.
2010년 시흥시청 일대 개발이 진행되면서, 연성동이 연성동과 능곡동으로 분동되었다.
2014년에는 군자동에서 월곶동이, 연성동에서 장곡동이 각각 분동되었다.
2018년 배곧신도시의 개발로, 정왕4동에서 배곧동이 분동되었다. 이로써 시흥시는 총 '''18개'''의 행정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1] 다만 지금의 광명시 북부인 철산리, 광명리, 하안리가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더라면 시흥군 서면 잔여지역 중 노온사리와 가학리가 소래읍으로 편입되었을 수도 있었다.[2] 2002년 초판에는 옛 지명에 대응되는 현 행정구역 목록이 간단히 실렸다. 그런데 거기에는 금천이 지금의 안양이었다고 나와있는 오류가 있다. 이 경우에는 광명으로 수정해야 하며, 안양의 경우 과천과 함께 과천으로 넣는게 옳은 편이다.[3] 포동과 매화동은 인천도호부, 연성동, 장현동은 안산군이었다.[4] 지역 야사에는 조선 정조 때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에 행차하는데 따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쌓았다고 알려져있으나 역사적으로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5] 1914년 화정리와 광곡리가 합쳐져 화정리가 되었는데, 시흥시의 화정동은 모든 영역이 옛 화정리에 속하고, 바로 옆에 붙어있는 안산시의 화정동은 옛 화정리의 나머지와 옛 광곡리의 영역이다.[6] 다만 소래면의 읍 승격이 반영되지 않은 오류가 있다. 또한 반월출장소 지역은 표기는 되어있으나 도 직할 출장소인 관계로 시흥군이 직접 관할하지 않는 것을 고려해 누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7] 옥길동이 광명시와 부천시, 계수동이 시흥시와 부천시 양쪽에 존재하게 된 계기가 여기서부터였다. 이뿐만 아니라 경기도 곳곳에는 이렇게 해당 리의 전 지역의 아닌 일부를 타 지역으로 편입하고 해당 이름을 그대로 쓰는 사례가 많다.[8] 군자면, 수암면과 화성군 반월면의 각 일부로 구성되었다.[9] 다만 수암면 일부의 경우는 1995년에 경기도 안산시 안산동이 되었다.[10] 1990년 인구총조사 기준. 당시 시흥시 인구는 107,176명이었다.[11] 즉, 1995년까지 안산동은 '''안산시가 아닌 시흥시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산동은 조선시대 안산군 관아가 있던 곳이다.[12] 화정동이 시흥시와 안산시에 모두 존재하는 이유이다.[13] 군자권(거모동, 정왕동 등) 역시 지속적으로 안산시 편입론이 있었으나, 결국 편입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거모동의 경우는 아예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흥시-안산시 행정구역 경계선이 지나며, 안산시 선부동, 원곡동, 신길동 시가지와 매우 가깝다.'''[14] 현재 시흥시 보건소. 시 승격 전부터 소래읍사무소가 위치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