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군

 


1. 개요
2. 상세
2.1. 1914년까지의 시흥
2.1.3.1. 구한말 당시 시흥군 산하 행정구역
2.1.4. 관련 문서
2.2.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후
2.2.1.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내용
2.2.2. 1914년 ~ 1973년 사이의 변천사
2.2.2.1. 가상역사 1. 만일 1936년에 영등포부 승격이 이루어졌다면?
2.2.2.1.1. 지금의 강남 지역
2.2.2.1.2. 지금의 과천시
2.2.2.1.3. 지금의 안산시와 주변 지역
2.2.2.2. 가상역사 2. 만일 1963년에 시흥군 동면이 서울에 편입되지 않았다면?
2.2.3. 관련 문서
2.3. 분리와 해체, 현재
2.3.1. 관련 문서
2.4. 만약 시흥시가 여러 기초자치단체로 쪼개지지 않았다면?
2.4.1. 반론
2.4.2. 대안
3. 참고/관련 문헌
4. 관련 문서


1. 개요


시흥군 행정구역 변천사
년도
당시 행정구역
삼국
잉벌노현
仍伐奴縣

동사힐현
冬斯肹縣
장항구현
獐項口縣
757
곡양현
穀壤縣

율진군
栗津郡
장구군
獐口郡
940
금주현
衿州縣

과주군
果州郡
안산군
安山郡
1018

과주현
果州縣
안산현
安山縣
1413
금천현
衿川縣

과천현
果川縣

1795
시흥현
始興縣



1895
1896
시흥군
始興郡

과천군
果川郡
안산군
安山郡
1914
시흥군
始興郡

현재
서울특별시 금천구(衿川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永登浦區)[1]
서울특별시 구로구(九老區)[2]
서울특별시 관악구(冠岳區)[3]
경기도 광명시(光明市)[4]

경기도 과천시(果川市)
경기도 안양시(安養市)[5]
경기도 군포시(軍浦市)[6]
서울특별시 동작구(銅雀區)[7]
서울특별시 서초구(瑞草區)[8]
경기도 안산시(安山市)[9]
경기도 시흥시(始興市)[10]
* 시흥군에서 갈라져 나온 자치구, 의 계승 구도는 각 구청, 시청 소재지를 기준으로 하였다.
구한말까지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영등포구[11], 구로구 동부, 관악구[12], 금천구, 광명시[13] 일대와 동작구 일부, 안양시 만안구 일부를 차지하던 군현이자 1914년부터 1989년 해체시까지 지금의 서울특별시 서남권(영등포, 구로, 금천, 동작, 관악, 서초)과 경기 중서부권(안양, 광명, 안산, 과천, 의왕, 군포, 시흥)을 차지했던 군(郡).
역사, 지리 관련 일부 서적에서는 조선시대의 금천/시흥을 '오늘날의 경기도 시흥시 일대'로 가리키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지금의 시흥시는 조선시대에는 인천과 안산에 속했기 때문에 명백한 오류이자 역사왜곡이다. 실제로 시흥에서 이를 갖고 기념사업을 벌였는데, 시의원 등이 역사를 왜곡한다며 들고 일어난 사건도 있었다. '오늘날의 영등포, 금천, 광명 일대'라 하는 것이 옳다. 이것과의 반면에, 역사책에서 조선시대의 과천과 안산을 오늘날의 과천시, 안산시로 일컫는데, 옛 과천군과 옛 안산군의 관아(지금으로 치면 시·군청)가 각각 지금의 과천시와 안산시에 있었기 때문에 시흥과는 다르게 이 둘은 옳다.
참고로 7차 교육과정 초기 시절의 국정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2006년 수정판 부록에 실린 옛 지명 목록(특별시/광역시 산하 자치구를 제외한 기초자치단체별 옛 지명)에 시흥(지금의 시흥시를 가리킴) 옛 지명으로 잉벌노, 곡양 등이 실려있는 오류가 있다. 국사편찬위 관계자도 인정한 오류. 시흥(시)에는 잉벌노, 곡양이 아닌 미추홀, 장항구 등이 실렸어야 했다.
2002년 초판에는 옛 지명에 대응되는 현 행정구역 목록이 간단히 실렸다. 그런데 거기에는 금천이 지금의 안양이었다고 나와있는 오류가 있다. 이 경우에는 광명으로 수정해야 하며, 안양의 경우 과천과 함께 과천으로 넣는게 옳은 편이다.[14]

2. 상세



2.1. 1914년까지의 시흥


1914년 이전 역사적 시흥 지역 행정구역 변천사
(지금의 영등포구, 구로구 동부, 금천구, 동작구 남서부, 관악구, 광명시, 안양시 만안구 일부)
고구려시대
잉벌노현
757년
곡양현
1413년
금천현
1795년
시흥현
1895년
인천부 시흥군
1896년
시흥군
1914년
시흥군 : 원시흥(금천)·과천·안산 통합
[image]
1914년 이전까지의 시흥.
원래 시흥이라고 불리던 지역은 현재 서울특별시 서남부(이른바 영등포 권역)과 경기도 광명시 일대로, 원래 '금천이라는 이름이었다가 정조 대에 '시흥'으로 개칭되었다. 이때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여의도, 양화동 제외), 구로구(안양천 이동지역), 금천구, 동작구 일부, 관악구(남현동 제외)과 광명시(옥길동 제외), 안양시 일부(석수동, 박달동)에 해당되는 곳이었으며[15] 이들 지역은 오늘날 서울 영등포 권역 생활권 (영등포 문화권)을 구성하고 있다.[16] 고로 지금의 시흥시 일대는 전통적 의미의 시흥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얘기. 간단히 말하자면 "오리지널 시흥"은 서울 영등포 권역 + 경기 광명시 일대 + 경기 안양시 일부.[17] 시흥의 역사적 정통성을 잇는 행정구역은 1914년 이전 시흥군의 딱 중앙에 위치한 곳으로, 전 지역이 시흥군의 영역 안에 들어가는 유일한 지자체이며, 지금은 철거된 시흥관아와 시흥향교가 있던 금천구이며, 경기도에 잔류한 곳으로 한정하자면, 비중이 작은 조그만 변두리일 뿐인 옥길동(인천도호부 영역이었다.)을 제외한 전 지역이 시흥군의 영역 안에 들어가는 지자체인 광명시안양시 일부(석수동, 박달동)이다.
이 문단에서는 1914년 이전의 원래 시흥군이었던 서울 영등포권경기 광명시 일대를 중점으로 기술하겠지만, 시흥군 해체 이전까지 시흥군에 속했던 지역들(현 시흥시 지역 포함)의 개괄적인 역사도 언급하겠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시흥시/역사, 과천시/역사, 화성시/역사, 안산시/역사, 인천광역시/역사, 부천시/역사 참조.

2.1.1.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糓壤縣, 本髙句麗仍伐奴縣, 景徳王改名. 今黔州.

곡양현(穀壤縣)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잉벌노현(仍伐奴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검주(黔州)이다.

삼국사기 권제35 잡지 제4

고구려 장수왕의 한강 유역 정복 이후 잉벌노(仍伐奴)현('늠내')[18]로 명명되었다. 늠내 혹은 잉벌노[19]는 '뻗어나가는 땅'이라는 의미로, 영등포 일대가 평야 지대인 것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늠내의 의미는 고려 초기에 등장하여 조선 후기에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시흥'이라는 명칭에서 다시 되살아났다. 통일신라 경덕왕곡양(穀壤)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20] 이 시기의 원시흥은 과주(지금의 과천)의 속현이었다. 신라시대부터 시흥동 근방에 호암산성이 있었고, 여기서 '잉벌내 역지내말(仍伐內力只乃末)'라고 적힌 문화재가 출토된 점을 미루어보면 읍치는 적어도 삼국시대부터 계속 시흥동 일대인 것으로 볼 수 있다.[21]
한편 과천은 고구려 장수왕 때 율목군 또는 동사힐이었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율진군이 되었다. 안산(현 시흥시 남부 포함)은 장수왕 때 장항구현이었다가 경덕왕 때 장구군이 되었다. 인천(현 시흥시 북부를 포함한 원인천 지역)은 장수왕 때 매소홀현이었다가 경덕왕 때 소성현이 되었다.

2.1.2. 고려


고려 건국 이후에 고려 건국에 기여한 호족들의 출신지가 되는 고을들을 죄다 주(州)로 승격시키고, 일부 고을의 지명을 고려 건국과 관련되게 바꿀 때, 원 시흥 지역은 곡양에서 금주(衿州) - 또는 검주(黔州) - 로 바뀌었고, 과천은 율진에서 과주(果州)로, 안산(현 시흥시 남부 포함)은 장구군에서 안산으로 개칭되었다.
인천(현 시흥시 북부를 포함한 원인천 지역)은 이후에 경원부로 승격되었다가 인주(仁州)로 이름이 바뀐다.
인천, 금천, 과천에 향 · 소 · 부곡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도 연관 있다.

2.1.3. 조선


개국 직후 행정구역 개편(1413년)으로 금천(衿川)으로 바뀌었다. 조선 개국 이후 양광도를 경기도로 개편하는 등의 전면적인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도호부보다 급이 낮으면서 끝이 -주(州)로 끝나는 고을의 주(州)자에서 모조리 -천(川)으로 바꾸어 금천(衿川)이 된 것.
이것은 인천(현 시흥시 북부 포함)과 과천도 마찬가지인데, 인주(仁州)와 과주(果州)였다가 1413년에 각각 인천(仁川)과 과천(果川)이 된 것. 안산(현 시흥시 남부 포함)의 경우는 이미 고려시대에 '안산'이라는 이름이 정해졌기에 조선초기의 행정구역 개편과는 관련이 없었다.
한편 여의도는 조선 시기(아무리 늦어도 조선 후기)에 한성부 성저십리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인 1414년에는 금천현과 과천현(현 과천시, 안양시, 군포시, 서울 관악구 남현동/동작구 노량진, 사당동, 동작동/서초구 대부분)이 금과현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다가 읍치 선정 문제로 몇 년 지나지 않아 원래대로 환원되었다. 금천구청과 과천시청 간 교통편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쉽다. 금천현과 양천현(현 서울 강서구, 양천구)이 통합되어 금양현이 만들어기도 하다가 1416년에 그냥 원래대로 '금천현'으로 환원되어 굳혀졌다. 다만 금양현 및 금양이라는 지명 자체는 금천현으로 되돌아간 이후에도 쓰인 것으로 보인다. 1400년대 후반 성종 때 저술된 강희맹의 금양잡록이 그 예.
정조 때(1795년)에 명칭이 금천에서 시흥으로 바뀌었다. 시흥이라는 단어는 잉벌노(늠내)의 의미를 되살린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시흥으로 개칭과 비슷한 시기에 지금의 시흥동에 시흥행궁이 지어졌고, 정조가 지금의 시흥대로 따라 서울(한양)에서 수원까지 행차했다고 한다. 사실 원래는 과천군 쪽에 나있던 길을 시흥군 쪽으로 옮긴 데는 사도세자 처형에 관여한 인물의 묘가 과천에 있는데, 수원까지 행차가는 데 과천을 지나가는 걸 정조가 싫어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아쉽게도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 있던 조선시대 시흥군 관아와 시흥향교 건물은 현재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22] 옛 시흥향교는 일제가 1940년대에 기존의 과천향교로 통합시키면서 철거되었다. 만약에 철거되지 않고 남아있었다면 양천향교와 함께 서울시내의 둘 뿐인 향교가 되었을 터. 하지만 양천향교도 헐린 건 똑같다. 관아터는 현재 시흥동 은행나무 앞 카멜리아 백화점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며, 시흥 향교는 범일운수 종점에, 시흥행궁은 관악산 신도브래뉴 아파트에 위치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2.1.3.1. 구한말 당시 시흥군 산하 행정구역

[image]
현재는 광명시와 석수동, 박달동만 제외한 전 지역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있다.
위 지도에 그려진 경계는 현재의 법정동 경계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구한말 당시 경계와 사소한 부분에서 다를 수 있다.
[image][23]
위 지도는 시흥군읍지(始興郡邑誌)에 기록된 내용이다. 위쪽이 동쪽이다.
시흥군읍지(1899년)에 나온 시흥군 행정구역과 현재 행정구역 대조
1899년
현재
군내면[24]
郡內面
북동·남동(北洞·南洞)
금천구
시흥동
박달리(博達里)
안양리(安陽里)
안양시 만안구
박달동
석수동
동면
東面
봉천리(奉天里)
신림리·서원리·난곡리(新林里·書院里·蘭谷里)
관악구
봉천동
신림동
가리봉리 일부(加里峰里)
구로구
가리봉동
가리봉리 일부(加里峰里)
독산리·문교리(禿山里·文橋里)
금천구
가산동
독산동
상도리 · 성도화리 일부(上道里·成桃花里)
성도화리 일부(成桃花里)
동작구
상도1동
상도동
남면
南面
노온곡리·유등리(老溫谷里·柳等里)
광명리·광화대리(光明里·廣火大里)
노온사리·아방리(老溫寺里·阿方里)
광명시
가학동
광명동
노온사동
서면
西面
소하리·가리대리(所下里·加里大里)
일직리·자경리(一直里·自京里)
철산리·사성리(鐵山里·巳省里)
하평리·안현리·율일리(下坪里·安峴里·栗日里)
소하동
일직동
철산동
하안동
상북면
上北面
구로일리·구로이리(九老一里·九老二里)
도야미리(道也味里)
구로구
구로동
신도림동
당산리·양진리(堂山里·楊津里)
원지목리 일부(遠芝牧里)
원지목리 일부(遠芝牧里)
사촌리(沙村里)
양평리(楊坪里)
영등포구
당산동
대림동
도림동
문래동
양평동
하북면
下北面
신길리·상방하곶리(新吉里·上放下串里)
영등포리·하방하곶리·중종리(永登浦里·下放下串里·重宗里)
신길동
영등포동
번대방리 일부(番大方里)
번대방리 일부 · 우와피리((番大方里 · 牛臥陂里)
동작구
대방동
신대방동
  • 박달리(博達里)는 서면 관할이었다가 1896년 군내면으로 이관되었다. 1914년에 군내면이 동면에 흡수될 때 홀로 떨어져나와 다시 서면 관할이 되었다.
  • 양화리(楊花里)은 양천군 남산면 관할이었다가 1914년 김포군으로 편입되었고, 1936년에 영등포와 같이 경성부로 이관되었다.
  • 두길리(斗吉里)는 인천부 황등천면 관할이었고, 1914년 같은 면의 옥련리(玉蓮里)와 합해 부천군 소래면 옥길리가 되었다가 1983년 다시 부천시 옥길동와 광명시 옥길동으로 나뉘었다.
  • 여의도계(汝矣島契)는 한성부 서부 연희방 관할이었다가 1914년 고양군으로 이관되고 율도계(栗島契)와 합쳐 여율리(汝栗里)가 었고, 1936년에 영등포와 같이 경성부로 이관되었다.
참고로, 위 표에 나온 모든 동리는 1914년 부군면 통폐합보다 3년 앞선 1911년에 통폐합되었다. (예: 원지목리+도야미리+사촌리→도림리, 철산리+사성리→철산리 등)
간단히 말하자면 북시흥은 지금의 영등포, 서시흥은 지금의 광명시, 동시흥은 동작구 서부, 관악구, 금천구 일대와 안양시 일부라고 보면 된다.
이 시기까지의 시흥군의 진산(鎭山)은 검지산(黔芝山)이었다. 지금의 호암산(虎巖山)이 바로 이 검지산이다.
안양시(석수동, 박달동 제외), 군포시(안산군 소관이던 대야동 일대는 제외), 과천시, 서울특별시 동작구 일부(노량진, 흑석동, 동작동, 사당동), 서초구(염곡동, 내곡동 제외), 관악구(남현동)은 과천군 관할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당시의 시흥군 지역과 현재의 시흥시는 그 관할구역에 있어서 전혀 연관이 없다!

2.1.4. 관련 문서



2.2.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후


[image]
시흥과 전혀 상관없던 지역에 시흥이라는 지명이 붙게 된 계기는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 남서부 일대의 전통군현들이 통폐합되어 부천군과 시흥군이 신설되면서부터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오리지널' 시흥군, 지금의 서울시 동작구(사당동, 노량진, 동작동, 흑석동), 관악구 남현동, 서초구 대부분과 경기 안양시 상당부분, 군포시(대야동 제외), 과천시 일대인 과천군, 지금의 안산시 일부 및 시흥시 군자-정왕, 연성-목감지구인 안산군 군내면·인화면·초산면·마유면·대월면·와리면이 시흥군으로 통합되었다. 군청은 그보다 3년 전인 1911년 시흥리에서 영등포로 이전하였다. 단, 인천(도호)부 신현면·천현면·황등천면을 통합한 부천군 소래면이었던 지금의 시흥시 북부 지역이 시흥군에 편입된 것은 한참 이후인 1973년의 일.
부군면 통폐합 초안에 따르면 부평+양천, 시흥+과천, 인천+안산으로 짜여져 있었으나, 최종 시행안은 인천+부평(→부천), 김포+통진+양천(→김포), 시흥+과천+안산(→시흥)으로 되었다.

부평과 부평의 일부로 흡수됐된 역사가 있는 양천은 평야로 이어져 있고, 시흥과 과천도 지금의 안양을 보듯이 이어져 있었다. 초안대로 했었다면 시흥에 시흥이 없는 상태도 안 생기고 안양권 통합 문제도 없을 수도 있는 것을 생각하면...이렇게 되었다면 아마 부평과 양천을 통합한 '부평(부천)'은 지금처럼 인천과 서울 사이에 낀 조그만 베드타운이 아니라 계양구 및 부평구 일대+부천시+서울시 강서구, 양천구, 구로구 서부를 합쳐서 체계적인 도시계획에 입각해 나름대로 산업+주거+문화에 이르기까지 독자 기반을 갖춘 큰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인천이 여전히 경기도 인천시로 남아 있고 이렇게 만들어진 '부평(부천)'이 부평(부천)광역시가 되었을지도... 인천의 경우 송도와 시화, 안산이 이어져 거대한 간척지가 생기고, 남동공단-시화공단-반월공단이 이어져 대규모 산업 단지가 조성되었을 수도 있다.

2.2.1.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내용


개편 이전 행정구역
개편 이후 행정구역
시흥군 상북면 + 하북면
시흥군 북면
시흥군 군내면 (박달리 제외) + 동면
시흥군 동면
시흥군 서면 + 남면 + 군내면 박달리
시흥군 서면
과천군 하북면 + 상북면 동작리, 사당리
시흥군 신북면
과천군 상북면(동작리, 사당리 제외) + 동면(주암리 제외)
시흥군 신동면
과천군 군내면 + 동면 주암리
시흥군 과천면
과천군 상서면 + 하서면
시흥군 서이면
과천군 남면
시흥군 남면
안산군 마유면 + 대월면 + 와리면
시흥군 군자면
안산군 군내면 + 인화면 + 초산면
시흥군 수암면
1914년 행정구역
현재 법정구역


시/구

북면
당산리, 양평리, 신길리, 영등포리, 도림리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양평동, 신길동, 영등포동, 도림동, 대림동, 문래동
구로리, 도림리
서울 구로구
구로동, 신도림동
번대방리
서울 동작구
대방동, 신대방동
신북면
노량진리, 본동리, 흑석리, 동작리, 사당리
노량진동, 본동, 흑석동, 동작동, 사당동
사당리
서울 관악구
남현동
신동면
잠실리, 반포리, 방배리, 양재리, 신원리, 우면리, 서초리
서울 서초구
잠원동, 반포동, 방배동, 양재동, 원지동, 우면동, 서초동
동면
시흥리, 독산리, 가리봉리
서울 금천구
시흥동, 독산동, 가산동
가리봉리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신림리, 봉천리
서울 관악구
신림동, 봉천동
상도리
서울 동작구
상도동, 상도1동
안양리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서면
일직리, 소하리, 철산리, 하안리, 광명리, 노온사리, 가학리
광명시
일직동, 소하동, 철산동, 하안동, 광명동, 노온사동, 가학동
박달리
안양시 만안구
박달동
서이면
안양리
안양동
일동리, 이동리, 비산리, 호계리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 평촌동, 비산동, 호계동
과천면
갈현리, 하리, 막계리, 주암리, 관문리[25], 문원리[26]
과천시
갈현동, 과천동, 막계동, 주암동, 관문동, 부림동, 문원동, 중앙동, 원문동, 별양동
남면
산본리, 금정리, 당리, 당정리, 부곡리
군포시
산본동, 금정동, 당동, 당정동, 부곡동
수암면
수암리, 장상리, 장하리, 부곡리, 양상리, 성포리, 월피리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 장상동, 장하동, 부곡동, 양상동, 성포동, 월피동
와리, 고잔리, 화정리
안산시 단원구
와동, 고잔동, 화정동
능곡리, 조남리, 목감리, 물왕리, 산현리, 하상리, 광석리, 논곡리, 하중리, 화정리
시흥시
능곡동, 조남동, 목감동, 물왕동, 산현동, 하상동, 광석동, 논곡동, 하중동, 화정동
군자면
장현리, 장곡리, 월곶리, 정왕리, 죽율리, 군자리, 거모리
장현동, 장곡동, 월곶동, 정왕동, 죽율동, 군자동, 거모동
선부리, 초지리, 원곡리, 신길리, 성곡리, 목내리, 원시리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초지동, 원곡동, 신길동, 성곡동, 목내동, 원시동

2.2.2. 1914년 ~ 1973년 사이의 변천사


1916년 신북면을 북면과 신동면에 분할 편입하였다.
개편 전
개편 후
신북면 본동리, 노량진리, 흑석리, 동작리
북면 본동리, 노량진리, 흑석리, 동작리
신북면 사당리
신동면 사당리
1917년 북면 영등포리, 당산리, 양평리를 영등포면으로 분리하였으며, 1931년 영등포읍으로 승격되었다.
1936년 영등포읍과 북면 노량진리, 흑석리, 번대방리 일부[27], 도림리 일부[28], 동면 상도리[29] 등이 경성부에 편입되었으며, 이때 경성부에 편입되지 않은 북면 잔여지역은 동면에 이관되었다. 이 때 영등포읍의 일본인 지역 유지들 중에서는 영등포부 승격을 바라는 여론도 존재했는데... 만일 영등포읍이 영등포부로 승격되었을 경우의 가상 역사는 영등포구/역사에 잘 나와 있으니 참조 바람.
1941년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되었다.
1947년 시흥군청이 영등포에서 안양면으로 이전되었다. 1949년에는 동면 구로리, 도림리[30], 번대방리[31] 등이 또다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32] 이와 함께 안양면이 안양읍으로 승격되었다. 영등포구의 역사에 대해서는 영등포구/역사 참조.
1963년 서울의 대대적인 확장에 따라 동면 신림리, 봉천리, 가리봉리, 독산리, 시흥리 및 신동면 전역[33]이 서울에 편입되었다. 양서면과 양동면 전역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옛 양천군 지역을 잃었지만 이름이라도 남긴 옛 김포군과 달리, 옛 시흥군은 1914년 이전 시흥군의 중심지였던 시흥동을 비롯한 상당부분이 서울에 편입되면서 옛 시흥군은 독자적인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다.[34]
같은 해에 동면(지금의 서울 금천구관악구 신림·봉천동) 안양리[35]와 서면(지금의 광명시) 박달리를 안양읍에 편입하였다.[36] 안양천과 서울시 경계를 기준으로 동쪽으로 넘어간 지금의 박달동과 석수동을 지금의 광명시, 금천구 지역에서 안양으로 이관한 셈. 이와 함께 화성군 일왕면을 편입하고 의왕면으로 개칭하였다.[37][38]
1970년 서면 광명리와 철산리에 서면 산하 광명출장소가 설치되었다.

2.2.2.1. 가상역사 1. 만일 1936년에 영등포부 승격이 이루어졌다면?

영등포부 승격이 이루어졌을 경우 옛 시흥현 지역의 가상 시나리오는 영등포구/역사 항목 참조. 이와 같은 형태로 영등포부 승격 → 영등포시 확장이 이루어졌다면 통합 시흥군에서 옛 시흥현 전역과 과천현 일부가 통으로 영등포시가 된다. 그렇다면 잔여 시흥군, 즉 옛 과천현과 안산현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옛 시흥현 전역이 영등포시에 편입됨과 동시에 잔여 시흥군은 공중분해되었을 것이다. 과천현에 해당하는 시흥군 신동면과 과천면은 광주군으로, 안산현에 해당하는 수암면과 군자면은 화성군으로, 그리고 과천현이었지만 서쪽에 따로 떨어져 있던 남면도 수암 · 군자 두 면과 함께 화성군으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2.2.2.1.1. 지금의 강남 지역

이렇게 되었을 경우 강남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광주군 신동[39], 언주, 중대, 구천 네 개 면이 서울의 위성 베드타운으로 개척되는 형태로 개발되었을 것이며, 이 네 개 면이 모두 읍으로 승격하면서 고양시의 사례를 보듯 얘네들을 묶어서 하나의 시로 승격시킬지, 아니면 따로따로 시로 승격시킬지를 놓고서 중앙정부가 한참 동안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경우 지금의 하남시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신동-언주-중대-구천 네 개 읍만 해도 골치아픈 마당인데 그보다 인구 면에서 한참 딸리는 광주군 동부읍을 신경쓸 수 있을 리가...
이렇게 되었을 경우 아마도 92년에 고양군을 시로 승격시킬 때처럼 신동-언주-중대-구천-서부-동부 여섯 개 읍면을 한꺼번에 묶어서 '강남시' 같은 이름으로 승격을 시키거나, 아니면 아예 95년까지 시간을 끌다가 통 크게 신동-언주-중대-구천 네 개 읍면만 분동하는 형태로 크고 아름다운 도농통합 광주시가 출범했을 것이다. 잘 하면 73년에 분리된 성남시까지 통합하여 서울, 영등포에 맞먹을 아주 크고 아름다운 경기도 제 1의 대도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40] [41]
이 경우 수도권은 서울특별시의 남서쪽에 영등포시, 남동쪽에 강남시/광주시라는 거대 도시가 좌청룡 우백호 형태로 포진한 도시 구조를 형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서울특별시는 지금과 같은 거대 도시가 되지는 못하고, 고양군 신도면과 원당 · 지도면 일부, 양주군 구리면 서부(부군면 통폐합 이전 망우리면)와 노해면 정도만 겨우 편입하여 영등포시나 강남시/광주시보다 조금 큰 정도의 행정 중심 도시로 성장하였을 것이다. 다만 여의도가 영등포시가 아닌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면 그래도 수도로서 체면치레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2.2.2.1.2. 지금의 과천시

과천의 경우에는 정부청사 이전을 계기로 과천면을 바로 과천시로 승격시킨 것임을 고려한다면, 정부청사 이전이 이루어졌다면 지금처럼 소규모 자치시의 형태로 승격되었을 것이고, 만일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92년 출범한 강남시에 편입되거나 95년 출범한 도농통합 광주시의 과천면/과천읍으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 정부청사가 없었다면 과천은 시는커녕 읍 되기도 어려웠을 가능성이 높다. 베드타운 성격으로 개발되었다 해도 과천'읍'이나 겨우 되었을 것이다. 만일 정부청사 이전이 95년 이후에 이루어졌다면 지금의 계룡시처럼 시내 중심부의 별양리 하나만 별양동으로 승격시키고, 나머지 외곽은 적당히 분할하여 '갈현면'과 '문원면'을 설치했을 가능성도 있다.

2.2.2.1.3. 지금의 안산시와 주변 지역

반면 화성군으로 편입된 수암-군자-남 3개 면은 수암면과 남면 사이에 끼어 있는 화성군 반월면, 그리고 남면 옆에 붙어 있는 의왕면과 함께 움직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반월출장소가 시로 승격하면서 86년에 안산시가 출범함에 따라 화성군의 군역이 아주 이상한 형태가 되었을 것이고, 이에 따라 행정 편의상 89년에 복원된 태안군처럼 수암-군자-반월 이렇게 3개 읍면을 관할로 안산군을 복원하든가, 아니면 95년에 가서 수암-군자-반월 3개 면에 옹진군 대부면, 어쩌면 화성군 매송면까지도 포함하여 4~5개 읍면을 관할로 도농통합 안산시가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남면과 의왕면은 수암-군자-반월 3개 면과 함께 움직이기 어렵다. 반월면과 남면 사이는 산으로 막혀 있다. 안산선 수리산-대야미 사이 구간의 터널이 이 산줄기를 통과한다. 따라서 태안군이 복원되던 89년에 안산군도 복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억지로 남면과 의왕면을 안산군에 포함시켰을 가능성은 낮다. 반월출장소에 포함되지 않은 수암, 군자, 반월면을 분할하여 마유, 군내, 초산, 북방, 월곡[42] 다섯 개 면을 복원함으로써 부군면 통폐합 이전 상태로 되돌렸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군내면은 '안산면', 혹은 안산군청 소재지로서 '안산읍'이 되었을 수도 있다.
89년에 안산군이 복원되었을 경우
  • 안산군 마유면[43]
  • 안산군 안산읍
  • 안산군 초산면
  • 안산군 북방면
  • 안산군 월곡면
이상 다섯 개 읍면이 95년에 안산시와 도농통합이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대부면과 매송면 일부[44] 또는 전부를 통합 안산시로 편입했을 수도 있다.
95년에 화성군 북서부를 안산시에 통합시켰을 경우
  • 안산시 수암면
  • 안산시 군자면[45]
  • 안산시 반월면
  • 안산시 매송면/송동면
  • 안산시 대부면
이 두 경우 모두 정왕리와 월곶리를 포함하는 면은 그 이름이 '군자면'이든 '마유면'이든 시화지구와 월곶 택지의 개발로 인해 인구가 증가하면서 96년경에 '군자읍'이나 '마유읍'으로 승격했을 것이다. 즉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이 아닌 '경기도 안산시 마유읍 정왕리'나 '경기도 안산시 군자읍 정왕리'인 것이다. 하지만 농어촌 혜택을 계속 누리기를 원하는 지역 주민들과 시화공단 입주 자본의 요구로 인해 계속해서 읍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어찌되었든 결론은 1~2읍 4~6면과 다수의 행정동으로 구성된 도농통합 안산시가 출범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현재의 안산 광역 생활권에 좀 더 적절한 행정구역 체계이다. 현재 옛 안산군+반월면 지역을 보면 안산 시가지와 정왕동 시화지구만 도시의 형태를 갖추고 있을 뿐, 나머지는 법적으로만 '동'이지 영락없는 시골이다. 도농복합시의 개념이 없던 시절에 억지로 행정구역을 편성하다 보니 이 사단이 난 것이다. 부군면 통폐합 이전 군내면과 초산면 지역은 영락없는 시골, 그것도 수도권 서부에서 보기 드문 깡촌이며 마유면 지역도 정왕동과 월곶동만 빼면 나머지는 다 시골이다. 대부도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런데도 89년에 소래읍을 시흥시로 승격시키는 과정에서 끌려 들어가면서 무리하게 '동'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리고 남면과 의왕면은 계속 화성군에 잔류하다가 군포읍, 의왕읍 승격을 거쳐 오산시처럼 독자 시로 승격되거나(따로 또는 같이 묶여서) 그러지 못했다면 도농통합 화성시의 군포읍, 의왕읍으로 존재할 것이다. 아니면 화성시 태안읍처럼 분동되었을 수도 있는데, 이 경우 농어촌 혜택을 계속 누리기를 원하는 주민들이 반발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화성시 군포읍이 남양주시 화도읍을 제치고 가장 인구가 많은 읍 타이틀을 달았을지도 모른다. 남양주시 오남읍의 경우에서 보듯 산본신도시 지역을 산본읍으로 분리했을지도... [46]
정리하자면 만일 영등포부 승격이 이루어졌을 경우 부군면 통폐합에 의해 억지로 만들어진 시흥군은 옛 시흥현 전역이 영등포시에 편입됨과 동시에 해체되었을 것이고 시흥현의 역사는 온전히 영등포시로 승계되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옛 과천현 지역과 안산현 지역은 각자 생활권에 맞는 행정구역을 찾아가게 되었을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상의 가상 역사는 향후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질 경우 일부 현실화될 수도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울분할론이나 안양권 및 안산권의 기초자치단체 통합론, 시흥시 분할론 등등 여러 떡밥과 무관하지 않은 이야기인 관계로...


2.2.2.2. 가상역사 2. 만일 1963년에 시흥군 동면이 서울에 편입되지 않았다면?

원래 1963년 서울 대확장 당시 시흥군 동면(신림리, 봉천리, 가리봉리, 독산리, 시흥리, 안양리)은 서울 편입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서울 대확장 과정에서 시흥군 동면까지 끌려 들어가면서 지금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유일하게 남은 안양리는 안양읍으로 편입되어 신안양리로 개명된 후 나중에 석수동이 되었다.) 지금처럼 시흥에 시흥이 없는, 즉 시흥으로서의 독자적 정체성이 상실되게 된 터닝포인트가 1963년인데, 그 근본적 원인은 바로 동면 대부분이 서울에 편입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서울 대확장 전까지만 하더라도 군 이름의 어원인 '시흥'리를 포함하여 오리지널 시흥 지역을 나름대로 관할하고 있었던 시흥군이었지만, 1963년 서울 대확장 과정에서 동면을 서울에 내주면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만일 이 때 동면이 서울에 편입되지 않았다면 시흥군 동면은 서울의 위성 도시로서 독자적으로 성장하여 1960년대 말이나 1970년대 초에 읍으로 승격했을 것이고 그 이름은 아마 '시흥읍'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면 이름 자체는 아무 뜻도 없는 단순한 방위명이고, 동면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중심지는 시흥리이니...[47][48] 그리고 1981년에 광명을 비롯하여 전국 단위의 시 승격이 이루어질 때[49] '시흥군 시흥읍'도 '시흥시'로 승격하여 현재의 금천구 전역과 관악구 신림동 및 봉천동, 구로구 가리봉동, 그리고 안양 만안구 석수동을 관할하는 경기도 베드타운 도시로 성장해 있을 것이다. 현재 해당 지역은 서울에서 가장 못 사는 동네 이미지가 하도 깊게 박혀 있는데, 만일 서울에 편입되지 않았다면 독자적 도시로 발전하여 그런 낙인이 찍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시흥시는 '소래시' 등 다른 이름으로 설치되었거나 인천 또는 부천으로의 편입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시흥에 시흥이 있고 시흥이라는 독자적인 정체성도 부평의 경우처럼 이중적인 형태(부평-인천광역시 부평구 & 경기도 부천시, 시흥-서울특별시 영등포구 & 경기도 '시흥시')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50] 다만 이 경우 안양시의 규모가 지금보다는 작을 것이고 어쩌면 구가 설치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데, 동면 잔여 지역으로서 시흥군 안양읍에 편입되었고 시 승격까지 따라간 석수동은 안양에서도 나름 비중 있는 큰 동네이기 때문이다.

2.2.3. 관련 문서




2.3. 분리와 해체, 현재


1973년 안양읍이 안양시로 승격되어 분리되면서, 시흥군의 영역은 동서로 분단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51] 이와 함께 현재 시흥시 북부이자 시흥시의 사실상 중심지인[52] 부천군 소래면을 편입해왔다. 하필 부천군 소래면이 시흥군에 편입된 이유는, 1973년에 부천군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되면서 처치 곤란해진 소래면계양면+오정면을 각각 근접한 시흥군김포군에 이관한 것이기 때문.[53][54]
1974년 서면 북부인 서면 광명출장소가 시흥군 직할 광명출장소로 승격되었다. 1977년 시흥군청을 안양시 안양동 674번지(현 삼원프라자호텔 자리)에서 안양동 477번지(현 만안평생교육센터 자리[55])로 이전하였다.[56] 1979년 서면 남부가 소하읍으로, 남면이 군포읍으로 승격되었다.
1979년과 1980년에는 시읍면 단위의 통화권을 시군 단위 통화권으로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읍면별로 설정되었던 시흥군 내 여러 통화권들도 아래와 같이 정리되었다.
  • 소래면 통화권: 1979년 수용국이 부천전화국으로 변경되면서 인천통화권(032)으로 흡수되었다.
  • 소하읍 통화권 (지금의 하안동, 학온동, 소하동, 일직동 지역): 관할 전화국이던 광명우체국이 서울통화권(개봉전화국)인 광명리 소재라는 점이 문제되었던지 서울통화권 확장 계획에 따라 1980년에 서울통화권(02)으로 흡수되었다. 한편 광명리, 철산리는 1970년대 초반부터 서울통화권으로의 편입이 진행되어 1978년에 편입이 완료되었다. 옥길리는 1978년말에 서울통화권으로 편입되었다. 아무튼 이에 따라 가학리, 노온사리의 수용국은 서울 개봉전화국이, 하안리, 소하리, 일직리의 수용국은 서울 구로전화국 시흥분국이 되었다.
  • 수암면, 군자면 통화권: 1979년 안양전화국 반월공단분국 설치로 새로이 설정된 반월통화권(당시 지역번호 0345. 현 안산통화권)으로 통폐합되었다.
  • 과천면, 군포읍, 의왕읍 통화권: 1979년, 1980년 즈음에 안양통화권(당시 지역번호 0343)으로 통폐합되었다. 그 중 과천면 지역은 1985년에 안양통화권에서 서울통화권으로 재조정.
시흥군 직할 광명출장소와 소하읍은 1981년에 광명시로 승격되어 분리되었다. 참고로 광명 지역은 당시 시흥군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57] 시흥군의 마지막 '오리지널 시흥' 지역인 광명시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시흥의 역사적 정통성을 고려했다면 이걸 갖다 '광명시' 대신 '시흥시'란 이름으로 승격시키고, 남은 시흥군은 개칭하는 게 좋았을 것이다. 문제의 서면(소하읍)은 서울시로 편입될 뻔했으나, 서울 집중 문제(5공 정부의 위성도시 육성 정책) 때문에 나가리되면서 결국 광명시로 승격되었다. 사실 이 때 광명을 '시흥시'라는 이름으로 승격시켰어도 지금과 같은 아스트랄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경부선 시흥역은 그대로 시흥역이었을 것이다(...).[58]
[image]
1981년 광명시 분리 이후 시흥군 행정지도(1982년).[59]
1980년에는 소래면과 의왕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에는 소래읍 옥길리가 광명시와 부천시에 분할 편입되었고, 계수리 일부가 부천시에 편입되었으며[60], 화성군 반월면 초평리, 월암리가 의왕읍에 편입되었다.
1986년에는 서부의 반월출장소[61]안산시로, 동부의 과천면이 과천시로 승격되었다. 이로서 최종적으로는 3읍(소래, 군포, 의왕)과 2면(군자, 수암)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image]
1986년의 시흥군.
결국 1989년 군포읍은 군포시로, 의왕읍은 의왕시로 승격되고 소래읍, 군자면, 수암면이 시흥시로 승격[62]되면서 시흥군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해당 잔여지역에 시흥시라는 이름이 붙여진 데는 목감동 출신의 어느 향토사학자의 기여가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시흥군 해체 직전에는 군포읍과 의왕읍 주민들은 군포읍과 의왕읍을 통합하여 시흥시로 승격하자고 주장하였고 안양시 편입에 완강히 반대하였다. 또한 인천시는 소래읍의 인천 편입을 내무부에 요청했지만, 소래읍 주민들은 인천 편입이 아닌, 소래시 승격을 원했다고 한다.기사 또한 부천시에서도 역사성과 생활권을 들어 소래읍의 부천 편입을 요구하기도 했다.기사 다만 당시 경기도는 소래읍의 인천 편입에 반대했고, 내무부도 소래읍의 인천 편입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고 한다.
한편 해체 이후 1995년에는 안산 생활권이었던 안산동(수암동, 장상동, 장하동)[63]과 화정동 일부[64]가 시흥시에서 안산시에 편입되었다.[65] 한편 내무부 주도의 인천 추가 확장 차원에서 시흥시도 인천 편입 대상으로 거론되었으나(참고 기사) 시청과 시의회의 거센 반발로 인천 편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시의 김포군과 달리 주민투표 회부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변화를 지도로 보고 싶다면 #이 블로그 참조.
이렇게 거의 1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급격한 변화를 겪다보니 원래의 시흥군 중심지인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과 현재의 시흥시는 전혀 관계없는 곳이 되어버렸고, 1905년 경부선 개통과 함께 생긴 시흥역은 현 시흥시와 완전히 동떨어진 지역에 위치하게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시흥시를 찾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안겨주다가 결국 금천구청역으로 개명했다.

2.3.1. 관련 문서



2.4. 만약 시흥시가 여러 기초자치단체로 쪼개지지 않았다면?


  • 인구가 100만명을 넘어 시흥광역시로 승격되었을지도 모른다. 2015년 3월 인구를 기준으로 시흥군에 속했던 도시들[66][67]의 인구를 합치면 약 250만 정도 나오며, 시흥군에 속했던 적은 없지만, 인천광역시와 서울특별시, 시흥광역시 사이에 끼어 있는 부천시까지 포함하면 약 340만 정도 된다.
  • 구 시흥군뿐만 아니라 서울특별시와 인접한 다른 지역도 여러 도시로 쪼개지지 않고 광역시로 승격될 수 있다. (예 - 양주광역시(양주시+의정부시+구리시+남양주시+동두천시, 위례광역시(성남시+하남시+광주시 )[68]
  • 더 나아가서는 인천광역시+서울특별시+시흥광역시 통합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거대한 도시권이 형성될 수도 있다.[69] 일본의 도쿄도[70](2188km²), 영국의 그레이터 런던(1572km²)과 견줄만할 정도로 거대해졌을수도 있다.[71]

2.4.1. 반론


그러나 이와 같은 가정은 1992년 고양군의 고양시 승격 시까지 줄곧 인구가 불어난 읍 위주로 하나 하나 자잘하게 시 승격이 이루어졌던 당시 정책[72]을 미루어볼 때, 당시 시점에서도 현실성이 없었을 것이다. 지역 차원의 요구사항이었던 영등포의 독자 승격이라든지, 당국이 한때 고려했던 부평권의 경성부 추가편입 시나리오[73]와 다르게 시흥군이 통째로 시흥시로 승격되는 시나리오는 당대 현실성이 아예 없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도권의 팽창으로 옛 시흥군 지역이 급속하게 도시화가 되어 지방행정서비스 차원에서 시흥군 지역이 통째로 '시흥직할시' 혹은 대규모 도농통합시 '경기도 시흥시'로 승격될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산하 읍, 면들을 하나 하나 시로 승격시키는 것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시 승격 이전의 광명시의 경우만 하더라도 서울시의 도시계획으로 도시화된 광명리와 철산리를 관리하기 위해 시흥군 차원에서 광명출장소를 설치했지만 행정서비스가 미흡하여 서울 편입 요구가 빗발칠 정도였다.
결정적인 문제는 '고양 600년'이란 문구로 대변되는 고양과 달리 시흥군은 시흥(영등포, 구로, 금천, 관악, 광명)+과천(동작, 서초, 안양, 과천, 군포)+안산(안산, 시흥 남부)이 별 연고의식 없이 억지로 합쳐진 형태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구 시흥군은 한가운데에 관악산-삼성산 줄기, 도덕산-구름산-수리산 줄기, 봉재산-운흥산-광덕산 줄기 등 수많은 산들이 틀어박혀 생활권이 아주 제멋대로였다. 1963년 서울 대확장 때 관악산 이북만 서울로 들어가고, 조선 초기에 금천과 과천을 합쳤더니(금과현) 통합된 고을의 읍치 지정 문제로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다시 분리시킨 것이 괜히 벌어진 일이 아니다.[74] 성남-분당처럼 딱히 장애물도 없고 역사적으로도 수백 년간 광주군이라는 동일한 고을에 속했던 지역에서도 분리하네 마네 소리가 들끓는 판인데, 시흥이 분리되지 않은 채 거대 도시를 형성했다면 오히려 그때야말로 곳곳에서 분리 요구(인접 타 대도시 편입 요구 포함)가 빗발쳤을 것이다. 차라리 영등포가 경성부 편입 대신에 영등포부로 독자 승격하여 영등포를 비롯한 옛 시흥군 상당부분(지금의 금천구, 관악구, 광명시, 안양시 지역이 영등포시에 편입)이 영등포직할시 → 영등포광역시로 발전하는 시나리오가 더 현실성 있었을 것이다.

2.4.2. 대안


서울 편입 지역 및 광명 지역(이상 영등포권)을 제외한 나머지 시흥군 지역이 크게 안양권(안양, 과천, 군포, 의왕), 안산권(안산 및 시흥 군자, 수암), 인천·부천권(소래)의 3개 도시권 및 생활권으로 정리되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시흥군 전체를 하나의 시로 승격시키는 것도, 반대로 소래, 군포, 의왕 등을 자잘하게 각자 시로 승격시키는 것도 아닌, 안양, 안산, 인천·부천의 3대 도시권을 따라 분할 편입시켜 정리하는 것이 최적이었을 것이다. 광명의 경우는 서울 비대화 억제 차원에서 서울 편입 대신에 별도의 소규모 시로 두는 것이 불가피했다고 치고.
가장 이상적이고 합리적으로 시흥군을 정리할 수 있었을 때는 안산과천이 시로 승격되어 분리된 1986년인데, 이 때 아예 시흥군도 같이 폐지해서 안산시의 전신인 반월출장소에 편입되지 않았던 군자·수암면 잔여지역은 완전히 안산시로 넘기고, 소래읍은 인천이나 부천으로 넘기며[75], 군포·의왕읍은 안양시로 넘겨서 시흥군을 재고처분(...)하면 되기 때문이다.[76]
그러나 굳이 시흥군을 1989년까지 3년이나 더 존속시켜, 결국 역사적인 이름과 실제 지역이 안 맞고 독자적인 도시권도 없는 시흥시의 탄생, 군포의왕의 독자적 시 승격으로 인한 안양권의 행정구역 파편화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세상 일이 이렇게 속 편히 돌아갈 수 있으면 뭐가 문제였겠는가.(...) 애초에 시흥군이 1989년까지 존속했던 이유부터가 무수한 행정구역 조정 요구사항들을 다 수용해줄 수 없어 이리저리 고심한 결과였다. 흔히들 지방자치제 이전 독재정권에서는 중앙정부 마음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을거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독재정권들조차 5공화국 전반부의 관제야당 시절 정도를 제외하면 언제나 국회의원 표가 중요했기 때문에 무조건 마음대로는 못했다.[77] 혹시나 그 전설의 관제야당 시절(1980~1984년)이었다면 모를까 특히나 1986년이면 5공 정권이 직선제 개헌요구를 무마하는 반대급부로 지방자치제를 만지작거리던 시점이라 더더욱 그러했다. 당장 소래읍도, 군포읍도, 의왕읍도 각자 어제의 이웃들처럼 번듯한 시 타이틀 가지는 걸 원했지 옆동네에 편입되는 걸 원한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이 문제를 단순히 어른의 사정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실질적인 걸림돌이 꽤 컸다. 그 걸림돌이 바로 소래읍. 부천이나 인천에 떠넘기기에는 외따로 뚝 떨어진 탓에[78] 이미 1986년이 되면 소래읍의 시 승격은 적어도 윗선에서는 거의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다. 김포군으로 넘어갔던 오정면이 2년만에 부천으로 돌아온 것을 보면 소래 역시 소사와의 연결성만 괜찮았을 경우 진즉에 부천시에 재편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수-군 1읍 2면에서조차 어디는 독립 승격, 어디는 안산, 어디는 안양, 어디는 광명, 어디는 부천 편입을 원하는 등 요구사항이 천차만별이었고, 신생 시의 생존을 위해 어떻게든 고심한 결과가 현재의 상황. 거기에 소래읍이 멀쩡히 독립시로 승격되는 상황에서 군포, 의왕의 시 승격 요구를 막을 명분도 없었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성주산만 없었어도 소래읍은 꼼짝없이 소사지역에 묻어갔을테니 현 시흥시 지역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3. 참고/관련 문헌


  • 시흥군지 (시흥군, 1988) - ,
  • 시흥의 어제와 오늘 (시흥시, 1997) - 링크
  • 한국 행정구역체계의 문제점과 개편의 방향 (임석희, 1994)링크
옛 시흥군 지역의 문제점(광명/과천의 서울 생활권 문제, 안양권 행정구역 파편화 문제 등)을 학술지 중간에 지적하였다.
  • 경기도의 근현대지도 (경기도, 2005)
부록에서 편저자가 시흥군이 역사적으로 매우 꼬여있음을 지적하는 내용이 나온다.

4. 관련 문서




[1] 양화동 제외[2] 안양천 서쪽 지역 제외[3] 남현동 제외[4] 옥길동 제외[5] 박달동, 석수동 제외[6] 대야미동, 도마교동, 둔대동, 속달동 제외[7] 대방동, 상도동, 신대방동 제외[8] 내곡동, 염곡동, 신원동 제외[9] 옛 반월면 지역, 대부도 제외[10] 구 소래읍 지역 제외[11] 여의도, 양화동 제외[12] 남현동 제외[13] 옥길동 제외[14] 다만 안양의 경우에는 동네 자체가 시흥과 과천의 합성이나, 안양시청의 소재지는 옛날로 치면 과천군 상서면 일대에 위치해있는 셈.[15]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비롯한 일부 백과사전에서는 안양시, 군포시 일대까지 포괄하고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안양시의 대부분과 군포시 일대는 과천군 관할이었기에 엄연히 잘못된 기술이다.[16] 조금 자세히 설명하면, 조선 시대의 시흥군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을 중심으로 서울특별시 금천구 및 영등포구(여의도, 양화동 제외) · 관악구(남현동 제외) · 동작구 일부(대방동, 신대방동, 상도동) · 구로구 동부(얀양천 이동지역)와 경기도 광명시(옥길동 제외) 및 안양시 일부(석수동, 박달동) 일대에 해당되었다.[17] 참고로 구한말까지의 시흥군의 행정구역 중 남면은 지금의 광명시 서부이고, 서면은 광명시 동부(+안양 박달동), 동면(현내면)은 서울 금천구(+안양 석수동)였다. 물론 안양시 나머지 전역, 군포시 일대는 과천군 관할이었다.[18] 조선 시대에 한성부 관할이었던 현재의 여의도까지도 포함한다. (출처: 영등포의 역사와 지명이야기, 민긍기)[19] 잉벌노는 늠내의 음차로 추정된다. 내 + ㅂ(ㅁ, ㅇ) + 내[20] 이 역시 훈독하면 낟 + 내로 낫내, 늠내가 된다.[21] 시흥동으로 읍치가 옮겨지기 이전의 잉벌노 읍치는 지금의 광명시 광명5동(구 광화대리, 고유어로 너부대)였다는 카더라도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22] 특히 군현 관아의 경우 다른 대다수 군현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일제시대에 기존의 군현 관아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초등학교나 군청을 지어버렸기 때문.(...) 수도권의 경우 인천, 부평 정도가 도호부청사 일부만 현재 남아있는 상태이다. 그나마 도호부 청사의 상당부분이 초등학교 건립 목적으로 철거되어 남은 것이 이 정도다. 한성부조차 관아 건물은 현존하지 않고 다만 터만 전해질 뿐이다.(...)[23] 만안교 옆에 과천계라 적혀있는데, 이는 만안교를 건너면 과천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24] 행정단위가 군(郡)이기 이전 현(縣)이었을 때는 현내면(縣內面)이라 했다. 이런 명칭이 붙은 이유는 관아의 소재지, 즉 군(현)의 중심지였지 때문이다.[25] 현재 관문동, 부림동 일대[26] 현재 문원동, 중앙동, 원문동, 별양동 일대[27] 현재의 서울 동작구 대방동[28] 현재의 서울 영등포구 도림동, 문래동[29] 현재의 서울 동작구 상도동[30] 현재의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 및 영등포구 대림동[31] 현재의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으로, 서울에 대방동과 신대방동이 따로 있는 이유는 번대방리가 분할되어 시간차를 거쳐 서울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32] 해당 지역들은 1936년 경성부 대확장 당시 편입되지 않은 북면의 잔여지역들이다.[33] 현재의 서울 서초구 대부분과 동작구 사당동, 관악구 남현동 지역으로 1914년 개편 이전에는 과천군 지역이었다. 시흥군에 통폐합되면서 '신'동면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 현재 서초구 잠원동에 위치한 신동초등학교는 과거 시흥군 신동면이던 시절부터 있었던 상당히 오래된 학교이며, 서초구로 바뀐 1990년에 개교한 신동중학교도 이 이름을 따른 것이다.[34] 옛 과천군의 상황도 비슷하긴 하지만, 적어도 시흥군의 경우 다르게 과천군의 관아소재지가 서울시에 편입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하지만 지금의 과천시 지역이 한때 장기적인 서울 편입 예정지였고, 추후 서울시 추가 확장시에 광명시와 함께 서울시에 추가 편입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 중 하나라는 게 문제.[35] 현재의 안양시 석수동. 기존 안양읍 안양리와 이름이 같아 신안양리로 개칭되었다가, 안양시 승격과 함께 석수동으로 개칭되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현 시흥동과 석수동의 경계문제가... 연현이라는 고개 북쪽마저도 안양시 석수동에 속하게 되었다.[36] 안양시광명시의 경계문제는 여기서 불씨가 되었다.[37] 원래 수원군 의왕면이었으나, 1936년 일형면과 통합되어 일왕면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다가 1963년 옛 일형면 영역이 수원시의 확장 과정에서 수원시로 편입되면서 옛 의왕면 영역만 남게 되어 다시 명칭을 회복한 것.[38] 소속된 군은 다르지만 일제 강점기부터 시흥군 남면과 수원군 의왕면은 같은 생활권이었다. 3.1 운동 당시에는 두 면의 주민들이 함께 만세운동을 벌이기도 했다.[39] '반포면'이나 '서초면'으로 개칭했을 수도 있다. 광주군의 가장 서쪽에 있는 형태가 되기 때문에... [40] 경기북부 제 1의 대도시인 의정부시는 양주군에서 분리되었다.[41] 성남시와 통합할경우 광역시 승격이 가능해지지만 동명의 지역이 있기 때문에 이름은 '경안광역시'나 '한주광역시'로 개칭해야 한다. [42] 반월면 가운데 옛 성곶면 지역은 모두 안산 시가지에 포함되고, 반월출장소 관할 구역이었으므로 제외한다. 군자면 가운데 옛 대월면과 인화면 지역도 마찬가지. 그러나 수암면 가운데 옛 군내면 지역은 안산 시가지에 포함되지도 않고, 반월출장소 관할도 아니었다.[43] 이후 시화지구 버프를 먹어 마유읍으로 승격했을 가능성이 높다.[44] 현 화성시 매송면은 동쪽의 매곡면과 서쪽의 송동면을 일제가 부군면 통폐합 때 억지로 묶어서 설치한 것인데, 옛 송동면 지역은 안산과 붙어 있고 수원보다 안산이 훨씬 가까운 반면 옛 매곡면 지역은 빼박 수원 생활권이다. 따라서 매송면을 반 나눠서 매곡면 지역은 수원으로 편입시키거나 화성군 매곡면으로 두고 송동면 지역만 새로 출범하는 도농통합 안산시에 편입시켰을 가능성이 높다.[45] 이 경우에도 시화지구 버프를 먹어 96년 1월 1일을 기해 군자읍으로 승격했을 가능성이 높다. 시화지구 아파트들이 95년에 입주하였다.[46] 동탄신도시처럼 대놓고 산업 기반을 갖춘 거대 규모의 신도시를 건설하지 않는 이상, 자잘한 택지개발 지구가 들어선 읍면은 분동하지 않는 것이 관례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 현재 전국 최대의 읍인 남양주 화도읍만 해도 자잘한 택지개발 지구만 들어선 것이라서 계속 '읍'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지, 만일 작정하고서 중앙정부 차원에서 '마석신도시'라도 개발했다면 수동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개 너머에 있는 법정리들은 싹 다 수동면으로 넘기고 나머지는 얄짤없이 마석 n동으로 분동하였을 것이다.[47] 면이 읍으로 승격할 때, 단순 방위명인 면들은 새롭게 이름을 붙여서 읍으로 승격하였다. 같은 시흥군 남면의 경우 읍으로 승격할 때 '군포읍'으로 개칭되었고 이후 시로 승격하였다.[48] 또한 시흥리는 1911년 이전까지 시흥군청 소재지로서 시흥군의 전통적 중심지이기도 했다. 시흥리에 경부선 시흥역(2008년 금천구청역으로 개칭)도 있고...[49] 동두천시, 송탄시(1995년 평택시 및 평택군과 도농 통합), 광명시, 태백시, 정주시(현 정읍시), 남원시, 금성시(현 나주시) 등등이 이 때 시로 승격하였다.[50] 물론 부천이 부평을 계승한 것처럼 광명이 시흥을 계승했다고 볼 수도 있으나, 경인선 개통 이후로 부평의 제 2도심으로서 일제 강점기부터 나름 도시권이 형성된 부천과 달리 광명은 서울시 도시계획에 편입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냥 시흥군에 속한 조그만 시골 동네였을 뿐이다.[51] 이 때문에 시흥군청은 여전히 안양시 내에 위치하게 된다. 동부나 서부로 이전해 버리면 서로 반대편에서 불편해 할 테니...[52] 현재의 시흥시의 사실상 모태는 이 소래읍이라 할 수 있다. 1989년 시 승격 당시에 인구가 가장 많았던 지역이었기 때문. 2014년 현재에는 소래권보다 정왕권이 인구, 경제력 측면에서 우세한 상황.[53] 이외에도 도서 지역(영종면, 용유면, 북도면, 대부면, 영흥면, 덕적면)들은 당시 2개 면(서해 5도)밖에 없었던 옹진군에 흡수되었다. (이후 영종면, 용유면은 1989년 인천직할시 중구로, 대부면은 1994년 안산시로 흡수된다.)[54] 참고로 오정면은 1975년 부천시로, 계양면은 1989년 인천직할시 북구(현 계양구)로 편입되었다.[55] 이후 만안구청으로 잠깐 쓰였다가, 만안구청이 현 위치(구 안양시청)로 이전하면서 만안여성회관으로 쓰였다.[56] 이전 버전에서는 '1980년 소래읍으로 이전했다'고 했으나, 사실이 아니다. 우선 시흥시 사이버역사관 자료에서는 '1973년 군청소재지였던 안양이 시로 승격되면서 군청이 타향살이하는 신세가 된다'고만 했을 뿐, 이후 소래로 이전했다는 말이 없다. 또한 1989년도까지 발간되었던 시흥군 통계연보(연간)에도 매년 군청소재지를 안양으로 적고 있다. 또한 1989년 시 승격 당시 시청사(현 대야동 시흥시보건소 자리)는 원래 소래읍사무소 청사였다. 군청이 소래에 있었다면, 읍사무소가 아닌 군청을 시청으로 썼을 것이다. 1988년 12월 30일 MBC 뉴스에 나온 시흥군청 당시 군청 사진 또한 군청이 1988년까지 계속 안양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사들이 있다. 1984년 7월 2일 행정구역과 청사소재지의 불일치로 인해 공납금 수납에 문제가 있음을 다룬 동아일보 기사 1988년 2월 11일 관할 행정구역(시흥군) 세수 확보를 위해 군청소재지 행정구역(안양시)을 벗어나 관할 행정구역(시흥군)까지 가서 담배를 사서 피는 시흥군청 공무원들을 다룬 경향신문 기사 1988년 8월 8일 시흥군의 행정구역 문제를 다룬 경향신문 기사 1988년 11월 28일 군포읍의 시 승격 준비를 다룬 매일경제 기사 '1980년 소래읍 시흥군청 이전'을 포털에서 검색하면 꽤 많은 글을 찾을 수 있는데, 잘못 퍼진 정보로 추정된다.[57] 당시 소하읍(법적으로는 광명출장소 지역까지 포함)은 시 승격 직전 인구가 15만으로 과대읍이었다. 이렇게 된 데는 광명출장소의 서울 편입 또는 독자 시승격 여부가 결정나지 않아 갈팡질팡하다가 읍 인구가 그렇게 늘어난 것(...).[58] 이런 가상역사 하에서는 지금의 KTX 광명역의 입지나 위치는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그 역의 입지가 지금의 광명역과 같았더라면 그 명칭은 '남서울역' 내지는 '일직역' 등이 되었을 것이며, 입지 자체가 지금의 금천구청역으로 되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금천구청역 근처는 군 부대였기 때문에 군 부대를 몰아내고 거기다가 KTX 역사를 짓는 식으로 했을 여지도 있었을 듯.[59] 다만 소래면의 읍 승격이 반영되지 않은 오류가 있다. 또한 반월출장소 지역은 표기는 되어있으나 도 직할 출장소인 관계로 시흥군이 직접 관할하지 않는 것을 고려해 누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60] 계수동이 시흥시와 부천시 양쪽에 존재하는 이유다.[61] 군자면, 수암면과 화성군 반월면의 각 일부로 구성되었다.[62] 다만 수암면 일부의 경우는 1995년에 경기도 안산시 안산동이 되었다.[63] 즉, 1995년까지 안산동은 안산시가 아닌 시흥시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산동은 조선시대 안산군 관아가 있던 곳이다.[64] 화정동이 시흥시와 안산시에 모두 존재하는 이유이다.[65] 군자권(거모동, 정왕동 등) 역시 지속적으로 안산시 편입론이 있었으나, 결국 편입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거모동의 경우는 아예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흥시-안산시 행정구역 경계선이 지나며, 안산시 선부동, 원곡동, 신길동 시가지와 매우 가깝다.[66] 서울특별시로 편입된 구 시흥군 지역은 제외하고 현재까지 경기도에 남아 있는 시흥시, 광명시, 안산시, 안양시, 과천시, 군포시, 의왕시의 인구를 합하여[67] 다만 이들 지역 중에서 광명시과천시 일대는 서울특별시에 추가 편입될 여지도 있었을 것이다.[68] 역사성을 따지면 각각 양주광역시와 광주광역시가 되겠으나(열거한 시들의 기원이 어디인지 생각해보라.) 광주광역시라는 이름은 이미 존재한다.[69] 실제로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김포군, 부천군, 시흥군의 각 일부 지역을 통째로 경성부로 통합하는 계획을 짠 적이 있었다.[70] 이전 버전에서는 도쿄도 특별구라고 표현했는데, 도쿄 특별구 지역 면적(619km²) 자체는 서울특별시 면적(606km²)과 큰 차이가 없다.[71] 경인통합(서울+인천자치구+부천+광명) 후 서울 면적은 1131km².[72] 물론 지나친 행정구역 파편화를 야기했다는 지적은 가능하다.[73] 영등포가 독자 승격되지 못하고 경성부에 강제 편입된 것은 부평권의 경성부 추가 편입을 염두에 둔 대경성계획 탓.[74] 이후에도 금천과 양천을 통합했지만(금양현) 몇 년 지나지 않아 원래대로 복구한 적도 있다.[75] 당시 인천직할시부천시는 서로 소래읍의 인천/부천 편입을 요구했다. 현재 소래읍의 생활권은 인천보다는 부천에 가까운 편이다. 아무래도 인천을 가려면 소래산을 넘어가야 하고 남동구 외곽은 아직도 시골인 곳이 남아있어 인천 시가지와는 분리되어 있지만, 부천은 고개 하나만 넘으면 되기 때문에... 대체로 서울과 소래 지역을 잇는 대중교통 이용 패턴이 부천역이나 소사역을 거치기 때문에, 자연스레 부천과의 왕래가 더 많다. 실제로 대중교통망도 시내버스의 경우 인천행은 하나뿐인 반면, 부천행은 31번 시리즈, 1번 마을버스 등 많다. 철도 역시 소사역으로 가는 수도권 전철 서해선이 소래 지역에서 가장 먼저 개통되는 철도다.[76] 여담이지만 이 당시에 목감동 일대의 안양시 편입을 요구한 전력도 있었다. 이 지역 학생들이 안양으로 많이 통학했기 때문.[77] 대표적인 사례가 목포시의 시역 확장. 무안군영암군의 극렬한 반대 속에 목포시는 삼향이나 삼호를 편입하는데 실패했다.[78] 하우고개가 포장된 게 1989년이었다. 그나마 이 포장이라는 것도 중앙선조차 안 그어진 시골 농로 수준이었는데 그대로 부천에 편입되었으면 소래권은 그냥 붕 뜬 채로 꽤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지금도 부천과 소래권의 소통이 수요에 비해 그렇게 원활하다고 하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