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연방공화국 제7대 연방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
Gerhard Schröder
'''
'''본명'''
Gerhard Fritz Kurt Schröder
게르하르트 프리츠 쿠르트 슈뢰더
'''출생'''
1944년 4월 7일 (80세)
대독일국 리페 자유주 모센베르크
'''학력'''
괴팅겐 대학교 법학 학사
'''배우자'''
'''김소연'''[1]
'''정당'''

'''재임기간'''
1998년 10월 27일 ~ 2005년 11월 22일
(만 7년 25일)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3. 나눔의 집 방문과 일본 정부 비판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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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연방공화국 제7대 연방총리 취임 선서'''

1. 개요


독일연방공화국의 변호사, 정치인. 독일 사회민주당(SPD) 소속으로 1998년부터 2005년까지 녹색당의 연립정권을 이끌면서 총리를 지냈다.

2. 생애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모센베르크[2]에서 태어났다.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아버지는 전사하게 된다. 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자라다가 14세 때 학교를 그만두고 17세부터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야간학교를 다녔다. 대입자격시험을 통과해 22세 때 뒤늦게 괴팅겐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전공하여 법학 학위를 받았으며 변호사 자격증을 따내고 1976년 하노버에서 변호사 개업을 시작하였다.
1963년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한 후, 1978년에는 사회민주당 청년조직인 '젊은 사회주의자'의 의장을 맡았다. 이후 1980년 연방하원 의원, 1986년 니더작센주의회 SPD 원내의장, 1990년 주총리를 거치면서 정치인으로 성장하여 마침내 독일 사민당(SPD)을 이끌게 되었다.
그는 1998년 총선에서 '새로운 중도노선', '좌파 속의 우파' 등을 외치며 16년 넘게 장기 집권하던 헬무트 콜 총리를 꺾고 총리가 되었다. 1990년 공산주의가 몰락한 이래 서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침체기를 맞았으나, 90년대 후반 우파적인 요소를 대거 수용하여 우파와 좌파를 절충하는 이른바 '제3의 길'을 표방하며 유럽 정치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이러한 물결 속에서 1997년 영국의 토니 블레어와 프랑스의 리오넬 조스팽이 총리가 되었으며 뒤이어 슈뢰더가 집권에 성공하며 유럽 중도노선의 지도자로 각광을 받게 된다. 실제로 그는 총리 당선 이후인 1999년 6월 8일 토니 블레어와 함께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위해 전진하는 제3의 길>이라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으며, 제3의 길 노선과 같은 맥락인 '신중도' 노선을 지향했다.
총리에 당선되자 외국의 이민자들에게도 독일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해 주었다. 또한 통일의 여파로 폭등한 독일의 실업율을 줄이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며 외교적으로는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에 힘썼다.
2002년 총선에서는 지지율이 썩 좋지 않았지만 엘베강 홍수재난에 맞서 보여준 리더십에 힘입어 가까스로 과반 의석을 확보, 재선에 성공했다. 그 후 경제가 악화된 것으로 인해 야당의 비난을 받게 되자 난국을 타파하기 위해 2005년 의도적으로 불신임을 받게 하였다. 그리고 조기 총선을 통해 총선에서 승리하여 입지를 굳히려고 했다. 목표는 이렇지만 사실 총선이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 지지율이 밀리고 레임덕이 일어나자 더 손해볼 것도 없으니 될 데로 되라 한 것이다. 선거 운동 기간 중에 기민당의 압승이 예상되었다가 선거 막판 기업 감세, 소비자 증세 논란 + 토론회에서 슈뢰더의 대승이 합쳐져 기민당의 지지율이 크게 떨어지고 그 반사이익으로 사민당의 지지율이 크게 올랐지만 결국 역전에는 실패해서 기민/기사련이 1당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도 선거에서 예상보다 선전은 거둔것은 사실이기는 했다. 허나 기민/기사련과 자유민주당 연합은 물론이고 사민당도 연정 파트너인 녹색당과 합해도 과반을 못넘는것은 마찬가지라서 참으로 애매한 결과가 나왔다고 평가되었다. 사실 제일 좌파적이었던 좌파당까지 연정에 포함시키면 과반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전직 사민당 당수였던 현 좌파당 당수 오스카 라퐁텐과 슈뢰더와의 사이가 최악이었던 것.
연정협상에 나선 슈뢰더는 처음에 총리직을 내주지 않고 버티려 하였다. 그러나 제1당이 된 기민당이 결국 연정협상을 주도하면서 사민당이 참여하는 대연정을 구성하기로 합의하게 되었고, 슈뢰더는 앙겔라 메르켈에게 총리직을 넘겨주고 퇴임하였다.
총리에서 사퇴한 이후로는 고향인 하노버베를린을 오가면서 본업이었던 법률직에 종사하는 한편 틈틈이 출판물도 내고 있다.
2017년 6월 전임자 헬무트 콜이 타계하면서, 독일의 전임 총리로는 유일한 생존자로 남게 되었다.
2017년 8월에 '''러시아 국영기업 석유기업의 감독이사회장으로 스카웃'''되면서 푸틴의 밸브 잠금질에 곤란을 겪은 독일에서는 전직 총리의 행보에 대해 경악하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출신당에 똥칠을 한격..獨 슈뢰더 전 총리, 對러 제재대상 석유회사 돈벌이 시도 논란(연합뉴스 2017년 8월 29일 기사) 메르켈 총리는 슈뢰더의 행동을 비판했고 사민당에서도 슐츠 당 대표는 전직 총리를 비판하는 인터뷰를 했다. 슈뢰더는 기본적으로 일관된 친러파이다.#
9월에는 자서전 한국 출판 기념으로 한국에 방문하여, EBS초대석에 출연하여 자신의 정치역사를 이야기했다. 나눔의 집에 가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났고,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의 5.18 취재를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를 관람하였으며, 문재인 대통령과 접견자리를 가졌다. #
2017년 9월 15일에는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했다.
2018년 10월 5일에 슈뢰더는 베를린에서 김소연과 결혼하면서 결혼후에는 독일과 한국을 오가고 여생의 절반을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어도 배울 것이라고 밝혔다.# 2018년 10월 26일에 광주를 찾은 슈뢰더는 국제사회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지원해야 한다고 밝혔다.#
2019년 8월 29일에 서울의 DMZ 평화경제 국제 포럼에 참석한 슈뢰더는 북한이 도발을 멈추고 유엔 안보리의 결의를 따르고 협상의 장으로 나오는 것을 촉구했다.#
2020년 3월 15일에는 한국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에 대한 단호하고 투명한 대처를 칭찬하며 문재인 대통령에게 편지와 성금을 보내왔다.#
2020년 5월 7일에 슈뢰더 전 총리와 재혼한 김소연 씨의 전 남편 측이 슈뢰더 전 총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의 첫 재판에서 슈뢰더 전 총리 때문에 김씨와의 혼인 관계가 파탄났다고 주장했다.#
2020년 10월 11일에 슈뢰더 전 총리 부부가 베를린시 미테구[3]에 세워진 소녀상 철거 결정에 항의하며 현지 당국에 이를 철회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전달했다.#

3. 나눔의 집 방문과 일본 정부 비판


“참으로 가슴 아픈 현장을 찾았다. 사람들이 이곳에 있는 분들을 ‘위안부’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위안’은 자발적 의사가 담긴 것이다. 이분들은 위안이 아니라 전쟁의 폭력에 참혹하게 희생된 여성들이다”

“전쟁에 의한 참혹한 폭력은 복구될 수 없다. '''일본의 전쟁 폭력 희생자들인 할머니들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할 것'''”

“할머니들이 당한 개개인들의 희생과 고통은 홀로코스트(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학살)와 다르지 않다. 전쟁에서 희생된 여성에 대해 세계가 알아야 한다. 피해 할머니들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역사를 쓰는 것”

“할머니들이 살아 생전에 '''일본이 사과하기를 바란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나 '''일본이 저지른 만행이 이 할머니들께 남긴 상처'''를 봤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 # ## #3 #4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직접 나눔의 집을 찾아서 전 위안부들을 위로한 뒤 일본 정부를 매우 강하게 비판하였다. 외국 전·현직 국가 원수급 인사가 나눔의 집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후 문재인 대통령도 접견하면서 '과거사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발언을 하였다.

4. 여담


  • 결혼을 5번한 것으로 유명하다. 3차례의 이혼 끝에 총리가 되기 1년 전인 1997년 19세 연하의 도리스 쾨프와 결혼하여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도리스 쾨프와는 오래 사는 듯 하더니 19년만인 2016년 다시 이혼. 결혼을 많이 했다고 하여 '아우디맨'[5]이나 '반지의 제왕'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아래는 슈뢰더의 부인'들' 목록.
    • 에바 슈바흐 (1968년 결혼, 1972년 이혼)
    • 앤 타셴마허 (1972년 결혼, 1984년 이혼)
    • 힐트루트 함펠 (1984년 결혼, 1997년 이혼)
    • 도리스 쾨프 (1997년 결혼, 2016년 이혼)[4]
    • 김소연 (2018년 결혼)

5번째 결혼은 무려 한국인슈뢰더 전 총리·통역가 김소연, 10월5일 결혼이랑 했다. 당사자인 김소연 씨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경제개발공사의 한국대표부 대표이며, 슈뢰더와는 통역원으로 인연을 맺은 것으로 전해진다. 김 씨는 2017년 9월 슈뢰더가 문재인 한국 대통령을 예방했을 당시에도 함께 청와대를 방문했다.
도리스 쾨프는 이혼사유가 김소연씨 때문이라고 불륜을 암시하기도 했다. [6] 10월 5일 베를린에서 5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본인의 생물학적 아이는 없다. 도리스 쾨프의 이전 결혼에서 낳은 딸 한명과, 러시아 출신 입양아 두 명을 자녀로 두고 있다.
  • 스스로는 개신교 신자라고 칭한다. 그런데 독일 내에서는 나이롱 신자 정도로 인식되는 듯. 실제로 보통 독일에서 총리직에 오를 때 선서하는 과정에서 '하느님, 부디 도와주소서(So wahr mir Gott helfe)'라는 구절이 으레 들어가는데 슈뢰더는 이 구절을 빼고 총리직 선서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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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를린의 대표적인 패스트 푸드인 커리 부어스트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카더라. 퇴임 후에도 베를린 길거리에 있는 음식점에서 커리 부어스트를 먹는 게 종종 포착되었을 정도.
  • 자동차광으로도 유명하다. 총리 시절 내내 자동차 산업을 증진시키려고 엄청나게 노력했을 뿐 아니라 본인이 폭스바겐 임원으로 활동[7]했던 사실도 밝혀져 자동차 총리(Auto Kanzler)라 불리기도 했다.


[1] https://www.instagram.com/soyeonschroederkim/[2] 그가 태어났던 1944년 당시에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이라는 주는 생기기 전이었다. 모센베르크 지역은 오늘날에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 속하는데, 니더작센 주에서도 가까운 곳에 있다.[3] 구청장 슈테판 폰다셀(동맹 90/녹색당)[4] 도리스 쾨프는 1963년생 언론인이다[5] 4번의 결혼으로 결혼반지가 4개인것을, 아우디의 로고가 4개의 고리로 되어 있는 것에 빗대 비꼰 것 원래 독일 총리의 의전차량은 벤츠였으나 때맞춰 슈뢰더가 아우디로 바꿨기 때문에 더욱 이런 말이 나온 것.[6] 사실 사민당의 선거 부진 이유가 친시장주의로의 노선 변화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슈뢰더에게도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듯.[7] 폭스바겐의 경우 니더작센 주정부가 총자산의 11.8%, 의결권의 20%를 소유하고 있어, 자연히 니더작센 주총리를 지냈던 슈뢰더는 폭스바겐의 당연직 임원이 되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