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플랑크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image]
1917년

1918년

1919년
찰스 클로버 바클라

'''막스 플랑크'''

요하네스 슈타르크
<colbgcolor=#00001b><colcolor=white> '''이름'''
'''막스 카를 에른스트 루트비히 플랑크'''
(Max Karl Ernst Ludwig Planck)
'''출생'''
1858년 4월 23일, 독일 연방 홀슈타인 공국
'''사망'''
1947년 10월 4일 (90세), 독일 괴팅겐
'''국적'''
독일 [image]
'''학력'''
막시밀리언 김나지움 (졸업) (1867-1874년)
뮌헨 대학교 (철학, 이론물리학) (1874-1877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물리학 / 박사) (1877-1879년)
'''소속'''
베를린 대학교
카이저 빌헬름 학회
'''직업'''
물리학자
[image]
20대의 막스 플랑크
1. 소개
2. 생애 전반기
3. 흑체복사 연구의 배경
4. 양자의 개념을 발견하다
5. 말년과 사후
6. 기타
6.1. 후학들의 구세주?
6.2. 불우한 개인사
7.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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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독일물리학자.
흑체복사에 대해 연구하다가 양자역학의 성립에 핵심적 기여를 했으며(즉 에너지는 양자단위다), 플랑크 상수의 발견자이다. 191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을 했다.

2. 생애 전반기


막스 플랑크는 1858년 4월 23일 북독일의 한 작은 도시인 (Kiel)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플랑크의 아버지는 법학 교수였으며, 그의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모두 괴팅겐 대학의 교수이고, 친척들 중에 변호사, 학자, 목사 등이 많은 소위 말하는 인텔리한 집안 출신이다. 그렇기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배움에 대한 열의가 남달랐다. 1867년 가족들이 킬에서 한 주의 수도인 뮌헨(Munich)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플랑크는 그곳에서 막시밀리안 김나지움에 입학한다. 이때 학교 교사를 통해 에너지에 대해 처음 접했다. 그때부터 물리에 푹 빠진 그는 그 후 1874년 뮌헨 대학교 철학[1]에 입학해 학업을 시작했다. 지도교수 필립 폰 욜리(Philipp von Jolly)는 플랑크에게 열역학의 기본 원리들이 모두 발견되어서 '''이론 물리학은 이제 거의 완성 상태에 도달했다'''고 하며 물리학 지원을 만류하였지만, 플랑크는 듣지 않았다.
이후 1878년 베를린 대학교로 옮겨 헤르만 폰 헬름홀츠(1821~1894)와 구스타프 키르히호프(1824~1887)[2]에게 배우고, 다음해 6월 뮌헨 대학교에 '열역학 제2법칙에 관해'라는 논문을 제출, 최우등 성적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다음해 교수자격 논문을 통과하고 강사로 살다가 1885년 킬 대학 수리물리학부 부교수에 이어 1889년 사망한 키르히호프의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 부교수가 되었다 이후 1892년 베를린 대학 정교수가 되었다.

3. 흑체복사 연구의 배경


그가 교수가 될 무렵 물리학에서는 막 새로운 개념이 쏟아지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맥스웰의 전자기학 이론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했던 것. 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3]가 맥스웰이 예언한 전자기파의 존재를 발견한 것은 고작 1888년의 일이었다.
한편, 1884년 오스트리아루트비히 볼츠만이 1879년 슬로베니아 출신의 요제프 슈테판[4]이 실험한 흑체복사 실험 데이터를 근거로 통계학을 열복사에 적용해본다. 놀랍게도 시도가 성공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슈테판-볼츠만 법칙"(E는 $$T^4$$에 비례)이다.
1886년에는 미국천문학자 랭글리(S. P. Langley, 1834­~1906)가 흑체(에 근사한) 구리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와 태양을 비교하는 실험을 통해 열복사의 실험적 정확한 측정에 성공했다.[5] 다음해인 1887년, 랭글리의 볼로미터 실험에 이론적 근거를 더해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마이켈슨(Wladimir Michelson, 1860­~1927)[6]의 이론이 창안되었고, 취리히 공대의 H.F. 베버를 거쳐 1892년 베를린 대학의 빌헬름 빈(Wilhelm Wien, 186~­1928)이 통계역학적으로 '빈의 (변위) 법칙'[7]을 발견하게 된다.
빈의 법칙에 따르면, 최대 세기의 파장과 온도의 곱이 상수값으로 나타나므로, 파장과 온도는 반비례한다. 즉 ''온도가 높아질수록 흑체에서 방출하는 전자기파 중 세기가 가장 큰 전자기파의 파장이 짧아진다.''[8]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빈의 발견 이후 3년 뒤, 1895년 프리드리히 파셴(Friedrich Paschen, 1865­~1947)[9]이 좀더 정확한 실험으로 새 유도식을 만들어내는데, 이 과정에서 빈의 데이터를 약간 수정하게 된다. 그러나 빈은 이런 파셴의 변형이 슈테판-볼츠만 식과 정면 충돌한다는걸 인식하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10] 이런 혼란기에, 빈의 발견으로 흑체 연구에 본격 뛰어들은 플랑크가 뛰어들게 된다.

4. 양자의 개념을 발견하다


플랑크는 다음과 같은 수식을 발견한다. 이 수식은 실험결과와 일치하며 기존의 빈, 파셴이 발견한 두가지 수식 모두를 설명 할 수 있다.[11]
$$ E = \displaystyle \frac{C\lambda^{-5}}{e^{\frac{c}{\lambda T}} - 1} $$
빛이 $$ \frac{hc}{\lambda} $$만큼의 에너지를 가질 때 볼츠만의 통계역학을 활용하면 흑체복사 공식이 유도된다.(h는 플랑크 상수, \lambda 는 파장, c는 빛의 속도)
빛이 파동이므로 에너지가 연속적으로 존재할 것이라는 기존의 상식과 위배되는 가정이다.
이러한 에너지의 양자화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로 이어지게 된다.

5. 말년과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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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기의 막스 플랑크
유대인이었던 프리츠 하버[12]를 변호해준 행보로 인해서 우생학반유대주의에 집착했던 아돌프 히틀러의 노여움을 샀다. 사실, 다비트 힐베르트 같은 수학자도 그렇고 독일 지식인의 상당수는 나치와 반유대주의 정책에 소극적이였다. 당시 교수나 연구자로서 활동하던 유대인 혈통 인물들이 꽤 됐기에 독일 지식인 계층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을 기회가 비교적 많았고,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먹물깨나 먹은 지식인 계층이 히틀러의 선전,선동에 놀아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13]
플랑크는 하버를 변호할 당시, 히틀러에게 "독일 문화를 만드는데 기여한 쓸모있고 똑똑한 유대인들은 제발 보호해달라"며 탄원했지만 히틀러는 "아무리 똑똑해도 유대인은 유대인일 뿐"이라며 완고하게 거절했는데, 플랑크는 히틀러의 인종주의적 완고함이 결국 독일을 무너뜨릴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는 일화가 있다. 결국 플랑크의 말 그대로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고 말았다.
연합군에 의해 독일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이는 연구기관인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가 이름을 변경하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막스 플랑크 협회(Max-Planck-Gesellschaft)가 되었다. 현재 포스텍에 아시아 지부가 있다. 그런데 이 연구소는 단순히 물리학 연구소가 아니라 독일의 기초 과학 전 분야를 망라하는 연구 협회 산하 연구소들의 집단이다. 더 중요한 것은 여기서 말하는 기초 과학이라는 것이 흔히 생각하는 자연과학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응용과학(쉽게 말해 공학), 사회과학, 인문과학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 총망라되어 있다. 덕분에 막스 플랑크 조세 재정 연구소, 막스 플랑크 종교 및 인종 다양성 연구소, 막스 플랑크 미술사연구소 같이 언뜻 보면 왜 앞에 막스 플랑크라는 물리학자 이름이 붙어있는지 잘 이해가 안가는 연구소도 있다.
그리고 사후 1957년부터 1973년까지 독일 2마르크 주화의 모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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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타



6.1. 후학들의 구세주?


양자역학의 천재들이 등장하는 세대의 앞세대 격이다. 태어난 시기도 최소 20년(아인슈타인의 경우) 이상 차이나고… 그래서 플랑크 본인은 보수적 학자로, 사실 양자라는 개념을 믿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왕따를 당했던 프리츠 하버의 재능을 인정해주었던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특허청 공무원 신분으로 논문을 작성해 이 인간으로부터 발굴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역시 유대인이고… [14]
우스갯소리로 "막스 플랑크는 두 가지 위대한 발견을 했다. 하나는 양자역학이고 다른 하나는 아인슈타인이다."라는 말도 돌아다닐 정도.

6.2. 불우한 개인사


학자로서의 화려한 업적과는 대조적으로, 개인으로서는 매우 불행한 일들을 여러 차례 겪었다. 그의 아내인 마리 메르크와는 22년 만에 사별하고(그나마 재혼은 했다. 24살 연하하고(...)), 첫째 아들은 제1차 세계 대전 때 전사하며,[15] 두 딸들은 모두 출산 중에 사망한다.
그 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이번에는 둘째 아들이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연루되었다. 막스 플랑크가 히틀러에게 청원하였지만 받아지지 않았고 처형되었다. 주변의 물리학자들은 핍박을 피해 모두 떠나갔으며 각종 물리학 실험 데이터가 있는 베를린의 집은 폭격으로 쑥대밭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재혼한 부인도 막스 플랑크가 죽은지 1년후에 죽었고, 재혼한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도 1954년 43세로 사망했다...

7. 참고문헌


  • "막스 플랑크와 흑체 복사 이론", 포항공대 임경순 교수(과학사), 한국 물리학회, #
왜 흑체 복사 이론이 독일에서 급속도로 발전했는지에 대한 설명 등이 흥미롭다.[16]

[1] 당시 이과는 철학부 소속이었다. 19세기만 해도 과학과 철학의 분리가 명확치 않았다는걸 상기하자.[2] 흔히 이과생에겐 키르히호프의 회로 법칙으로도 유명하지만 플랑크의 지도교수로서는 "키르히호프의 흑체 복사 법칙"과 연결이 된다. 이 법칙은 흑체의 복사강도 분포가 온도와 파장에만 비례한다는 것이다.[3] 헤르츠(Hz)의 어원이 된 그 사람 맞다.[4] 요제프 슈테판은 볼츠만의 스승, 참고로 아레니우스는 볼츠만의 제자.[5] 천문학자가 왜 흑체를 연구하냐면, 당시만 해도 항성이 바로 전형적인 흑체로 가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다 그런건 아니지만 초보적 천체물리에서는 유용한 가정이라고.[6] 미국인인 앨버트 마이켈슨(마이켈슨 간섭계로 유명한 과학자)와는 다른 인물.[7] Wien's Verschiebungsgesetz, 혹은 Wien's displacement law[8] 이것은 별이 온도가 높을수록 푸른색을 띄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9] 수소 원자 방출 스펙트럼 파셴 계열의 그 파셴이다[10] 결론부터 말하면, 빈이 틀렸다. 하지만 빈의 오류는 자신의 유도식을 에너지를 중심으로 정리할 경우, 분모에서 1을 빼야한다는 사실을 구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우변의 한 항을 [image] 로 잘못 유도한 것인데, 실상은 플랑크가 유도한 [image] 이것이 맞다.) 물론 빈의 실험 자체에서는 1은 의미있는 값이 아니었지만, 이 작은 차이가 양자역학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래도 빈은 1911년 빈의 법칙 발견만으로도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11] \labmda가 매우 작을 때와 매우 클 때를 기준으로 근사하면 각각의 공식이 유도된다.[12] 프리츠 하버는 유대인이었으나 이미 어린 시절에 개신교로 개종해서 유대인이라는 자각이 전혀 없었다.[13] 물론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전 히틀러는 과장 조금 보태서 모든 독일인들이 지지한다고 해도 될 정도로 압도적인 지지율을 등에 업고 있었다. 하지만 유대인 및 소수민족 학살과 2차 세계대전에서의 삽질 때문에 지식인들은 히틀러의 실체를 어느정도 파악하게 되었고, 나치에 부역하던 베르너 폰 브라운이나 레니 리펜슈탈 같은 인물들도 훗날 문제가 될 수도 있는 흉악범죄는 저지르지 않는 선을 지키며 히틀러 및 나치당과 손절할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14] 아시다시피 아인슈타인이 특허청 공무원 시절에 쓴 논문 3편은 한편한편이 각각 물리학의 새로운 과목을 만들어낸다. 상대성 이론, 광전효과(양자역학), 브라운 운동(카오스역학). 그것도 세 논문 모두 1905년 한 해 동안 발표했다.[15] 이에 앞서 막스 플랑크의 형도 보불 전쟁 중에 전사했다.[16] 결론부터 말하면 전기 산업가 지멘스(시멘스, Werner von Siemens)가 후원한 제국물리기술연구소(PTR)와 샤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 베를린 대학의 국가지원 산학협동 연구 때문으로, 당시 백열등필라멘트 성능을 위한 측면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