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 제4번(브루크너)

 


정식 명칭: 교향곡 제4번 E플랫장조 '낭만적'
(Sinfonie Nr.4 Es-dur "Romantische"/Symphony no.4 in E flat major 'Romantic')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 지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연주.
1. 개요
2. 곡의 형태
3. 초연과 출판
4. 판본
4.1. Version I (1874년판)
4.2. Version II (1878/80년판)
4.3. Version III
4.3.1. Version III와 관련된 코스트베트의 주장
4.4. 말러판


1. 개요


안톤 브루크너의 여섯 번째 교향곡. 지금은 브루크너 교향곡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곡의 서열 1위를 다툴 정도로 유명한 곡이다. 브루크너 교향곡들 가운데서도 특히 주제가 대중적이며 곡의 짜임새도 매우 뛰어나다. 특히 1악장의 경우 브루크너 휴지도 별로 없이 악상이 잘 짜여져 있다. 때문에 7번과 더불어 브루크너 교향곡의 입문곡으로 널리 추천되고 있다.
부제는 '낭만적' 인데, 브루크너가 자기 교향곡에 공식적으로 제목을 붙인 유일한 사례다. 하지만 제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한 면도 있는데, 실제로 초연 때 바그너까로 유명했던 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와 막스 칼베크가 떡밥으로 물고 까기도 했다.
작곡 시기는 1874년 1월 2일부터 11월 22일까지로 되어 있다. 하지만 전작인 3번의 개발살 초연 사건도 있고 해서 초연도 되기 전인 1878년부터 1880년 동안 작품을 완전히 갈아엎는 대규모 개작이 행해졌다.
개작된 판본을 바탕으로 1881년말에 초연되었으며, 1889년 처음 출판되었다.
최대 약점은 브루크너 교향곡의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깊이 있는 아다지오 악장, 즉 2악장이 상당히 약하다는 점이다. 후기 걸작 7~9번에 밀리는 것도 2악장(8,9번에서는 3악장)이 결정적으로 약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 4번 교향곡의 2악장 자체의 퀄리티와 애호도는 브루크너의 다른 비인기 교향곡들의 2악장들에게도 밀리는 형국이다.

2. 곡의 형태


브루크너가 교향곡의 중심 조성을 장조(Dur/Major)로 잡은 최초의 사례인데, 곡의 분위기가 전작들보다는 좀 부드러워졌다는 인상을 준다. 동시대의 낭만적인 음악과는 많이 거리가 있지만, 예전의 브루크너 작품과 비교해 보면 좀 더 감성적인 차원에서 진일보했다는 평가도 수긍할 만하다.
악장 구성은 역시나 4악장이고, ABA 3부 형식의 스케르초 3악장 외에 나머지 악장들에서는 소나타 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곡에서부터 브루크너는 종래의 형식 구조를 잡아늘여 확대한 형태로 응용하고 있는데, 특히 4악장의 구조는 기존 형식론으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게 꾸며놓고 있다.
예전 곡들과 달리 바그너 등 다른 작곡가들 뿐 아니라 자작곡에서 인용하는 아이디어는 '''거의''' 쓰지 않고 있다. 다만 교향곡 3번 4악장에 나온 바 있는 반음계적 모티브가 이 곡의 1악장에 거의 비슷한 형태로 등장하기는 한다. 대신 4악장에서 선행 악장들의 주제를 회상하는 스킬은 여기서도 나오고 있다. '브루크너 오프닝' 이나 '브루크너 휴지', '브루크너 시퀀스' 같은 독특한 기법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고, 자작 종교음악의 인용이 없는 대신 금관악기를 선두에 내세운 코랄 스타일의 악상들이 곳곳에서 임팩트를 주고 있다.
관현악 편성은 1881년 하스판과 1886년 노바크판 기준으로 플루트 2/오보에 2/클라리넷 2/바순 2/호른 4/트럼펫 3/트롬본 3/튜바/팀파니/심벌즈/현 5부(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 브루크너 교향곡에서 튜바가 쓰인 것은 이 곡이 처음인데, 다만 갓 완성되었을 때는 튜바가 없었다.

3. 초연과 출판


앞서 썼듯이 3번의 초연 무대를 워낙 호화찬란하게 말아먹은 탓에, 미리 써놓았던 이 곡과 후속작인 5번, 그리고 전작까지 포함해 대규모 개정 작업이 몇 년동안 진행됐다. 개정 과정에서 다소 난잡하고 과체중인 곡의 윤곽을 말쑥하게 다듬게 되었고, 저음 금관악기인 튜바를 처음으로 추가했다. 그리고 전작들에서 직접 지휘한 것이 패착이었던 것을 감안해, 이번에는 다른 노련한 지휘자가 공연을 이끌도록 했다.
'''전곡 최초 공연''': 1881년 2월 20일에 한스 리히터[1]의 지휘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빈에서 초연.
초연 때 곡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3번처럼 대놓고 안티까지는 아니었더라도 밍숭맹숭했다고 하는데, 개요 란에 쓴 것처럼 바그너파들은 여전히 가루가 되도록 까고 있었다. 하지만 3번 보다는 괜찮다고 받아들이는 소수의 그룹도 있었고, 7번의 성공 뒤에는 연주 횟수도 급등해 지금은 브루크너 교향곡 중 연주 빈도가 가장 높은 교향곡들 중 하나로 등극하고 있다.
출판은 1889년에 빈의 알베르트 구트만 음악출판사에서 성사됐는데, 다만 이 구트만판은 예전까지의 교향곡들과 달리 엄청나게 무단 개정이 가해졌다고 여겨져 브루크너 협회로부터 짝퉁 판본으로 간주되었다. 하스와 노바크의 원전판이 나온 뒤로는 채택 빈도도 급격히 떨어졌고, 적어도 2004년까지는 이 판본 이야기만 꺼내도 입에 거품을 물고 디스하는 브루크너빠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2004년 미국의 음악학자인 벤자민 코스트베트가 국제 브루크너 협회를 등에 업고 1889년 구트만판의 존재의 당위성을 제시하면서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이후 코스트베트의 주장에 대한 재반박 러시도 이루어지고 있다.

4. 판본


4번 교향곡은 브루크너 교향곡 중에서도 가장 빈번하게 개작된 작품에 속하기 때문에 판본 문제가 복잡한 편이다. 그러나 대체로 아래와 같이 세 가지 버전 카테고리로 구별하는 방법이 최근 정착되고 있는 분위기다.

4.1. Version I (1874년판)


브루크너가 최초로 완성한 형태의 판본이다. 하지만 미처 연주되기도 전에 개정되면서 작곡가 생전은 물론 이후에도 오랜 기간 동안 알려지지 못한 비운의 판본이다. 완성된지 100년이 지난 1975년에야 음악학자 레오폴트 노바크의 편집으로 출판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곡의 초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귀중한 자료지만, 개정된 1978/80년판(Version II)에 비해 완성도가 확연히 떨어지기 때문에[2] 현재에도 실제 공연에서는 주로 1878/80년판인 하스판이나 노바크판이 사용되고 있다.
1874년 초판은 이후 개정된 판본들과 비교하면 매우 차이가 큰데, 78/80판을 듣던 사람이 들었다면 정말 어리둥절할 것이다. 1, 4악장은 거의 다른 작품이라고 봐도 될 정도. 그나마 2악장이 가장 원형에 가까운 것 같다.들어보자

4.2. Version II (1878/80년판)


실제 공연에 채택되는 악보는 대부분 '''1878/80년판본'''이다. 1878/80년판본으로는 하스판(1881년까지의 개정까지 반영)과 노바크판(1886년까지의 개정을 반영)이 있는데, 두 판본 사이의 실질적인 차이는 별로 없다. 이들 악보를 쓰는 지휘자들 중 간혹 뢰베판의 아이디어를 빌어 몇몇 대목을 살짝 수정 또는 첨삭하는 경우가 있다. 오이겐 요훔이나 에밀 차카로프, 이동호, 카라얀의 두번째 녹음 등에서는 4악장의 76마디에 뢰베판의 심벌즈를 집어넣고 있다. 카라얀, 스크로바체프스키, 임헌정 등은 1악장 서두에서 뢰베판을 따라 바이올린의 하강 음형을 한 옥타브 높여서 연주하였다.
'''1878년 개정''': 1874년 초고를 일단 완성했지만 작곡가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여 개정에 착수했다. 후속작인 5번의 초고를 탈고한 직후인 1876년 혹은 1877년에도 근소한 수정이 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본격적인 개정은 1878년에 이루어졌는데, 1878년 내내 개정 작업을 벌여 곡의 윤곽을 싹 바꾸었다. 1878년 1월부터 9월까지는 1악장과 2악장, 4악장을 전면적으로 개정했고, 12월에는 기존의 3악장을 버리고 아예 새로 3악장을 다시 썼다. 이렇게 1~4악장이 모두 개작되었는데 1~3악장은 현재 연주되고 있는 1878/80년판본을 구성하고 있지만, 4악장은 아쉽게도 1880년에 새로 작곡된 버전으로 대체되면서 본곡에서 탈락되었다. 탈락된 1878년의 4악장에는 나중에 '민중의 축제(Volksfest)' 라는 부제를 붙었고, 이 '민중의 축제(Volksfest)'는 1936년에 로베르트 하스 편집으로, 1981년에 노바크 편집으로 간행되었다. 1878년판을 재구성하고 싶다면 현재의 1878/80년판의 1~3악장(특히 1944년 하스판)과 '민중의 축제(Volksfest)'를 결합하면 되기 때문에 그동안 1878년판 자체의 전곡 출판본은 없는 상태였지만, 최근 윌리엄 캐리건에 의해 편집되었다.
'''1880년 개정''': 1878년에 행한 대규모 개정 후에도 4악장이 성에 안찼는지 1879년 11월부터 1880년 6월까지 4악장을 새로 쓰다시피 개작했다. 이것이 현재 대부분의 연주에서 사용되는 판본(1878/80년판, 특히 하스판과 노바크판)의 프로토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초연도 이 판본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현행 1878/80년판인 하스판이나 노바크판은 사실 1881년이나 1886년의 작은 개정까지 포함하고 있는데, 순수한 1880년판은 아직까지 개정/출판 작업이 없는 상태다.
'''1881년 개정''': 흔히 '''하스판'''이라 부른다. 1936년에 하스의 편집으로 출판되었다. 한스 리히터와 빈 필에 의한 초연을 거친 직후 작곡가가 몇몇 대목을 약간 손본 판본이다. 다만 이 개정 작업이 크게 눈에 띄는 변화를 준 것은 아니라서, 1878년과 1880년에 행해진 대규모 개정에 의거해 보통 1878/80년판이라고 부른다.[3] 1881년에 개정한 자필악보는 브루크너가 최만년에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에 직접 기증했다. 때문에 하스를 비롯한 다수의 후대 학자들은 브루크너가 최만년에 결정고로 남기고 싶어했던 버전이 바로 1881년판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1886년 개정''': 흔히 '''노바크판'''이라 부른다. 1953년에 노바크의 편집으로 출판되었다. 1886년 이 곡의 미국 초연을 계획하고 있던 지휘자 안톤 자이들에게 브루크너가 직접 보낸 필사보가 1952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 발견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기본적으로는 하스판(1881년 개정)과 거의 다른 점이 없지만, 마지막 4악장 종결부에서 1악장의 호른 주제를 좀 더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변화를 주었다. 노바크는 1881년 하스판을 1878/80년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자신의 판본이 하스의 판본과 큰 변화가 없다고 생각하여 공식적으로 1886년판이라 하지 않고 1878/80년판이라고 했다.

4.3. Version III


'''1889년판''' (뢰베판, 구트만판, 개정판(Revised Version)): ''브루크너의 제자였던 지휘자 페르디난트 뢰베, 그리고 (아마도) 역시 제자들이었던 요제프 샬크와 프란츠 샬크가 편집한 악보다. 1889년 9월 구트만사에서 출판되었다. 뢰베판[4], 구트만판[5], 개정판(Revised Version)[6], 1889년판[7] 등 다양하게 불리고 있다. 큰 틀은 Version II(1878/80년판)을 유지하고 있지만 여러 부분에서 오케스트레이션이 유의미하게 변했고, 일부 삭제가 있다. 제자들이 브루크너의 동의없이 수정한 판본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원전판인 하스판이 간행된 1940년대 이후에는 거의 연주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2004년 벤자민 코스트베트가 이 판본의 출판에 브루크너가 직접 개입한 정황을 들어 이 판본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논란이 불붙었다. 자세한 사항은 후술.
'''1888년판''': 2004년에 벤자민 코스트베트의 편집으로 출판됨. 1889년판(뢰베판, 구트만판, 개정판)의 자필악보 사진과 실제로 출판된 악보를 대조해서 오기를 찾아내어 바로잡은 것이며, 별도의 새로운 내용이 반영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1889년판과 사실상 완전히 동일한 판본이다. 국제 브루크너 협회 공인의 최종 개정판이지만, 논란이 많다. 자세한 사항은 후술.

4.3.1. Version III와 관련된 코스트베트의 주장


이 개정판(Version III)은 브루크너의 제자들이 스승의 음악을 보다 이해하기 쉽게 만들려는 목적으로 브루크너의 동의없이 무단으로 개정을 진행했거나, 혹은 브루크너가 개정 사실을 알았거나 심지어 개정에 소극적으로 참여하긴 했지만, 이는 자신의 든든한 지지자였던 제자들의 강력한 요구에 마지못해서 개정을 허락한 것이며, 브루크너 본인의 의지에 의한 개정은 아니었다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런데 벤자민 코스트베트가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음악애호가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해 주었다. 즉 Version III의 개정에 브루크너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의지가 반영되었다는 것. 여기에 코스트베트는 2004년 기존의 Version III인 뢰베판(1889년판)의 인쇄 오류를 교정한 1888년판을 내놓았다.
코스트베트는 국제 브루크너 협회의 초기 편집자였던 하스가 세간의 평과 달리 이 뢰베판의 신개정판을 준비했었고, 그 동안 하스의 브루크너 전기에 게재된 이 곡의 최종 결정고(Stichvorlage) 사진판(원본은 소실됨) 표지의 연도 계산이 잘못되어 혼란을 야기시켰다고 설명하고 있다. 코스트베트는 최종 결정고의 사진판과 뢰베판(구트만판)을 면밀히 대조했고, 초판본의 세세한 편집상 오류를 수정한 새로운 판본을 2004년에 국제 브루크너 협회의 승인 하에 출판했다.
코스트베트는 악기 편성에서도 종전에 뢰베의 개찬이라고 여겨진 제3플루트의 추가(3~4악장의 피콜로도 제3플루트 주자가 겸함)나 4악장의 심벌즈 추가도 브루크너의 의도였던 것으로 밝혀져 그대로 들어갔고, 가장 논란이 되어온 3악장 스케르초와 트리오 사이의 새로운 이행부나 스케르초 다 카포의 후반부 일부 삭제[8], 4악장 중반부의 일부 삭제 역시 브루크너 자신의 아이디어로 판명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코스트베트의 연구에 대해서 재반론도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다. 우선 1888년 판본에 브루크너의 서명이 없다는 점을 드는 이들이 있다. 또한 당시 브루크너가 자기 악보를 출판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제자들과 출판사의 입맛을 맞춰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개정이 브루크너 자신의 승인하에 이루어졌다고 해도, 브루크너가 주변인들의 압력과 비평을 너무 의식해 필요 이상의 자아비판식 개정을 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브루크너가 만년에 빈 국립 도서관에 기증한 자필악보가 Version III이 아닌 1878/1880년판(Version II)이라는 점도 여전히 코스트베트의 주장을 비판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하스가 개정을 시도했기 때문에 공식 개정판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도 역시 비판이 나오고 있다. 최초로 원전판을 편찬한 하스는 학문적 엄밀함보다는 브루크너의 정신에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취지로 하나의 단일한 베스트 버전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원전판을 편찬했다. 때문에 일부 교향곡에서는 다른 시기에 형성된 판본들을 섞어 편집하였는데, 하스의 이러한 편집 방침은 이후의 음악학자들이 하스의 작업을 비학문적 개정이라고 비판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한 바 있다. 이러한 점을 들어 코스트베트의 의견을 논박하는 이들은, 하스가 굳이 뢰베판을 건드린 것도 그가 1번과 8번 등에서 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1889년판에도 브루크너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해 다른 판본을 개정하면서 이 판본도 일부 끌어와 자신의 주관을 편집에 투영하려고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코스트베트 본인이 과거에 하스를 가열차게 비난했던 장본인이었다.
음악적인 견지에서 비판하는 이들은 Version III에서 나타나는 빈번한 셈여림 변화 등의 오케스트레이션과 전체 구조의 불균형이 브루크너 고유의 스타일과 명백히 다르다는 점을 들고 있다. 아울러 1888년판의 출판은 하스판과 노바크판으로 구별되는 대규모 원전판 출판 작업 이후 존재 가치가 없어진 국제 브루크너 협회가 해산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어거지로 만들어낸 어처구니없는 뻘짓거리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가해지고 있다.
또한 코스트베트의 1888년판이 기존의 1889년판(뢰베판)의 자필고 사진과 출판본을 대조하여 오기를 수정한 것에 불과하지만, 마치 새로운 내용이 반영된 판본인 양 '''1888년판'''이라고 출판하여 로열티 장사를 해먹는 작태에 대해서도 비판도 가해지고 있다. 그동안 브루크너 교향곡의 비판교정 작업에서는 곡의 구조가 달라질 정도의 유의미한 개정이 있을 때만 연도를 달리하여 구분했다. 예를 들어 브루크너 교향곡 4번의 1878/80년판의 경우, 1881년과 1886년에 작곡가에 의한 추가적인 사소한 수정이 있었고, 이것을 나중에 하스와 노바크가 각각 자신들의 원전판 편집 작업에 반영했다. 그러나 이것은 유의미한 개정이 아니기 때문에 하스판과 노바크는 자신들의 판본에 새로운 연도를 붙이지 않고 기존과 같이 1878/80년판이라고 했다. 때문에 코스트베트가 고작 자필고 사진과 출판된 악보를 대조하여 오기를 수정한 것으로 새로운 연도를 붙여 판본을 발행한 것은 그간의 편집 원칙과 전통에 위배되는 것이다. 코스트베트판과 뢰베판(구트만판)이 실질적인 차이가 없기 때문에 최근에는 이 둘을 묶어 1888/89년판이라고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코스트베트의 1888년 악보가 출판된지 10여년이 지난 현재도 이 판본을 택한 지휘자 혹은 관현악단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2005년에 이 판본을 나이토 아키라의 지휘로 초연한 도쿄 뉴 시티 오케스트라는 아마추어 악단이라는 이유로 차치하더라도, 미네소타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 오스모 반스카,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 프란츠 벨저-뫼스트 등 주로 코스트베트와 동향인 미국 악단이 주축이 된 리바이벌 작업을 제외하면 유럽에서는 아직까지는 1888년 판본을 이용한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륙이나 지역, 국가를 막론하고 전세계적으로 사실상 모든 공연과 녹음에서는 기존의 하스판이나 노바크판이 사용되고 있다. 코스트베트판의 사용이 아직 더딘 이유가 베토벤 교향곡의 조너선 델 마 판본 같은 신판들처럼 비싼 로열티 문제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코스트베트판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판본인 뢰베판(1889년판)은 출판 후 100년이 넘어 저작권저작인접권이 소멸되었지만 이 판본을 이용한 연주도 거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지적은 타당성이 떨어진다.

4.4. 말러판


그리고 뢰베판을 가지고 추가로 구스타프 말러가 뜯어고친 악보도 있는데, 3악장 스케르초 다 카포의 후반부를 더 덜어내고 전곡의 관현악 편곡을 몽땅 다시 하는 등 제대로 관광보낸 결과물로 악명높다. 이 말러판은 말러 자신이 소장한 지휘자용 총보는 남아 있지 않지만, 악단 단원들이 보는 개별 파트보가 이 곡을 직접 연주했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소장되어 있다. 1984년에 러시아 지휘자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가 파트보를 모아서 총보로 재구성한 뒤 소련 문화성 교향악단을 지휘해 소련 국영 음반사인 멜로디야에 녹음했는데, 그 후 말러판 녹음을 시도하는 지휘자는 2014년 현재까지 단 한 사람도 없다. 말러라는 한 개인에 의한 사적인 판본이므로 흥미 거리 이외에는 '''언급될 가치가 없는 판본'''이며, 그가 비슷한 논리로 대폭 개작한 슈만의 교향곡 전곡 악보를 출판한 바 있는 국제 말러 협회에서도 아직 출판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있다. 그래도 말러는 누구보다도 브루크너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브루크너 곡의 가치를 알고 청중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개작을 진행하였다. 실제로 말러의 무단 개작에 의해 진행된 공연은 성공적이기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단 개작이라는 오명이 묻혀서는 안 될 것이다.

[1] 한스 리히터는 호른 주자로 시작해 지휘자로 전직한 인물로, 바그너 오페라의 탁월한 해석가로 유명했다. 물론 바그너만 판 건 아니었고, 바그너와 대립 기믹이었던 브람스의 교향곡도 자주 다루었다. 훗날 영국으로 건너가 할레 관현악단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을 지휘하면서 아직 초짜였던 엘가의 작품을 과감히 무대에 올려 성공시킨 대인배로도 기록되고 있다.[2] 지휘자 게오르크 틴트너는 말년에 낙소스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의 녹음을 남겼는데, 1번2번, 3번, 8번에서는 초판을 택해 녹음했지만 교향곡 제4번에 한해서만 1874년판이 너무 난삽하고 응집력이 떨어진다는 판단으로 하스판을 택했다고 한다.[3] 다만 하스는 1944년에 다시 재출판했는데, 1944년 악보에서는 3악장 트리오 도입부의 목관악기 구성을 1878년판을 따랐다.[4] 개정을 주도한 뢰베의 이름을 따서[5] 악보가 출판된 구트만출판사의 이름을 따서[6] 작곡가가 직접 작곡/개정한 원전판(Original Version/Originalfassung)이 아니라 제자들이 무단 개정한 판본이라는 의미에서[7] 1889년에 출판되었음[8] 뢰베판을 주로 사용했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경우, 활동 후반기에 이 스케르초 다 카포 후반부 삭제가 3악장 전체의 균형을 깨뜨렸다고 여겼는지 삭제된 부분을 되살려 공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