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 제7번(브루크너)

 


정식 명칭: 교향곡 제7번 E장조
(Sinfonie Nr.7 E-dur/Symphony no.7 in E major)
1. 개요
2. 곡의 형태
3. 초연
4. 판본
5. 편곡
6. 기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1] (1악장 00:00, 2악장 19:42, 3악장 42:57, 4악장 53:08)

1. 개요


안톤 브루크너의 11개의 교향곡 중아홉 번째 교향곡. 8, 9번과 더불어 브루크너 후기 3대 교향곡으로 불린다. 브루크너 교향곡 중에서도 선율미가 뛰어난 편이라 4번과 함께 입문자에게 가장 먼저 추천되고 있는 곡이기도 하다.
작곡 시기는 1881년 9월 23일부터 1883년 9월 5일까지.
브루크너 교향곡 중 최초로 초연 무대에서 제대로 극찬을 받은 곡이다. 물론 전작 4번 때도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고, 6번의 부분 초연 때도 호평을 받았지만, 7번이 거둔 성공은 브루크너에게는 전례없는 것이었다. 이전까지 브루크너는 바그너까 내지는 브람스빠의 질시와 곤경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7번의 성공으로 작곡가로 제대로 된 대접을 받기에 이르렀다.
1883년 완성 후 1884년 초연을 전후로 약간의 수정을 가하였으나 그 차이가 미미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단일한 판본을 가진 곡으로 간주된다. 다만 2악장 클라이맥스의 타악기 사용에 대해서는 판본마다 차이가 있다. '판본' 항목 참조.

2. 곡의 형태


전작들과 후속작인 8번과 마찬가지로 4악장 구성이고, 느린 악장과 스케르초가 각기 2악장과 3악장에 오는 전형적인 고전 양식이다. 이 중간 악장들 외에 1악장과 4악장은 소나타 형식이나 론도 형식 등 기존 고전 형식으로 설명하기 힘들 만큼 독창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특히 4악장은 브루크너의 장기였던 오르간 연주나 주제 간의 대립 기믹 등을 이해하지 못하면 머리 뽀개지는 복잡성으로 설레발을 유발한다.
형식 연구와 응용이 고도로 진행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곡에 쓰인 악상들 자체는 오히려 좀 더 통속적인 맛이 강한 편이다. 브루크너 음악을 처음 듣는 이에게 당혹감을 안겨주는 '브루크너 휴지' 도 거의 없는데, 이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성공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휴지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곡의 흐름이 지속되고 악상들이 유기적으로 짜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브루크너 교향곡 중 성공작으로 꼽히는 곡들은 대체로 '브루크너 휴지'가 적다.
또 타악기 사용을 많이 자제하면서 곡의 서정성을 살리는 계책도 효과적으로 쓰고 있는데, 예로 팀파니는 3악장에서 전반적으로 쓰이는 것을 제하면 1악장과 4악장에서는 중간부와 종결부에서만 나온다. 2악장에서도 클라이맥스에 등장하지만, 이는 애초에 브루크너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작품을 초연한 지휘자인 니키슈에 의해 제안된 것이다.
2악장은 바그너의 죽음을 추도하는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장조로 쓰였으면서도 오히려 다소 비장한 추도의 기색이 역력한데, 실제로 이 대목을 쓰던 때에 브루크너의 빠심이 향해 있던 바그너가 사망했다. 브루크너는 바그너를 추모하기 위해 2악장에 네 대의 바그너 튜바를 추가하고 클라이맥스 후 이 악기들이 주축이 되어 연주하는 장송곡 풍의 코랄 악상을 작곡해 넣음으로써 바그너에 대한 빠심을 표현했다.
4악장에서는 종래의 소나타 형식 스타일 전개를 상당 부분 무너뜨리고 처음 내놓은 주제 세 개를 가지고 극명한 대립각을 세우는 스타일로 음악을 끌고 나가는데, 위협적인 느낌의 단조 악상인 3주제가 1악장 첫 주제와 많이 유사한 장조의 1주제와 극명하게 대립하는 양상이다. 거기에 다소 단조롭지만 현악기들에 의해 코랄 스타일로 담담히 연주되는 2주제가 완충 작용을 하는데, 마지막에는 1주제가 대세를 몰아 계속 커지고 위로 향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식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브루크너의 장기였던 오르간 연주로 얻은 경험도 나오는데, 다양한 스톱을 조작해 음색과 셈여림을 바꾸는 오르간 특유의 연주법을 반영한 관현악 용법을 구사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관현악법은 이 곡에서 처음 나온 것은 아니고, 5번의 4악장 중간부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쓰였던 바 있다. 그리고 3번 이후의 곡들에서 오르간 양식의 관현악 작곡법은 브루크너만의 개성으로 굳어졌다. 전문적으로까지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이러한 배경 지식을 상식 선에서 알고만 있어도 이 곡을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관현악 편성은 기본적으로 4~6번과 유사하지만, 바그너가 자신의 오페라에 쓰기 위해 고안한 금관악기인 '바그너 튜바'가 처음으로 도입되어 2악장과 4악장에 쓰이고 있다. 바그너 튜바가 교향곡에서 사용된 최초의 용례인데, 다만 독일오스트리아 외의 국가나 지역에서 바그너 튜바를 구하기 힘든 편이라 테너 바그너 튜바는 알토호른(고음용 유포늄으로 생각하면 된다)으로, 베이스 바그너 튜바는 유포늄으로 악기를 대체해 연주하기도 한다. 브루크너 자신도 후배 지휘자 겸 작곡가 펠릭스 바인가르트너와 후속작인 교향곡 8번의 초연을 준비하면서 당시 오케스트라가 바그너 튜바를 구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자 유포늄으로 공연하는 것을 허락한 바 있다. 7번 교향곡 역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될 당시 대체 악기로 연주된 것으로 보여지며, 몇 개월 후 헤르만 레비가 지휘한 뮌헨 궁정 가극장 오케스트라의 연주 때 최초로 바그너튜바가 사용되었다.
플루트 2/오보에 2/클라리넷 2/바순 2/호른 4/테너 바그너 튜바 2/베이스 바그너 튜바 2/트럼펫 3/트롬본 3/튜바/팀파니/심벌즈/트라이앵글/현 5부(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라는 스펙. 단, 심벌즈와 트라이앵글의 경우 아직도 추가 여부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있다.

3. 초연


5번처럼 처음에는 피아노 연탄용 편곡을 통해 소개됐다. 1883년 2월에 요제프 샬크가 1악장과 3악장을 직접 편곡해 연주했고, 1년 뒤인 1884년 2월에는 나머지 악장까지 모두 편곡해 전곡을 피아노 연탄으로 공연했다.
요제프 샬크는 두 차례의 피아노 초연을 하면서 관현악 초연도 계획했지만, 전작 교향곡들 대부분이 처참하게 까이고 실패한 것을 똑똑히 본 터라 다소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를 비롯한 브루크너에게 적대적인 브람스파들이 포진해 있었던 대신 다른 도시에서 곡을 초연한다는 아이디어를 짜냈고,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던 신진 지휘자인 아르투르 니키슈에게 이 곡을 소개했다. 샬크와 니키슈, 그리고 작곡자인 브루크너 삼자 간에 여러 차례 의견 조정을 위한 편지가 오갔고, 마침내 니키슈가 초연 제안에 응해 첫 공연이 개최되었다.
'''초연''': 1884년 12월 30일에 아르투르 니키슈의 지휘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라이프치히에서 초연.
교향곡으로서는 처음으로 빈 이외의 지역에서 초연을 시도했는데, 꽤 모험을 각오하고 진행한 것이 오히려 역대 브루크너 작품 중 최고의 성공을 거두는 반전을 이루게 되었다. 이어 헤르만 레비와 펠릭스 모틀 등 바그너 계열이자 브루크너의 친구나 제자 지휘자들에 의해 독일의 다른 도시들에서도 전곡 혹은 부분 공연이 개최되었고, 1886년에는 빈에서도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공연되어 절찬을 받았다.

4. 판본


판본 문제는 다른 유명 교향곡들에 비해서는 상당히 단순한 편으로 '''사실상 단일 판본'''으로 볼 수 있다. 다만 2악장 클라이맥스에서 타악기의 사용 유무가 학술적으로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이다. 브루크너는 1884년 말에 초연을 준비하면서 지휘자인 아르투르 니키슈, 제자인 샬크와 함께 논의하여 약간의 세부적인 수정을 가하였다. 특히 니키슈는 지휘자의 감각으로 2악장 클라이맥스(177마디 연습 번호 W)에서 팀파니와 심벌즈, 트라이앵글을 넣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고, 샬크가 이에 동조하자 브루크너도 이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브루크너는 악보를 새로 그리는 대신 타악기 악보만 간단히 그린 작은 종이를 자필보에 추가했는데, 문제는 이 악보의 한 귀퉁이에 '무효(gilt nicht)' 라고 적혀 있다는 점이다.
'무효' 를 누가 적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오갔고,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이 세 가지 악보가 가진 가장 큰 차이점이다. 일단 알베르트 구트만 음악출판사에서 초판으로 1885년에 나온 악보에는 이 타악기 첨삭이 반영되었지만, 나중에는 일관성이 없는 모습으로 개정판이 간행되어 논란을 부채질했다. 특히 개정판은 2014년 현재까지만 해도 세 가지의 판본이 나와 있어서, 편의상 출간 순서대로 번호를 매겨 분류한다.
'''1883년 초고(가상)''': 이 곡의 최초 형태로 추정할 수 있는 판본이다. 하지만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판본이며, 복구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브루크너는 이 작품의 초연을 준비하면서 지휘자인 니키쉬나 제자이자 동료인 샬크 등과 상의하면서 약간의 수정을 거쳤는데, 이 초고 위에 그대로 가필해 수정하는 형태로 작업했기 때문에 순수한 1883년 초고는 복구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다. 이런 방식으로 작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현행 1885년 판본과는 곡의 구조에서 전혀 차이가 없으며, 사소한 오케스트레이션 수정 위주의 개정으로 보고 있다.
'''1885년판''': 1883년에 일단 완성된 이 작품은 1884년 연말에 초연을 준비하면서 약간의 수정을 거쳤는데, 현재 연주되는 모든 판본은 여기에 기반해 있다. 실질적으로 연주되는 판본은 '''하스판'''과 '''노바크판''' 두 가지다.
'''(1) 하스판''': 1944년에 로베르트 하스의 편집으로 출판된 판본. 2악장 클라이맥스의 타악기 추가보에 적힌 '무효' 라는 글씨를 브루크너 자신의 것으로 여겼고, 이외에도 초연 준비 과정에서 있었던 '낭만적인' 첨삭들을 모두 브루크너 자신의 의도가 아닌 것으로 간주하고 삭제했다. 1883년 초고가 복구 불능 상태인 만큼, 이 하스판이 곡의 프로토타입에 가장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다른 판본과 눈에 띄는 가장 큰 차이점은 2악장의 타악기를 삭제했다는 점이다. 하스는 2악장 타악기 문제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2) 노바크판''': 1954년에 레오폴트 노바크의 편집으로 출판된 판본. 하스와는 반대로 타악기 추가보에 적힌 '무효' 가 브루크너 자신의 필적이 아니라는 견해를 냈고, 다른 첨삭들에 대해서도 브루크너의 승인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시 복구시켰다.
'''(3) 카와사키판''': 2008년에 5번의 미개정판을 발표한 바 있었던 일본 음악학자 카와사키 타카노부가 새롭게 편집해 2012년 발표한 판본. 빈 국립 도서관에 소장된 자필보와 초판본, 하스판과 노바크판을 바탕으로 각 악보의 차이점과 오류로 보이는 부분 등을 취합해 편집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국제 브루크너 협회에서는 2014년 현재도 카와사키의 편집 작업에 대해 공식 승인을 내리지 않고 있고, 카와사키도 아직 자신의 판본을 공식 출판하지는 않고 있다.
'''(4) 구트만판''': 브루크너와 요제프 샬크, 니키슈, 페르디난트 뢰베 등이 공동 편집한 악보. 초연 준비 과정에서 제자들과 논의한 수정 사항이 반영되어 있고, 2악장 클라이맥스에서 타악기가 추가되면서 이후 이와 관련된 해석의 문제를 낳게 되었다. 흔히 출판사의 이름을 따 구트만판이라고 부른다. 다른 교향곡에서와 마찬가지로 구트만판은 제자들에 의한 무단 개정판으로 간주되고 있어 오늘날은 사실상 사장된 판본이다. 다만 기존의 노바크판과 실질적인 차이는 거의 없다.
현재는 사실상 '''하스판'''과 '''노바크판'''만이 원전판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 두 가지 중 하나가 일반적으로 연주되고 있다. 2악장 클라이맥스의 타악기 유무를 제외하면 유의미한 차이도 없기 때문에 최근에는 아예 판본을 기재하지 않은 음반도 늘어나고 있다.
벤자민 코스트베트 등 몇몇 영미권 계통 음악학자들은 4번과 8번 교향곡에서 한 때 쩌리 취급받던 개정판(샬크판 등)들도 브루크너가 직접 개입 또는 승인한 정황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곡에서도 비슷한 논리로 구트만판을 옹호하는 이들도 있지만 구트만판과 여기서 행해진 첨삭을 거의 보존하고 있는 노바크판의 차이점이 실질적으로 거의 없기 때문에 그냥 노바크판을 쓰면 된다고 반박한다.
현실적으로 하스판, 노바크판 두 가지 중 하나가 연주되는데, 쟁점이 되는 부분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2악장 클라이맥스에서의 타악기 사용 유무가 되겠다. 그러나 2악장 타악기의 유무로 하스판, 노바크판을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한데, 하스 본인이 서문에 타악기 가필에 대해 언급한 만큼 하스판을 사용하는 지휘자도 2악장 클라이맥스에서 타악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세르주 첼리비다케 등 하스판을 사용하는 많은 지휘자들이 타악기를 추가해서 연주하고 있다. 타악기 없이 하스 원보를 그대로 따른 지휘자는 한스 로스바우트와 게오르크 틴트너,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 아사히나 다카시 등 몇 사람에 불과하다. 파울 힌데미트의 경우에는 1958년에 슈투트가르트 남서독일 방송 교향악단을 지휘한 녹음에서 타악기가 들어가는 구트만판을 사용했으면서도 심벌즈와 트라이앵글을 빼고 팀파니만 사용하게 했다.

5. 편곡


브루크너 생전에 첫 성공을 거둔 교향곡이고, 또 그 이후로도 독어권 지역에서 자주 연주되다 보니 대규모 관현악단용인 원곡을 당대 유행한 소편성 경음악단인 살롱 오케스트라를 위해 편곡한 판본도 있다. 1921년에 쇤베르크의 제자들이었던 한스 아이슬러(1/3악장)와 에어빈 슈타인(2악장), 카를 랑클(4악장) 셋이서 공동으로 10인조 살롱 오케스트라(클라리넷/호른/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네 손 연탄 피아노/하모늄)를 위해 편곡해 쇤베르크가 기획한 사적 연주회에서 초연하려고 했는데, 초연 계획이 엎어지면서 이 편곡도 존재 자체가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1980년대 중반에 빈의 쇤베르크 센터에서 쇤베르크의 유고 정리 작업 중 악보가 발견되었고, 1994년에 미국 코네티컷 주 뉴런던의 코네티컷 대학에서 열린 브루크너 강연회의 부속 실내악 연주회에서 73년 만에 초연되었다.
그리고 2009년 8월 21일에는 브루크너의 '제2의 고향' 이자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장크트 플로리안 수도원에서 열린 '제3회 브루크너타게(Brucknertage)' 때 색소포니스트,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토마스 만델이 이끄는 퓨전 밴드 '템포러리 아트 오케스트라' 가 전곡을 재즈로 편곡한 버전인 ''Bruckner VII Translated' 가 공연되어 화제가 되었다. 이미 1회 행사 때부터 5번으로 처음 재즈 편곡을 시도했는데, 반응이 의외로 괜찮았다고 한다.

6. 기타


  • 음악적인 논쟁과는 별도로, 이 곡은 나치에서 유달리 선전에 많이 내세운 브루크너 교향곡들 중 하나라는 흑역사도 갖고 있다. 나치가 개최한 이런저런 정치 집회의 기록 영화나 상업 영화, 여타 영상물의 BGM으로 깔려나오는 사례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고, 독일 제국방송이 히틀러자살 소식을 전하며 추모곡으로 띄운 두 곡 중에 이 교향곡의 2악장도 포함되어 있었다.[2]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생전 마지막으로 녹음한 음반이 브루크너 교향곡 7번 음반이다. 카라얀이 마지막으로 남긴 녹음이라는 점에서 그 상징성이 매우 높게 각인되어 있다.
  •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 '애증 Senso(1954)'에는 브루크너 교향곡 7번 1, 2악장이 영화 내내 영화음악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예 오프닝 크레딧에 큼지막하게 '음악 : 안톤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이라고 명시해놓았다. 마치 이태리 오페라처럼 상당히 빠르고 비브라토가 심한 스타일로 연주되고 있기 때문에 이색적인 느낌을 준다.
  • 2004년 9월부터 2005년 9월까지, KBS1에서 방영됐던 불멸의 이순신에 이 곡의 2악장이 BGM으로 깔렸다! 이순신이 고뇌하는 장면을 비롯하여 극중에서 비감하고 애통한 장면에 2악장이 자주 배경음악으로 쓰였다.
  • 노바크판에 도입된 2악장의 심벌즈와 트라이앵글은 2악장 클라이맥스에 단 한 번 등장한다. 트라이앵글은 지속되기라도 하지만 심벌즈는 단 한 번 타격한다.

[1] 이 연주는 카라얀이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녹음으로도 유명하다.[2] 다른 곡은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 중 지크프리트의 장송 행진곡. 참고로 두 곡 모두 전쟁 말기에 나치를 피해 스위스로 도피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베를린 필을 지휘해 녹음했던 음원을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