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고문단

 

1. 개요
2. 주한미군 군사 고문단
3. 고문관의 유래

Military Advisor

1. 개요


※ 정의에 대해서는 고문 참조
신생 독립국의 군사 체계를 정립하기 위해서 우방 강대국에서 파견하는 인원들을 의미한다.
태평양 전쟁 이전에 만주군에 일본군 군사 고문단이 있었고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 게릴라전 당시 게릴라 훈련을 위해서 각국에서 파견되는 경우도 있다. 유명한 인물로는 중화민국에 고문관으로 갔던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이 있다. 자세한 것은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 문서 참조. 중일전쟁 우쑹 전투에서 중국군이 일본군에게 '''1시간 만에 1만명 전사, 3주만에 전체 병력의 96% 손실'''이라는 '''미친 타격을 주었다'''. '''그런데도 졌다.''' 흠좀무.[1]
주로 특수부대 등지에서 군사고문단원으로 파병되는 경우가 많았고, 특수부대가 직접 훈련시키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개도국의 친위대적인 성격의 부대를 훈련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이경우에는 소련이나 쿠바에서 많이 파견했는데, 혁명수출과 같은 목적으로 군사고문단을 파견, 물자지원과 함께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동독도 예외는 아니었고, 북한도 80년대까지 군사고문단을 보낸 적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짐바브웨의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의 친위대인 경호여단을 훈련시킨 것은 북한이었다. 이외에도 크로아티아가 민간군사기업[2]의 고문관을 초빙해 훈련을 받고 전쟁에 승리하기도 했다.

2. 주한미군 군사 고문단


해방 후 신설된 국방경비대가 체계나 능력이 많이 모자라던 시절, 한국군 부대마다 미군 고문단이 몇 명씩 파견되었다. 이들은 한국군의 교육, 물자지원등의 임무를 담당하였고 지휘관과 간부들의 역량을 평가하는 일도 맡고 있었다.
일단 1949년 즈음에는 김석원 같은 사단장들은 대령급이었다. 그런데 미군정 치하와 한국전 때 유엔군, 특히 미군 도움을 주로 받으며 이들과 사이가 틀어지면 물자도 제대로 지원 안해주니 위관급 고문단도 상석 대하듯 대해줘야 했다.
여기에 당시 영어 할 줄 아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해 일부 단어나 바디랭귀지로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그래선지 한국군 내부 사정을 알 듯 하면서도 모르는 일도 많았기에 60년대까지는 현지 한국군이 군수지원을 요청하면 흔쾌히 들어 주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어수룩하고 호구같은 면을 보여줘서 지금의 단어가 되었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식이다.

한국군 담당자 : "아놔 우리 중대원들이 훈련 나갔다가 모포를 전부 다 잃어버렸음. 그리고 수통도 다 잃어 버리고 반합도 다 잃어 버리고 양말도 다 잃어 버리고 속옷도 다 잃어버리고... 그래서 모포 100개, 수통 100개, 반합 100개, 양말 300켤레, 팬티 500장, 러닝셔츠 400장 청구 좀 넣어주셈."

미군 담당자 : "OK"

다음날...

한국군 담당자 : "ㅈㅅ...우리 애들이 어제 청구 넣은거 또 잊어먹었음...그래서 이번에는 모포 80장, 반합 120개, 양말 500켤례 좀 보급 넣어주셈."

미군 담당자 : "OK"

...즉, 4달라 협상과 비슷하게 고문관은 담당자가 필요하다면 현황을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3] 죄다 갖다 바치다시피 한 것이다. 그래서 이 성인군자 혹은 호구들을 놀리는 단어로 시작된 것이 지금의 고문관의 의미로 뿌리내린 것이다.
그래도 전투복, 모포 한장 제대로 만들기 힘들었던 당시 한국 실정상 이들이 아낌없이 보급하는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는 그대로 한국군의 창고에 쌓여 유사시에 쓰이기도 했고 잉여 물자는 시중에 팔아 부대 자금으로도 쓰였다. 또 시중에 도는 것들은 많은 피난민과 민간인들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일종의 비리인 셈이지만, 특별히 조사를 하거나 안 갖다준 적은 거의 없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잘 알기 때문에 민간에 생필품으로 흘러나가는 걸 알면서도 그냥 눈감아 준 것이다. 다만 너무 많이 없어진다는 '밑빠진 독'이라는 불만은 있었다고.
하지만 미군내의 잉여 물자들을 지원한다는 측면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필요없는 물자를 지나치게 지원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공사등 기지 건물 건설때 이런 일이 빈번하였는데. 리영희도 이 점을 자신의 회고록에서 지적한 바 있다. 리영희가 당시 통역장교였고 고문관 중에서 기억에 남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만 전체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3. 고문관의 유래


한편 좀 더 부정적인 의미에서 출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지금도 부정적인 의미지만. 미국에서 온 고문관들의 경우 한국말이 서툴고 한국실정도 잘 모르다보니 상대하는 군인 입장에선 '''꽤나 답답한 친구들'''이었다는 것. 그러다 보니 '저런 고문관 같은 놈'이란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사실 위에서 말한대로 고문관이 정말로 그렇게 한국에게 '''고마운''' 존재였다면, 이런 자들의 이름이 '''욕설'''로 쓰이고 있는 상황은 상당히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한국군 장병들도 한명한명이 전부 다 코갤러급인 것은 아닐 거고,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자기한테 그렇게 잘 해주는 사람을 장난으로 놀리려고 쓰는것도 아니고 정말로 싫어하는 사람에게 갖다댈 수는 없기 때문.
한국군의 인력 자원은 완전히 무(無)에서 시작된게 아니었다는게 결정적으로 고문단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게 중국군이나 왜군같은 삼류 군대 경험들이라서 문제지만. 광복군 출신 장교들은 신생국가의 건군에 참여했다는 자부심으로,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 장교들은 실전 경험자의 프라이드를 가지고 대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2차 대전 중 독일군, 일본군을 박살낸 미군이 보기에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다. 일본군은 문제점이 매우 많았으며 중국군은 그 일본군에게조차 고전하던 군대다. 그래서 여기서 얻은 경험들은 미군 입장에서는 별로 존중할 가치가 없었다. 미국의 전반적인 평가는 병들은 용감하지만 지휘부는 무능하다는 것. 이는 나중에 한국전쟁에서 오스트레일리아군도 비슷하게 평가했다는걸 보면 신빙성이 있다. 가령 존 처치 준장은 한국군 지휘관들의 능력을 믿을 수 없다는 식으로 불만을 표했고 맥아더는 한국군이 싸울 의지도, 능력도 없고 방어와 보급체계도 없다고 불만을 표했다. 고문단의 실제 평가기준에는 반자이 어택을 사용하는지 여부를 확인하게 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냐면, 멀쩡한 현역 장성들은 훈련병이 받는 6주 신병캠프에 집어넣고 굴릴 정도였다!
이제 막 탄생한 아시아의 어떤 신생국에 대한 우월감, 언어와 문화적 차이 등으로 상호간에 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창군원로 중 경력이 가장 화력한 축에 들었고 한국전쟁 초기 포항 철수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김석원은 특유의 불같은 성정이 더해져 미군 고문관과의 충돌이 굉장히 심해서 일찌감치 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미군은 김석원의 실전경험을 일본군의 그것이라며 철저히 무시했고 당시 38선의 3분의 1일 감당하던 1사단의 사정을 의도적으로 무시한채 김석원이 예비대를 두지 않는다며 중상을 했다.
하지만 미군을 무시할순 없으니 대다수 한국군 장교들은 나름대로 이들과 친하게 지내려 노력했고, 백선엽, 채명신같은 국군 창설멤버들도 기억에 남는 고문관 장교들에 대한 추억을 회고록에 남기고 있다. 강창성의 저술에 의하면 일부 예외는 있지만 만주군 출신 장교들은 광복군/일본군 출신들보다 고문관들과 원만하게 지냈다고 한다. 이것은 일본 고문관이 배속되었던 만주국의 특수한 사정으로 고문관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사실 이런 단어들이 그렇듯 '정확히 이것이 그 단어를 쓰게 된 원인이다.'라고 특정지을 수는 없고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미군 고문관들도 한국전쟁 초기에 의사소통의 부재로 불필요한 후퇴를 유발하거나 미군 전력에 대해 자만심으로 전세를 악화시키는데 약간의 기여가 있기는 했다.[4] 의정부 전선의 경우 북한 전차가 돌진해도 막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미군 고문관이 제일 먼저 도망친 경우가 있다. 여기서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데, 의정부에서 미군 고문관은 두 가지 모습을 보였다. 하나는 대전차포 소대를 직접 지휘하다가 북한 전차가 끄떡도 않자 포수들이 다 도망치는 와중에서 홀로 포를 폐기하고 탈출 중 전사한 중위, 그리고 하나는 한국군 바주카 사수들이 형편 없어서 못 잡는 거라며 바주카를 들고 접근했다가 맞고도 멀쩡한 걸 보고 혼자 도망쳐버린 대위이다. 이 에피소드는 당연히 후자의 경우이다. 이 경우 고문관은 진짜 '''고문관'''이다. 적어도 공격은 제대로 해보고 나서 도망쳤으니 밥값이야 했지만, 장교가 아군을 내팽게치고 나홀로 적전도주를 했으니...
또한 병종 별로 고문관들의 성향도 달랐다고 하는데 육군 고문관들이 위에 언급된 사안들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 반면 해군에 파견된 미 해안경비대 고문관들은 사로잡은 포로의 물건을 따로 보관하고 있다 나중에 돌려줄 정도로 신사적이었고 한국군 장교들과도 굉장히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평양 지역 미국 선교사의 아들이었던 해군 고문관은 한국어가 유창했는데 일부러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시늉을 하다가 자기 욕을 하거나 언어의 차이를 이용해 속여먹으려 들면 한국어로 대답하여 한국군 대원들을 놀리는 장난을 즐겼다고 한다.

[1] 앞의 서술에서 일부 전과를 크게 조명하였는데, 어쩔 수 없는 것이 이미 제해권과 제공권은 일본이 거머쥐은 상태인데다가 국부군은 장제스 직속 개편사 중에서도 최정예인 8개의 독일식 사단들 조차 산포 1개 대대도 못 갖춘 상태였고(그렇다고 그 이상 상급제대에 직할 중포가 충분한 것도 아니다.), 반대로 일본군은 야전중포병연대 및 증원군이 계속 투입되었던 것도 모자라 독가스까지 아낌없이 뿌려 댔으니...[2] 미국의 샌드라인 인터내셔널에서 군사컨설팅을 받아 승리하였다.[3] 다만 작정하고 감추고 요청하면 여기저기 들쑤시며 찾아다니거나 탐문을 하는 수밖에 없는데 후자는 전술했듯 의사소통 가능자나 수단이 제한되었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4] 물론 미군보다 병맛넘쳤는 한국군 지휘부의 책임이 훨씬 크지만 원래 잘되면 내탓이고 안되면 네탓이라고 주장하는 법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