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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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Alexander Ernst Alfred Hermann von Falkenhausen'''
알렉산더 에른스트 알프레트 헤르만 폰 팔켄하우젠[1]
생몰년도
1878. 10. 29. ~ 1966. 7. 31.
복무
독일 국가방위군(Reichswehr)
1897~1930
독일 국방군
1934~1944
최종 계급
육군 보병대장
주요 서훈
중화민국 보정훈장(寶鼎)
1. 개요
2. 생애
2.1. 1차대전~전간기
2.3. 2차대전과 말년
3. 여담
4. 각종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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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년 현역 일선에서 물러났을 때의 모습

1. 개요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은 독일장군이다. 제2차 세계 대전벨기에의 독일군 군정사령관을 지내기도 했다.

2. 생애



2.1. 1차대전~전간기


1897년 19세로 소위로 임관해,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일본 제국에서 주재무관을 지냈다. 그 동안(1909~1911) 일본과 화북, 한국과 인도차이나에 유학을 하기도 했다. 그 후 1차대전시에 오스만 제국군 소속으로 팔레스타인으로 파견, 푸르 르 메리트를 받았다. 전후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복무하여, 1927년에 드레스덴 보병학교 교장으로 재직했다. 그리고 1930년에 퇴역했다.

2.2.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 단장 시절


1935년 건강상의 이유로 퇴임한 전대 재중 독일 군사고문단장 젝트의 후임으로 중화민국에 파견되어 1935년부터 1938년까지 3년간 4대 주중독일 군사고문단장을 지냈다. 이후 그는 국민혁명군을 독일식으로 훈련시키고 독일제 대포(88 mm 등), 소총(중정中正 소총 등)을 전달하였다. 그는 상하이에서부터 난징까지의 길목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도록 중국군을 지도하며 우쑹 전투 등을 참관, 일선에 나가 진두지휘했다. 이로 인해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중국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전에 없는 뛰어난 전과를 올렸지만 결국 국민당 장교진과 장제스의 역량 및 경험 부족으로 상하이를 내주어야 했고 상하이를 점령하는데 개고생을 했던 일본군이 빡치면서 일어난 결과가...
1937년부터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을 중재하려던 독일의 트라우트만 공작이 실패로 돌아가고 일본 제국이 독일 측에 팔켄하우젠을 비롯한 독일 고문들을 중국에서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자 송환이 결정되었다. 팔켄하우젠은 중국에 남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으나 오지 않으면 가족들에게 불이익을 주겠다는 위협에 어쩔 수 없이 장제스가 베푸는 고별 만찬에 참여한 다음에 주중 독일 대사인 오스카 트라우트만과 함께 1938년 6월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중국이 결국 승리를 거둘 것이라 확신한다. 일본은 전쟁과 평화, 모두 짊어지게 될 것이다." 라는 말[2]을 남겼다.

2.3. 2차대전과 말년


1938년 팔켄하우젠은 재복무하여 1940년 벨기에 군정사령관이 될 때까지 서부국경에서 복무하였으며 보병대장까지 진급한다. 1940년에서 1944년까지 벨기에 군정사령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유대인에 대한 법령을 시행하여, 유태인 28900명을 추방했다. 또한 반유대정책으로 일자리를 잃은 유태인 2250여 명을 지크프리트 선 건설에 투입했다. 또한 점령기간 동안 레지스탕스 수백 명이 독일군에게 총살당했고, 벨기에 사람 약 4만 3천 명 역시 수용소로 추방되어 1만 3천 명이 죽었다.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직후 에르빈 폰 비츨레벤과의 친분 때문에 티롤의 수용소에 투옥되었고, 이후 다하우로 이송되었다.
1951년 브뤼셀에서 열린 재판에서 첸쉬링[3]의 증언 등이 있었으나, 유대인 2만 5천 명을 추방하고 레지스탕스에 대한 보복으로 인질을 처형한 것이 유죄로 인정되어 중노동형 12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콘라트 아데나워에게 도움받아 3주 후 석방된다. 1950년, 팔켄하우젠의 72번째 생일에 장제스가 '중국의 친구'라는 이름으로 1만 2천 달러를 보냈으며 1958년 11월 28일, 중화민국 정부는 팔켄하우젠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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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담


1차대전 때 벨기에 군정 사령관이었던 루트비히 폰 팔켄하우젠의 친척이다.

4. 각종 매체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 중화민국의 꿈과 희망으로 등장한다. 독일로 벨기에 점령 후 플랑드르왈롱이라는 괴뢰국을 세우면 장관진에 등장하는데, 우선순위가 낮아 국가원수 몇 명을 암살해야 볼 수 있다.[4] 하지만 호이4에서는 참모로는 나오지 않고 독일 장교단이라는 국가 정신으로 구현되어 육군 교리 연구 시간을 7% 단축시키는 것으로 끝나는데 중일전쟁이 발발하면 팔켄하우젠을 소환할지 안할지를 묻는 이벤트가 독일 측에서 뜨게 된다.[5] 십중팔구 독일에선 팔켄하우젠을 소환해버리곤 한다. DLC Waking the Tiger에서는 중국계 국가들이 국가 중점으로 팔켄하우젠에게 시민권을 주고 장관진으로 고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독일과의 관계도 일정 이상이 필요하기에 제일 잘 써먹을 수 있는 것은 독일과 같은 파시스트 사상을 가지고 있는 만주국이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심각한 고증오류인게 팔켄하우젠은 어디까지나 독일에서 중국과의 우호를 위해 난징 국민정부만을 위해 파견한 독일 군사고문단 단장이었지 아무 군벌이나 만주국이 돈주고 고용할 사람은 아니었다.
만일 카이저 복귀 루트를 타고 중국으로부터 칭다오를 할양받은 뒤에 전쟁이 일어나면 중국에 있던 군사 고문관들이 구속되나 팔켄하우젠은 무사히 탈출하는 이벤트가 발생한다. 나오는 답글은 "잘했어!"
1.6패치로 독일이 "일본과의 친선" 중전을 완료하면 독일로 소환되어 레벨 3, 보병 전문가 특성을 가진 독일 장군으로 나온다.
Wind Blow에서는 서독의 꿈과 희망으로도 등장한다.

[1] 외래어 표기법대로는 '폰팔켄하우젠'이 된다. 외래어 표기법상 영어를 제외한 로망스어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2] 미국 주간지 타임, 1938년 7월 18일[3] 钱秀玲, '중국판 쉰들러'라고 불리는 할머니로 벨기에의 유대인들을 구출했다.[4] DHR 이후로 독일령 벨기에-북부 프랑스 총독령이 추가되었는데 해당 국가를 독립 시키면 국가 원수로 등장한다.[5] 근데 정작 사진은 히틀러와 담화하는 쿵샹시의 사진이 뜬다. 히틀러와 쿵샹시의 만남이 중독합작의 나름 상징적인 사진이긴 하지만 대놓고 팔켄하우젠을 소환하겠냐는 선택지에서 굳이 쿵샹시의 얼굴만 찍은 사진을 보여줄 이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