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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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군대이다. 1945년 8월 15일 해산 당시 약 20만 (15만~22만)정도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군관구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독립적인 군대라기보다는 관동군의 보조 부대에 가까웠다.
2. 역사
중화민국 동북변방군(약칭 동북군), 즉 장쉐량의 봉천군벌은 30만명의 대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고작 만여명의 일본군에게 참패하고 그 중 6만명 정도가 투항하는데, 이들이 만주군의 토대이다. 무기 또한 초기에는 동북군의 물자가 고스란히 사용되었다. 오합지졸이던 중국의 군벌군답게 아편 중독자가 즐비했고, 훈련도도 낮아 교전만 붙으면 깨지기 일쑤였으며 부대 이동 시에는 여러 민폐가 많았다.
1933년 2월, 황제 푸이의 친위대인 금위대가 설치되었고, 1934년에는 만주국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이들만 만주군 장교로 임용되도록 법이 제정됐다.[1]
법제상으로는 징병제를 채택했으나, 제대로 시행되지는 못했다.
3. 계급
체계는 중국군 계급과 유사한 방식이었지만, 계급장의 형태는 일본 육군식이다.
보다시피 일본 육군 계급장에서 바탕색만 바꾼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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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군 육군 장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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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군 군악대.
4. 군종
4.1. 만주국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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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과 군기가 똑같다. 만주군의 주축이 육군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인원은 몇차례 변동을 거쳐 110,044명 수준. 위에 상술했다시피 처음에는 구 중국 군벌들의 병력이 주축이었으나 점차 일본이 훈련시킨 장교들이 군벌 출신 장군들을 몰아내고 조직을 장악해나갔으며 1936년 무렵에는 경찰보다도 숫자가 적은 7~8만명대로 줄이기까지 했다. 1933년의 열하사변이나 노몬한 전투에도 동원되었다. 기갑 전력으로는 구식 영국제,프랑스제 장갑차 약간과 장쭤린이 체코 군단을 경유해 확보한 프랑스제 르노 경전차 몇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소수의 일본제 94식 경장갑차를 일본군으로부터 대여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보유 장비는 부실한 편이었다.
2차대전 말기가 되면 소련군의 침공을 대비해서인지 도로 숫자와 조직이 확장되기는 했는데 막상 1945년 8월 소련군이 쳐들어왔을 때는 별다른 구실을 하지 못했다.
4.2. 만주국 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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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본토인 일본도 없는 공군이 존재했는데[4] , 1937년 만주군 육군 비행대로 창설되었고 신징(新京)에 소재한 만주항공 활주로를 썼다. 1940년에 독자적인 사령부를 설치했고 1940년에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처럼 만주국육군비행학교가 설립되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카미카제로 쓰려고 난화특별공격대(蘭花特別攻擊隊)란 부대를 만들기도 했다. 만주국 비행대였지만 역대 사령관 셋 중에 둘이 일본인이었다. 거기다 얼마나 기체가 부족했는지 방위 목적으로 지역마다 돈을 걷어서 기체를 사고 거기에 아래 예시처럼 "호국XX 호"라고 이름까지 떡하게 칠하고 다녔다.[5]
전투기, 훈련기 등을 합쳐 40기 내외의 작은 규모였다.
편제는 41년도 기준으로
- 비행대 사령부
└제1 비행대(신징)
└제2 비행대(펑텐)
└제3 비행대(하얼빈)
└제2 비행대(펑텐)
└제3 비행대(하얼빈)
- 독립 비행대
- 항공병기창
- 육군비행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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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도 만슈사에서 Ki-98이라는 전폭기를 만들었으나 프로토타입을 1대 만든체 종전해버렸다. 주무장은 토류랑 같은 37mm 1문, 20mm 2문이었다.
4.3. 만주국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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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해군 소속의 군함.
많은 장교가 일본인 장교였으며 실질적으로는 강방함대(江防艦隊) 내지는 강상군(江上軍)으로 불렸다고 한다. 만재 배수량 1,000t대인 모모가타급 구축함(桃型駆逐艦)을 기함으로 썼고 몇척의 건보트가 더 있었다고 한다.
창설 초기에는 일본 해군에서 고문관이 나왔는데 이 고문관들이 일본 육군과 허구헌 날 싸우다가 1938년에 몽땅 철수해 버렸다. 그래서 만주군 해군도 관동군에서 고문관을 보내 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군 수병들은 "해군이 육군의 지휘를 받아야 하냐"면서 불만이 쌓이다 1942년에 배를 버리고 일본으로 다 도망갔다. 그후 만주국 자력으로 배를 굴릴 인원[6] 이 없자 배를 해체한 후 해안포대로 굴렸다.
5. 해산
1945년 8월 18일, 만주 작전으로 소련군이 소만국경을 돌파해 들어오며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미 정예사단 다 빠지고 잡병이 된 관동군도 박살나는 와중이었다. 종전 이후 만주군의 잔당들은 알아서 국부군과 인민해방군으로 갈아탔다.
6. 만주군과 한국군
만주군에서는 조선인을 상당수 받아들였다. 간도특설대가 바로 만주군 소속의 부대. 만주국 패망 당시 조선인 최고 계급자는 원용덕으로, 군의관 중교(중령)였다. 만주군 출신 인물들은 만주국육군군관학교 항목의 출신 인물을 참고할 것.
광복 후 만주군 출신자들은 대한민국 국군 건군 과정에서 한 축을 담당하였으며, 국군 창설 후 점차 우위를 차지했다.
건군 당시의 파벌로는 만주군파 외에도 중국군파(국부군)[7] , 일본군파가 있었는데, 이들 3개 파벌 가운데 만주군파가 우위를 점한 까닭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먼저 중국군파는 숫자가 적었다. 광복군은 정통성은 있고 해방된 조국에서 당당할수있었고 낯부끄럽지 않았으나 사회주의계열을 제외하면 100명을 좀 넘기는 수준이었고 사회주의계열인 광복군 제1지대와 동북항일연군도 둘이 합쳐 1000~1500명 수준이었다. 그리고 이 적은 인원중에서도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실전경험이 전무한 인원이 많았다. 이때문에 일제 패망 후 장교경력자 우대 명목으로 일본군/만주군 출신들을 닥치는대로 받아들였다.[8] 국민당군에서 싸워봤거나, 아님 미군 교관에게 훈련받아 미국식 군사교리에 익숙했던 극소수를 제외하면[9] 실전에 써먹기 부적합한 이들이었다. 초기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남조선 국방경비대 시절)과 정부수립 후 초대 국방장관, 국방차관을 모두 점유하긴 했으나, 실력으로 꿰찬게 아니라 정치적 이유로 차지한 자리로 이내 밑천을 드러냈다.[10] 그런데다 독립운동했다는 자존심은 강해서 군사영어학교 개교시 '''광복군 출신들의 군 경력만 따로 인정해서''' 특별임관시켜줄 것을 미군정에 요구하다 사이가 틀어졌다.
일본군파는 파벌에서 메인으로 등극하기에 두 가지 약점이 있었다. 하나는 미국 고문관과의 마찰이었다. 일본군파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건 당연히 육사출신 장교들이었다. 이들은 당대 아시아 최고의 군사교육기관이던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입교한 '''최상위 엘리트'''라는 자부심이 강했고[11] , 중일전쟁을 통해 전투경력도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경력 짧은 위관급에 불과한 미국 고문관의 참견을 성가시게 여겼다. 또 나이 지긋한 사람이 많아서 사관학교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일본식 관습(대표적으로 군도패용)과 교리에 대한 고집이 강해서 일본군이라면 질색하던 미 고문단과 마찰이 심했다. 당연히 미군 고문관의 보고서는 악평으로 가득찼는데 국내에 기반이 없던 이승만은 미국 고문관의 보고서를 '''객관적 평가'''로 수용하고 있었다.[12]
또한 일본군파는 그 안에서 '''또다시''' 파벌이 나뉘었다. 엘리트라 자부하던 일본육사파, 그리고 전쟁 막바지에 반강제로 동원되었던 학병파, 마지막으로 장교가 아니었던 하사관파. 이들 세 파벌은 당연히 사이도 좋지 않았다. 개중 학병파는 반강제로 군에 들어왔던 이들이라 해방 이후 먹고 살기위해 군에 돌아오긴 했지만 복무의지가 강하지 않아 병사들까지 염세적으로 만든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조선이 일본제국의 식민지였던 만큼, 이들 세 파벌의 인원은 가장 많았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유대감이나 결속력이 없었고, 이것이 다수임에도 만주군파에게 뒤쳐지게 된 한 이유가 된다.
만주군파는 모두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출신으로 단일화되어, 단결력이 좋았다. 물론 만주국육군군관학교가 일본육사처럼 고급 교육기관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소한 중국군벌들이 중구난방으로 세운 군사학교들 보단 체계가 잡혀 있었고,[13] 개중에서도 조선계는 몇 안되는 출세길 찾아 매달린 조선내 '''차상위 엘리트 계층'''이었다. 항일독립군이 만주에서 축출된 41년 겨울 이후로도 화북지역에서 중국군 게릴라나 마적떼 상대로 실전경험을 쌓을 수 있었기에,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고 변변한 게릴라전 경험도 부족했던 대다수 광복군 출신들보단 기량이 우세했다.[14] 무엇보다 만주군 시절 일본군 고문관의 지휘를 받아본 탓에 미국 고문관에도 금세 익숙해져 별다른 마찰을 빚지 않았다. 국군의 전신이 자위대처럼 미군을 보좌하던 남조선 국방경비대이며, 한국전쟁 개전 이후에는 유엔군의 작전지휘를 받아왔음을 생각하면 큰 플러스 요소였다. 또한 만주국 건국과 입교시기를 고려하면 대부분이 청장년층의 젊은 나이여서, 새로운 방식을 쉽게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이러한 특성은 당시 주한 미국군사고문단장인 로버트 준장의 서한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의 서한에서 중국군파는 늙고 무능하고 부패하며, 일본군파는 말이 안통하는데다 군벌이 될 가능성도 있는 맛이 간 집단으로 묘사된다.[15] 반면 백선엽, 정일권 등 호의적으로 거론되는 장교들은 모두 만주군파에 속한 인물들이다. 대부분 청장년층으로 나이까지 젊었던 그들이 국군 내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은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1] 이는 일본에 협력했던 군벌들을 밀어내고, 일본이 직간접적으로 육성해 고분고분할 수 밖에 없는 초급 장교들로부터 장교단을 채우기 위한 조치였다. 이렇게 밀려난 군벌들은 '''건국원훈''' 칭호를 받고 명목상 높은 지위를 받았으나, 실질적으로는 병력도 뺏기고 뒷방 늙은이 취급을 당했다. [2] 만주국 황제가 맡았다. 그러니깐 푸이.[3] 부사관에 준하는 병.[4] 육군항공대에 가깝지만 정식명칭은 대만주제국공군이다.[5] 하야부사나 쇼키, 하야테같은 기종도 소수 배치되었지만 대부분은 구형 기체였다.[6] 일본 해군은 패망하는 그날까지, 식민지 출신을 항해병과로 받지 않았다. 그 탓에 한국 해군의 창설 멤버들은 민간 상선사관들이 주축이었다.[7] 광복군은 실병력이 얼마 되지 않은데다 장교단이 병사보다 훨씬 많은 기형적 구조였다. 실전 경험을 가진 장교들은 모두 국민당군에서 일본군, 공산군과 교전한 국부군 출신이었다.[8] 흔히 만주군 중위로 알려진 박정희 전 대통령도, 일본이 패망한 한 달 뒤 경력자 우대로 광복군에서 활동했다. 46년 5월 임시정부 일원이 정부 및 군사단체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귀국할 때까지, 광복군 평진지대 중대장을 지냈다. 훗날 군부 숙군작업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구명에 광복군 출신인 백파 김학규 장군(광복군 평진지대장)이 나섰던 것도 이 시절 인연 때문이었다.[9]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 중장이던 시절, 중장까지 진급하고 당시 미국 다음의 우방국이던 중화민국 대사를 역임한 김홍일이 대표적 인물이다. 국민당군에서 군단 참모장을 지냈고, 미군 교관에게 훈련받았다.[10] 대표적으로 송호성과 최덕신[11]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 사관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은 왕공족이나 조선귀족 정도의 상류층이 아니면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정도로 여려운 일이었다.[12] 피를 본 가장 대표적 인물이 김석원 장군. 중일전쟁 당시 대대병력으로 국부군 사단을 격퇴하여, 해방 후 진해회담 당시 국군에 인물이 없다는 이승만의 푸념에 장개석 전 총통이 '당신 나라에 김석원이라는 명장이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가장 유명했던 그도 얄짤없었다.[13] 중국군파 육군초대사령관 송호성은 군벌들이 세운 학교들중에 가장 규모가 컸던 보정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 출신이고 경험도 쌓았지만 독도법조차 깨치지 못했다. 즉, 일부 기회 잘 잡았거나 특출난 인간 아닌 평균적인 질을 담보할 수 없었다.[14] 식민지하 조선이들이 잡을 수 있었던 출세길 중에 고등문관시험이나 일본육사는 집에 돈 없으면 힘들었다. 그럼 쥐어짜내서 어느정도 학력은 쌓았지만 집안이 가난한 대다수 조선 청년들에게 현실적인 출세길은? 가깝게는 헌병보조나 면서기, 멀게는 만주군관학교가 된다.[15] 중국군파 가운데 유일하게 호의적으로 평가된 인물은 미국식 군사교리에 익숙한 김홍일, 일본군파에서는 4.3 사건의 진압을 유화적으로 마무리한 유재흥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