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빈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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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세조의 후궁. 정희왕후의 인지도에 밀려서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세조의 후궁 중 유일하게 자식을 낳아서 키운 후궁이다.[1]
2. 생애
현재 남아있는 기록이 많지 않아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 극히 제한적이다. 다만, 장남 덕원군 이서가 1449년(세종 31)에 태어났고, 차남 창원군 이성이 1458년(세조 4)에 태어났으므로 세조가 수양대군일 때 만나서 첩실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1468년 예종이 즉위하고 사람들의 품계를 높여주고 상급을 준 적이 있었다. 이때 "숙의 박씨는 귀인으로 올리며" 라고 언급한다.[2] 이에 따라 처음에는 수양대군의 첩실이 되었다가 계유정난 이후에 왕으로 즉위하면서 종2품 숙의의 품계를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1483년(성종 14)에 정1품 빈으로 책봉되어 이때부터 근빈이 되었다.[3] 조선시대 평균 수명을 고려한다면, 나이 80세까지 대단히 오래 살았다. 그런데 하필 연산군 시절까지 사는 바람에 그녀는 말 못할 고통을 겪었다.
연산군은 이미 부왕의 후궁들을 때려 죽인 적도 있었다. 연산군은 이런 사실을 딱히 은폐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의 시신으로 젓갈을 담그라고 내수사에 명한 바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살기 위해서 춤을 췄을 것이다.이때 세조의 후궁 근빈(謹嬪) 박씨(朴氏)가 나이 80세로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항상 자수궁(慈壽宮)에서 거처하다가 이 무렵 입궐하였는데, 왕이 나놀려면, 근빈에게 교자(轎子)를 타도록 하고, 궁인이 메게 하므로 궁인들이 항시 승혜(繩鞋)를 신고 갔다. 술이 취하면 왕이 스스로 일어나 춤을 추고, 또한 근빈도 일어나 춤추게 하였는데, 근빈은 늙어서 할 수 없었으나 치열한 학대가 두려워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10년 9월 4일
연산군 때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1] 폐출된 소용 박씨가 자식을 낳은 적이 있으나 조졸하였다. [2] 예종실록 1권, 예종 즉위년 9월 22일 무인 3번째기사. # [3] 성종실록 155권, 성종 14년 6월 15일 병자 2번째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