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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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 세조의 4남이자 막내아들로 어머니 근빈 박씨에게는 차남이다. 전주 이씨 창원군파의 파시조이기도 하다. 성장한 세조의 자녀들 중에서 세조 즉위 후 태어난 유일한 아들이다.[3]
2. 생애
1467년(세조 13년)에 창원군으로 봉해졌고 1470년(성종 1년)에 혼인했다.#
3. 사건사고
《성종실록》에는 그가 여러 가지 사건사고를 일으킨 내용이 많이 나온다.
- 1472년(성종 3년)에는 형 덕원군과 함께 회암사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는 이유로 형조에서 죄줄 것을 청했다.# 저게 무슨 잘못이야? 할 수 있겠지만, 성리학이 국교인 조선에서 왕족이 불교를 대놓고 숭상하는 것은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대간들은 끈질기게 처벌을 요청했으나 성종은 쿨하게 무시하고 그냥 넘어갔다.
- 1477년(성종 8년)에는 충청도 온양에 목욕하러 간다면서 정작 하라는 목욕은 안하고 여러 고을을 놀러다니며 수령들을 능욕하고 나라에서 관리하는 역마를 함부로 타고 다녔다. 그리고 다니는 곳마다 접대를 받았다. 문제는 저 당시가 늦봄, 즉 농삿일이 한창 바쁠 때라 잦은 접대가 자연스레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성종은 그의 관노비를 회수하란 명을 내렸다.#
- 위 사건이 있은 지 1년 여 뒤인 1478년(성종 9년) 1월에 돈의문 밖, 모화관 동북쪽 인근에서 살해당한 한 여성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 이 역시 범인은 창원군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아무리 수사를 해도 단서가 잡히지 않던 중 도승지 신준의 집에 창원군이 범인이라는 익명의 투서가 날아들었다. 신준은 익명서를 승지 김승경에게 보였는데, 거기에는 ‘여자의 시체는 거평군 부인이 질투하여 한 짓이니 (노비인) 가외(加外)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김승경은 가외를 데려와 시체의 신원을 물었고, 가외는 “자신의 8촌 동생 고읍지가 창원군 집에서 관노비로 일하고 있다. 창원군이 고읍지를 간통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시체가 곧 고읍지일 듯하다”고 말하며 고읍지의 용모와 복색을 언급했다. 가외는 시신을 본 뒤 고읍지가 맞다고 했고, 이에 수사를 담당하던 삼사(三司)에서는 창원군을 수사하기에 이른다. 수사에 앞서 창원군에게 관노비의 등록대장을 가져오라고 했으나 창원군은 없다고 발뺌했다. 그러자 성종이 다시 내관과 한림을 보내 가져오게 시켰지만 창원군은 이미 보냈다고 발뺌했다.#
이후로도 창원군은 계속 수사를 방해했다. 사간 경준 등이 집을 수색하려 할 때에도 거절하여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범행도구로 쓴 칼을 찾으려 하자 이 또한 거부했다. 그러자 신하들은 창원군을 가두고 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종도 더는 봐줄 수 없었는지 창원군에게 의금부 문 밖에 나와 대죄할 것을 명하고 내관 조진을 다시 창원군의 집으로 보내 범행에 쓴 칼을 가져올 것을 명했다. 그러나 창원군은 도리어 “내가 안 죽였는데 범행에 쓴 게 어딨냐”며 발뺌했다. 그러자 다시 의금부 낭청이 가서 “범행에 안썼어도 집에 있는 칼은 반드시 가져오라”고 했지만 창원군은 “칼이 없는데 어디서 얻냐?”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 창원군의 노비인 원만, 석산, 산이가 자복하여 시체 사건의 전말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고읍지가 옥금이란 종에게 “꿈에서 홍옥형을 보았다”고 말한 것을 창원군이 듣고 화가 나서 “그게 무슨 뜻이냐?”라며 질투심에 다른 종들을 시켜 고읍지를 죽인 것. 행랑 처마에 매단 뒤 칼로 죽였다고 한다.# 또한 삼사에서 범행 장소를 다시 살폈더니, 흐른 피가 땅에 있고 뿌린 피가 벽에 가득했다고 한다.#
이에 종친, 신료들 가릴 것 없이 분노했다. 사건을 조사했던 삼사의 관원들은 물론이고 성종의 형 월산대군과 영의정 정창손까지도 창원군을 처벌할 것을 주청했다.# 그러나 창원군은 종친이라는 이유로 사형을 면했다. 이후 충청도 진천현에 부처[4] 하게 하려 했으나 대왕대비였던 정희왕후가 세조의 친아들들은 창원군 형제 뿐이고 또한 생계도 어려운데, 창원군을 멀리 보내는 것은 차마 못할 짓이라고 말려 결국 부처는 없던 일이 되었다.# 이에 신하들은 부처 철회는 부당하다며 몇 번이나 상소를 올렸지만## 성종은 무시했고 그 해 10월 4일에는 거두었던 직첩마저 돌려주었다.
4. 사망
1484년(성종 15년)에 사망했다. 향년 26세.[5] '여도(戾悼)'란 시호가 추증되었다. ‘여(戾)'는 ’지난 허물을 뉘우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누가봐도 나쁜 뜻이라서 당시 생존해있던 창원군의 어머니 근빈 박씨가 시호를 고쳐줄 것을 성종에게 요청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그냥 두었다.# 결국 정조 때에 가서야 '장소(章昭)'로 바뀌었다.
묘는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 팔애동, 지금의 서울대학교 자리에 있었으나 도시개발로 1968년 8월 14일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로 옮겨 현재에 이른다. 아들과 손자들의 무덤 역시 창원군 묘 주변에 있어 하나의 가족 묘역을 형성하고 있다. 묘역은 2009년 11월 3일 파주시 향토유적 27호로 지정되었다.#
5. 가족과 후손
정실부인을 3명 두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어 형 덕원군의 2남 덕진군 이활(德津君 李濊)을 양자로 들였다. 덕진군은 달성도정(達城都正)과 난포정(蘭浦正)을 낳았고, 이들의 후손이 번성하여 전주 이씨 창원군파를 형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