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 정씨(성종)
1. 개요
조선 성종의 후궁. 본명은 정금이(鄭金伊)로,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1]
2. 생애
성종실록에서 정씨는 종3품 숙용, 또는 정3품 소용으로 등장하는데, 정씨의 동생을 영구히 양인으로 삼는다는 전교가 있었다.[2] 이를 통해서 정씨의 본래 신분이 미천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정씨는 이외의 기록이 전무하다가 1477년(성종 8) 익명서 사건으로 언급된다.
사건은 한 통의 익명서가 덕종의 후궁인 권 숙의의 집안에 떨어지면서 시작됐다. 익명서의 내용은 "엄 숙의가 정 숙용과 더불어 중궁과 원자를 모해한다"는 것으로 깜짝 놀란 권 숙의가 익명서를 위에 바친 것이다. 처음에는 정씨가 의심 받았지만, 당시 대비전과 성종은 곧 왕비의 자작극으로 판단한다. 이외에 여러가지 일들로 믿음을 잃게 되는 바람에 왕비는 폐출되어 사가로 쫓겨난다.[3]지난 정유년 3월 20일에 엄 숙의(嚴淑儀)가 정 숙용(鄭淑容)과 더불어 중궁 및 원자를 모해(謀害)한다는 글 두 통과 비상(砒礵) 약간과 압승책(壓勝冊) 한 권을 작은 상자에 담아 가지고 백저포(白苧布) 보자기로 싸서, 권 감찰(權監察)의 집 사람이라 일컫고 권 숙의(權淑儀)의 【권 숙의는 덕종(德宗)의 후궁으로, 여러 숙의를 총괄하여 다스렸다.】 집에 던졌는데, 권숙의의 집 사람이 그 상자를 가지고 대궐에 나아와서 숙의에게 바쳤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0년 6월 5일 경인 4번째기사
이것이 바로 폐비 윤씨의 일인데, 사실 정씨가 다른 후궁인 귀인 엄씨와 함께 원자의 생모였던 폐비 윤씨를 직접적으로 해치거나 모함한 일은 없다. 하지만 이 익명서 사건에 이름을 오르내렸기에 훗날 연산군의 타겟이 된다. 애초에 성종의 후궁이 한 두사람도 아닌데, 콕 찝어서 '엄 숙의'와 '정 숙용'이라고 익명서에 적시되었을 때부터 폐비 윤씨의 정적이라는 뜻이다.
연산군은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창경궁 뜰에 묶어놓고, 정씨의 소생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잡아와, 그녀를 마구 때리게 했다. 당시 날이 어두워 안양군은 어머니임을 짐작하지 못하고 마구 때렸으나, 봉안군은 어머니임을 알아차리고 때리지 않고 흐느꼈다고 한다. 이를 지켜 본 연산군은 더욱 화가 나 그녀들을 몽둥이로 마구 때려서 살해하였다.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가 숨이 끊어지고도 연산군의 매질은 그치지 않았으며, 젓갈로 담가 산과 들에 뿌렸다. 그녀의 부친 정인석과 배다른 형제들도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데, 정인석은 아예 뼈를 가루로 만들어 강 건너로 날렸다.
3. 후손
연산군은 할머니 인수대비에게로 안양군과 봉안군을 끌고 가 갖은 행패를 부렸다. 이후 1주일 뒤에 안양군은 충청도 제천에, 봉안군은 경기도 이천으로 유배를 갔으며 1년 후에 죽었다. 연산군이 안양군은 어머니를 죽인 죄로, 봉안군은 왕명을 거역한 죄로 사사하였다고 한다.
막내 딸 정혜옹주 또한 15세의 나이로 황해도 배천으로 유배를 갔다. 당시 정혜옹주는 옹주의 작위를 박탈당하고 단지 "한기의 처"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정혜옹주가 유배간 지 약 6개월 후, 귀인 정씨의 유일한 사위이자 정혜옹주의 남편인 부마 청평위(淸平尉) 한기(韓紀)도 고문을 당했다. 연산군은 한기가 익명서를 투서하였다는 이유로 고문을 명령하였으나, 한 차례 고문을 받은 한기는 "저는 나이가 어려 익명서를 투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변명했다. 한기 역시 15세였다.
중종반정 이후 죽은 귀인 정씨와 세 자녀 역시 신분이 복위되었으나, 정혜옹주는 17살 나이에 사망했다.
4. 대중 매체에서
폐비 윤씨를 모함한 후궁으로 유명해서인지,성종과 연산군 시기를 다룬 사극마다 귀인 엄씨와는 쌍둥이처럼 세트로 빠지지 않고 꼭 등장한다.
- 《설중매(1984)》: 배우 김해숙
- 《한명회(1994)》: 배우 정유진
- 《장녹수(1995)》: 배우 정복임
- 《왕과 비(1998)》: 배우 김정난
- 《왕과 나(2007)》: 배우 윤혜경
- 《인수대비(2011)》: 배우 정요숙